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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냐
작품등록일 :
2024.07.30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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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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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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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유일한 수

DUMMY

6월의 태양을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시원한 그늘 아래 피하는 것과 여름보다 뜨거운 사람이 되는 것.


"그래, 오늘도 다 하고 왔느냐?"


"예."


매일 러닝 10km, 푸쉬업 100개와 스쿼트 100개, 한 다리 들고 균형잡기 각각 30분. LA의 전설인 그가 내린 미션을 매일 완수한 지도 반년이 지났다.


"오늘은 누구냐."


"존슨입니다."


"비둘기 잡은 그 존슨?"


"예."


"그래, 내가 잘 알지. 해봐라."


한국 최고의 게임사, 넥시엔슨이 비밀리에 개발 중인 야구 게임, '플레이볼'.


대중에게 공개되기 전, 이미 메이저리그 각 구단은 앞다투어 엄청난 거금을 투자해 전력 분석에 활용하고 있다.


게임에 들어가는 핵심 기술인 물리엔진과 인공지능을 구현한 것이 바로 수현이었다. 창문사의 스티브 모발이 한 눈에 보고 반해버린 바로 그 프로그램이다.


업계의 패러다임을 바꾼 영상 처리 인공지능은 단 하나의 카메라 만으로 현실의 선수를 디지털 세계에 완벽하게 구현해 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기술도 근원이 되는 데이터가 없다면 과거를 재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잠들어있는 전설들의 역동성을 인공지능이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해답은 아주 일찍부터 우리 곁에 있었다. 작은 인간이 어떻게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 수 있었을까? 간단하다. 하나하나 옮기면 된다. 전문용어로는 '노가다'라 한다 카더라. 이게 유일한 수였다.


LA의 전설, 박특급의 머릿속에는 속에는 한국 프로야구 이전 전설들과 메이저리그 고대 괴수들의 투구가 하나하나 깊이 박혀있는 완벽한 데이터베이스와 같았다. 이제 그것을 현실로 옮겨오는 것이 바로 민재의 역할이다.


"에이! 팔 각도 더 낮춰! 몸을 더 베이스 쪽으로 돌리고! 팔을 휘적거리는 게 아니라 채찍처럼 휘두르란 말이다! 어깨가 빨리 열렸어! 다시!"


박특급이 만족할 때까지 무한 반복. 어떨 때는 단 두 번 만에 끝나기도 하지만, 잘못하면 하루 여덟 시간씩 일주일을 넘게 시달리기도 했다.


"고생했어."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민재에게 수현이 수건을 건넸다. 미국에서의 비즈니스와 한국에서 진행 중인 '플레이볼' 개발을 위해 한 달의 절반은 미국에서, 나머지는 한국에서 보내고 있는 수현은 한국에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이곳, 요양원 옆에 만든 스튜디오에서 보내고 있다.


"대표님. 회장님이 다음 주에 있을 시연회를 위해 미팅 시간을 잡으라고 하십니다."


비서의 전언을 들은 수현이 밖으로 나와 전화를 들었다.


"네 회장님."


"업무라고 딱딱하게 그럴 거냐."


"공과 사는 확실하게 하라고 배워서요."


"과연 내 딸이구나."


안절부절못하는 비서의 표정과는 달리 회장의 목소리는 굉장히 밝았다.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반년인데 얼마나 구현했지?"


"역대 메이저리그 선수 18,918명 중 투수 9,331명. 주요 선수 중 데이터가 없는 선수 99명. 그중에 96명의 투구폼을 구현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굉장하구나. 장하다 우리 딸."


고등학교를 일반 학교로 진학한다고 했을 때는 거의 호적에서 파일 뻔했다. 보장된 미래, 최고의 엘리트 코스,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포기하고 낙후되고 평범한 학교에 간다니.


나쁜 사람이 대기업 회장의 딸을 납치해 인질극을 벌이면 그룹 전체가 흔들리고 수 많은 직원들의 생계에도 영향이 미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경호원과 보안 업체까지 물리면서 평범한 생활을 쟁취해 낸 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이번엔 경영권 상속을 포기하고 미국에 가겠다고 선언했다.


"날 닮아 똘똘한 줄은 알았지만 4년 만에 박사 2개에 아빠가 힘들게 일군 회사보다 잘나가는 기업을 만들다니. 품 안의 자식이라고 조금 서운하고 허전하구나."


"아빠 갱년기에요?"


"하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린 최회장은 넌지시 물었다.


"민재는 나 보러 안 온다더냐. 언제 데리고 올 거야?"


"아빠 하는 거 봐서요."


"그래. 내가 널 어떻게 이기겠냐."


아무리 강단 있고 대단한 최회장도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드는 딸내미다.


"일정이 잡혀서 전화했다. 다음 주에 국내 10개 구단 구단주, 단장, 감독, 수석코치까지 전부 참석할 거다. 한국 야구 총재까지 싹 다."


대중에게 발표되기 전, 메이저리그를 넘어 일본과 한국, 대만 구단들까지 여러 루트를 통해 투자 문의와 사용료 협상 테이블이 열렸다. 생물학과 인공지능. 두 가지 분야에 미쳐 연구에만 몰두하던 수현에게는 너무나도 불편한 자리. 만두 가게부터 IT 대기업까지 현장에서 산전수전 공중전 우주 전까지 다 겪은 베테랑인 아버지의 손길 만이 혁신적인 신기술이 제 값을 받을 유일한 수 였다.


"통화 끝났으니까 오늘은 퇴근하세요."


"저, 회장님이 오늘도 집까지 모셔다드리라고..."


"됐어요. 분위기 보면 몰라요?"


일부러 쌀쌀맞게 비서를 퇴근시키고 하늘을 보니 벌써 해가 뉘엿뉘엿하다.


"오래 기다렸지? 오늘은 땀이 좀 많이 나서."


사흘 만에 존슨의 투구폼을 재현하는 데 성공한 민재가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은은한 샴푸 향기가 수현의 코 끝을 간질인다.


언제부터였을까. 무엇 때문일까. 이 녀석을 좋아하게 된 것은. 순둥순둥한 외모 때문인가? 순수하고 다정한 성격 때문에? 몸에 밴 성실함 때문에? 어릴 때 부모님을 잃은 것에 대한 연민 때문에?


아마 자신을 '최회장의 딸'이나 '잘나가는 스타트업 대표'나 '젊은 천재 과학자'가 아니라 '24살 최수현'으로 바라봐주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아빠가 시장에서 만두 장사를 할 때부터 대기업 회장이 되었을 때까지 민재는 항상 한결같았다. 이전의 관계를 이용해 무언가를 얻어내려거나 약점을 잡고 휘두르려 하지 않았다. 그냥 한 그루 나무처럼 무더울 때는 그늘을, 힘들 때는 기댈 구석을, 허기질 때는 열매를 나누어줄 뿐이다.


"언제 이렇게 컸대. 10살까지는 울보였는데."


이젠 키가 머리 하나 가까이 차이 난다.


"조심해."


갑자기 나타난 오토바이가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찰나. 단단한 품이 수현을 감쌌다.


"어쭈! 나 지켜준 거야?"


"응. 앞으로도..."


"뭐?"


작게 중얼거린 민재의 독백은 지난 4년 간 0과 1로 둘러싸인 수현의 세상에 색상을 입혔다.



민재는 야구를 좋아하는 아빠와 항상 저녁 먹기 전에 캐치볼을 했다.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해가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었다. 저녁 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따뜻한 목소리에 아빠와 함께 달려가 보면, 반찬이 많지는 않지만 아기자기하게 차려진 밥상이 기다리고 있다.


그날 부모님이 외출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부모님을 따라나섰더라면. 그날 조금만 더 붙잡아서 10분 만 늦게 출발했더라면.


사람을 잃는 게 두려워 100개의 담장을 둘러놓은 민재의 나무에 한 마리 파랑새가 날아왔다. 새는 세상을 인식하던 때부터 언제나 같이 있었다. 부지런히 날아다니며 나뭇가지, 진흙, 지푸라기, 돌멩이를 모아와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다른 녀석들, 사자나 사슴이나 토끼 같은 녀석들은 담장을 열어주지 않으면 들어오지 못했다. 언제나 민재가 열어주는 만큼만 들어오고, 문을 꽁꽁 걸어 잠그면 자연히 멀어지는 존재들. 그러나 이 작은 파랑새는 뻥 뚫린 하늘을 마음껏 활보하며 제집 드나들듯 하더니, 민재의 나무에 사뿐히 내려앉아 둥지를 틀었다.




"넥시엔슨의 최회장님 입장하십니다."


한국 야구계의 거물들이 모두 모인 고급 호텔. 넥시엔슨 최회장이 입장하는 동안 넥시엔슨이 운영하는 야구단, 창원 크로커다일즈의 몇 년 전 우승 영상이 흘러나왔다. 선수단이 마운드 위에 올라 우승 트로피로 자사 게임의 유명 아이템 '냉동참치'를 하늘로 치켜들어 올릴 때는 그야말로 전율이 흘렀다.


창단 8시즌 만에 우승 트로피에 이름을 새긴 크로커다일즈 구단은 낙동강 더비의 파트너인 부산 워리어스와의 매치업에서 유독 불타올랐다. 부산 워리어스도 마찬가지. 이번에도 여지 없었다.


"지금 시즌이 한창인데 옛날 영상은 왜 틉니까? 예?"


부산 워리어스 구단주의 입에서 구수한 사투리가 쏟아져나왔다.


"여러분도 우승하면 인게임 상에 이렇게 멋진 헌정 영상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푸훗. 여기저기에서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


"저희 넥시엔슨은 수현소프트에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고 해당 엔진을 사 왔습니다. 단지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요."


최회장이 단상에 올라 발언을 시작했다.


"저희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이 엔진을 샀습니다. 계약상 비밀 유지 조항에 따라 팀명을 밝힐 수는 없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전력 분석을 위해 이 엔진을 구입한 팀이 5개라고 합니다."


한 손을 전부 쫙 펼친 최회장에게는 자신감이 넘쳤다.


"이 엔진을 개발한 최수현 대표에 대해서 잠깐 소개하자면..."


나이 50이 넘고 생긴 급성 팔불출 끼가 시동을 걸었다.


"내도 안다! 다 안다꼬. 당신이 세 번 보낸 니 딸 자랑하는 200 페이지짜리 서류 뭉치. 아, 그리고 우리 집에 등기로는 만다꼬 보내는데!"


이번에도 부산 워리어스 구단주가 나서서 겨우 저지에 성공했다.


"저 양반도 도움이 될 때가 있구만."


다른 구단주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램 시연을 보고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회장이 구단주들과 관계자들에게 보낸 200 페이지짜리 서류 뭉치는 결코 과장이나 팔불출이 아니었다.


"일본 수출 당장 막으시오."


한국 야구 총재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게 한국 야구가 일본을 따라잡을 유일한 수요."



협상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10년간 일본에 제공하지 않는 조건으로 리그 차원에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고 사용료를 지불한다. 대신 어떤 구단도 엔진을 독점하지 못한다.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 한국 구단끼리 기본적인 내용은 공유하되, 구단마다 민감한 데이터는 보호할 수 있다.]


엔진이 야구 역사를 바꿀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는 극찬이 이어졌다.


"최회장님."


협상이 끝난 이후 모두 저마다 들떠 활용 방안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이, 부산 워리어스의 구단주가 대기실로 들어간 최회장을 찾아왔다.


"예. 무슨 문제라도?"


어깨가 하늘 끝까지 승천한 최회장에게 워리어스 구단주가 고개를 푹 숙였다.


"크로커다일즈 창단이 한국 야구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반대했던 걸 사과하려고 왔소."


"구단주님께 사과받을 날도 오는군요."


근본도 없는 놈이 촌구석에 야구단을 세운다고 온갖 비아냥에 시달렸던 설움이 드디어 씻어지는 최회장이었다. 고향에서 만두 장사를 하면서 짬짬이 만들던 게임이 대박이 나서 하루아침에 거대 게임사가 되었는데 누가 곱게 보겠는가.


자존심을 내려놓은 워리어스 구단주에게,


"선물로 좋은 소식 하나 알려드릴까요?"


최회장의 눈에 장난기가 넘실거린다.


"당장 찾아, 당장!"


구단주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구단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이번에 본 엔진은 혁신 그 자체.


워리어스 일동은 엔진에 구현된 워리어스의 전설, 안경 에이스를 고스란히 재현시킨 장면에서 잊지 못할 전율을 느꼈다. 용틀임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의 역동적인 투구폼은 워리어스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시울이 뜨거워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사람이 던진 걸 촬영한 것이며 그 폼으로 던진 사람이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24살 유망주라니.


"무조건 모셔 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장!!!!!! 이게 워리어스를 구원할 유일한 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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