42. 농사꾼 장군
우리 한민족의 조상은 과연 아프리카 초원에 살던 흑인 일까요?
42. 농사꾼 장군
충남 서산군 해미읍성 근처, 낡은 소나타 한대가 큰길에서 벗어나 집들이 드문드문 보이는 한적한 시골마을의 좁은 시멘트포장도로를 따라 천천히 들어가고 있다.
혼자 조심해서 차를 모는 50대중반의 남자는 짧게 친 헤어스타일과 몸에 꼭 끼이게 입은 양복이 어색한 용모로 보아 얼핏 군인 장교 같은 느낌이 든다.
좌우로 꺾어가며 10여분 서행하던 소나타는 무성한 나무숲 울타리를 끼고 돌아 대문도 없는 어느 조그만 슬라브지붕 가옥의 널따란 마당으로 들어서 멈춘다.
오는 줄 알고 있었는지 마당에는 평상복 차림의 60대 중반 남자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미리 나와 서있다. 꼿꼿하면서도 탄탄한 풍모의 그에게서도 군인냄새가 물씬 풍긴다.
“충성!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여단장님!”
차에서 내린 50대가 차려 자세를 취하고 거수경례를 붙인다.
“그래, 어서 오게. 황대령!”
60대도 거수경례로 인사를 받고 두툼한 손을 내밀어 반갑게 악수를 한다.
악수하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서로 쳐다보는 얼굴에 잔뜩 반가운 미소를 띄우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한 상하간의 전우애가 느껴진다.
“너무 늦게 찾아 뵈어 죄송합니다.”
“아니야, 퇴역한 퇴물을 이렇게 찾아 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허허.”
“사모님은 안에 계십니까?”
“아닐세. 집사람은 수확할 때나 가끔 오고, 평소에는 나만 주말에 내려오네.”
“아, 이런. 그럼 제가 서울로 찾아 뵈어야 했는데 잘못됐습니다. 저는 사모님도 여기 내려와 계신 줄 알고···”
“아니야, 함께 오려고 했는데, 오늘은 자네가 긴히 할 얘기가 있다고 해서 일부러 떼 놓고 왔지. 허허. 자, 들어가세. 내가 간단히 술상 봐놨어.”
“아이구, 이런. 제가 여단장님이 차린 술상을 받게 생겼습니다. 하하. 벌주는 제가 미리 가지고 왔습니다. 먼저 들어 가십시오. 양주 챙겨서 뒤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지프를 안타고 왔는가? 운전병이 휴가 갔나?”
“아, 아닙니다. 공적인 외출도 아니고, 여단장님께 조용히 드릴 말씀이라서 일부러 아들놈 차 몰고 왔습니다. 오랜만에 운전했더니 증평에서 여기까지 한 시간 반이면 될 거리를 두 시간쯤 걸렸습니다. 하하.”
두 사람의 얘기로 미루어보아, 60대는 퇴역한 군인으로 재직 시 여단장이면 원 스타, 별 하나인 준장출신이다.
찾아온 50대 황대령은 예전에 함께 근무했던 후배로 아직 예편하지 않은 현역으로 보인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예비역준장 여단장의 거실에 마련된 술상 앞에 양반다리로 마주앉았다.
술상 위에는 얼음통과 유리컵, 약간의 양주 안주와 집주인이 준비한 시바스 리갈 18년산 한 병이 놓여있다. 18년산이면 면세점에서 13만원 정도에 살 수 있다.
“여단장님은 지금도 시바스 리갈이군요. 아직도 그분에 대한 존경심은 여전하신 것 같습니다.”
시바스 리갈은 고 박정희대통령이 시해되던 날 마셨다던 그 스카치 위스키이다.
“그러네. 한 30년 마시다 보니, 지금도 이 걸 사게 되더구먼. 그런데 자네, 그거 발렌타인 30년산 아니야? 군인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런 비싼 걸 사왔는가?”
“아, 예. 아들 놈이 해외연수 갔다 오면서 면세점에서 얼마 안주고 사온 겁니다. 오랜만에 여단장님 뵈러 왔는데, 이것도 부족하지요. 제가 먼저 따라 올리겠습니다.”
시중 백화점에서 100만원이 넘고, 면세점에서도 40만원은 넘게 줬을 것이다. 예비역 준장과 현역 대령의 씀씀이가 벌써 차이가 난다.
“자네가 여단장이라고 부르니까, 내 기분이 좀 그러네.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서 좋기도 하지만···”
“아, 예. 저는 그냥 예전에 뫼실 때 부르던 습관이 들어서.. 저, 그럼 그냥 장군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여단장님!”
“허허, 그러게. 다들 그리 부르네.”
“예, 잘 알겠습니다, 여단장님! 아, 장군님! 하하.”
함께 웃으면서 서로의 잔에 교대로 발렌타인을 붓고 얼음을 채우고 나서, 컵을 수직으로 들어올리고는 잔을 부딪히며,
“필승!”
구호를 외치고는 육사 생도처럼 수평으로 입에 가져가 손목을 직각으로 꺾어 입안에 부어 넣는다.
“캬~ 이거, 비싼 거라 순해서 그런지 목 넘김이 아주 부드러운데 그래? 허허.”
“드시기 괜찮으십니까? 저도 오늘 처음 마셔봅니다. 여단장.. 군님! 하하.”
그러면 그렇지. 퇴역한 별 볼일 없는 선배를 깎듯이 모시는 걸로 봐서 사람 됨됨이는 괜찮아 보이는데, 군인봉급으로 저런 비싼 양주나 사먹나 싶었더니, 역시 오늘 선배대접 하느라고 주머니 털어 큰 돈 들였구먼. 아들 해외연수는 핑계 댄 것 같고, 보기 참 좋네.
“여기 들어오면서 보니까, 농장이 꽤 넓습니다! 몇 평이나 됩니까? 장군님!”
“음. 한, 천 평쯤 되네. 내 퇴직금 다 털어 넣고 샀는데, 소일거리가 아니고 주말에는 아예 2~3일씩 매여서 사네. 허허.”
“아이구, 천 평이면 굉장한 면적인데요! 뭘 심으시는 지는 모르겠지만 정원수도 있어 보이고 채마 밭도 있는 것 같던데, 저 넓은 농장을 장군님 혼자서 다 경작하십니까?”
황대령이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장군을 바라본다.
“그럼. 내가 원래 저 남쪽 경남의 시골 촌놈출신 아닌가? 어릴 때부터 농사일 거들며 자라서 별로 힘들지도 않고 재미있네. 시간을 좀 많이 뺏겨서 그렇지. 허허. 처음에는 고구마, 감자, 고추와 양파나 배추 같은 먹을 거리를 많이 심었었는데 지금은 거의 정원수와 유실수를 심어 키우고 채소류는 조금만 심고 있어서 손 쓸 일은 많이 줄어들었네. 가위로 가지치기나 제대로 해주고 퇴비나 잘 만들어 주면 되니까. 허허.”
농사짓는 장군이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면서 말한다. 말을 쉽게 해서 그렇지, 천 평이나 되는 땅에 농작물 심어서 재배하고 가꾸는 일이 곁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 만만한 게 절대 아니다. 농사지어 본 경험 없는 사람이 목가적인 시골생활을 동경해서 섣불리 생각하고 귀농이니 귀향이니 계획했다가는 크게 후회하게 된다.
“그래도 고구마나 감자 캐고 김장배추 수확할 때는 일손이 많이 들지 않습니까? 참, 아드님들이 많이 도와주겠네요!”
“하이구, 그 놈들 이런 저런 직장핑계 대고 내려오지도 않아. 저기, 홍소령이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어서, 내외가 종종 와서 도와주고 가지. 허허.”
“아, 홍소령이 이 근처에 삽니까? 그 친구라면 그리 할겁니다. 아주 성실한 친구였지요. 정말 다행이네요. 그 친구 예편한지도 벌써 햇수로 2년이 되는 것 같은데요?”
아마 홍소령이라는 사람과도 예전에 증평에서 함께 근무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증평에 있는 여단이라니? 여단은 연대하고는 달라서 보통 포병부대처럼 특수한 부대로, 사단의 소속이 아니고 군단 직속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후방인 충청북도 증평군에도 포대 여단이 있나?
“응, 그렇지! 고향이 해미 비행장 근처라서 거기서 부부가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네.”
“해미 비행장이요? 서산 말고 해미에도 비행장이 있습니까?”
“아, 해미 비행장이 서산 공군비행장이야. 정확히는 서산시 고북면인데, 해미읍성이 있는 해미면에 붙어있어서 처음에는 해미비행장이라고 불렀어. 공군 20전투비행단이 사용하고 있는데, 주변에 철새도래지 천수만이 있어서 조류하고 충돌할 위험도 많은 가봐. 여기서 가까워. 홍소령이 작년에는 비행장소음 때문에 데모하러 다닌다더니, 얼마 전에는 소음피해 대책위원이 돼서 특별법 제정하러 국회의원 만난다고 하던데! 허허.”
“아, 그래요? 그 친구 원래 정의파라서 그런데 잘 참석하고 앞장 섰을 겁니다. 하하.”
“그러게. 홍소령 부인은 안 그랬으면 좋겠다고, 내가 좀 말려달라며 우리 집사람한테 하소연을 하더라는 구만. 그런 일을 내가 뭐라고 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허허.”
농사꾼 장군께서 웃는데, 그 웃음 속에 뭔가 아쉬움과 약간의 분노가 서려있는 듯도 하다.
그걸 감지한 황대령이 찬스를 놓치지 않고 약간 정색을 하며 장군을 빤히 쳐다보고 한마디 한다.
“장군님! 우리 군을 저, 정중장 같은 사람의 손에 맡기고 관망만 하고 계실 겁니까?”
장군에게 감히 불경스러워 보일 정도로 심하게 항의하는 황대령의 눈동자가 충혈되면서 강한 분노에 이글거린다.
“그 일은 이미 군에서 조처를 취하지 않았는가? 정장군이 사령관에서 물러나고 새 사령관이 임명되어 부임해 왔는데, 1년반도 더 지난 일을 새삼 끄집어 내어 뭘 어쩌자고 그러나?”
“미국 놈들이 사용하는 포로결박훈련 도입해서 심문실에서 생떼 같은 우리대원 목숨을 두 명이나 앗아갔습니다! 그 책임을 물어서 괜히 죄 없는 교관 홍소령만 불명예제대 시키지 않았습니까? 정중장이 우리 제 13 공수특전단 대원 2명을 억울하게 죽인 겁니다, 장군님! 지금 정장군은 1군 부사령관으로 가있습니다. 그게 살인마에 대한 좌천입니까? 그 사람, 머잖아 3군사령관으로 승진해서 곧바로 합참의장 발령 날지도 모릅니다.”
황대령 얼굴이 술기운 때문은 아니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서 벌겋게 달아오르며 격한 목소리로 침을 튀기고 항변한다. 자칫하면 입에서 피가 튀어나올 것 같다.
“어허, 이사람!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나. 미국이나 영국에서 특수부대원들이 받고 있는 훈련을 우리 특전사 대원들에게도 시킨 거지 않나? 실시 과정에서 안전에 대한 대비책이 미비해서 사고가 난 걸 가지고 사령관 탓을 하면 안되지! 그러고, 3군사령관이나 합참의장이 그렇게 누구 몇 사람 손에 의해 쉽게 정해지는 자리가 아닐세.”
아마, 10여년 전에 제 13 공수특전단 여단장을 지낸 것으로 짐작되는 퇴역장군이, 현역 정중장이라는 전임 특전사 사령관을 두둔하고 나선다. 정중장이 이 농사꾼 장군의 육사 몇 년 후배라서 서로 잘 알고 있겠지 싶다.
“한국에서 2년간 주한 미 특전사령관으로 취임해 있던 웬트 준장이 재작년 4월에 이임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에 20년 넘게 다녀가고 지난 2년간 근무했지만, 정00 중장만큼 부대를 발전시키는 지휘관은 보지 못했다. 지난 6개월 동안의 변화는 지난 20년과 맞먹는다. 앞으로 기대가 크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5개월 후에 사고가 난 겁니다. 우리나라 별 세 개 중장이 미국의 별 하나 준장의 꼭두각시가 되어 놀아나다가 저지른 결과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저 미국 놈들의 지지를 받는 정중장이 3군사령관, 합참의장 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라도 있습니까? 저는 단순히 정중장 한 사람을 지목해서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정중장처럼 사대주의 근성에 빠져서 미국 놈들 꽁무니에 달라붙어 자신들의 영달을 꾀하고, 향후 우리 군의 권력을 자기들 손아귀에 통째로 거머쥐려는 패거리들을 방치하고만 있을 거냐는 겁니다, 장군님!”
이 소설은 판타지가 아닙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닥쳐 올 사실을 미리 알려드리는 겁니다. 여러분의 가까운 미래를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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