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Chapter 10 (2)
하얀 눈이 내리는 새벽이었다. 거리에 사람들은 없었고, 단 한사람만 미친 듯이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간혹 뒤를 돌아보며 혼잣말을 짓거렸다.
“시발...”
그리고 자신의 욱신거리는 배를 만졌다. 오리털 잠바에서 피가 흔건하게 젖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뭔가를 찾고 있었다.
“시발.. 여기에는 왜 전화박스도 없는거야. 개같은..”
그리고 골목을 도니 익숙한 전화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빠르게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주머니속에 있는 피 묻은 동전을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르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따르르릉 신호가 갔다. 하지만 전화기의 주인은 그리 쉽지 받을 것 같지 않았다. 하긴 그 주인이 전날도 철야라고 했던가. 운이 안 되면 못 받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음성이 들려왔다.
-으.. 누구..세요?
“나다. 길한이.”
-길한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말할 시간 없어.. 너 지금 잠자고 있었냐? 그럼 지금 당장 녹음기 틀어.”
-무슨일인데.
“나 죽어간다. 그러니까 빨리 틀어.”
-뭐?
전화기 건너편에서 경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분하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슬슬 의식이 사라지고 있었다.
-너.. 너도 설마..
“시간없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빨리.”
길한이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것일까? 전화기 반대편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돼..됐어.
“그래. 시발.. 잘들어. 강호야. 진짜 우리 좆됐다. 경찰도 그들과 한패야 아무도 믿지 마. 네놈이 지금 잠결이라서 몰라서 녹음기 틀라고 한거야.. 그러니까 내말 잘들어.. 다 잊고 잘 살아.. 절대로 내 장례식장은 와서는 안돼.. 절대로.. 알았냐?”
-야.. 이 병신아 허튼소리 하지 말고 병원이나 가.. 아니다. 어디야. 내가 갈게.
“쿨럭.. 이미 난 틀렸다니까... 누차 말하지만 신고할 생각 절대 하지마.. 시발 진짜 진한테는 미안하다.. 그 애가 고작 13살이었다니.. 어른으로써 책인감 있게.. 진실을 파헤치고 싶었는데.. 시발...”
-길한아..
“너는.. 시발 살아남아. 그리고 언제가.. 진짜 언제가 볼수 있으면 그 진님에게 전해.. 우리가 모은 자료를.. 그 애새끼.. 어리긴 하지만 영특하니까.. 우리들이 모든 정보를 전해주면.. 아마 알 거야. 어떤 의미진...”
“뭘 전해줘?”
길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른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시발새끼.. 결국 여기까지 쫒아왔냐?”
“아아.. 설마 배에 찔리고 그렇게 도망갈줄은 몰랐어. 근성있더라? 너 다른 애들과 달리 말이야. 그런데 지금 누구랑 통화하냐?”
“시발놈아... 네가 알아서 뭐하세?”
“아아.. 그렇지. 설마 또 경찰은 아니지?”
“너 같은 경찰이 또 있을 것 같아서 신고도 못하겠더라.”
“아아.. 그래? 그럼 다행이네. 어이 거기 전화 받고 있는 양반 잠시만 기다려 나와 대화 좀 하자.”
그리고 그는 그 순간 자신의 손에 쥐어진 식칼을 그대로 길한의 배에다가 망설임 없이 찔렀다.
“컥.. 쿨럭.. 개새끼....”
그리고 그는 다시 칼을 뺐다. 피가 그의 배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의 입에서도 나왔지만 짜는 사내는 무표정하게 그의 머리를 잡은후에 그를 전화박스 안에서 끄집어냈다. 그리고 통화중이던 수화기를 들며 말했다.
“아아. 여보세요. 아직 있나?”
-야. 이 개새끼야.. 네놈이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아아. 붐이구나?”
그의 말에 붐은 정신이 확 들었다. 어떻게 단번에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궁금했다.
“걱정마 곧 너도 죽여 줄테니까.”
-뭐?
“설마 이 친구만 보내면 너 좀 서운해 할꺼 아냐? 그러니까. 기다려 죽이러 가줄테니까.”
-이.. 시발 새끼가.. 너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그딴 소리 하는 거야?
“지금은 몰라도 돼. 앞으로 알아가면 되니까.”
-뭐?
“너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거냐?”
-......
“큭큭.. 병신 같은 새끼.. 내가 바로 아소라고. 이래도 모르겠냐? 네놈 따위 잡아서 죽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목씻고 기다리고 있어. 알았냐?”
-이.. 이 새끼가..
“할말은 고작 그거냐? 살려달라고 안해? 참 너희들은 하나같이 개성이라는게 없냐? 자 그럼 됐고 나중에 내가 너한테 찾아서 남은 이야기나 하자 일단 누워 있는 이 새끼를 처리해야 하니까 말이야.”
-야 이 개새끼야 그만둬!!
뚜뚜뚜..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붐의 목소리만 방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다음날 뉴스에서 길한이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보도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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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는 붐의 설명과 녹음기에서 들린 대화 내용을 얌전히 다 들었다. 채란은 꽤나 충격을 받은 것인지 아니면 공포감 때문에 그런 것인지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와 달린 제호는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았다. 길한이가 말한 경찰이라는 말 그리고 그 경찰의 목소리는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야.. 이건 진욱이형 목소리가 아니야. 아니야, 그 형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렇다 그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경찰이라고 추측되는 그 목소리가 김진욱의 목소리와 상당히 닮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들의 앞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무료 5년의 목소리다 더군다나 디지털도 아니고 테이프로 돌아갔다. 음질이 저하가 되어서 저렇게 들릴 수도 있었고, 5년전의 진욱이 형의 목소리는 저렇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뭔가 불안했다.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제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채란이 붐을 바라보며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붐씨는 왜.. 이런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죠?”
“누구에게 공유를 한다는 말입니까?”
“그야.. 언론쪽에...”“저도 그것은 생각해봤습니다. 하지만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안했습니다. 경찰조차 매수가 되어 있는데 언론에 폭로를 해봤자 금세 묻힐게 분명했고, 그때 당시에는 아직 저에게는 처와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는 진짜 몸을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5년이나 지난 이야기였지만, 그 때 당시의 상황은 저에게 있어서는 공포 그 자체였다. 잘만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밤을 지새우며 자신의 가족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제가 왜 그러는지 몰랐고, 저는 자신의 처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잠을 못자면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공포가 머릿속에 지배했을 때 저는 처와 아이들을 구타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혼을 하게 되었구요.”
“.....”
제호와 채란은 그의 말에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씁쓸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서 그리움이 묻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시 활짝 웃으며 그가 말했다.
“차라리 그게 잘되었습니다. 지난 오년동안 아소는 저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찾지 못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언제가 저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차라리 저는 혼자가 좋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끌어드리지 않고 저 혼자 일을 해결할수 있으니까요.”
“그건..”
채란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에게 뭐라고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마땅히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건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다. 현실이다. 진짜로 누군가가 죽는 현실인 것이다.
“하아..”
제호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문서들을 다 한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들은 다 제가 가지고 가겠습니다.”
“진님. 진님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제호가 무엇을 할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도와줄수 있는일이라면 뭐든지 하고 싶었다. 친구들의 복수를 갚고 싶었고, 자신의 인생을 망친 그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제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뇨. 됐습니다. 지금의 당신에게는 저를 도와줄 능력이 없습니다. 그건 당신이 누구보다 더 잘알텐데요?”
“아.. 아닙니다. 제가 할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것입니다.”
그의 말에 제호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붐씨.. 저는 그날 이후.. 사람에 대한 혐호감이 분명 있었습니다. 아무리 넷상이라고는 하지만 그때 당시 저는 일곱명의 사람들을 모두다 진심으로 믿었으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제호는 가볍게 몸을 숙이며 그에게 말했다.
“이 일은 제 일입니다. 붐씨.. 진짜 오년동안 수고 하셨습니다.”
“예..?”
그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제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호가 차분하게 그에게 말했다.
“분명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도 오겠지요. 하지만 전 더 이상 누구를 끌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복수도 하시고 싶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그만 마음속의 무거운 짐을 놓으세요. 그 짐.. 앞으로는 저 혼자서 짊어 질 테니까요.”
“진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 친구들에게 무슨 면목이 있겠습니까?”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으신거 아닙니까?”
“그게 무슨...”
“들어오면서 가계 테이블에 있는 여러장의 사진들을 봤습니다. 아들분과 따님 아니십니까? 사진 속에 있는 인물들이 말입니다.”
“.....”
그는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제호는 들어오면서 혹시나 모를 일을 대비해 주변을 살핀 것이었다. 그리고 찍은 지 별로 안돼 보이는 사진을 발견한 것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앉기는 했지만 그 정도 눈썰미는 있었다.
“얼핏 봤지만 붐님을 닮았더군요. 연락은 계속하시는 거 아닙니까? 가족들도 이만 돌아오시기를 바랄 것입니다. 제가 장담컨대 이제 아소를 잡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그런 정보를 가지고는 아소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실 텐데요?”
“저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
그의 말 그대로였다. 붐에게 있어서 진은 신과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럼 식사라고 하고 가시는게 어떻습니까? 이렇게 보여도 고기 맛이 아주 끝내줍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입맛이 없네요. 아소를 잡은뒤에.. 그때라면 정말 맛있게 먹을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정말 아쉽네요. 하지만 그때 오시면 정말 배가 터지도록 먹여드리겠습니다.”
그는 차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붐이 가지고온 문서와 녹음기를 들고서 말이다. 채란은 아무말없이 제호를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붐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서울로 향했다.
차안에서 채란과 제호는 아무말을 하지 못했다. 채란은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 30분정도를 달렸을까? 조용한 차안에서 제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O.S를 봐드리는건 나중에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본 다고해서 집중이 될 것 같지도 않고요.”
“아.. 그래.”
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선 듯 그의 입에서 먼저 봐준다고 하니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아마 붐에게 들은 이야기가 그만큼 큰 충격이었다는 증거였다.
다시 어색한 시간이 흘러갈 때 제호의 입에서 작은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천조원이라.. 사람을 아무렇게나 죽일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돈이 좋단 말이야?”
운전을 하고 있었고, 엔진소음까지 있었다. 하지만 채란은 이상할 정도로 그의 그 말을 또박또박 들려왔다. 그리고 그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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