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볼 마스터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스포츠, 현대판타지

하나냐
작품등록일 :
2024.07.30 22:05
최근연재일 :
2024.08.22 21:0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2,015
추천수 :
17
글자수 :
167,915

작성
24.08.05 21:00
조회
53
추천
0
글자
12쪽

11화 진실

DUMMY

'으윽, 미치겠네.'


몸 쪽 싱커를 겨우 긁어냈다.


따닥!


타구는 배트 안쪽을 맞고 희동의 왼쪽 발목보호대를 때렸다.


민재가 정식 투수가 되고 두 번째 경기. 그전까지 민재의 도움이 얼마나 컸는지 알 것 같다.


그동안에는 답지를 옆에 놓고 얼마나 빨리 옮겨 적는지 시험을 쳤다면, 이제 두꺼운 전공서적을 놓고 찾아서 풀어야 하는 시험 같다.


'교수님, 진도가 너무 빠르다고요.'


깐깐한 교수님처럼 생겼다고 불리는 별명, '닥터 밤'의 투구학개론 수업이 시작되었다.


"5구, 볼. 투앤투. 바깥쪽 보여주는 슬라이덥니다."


"살짝 빠지긴 했지만 타자 입장에서 2스트라이크에 몰리면 반응을 할 수밖에 없거든요? 잘 참아냈습니다."


'몸 쪽 싱커일까? 아니면 바깥쪽 슬라이더?'


예전이라면 민재의 도움으로 목표를 정해놓고 타석에 들어왔을 것이다. 타석에서 물러나서 땀을 닦으며 슬쩍 벤치를 바라봤다.


청태오와 배테랑들이 빠진 벤치 분위기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민재형, 보고 있다면 답을 알려줘요···'


희동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재는 묵묵히 그라운드를 바라볼 뿐.


"6구 승부입니다. 투수 와인드업,"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비행을 시작했다. 1개의 공, 108개의 실밥이 마운드 위 상공 2m에서 상륙했다. 비행은 18.44m를 통과하지 못하고 홈플레이트 앞에서 마무리되었다.


"바운드볼, 볼입니다. 커브를 던지려고 했던 것 같은데 잘 빠지지 않았습니다."


"느린 화면이 나오네요, 아 커브가 맞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모습이 거의 없었거든요, 아무래도 밤 선수도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습니다."


세월은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 복수하곤 한다.


"에이징 커브가 어느 정도 의심이 되는 수치들이 있습니다. 일단 작년보다 패스트볼 구속이 3km 정도 떨어졌죠."


해설이 이야기하는 사이, 패스트볼이 많이 높게 솟구쳐 포수가 벌떡 일어났다.


"아, 풀카운트로 갑니다."


전광판에 찍힌 143km를 보고 해설진에서 아쉬운 탄식이 나왔다.


"지금 6시즌을 한국에서 보내고 있는 장수 외인인데요, 저도 현역 시절에 참 애를 많이 먹었거든요. 특히 몸 쪽 싱커는 공략이 불가능해서 포기하고 바깥쪽에 보여주는 패스트볼만 노렸던 기억이 납니다."


나해설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그라운드에서 총 대신 공을, 칼 대신 방망이를 들고 온몸으로 부딪혔다. 최고 수준에서 경쟁하던 선수들이 하나 둘 은퇴하고 마운드 위에서 군림하던 외인, 밤이 이렇게 애처로워 보일 줄은 몰랐다.


"벗어납니다. 볼넷, 볼넷입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희동이 1루를 향해 발을 뻗었다.


"윤희동 선수가 잘 참아냈죠. 몸 쪽 싱커가 날카롭게 들어갔는데 커맨드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인지한 윤희동선수가 1번 타자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깔끔한 안타보다 7구 승부 끝에 내주는 볼넷이 더 타격이 클 수 있다.


"나이쓰!"


"굿 아이, 굿 아이!"


갑작스럽게 혈을 막던 고참들이 사라지자 여기저기 활기가 돈다.


안타를 쳐도 전 타석에 삼진 당한 선배 눈치를 보느라 마음껏 기뻐하지 못하던 타자들과 실책 한 번 했다 하면 죽일 듯 노려보는 고참 투수들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어린 선수들도 팀원의 출루를 마음껏 축하했다.


"아, 볼넷 가지고 졸라 시끄럽네···"


작년까지 주전이었지만 희동의 등장으로 후보로 밀린 고참 손섭이 눈치를 주자, 그동안 눌려있던 젊은 선수들의 한이 터져 나왔다.


"잘한다! 네가 1번 타자다!"


더 크게 떠드는 후배들에게 기세가 눌린 손섭은 곧 잠잠해졌다.


'원래 덕아웃 분위기가 이런가?'


어제 인생 첫 경기를 나가본 민재는 기가 쭉쭉 빨리고 있다. 아마추어 경기도 한 번 나가지 않고 아빠와의 캐치볼이 야구 경력의 전부였던 민재에게 너무나 생소한 환경이다.


어제는 묵언수행, 오늘은 축제. 양쪽 모두 기가 빨리기는 매한가지다.




기가 빨리는 쪽은 또 있었다.


"진짜지? 진짜지! 나 가도 되지?"


전화를 끊고 택시를 잡아탄 신문고는 직감했다. 이번 사건은 언론 지형을 뒤집을 수 있는 역사적인 기회임을.


흥분이 극에 달해 수업 중 뛰쳐나와 승강장까지 달려가는 동안 전화통을 붙들고 계속 물었다.


"진짜지? 나 지금 수업 쨌어. 진짜지? 나 지금 계단 내려가고 있어. 잠깐만, 택시 좀 부르고. 진짜지? 지금 신발 신는다? 진짜지? 진짜지?"


"..."


괜한 짓을 했나.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살짝 진정시키고 한마디 했다.


"진짜니까 닥치고 그냥 와."


욕을 한 지껄이 하고 전화를 끊은 수현은 근심을 떨치려고 안간힘을 썼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괜서리 민재의 얼굴이 떠올랐다.


"널 위해서라도, 힘낼게."




"국장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닙니다. 제 경력을 걸고라도 이런 일에 침묵할 순 없어요."


대기자가 되라고 부모님이 붙여주신 이름, 대기자. 대기자가 되고 싶은 기자, 대기자는 지난 20년의 기자 경력을 돌아봤다.


인터뷰 하나를 따기 위해 20시간을 대기한 적도 있다. 선배가 취재하던 사건을 얼떨결에 떠맡아 무서운 조직의 표적이 되기도 했고, 수많은 기획 기사를 반려당하며 자존심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다.


"기자야, 넌 기자가 뭐라고 생각하냐."


한 살 많은 선배인 국장이 타이르듯 말을 건넸다.


"나는 기자가 받아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손등 주름이 그간의 노고를 대변했다.


"누구나 의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의도를 꿰뚫고 받아 적는 사람들."


곧았던 허리는 점점 내려가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젊은 날의 패기로 세상과 싸워왔던 나는 이제 세상의 의도를 읽을 수 있게 되었어."


그의 어깨가 덜컥 내려앉았다.


"난 잃을게 너무 많다. 후배야. 손 떼자. 이건 내 선에서 끝날 일이 아냐."


소파에 앉은 후배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그대로 지나쳐 문쪽으로 향했다.


"날 많이 원망해도 좋다. 내 면상에 대고 욕지거리를 해도 좋고, 비겁자라고 떠벌리고 다녀도 괜찮다. 하지만 이 일은 안돼."


"먼저 후배라고 했으니 선후배 관계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덜컥. 방문을 열고 나가라고 손짓하는 선배의 코 앞까지 몸을 붙였다.


품 안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찾던 대기자가 손을 뻗었다.


"이제 나 찾지 마 이 새끼야!"


빛바랜 봉투에 적힌 글자.


'사직서'.


처음 취직하고 나이 차이 많은 선배에게 죽도록 깨지고 나서 썼던 사직서니까 19년이 넘었다.


언제나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수십 번도 넘게 꺼냈다 접었다 했던 서류.


'너, 내가 수리할 때까지 다녀. 넌 내가 책임진다.'


한 살 많지만 남들보다 일찍 입사해 두각을 드러냈던 선배와 달리 둔재라는 오명을 달고 많은 눈물을 훔쳤던 대기자였다. 선배의 그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대기자를 버티게 했었다.


사직서 봉투를 국장의 가슴팍에 대고 고개를 숙인 대기자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


'미안하다.'


더럽고 치사하다. 이 바닥은 지대 낮은 흙바닥과 같아서, 조금만 비가 내렸다 하면 흙탕물로 변해버린다.


가끔 들어오는 미꾸라지들은 바닥에 가라앉은 먼지들을 또다시 일으키기도 했다.


개천에서 용 난다고 일약 스타 덤에 올라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괴물이 되기도 하지만, 백만 마디 옳은 말도 회색 종이에 잉크 한 방울로 남겨지지 못하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버리기도 한다.


'나도 너처럼 가정이 없었다면 달랐을까.'


가정이 있다는 허울 좋은 핑계로 또다시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크로커다일즈 직원이 문을 열고 남자를 맞이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사건들을 겁도 없이 기고하는 것으로 유명한 기자, 대기자다.


어떤 언론이든 그의 기사가 떴다 하면 일단 받아 적고 봐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글에는 파급력이 있었다.


"이제 백수입니다. 하하."


한편으로 홀가분해진 그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은 여기가 진실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글은 심금을 울리는 수려한 글이거나 누군가의 열정을 이끌만한 진심이 담긴 글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언제나 진실이 담겨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의 글이 하나하나 다시 조명받곤 하던 이유였다.


"진심은 언제나 바뀔 수 있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합니다. 저도 20년 동안 제 직장에 진심이었어요. 지금은... 진심으로 증오합니다."


그의 눈에 이글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그의 오랜 팬으로 그의 이름이 달린 기사란 기사는 외울 때까지 읽고 또 읽은 남자, 신문고는 그토록 바라던 대면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가끔 TV에 나오던 지적이고 세련된 이미지의 대기자는 온데간데없다. 그는 전사였다. 그는 노련한 사냥꾼이었다. 그는 한 번 맡은 냄새를 잊지 않고 추격하는 맹수였다.


우상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신문고에게 있어 잊지 못할 밤이었다.




경기는 5회 초, 매 이닝 출루에 성공한 워리어스의 공격. 1번 타자 운희동이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섰다.


"첫 타석 볼넷, 둘째 타석은 삼진으로 물러났습니다. 세 번째 타석은 어떨지 궁금하군요."


'후. 어떻게 해야 하지...'


민재가 1군으로 올라오고 나서 더그아웃에서는 서로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첫날은 민재가 경기 후반에 왔기 때문이고, 오늘은 민재가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골똘하게 생각을 하고 있는 탓에 아무도 감히 말을 걸지 못했다.


제구 되는 150 후반을 편하게 던지는 괴물이 등장한 지 하루 만에 그동안 고여있던 괴물들이 싹 사라진 것을 보고 연결고리를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선수들이 더 열심히 파이팅을 외치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디서 나타난 녀석이지?"


"스물 넷이라던데. 너 동기잖아. 저런 애 본 적 없냐?"


"소문으로는 교포라는 말이 있던데요. 스티브가 데려온 괴물들하고 같이 농구하는 것도 봤다던데."


"프런트 형이 그러는데 구단주님이 따로 스카우트했다는데? 주말에 간부들 다 내려가서 모셔왔어. 이건 팩트임."


"확실한 건 윗 선에서 꼽은 거라는 거지? 잘못 보이면 나가리 되겠는데? 아저씨들 쳐낸 거 보면."


소문은 점점 부풀려져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생겨버렸다.


"표정 좀 봐. 누가 봐도 지금 딱딱 진단해서 구단주님한테 보고할 것 같지 않아?"


"나 고딩 때 메이저 스카우트가 딱 저 눈깔이었어."


"어허, 눈깔이라니. 구단주님의 눈한테 감히."


"그럼 신의 눈인가?"


"뭐래 귀신 눈깔이구만."


살면서 이만큼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는 민재는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어휴, 목이 타네."


긴장한 탓에 마른침을 삼키자, 부스럭.


"여기 있습니다..."


희동에게 밀려 벤치 신세가 된 외야수 손섭이 빠릿빠릿하게 물을 대령했다.


"아, 고맙습니다."


목이 매여 뒷말이 잘린 탓에 손섭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들렸다.


"아, 고마해."


'나도 잘리는구나.'


깊은 절망을 느끼고 고개를 푹 숙이는 손섭을 보며 오해는 더 커졌다.


"야, 손섭이 형을 그냥 조져버렸나 본데?"


"하긴 우리도 물 미지근하다고 욕 뒤지게 먹었었잖아."


"하긴 저 인간, 청태오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긴 했어."


배팅볼을 한 달 내내 쳤던 레귤러 멤버들의 혼란은 배나 컸다.


"야, 나 조진 거 아니냐? 한 번 빼먹은 것 같은데..."


"네가 나보다 낫네. 난 반말하고 마사지시켰다."


"형, 저는 저보다 나이 많은데 나이가 벼슬이냐고 존댓말 쓰라고 했어요..."


암울해진 분위기 속에 희동이 큼지막한 파울 타구를 날려 보냈다.


"좋아! 나이쓰! 날려버려!"


누구보다 앞장서서 파이팅을 외치는 손섭이었다. 그를 본 선수들도 앞다투어 파이팅을 외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패스트볼 마스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1부 마감 및 휴재 공지 24.08.23 8 0 -
31 30화 미국 24.08.22 12 0 12쪽
30 29화 실업 24.08.21 13 0 13쪽
29 28화 기적 24.08.20 16 0 11쪽
28 27화 지배 24.08.19 18 0 12쪽
27 26화 돈 24.08.18 19 0 13쪽
26 25화 아버지 24.08.17 21 0 12쪽
25 24화 관조 24.08.16 20 0 12쪽
24 23화 생소함 24.08.15 21 0 13쪽
23 22화 김나박이, 최 24.08.14 20 0 12쪽
22 21화 개화 24.08.13 23 0 12쪽
21 20화 변신 24.08.12 24 0 12쪽
20 19화 야구 VS 축구 24.08.10 34 0 13쪽
19 18화 야성 24.08.09 29 0 13쪽
18 17화 균형 24.08.08 32 0 13쪽
17 16화 마무리 24.08.07 42 0 12쪽
16 15화 김나박이 24.08.07 42 0 12쪽
15 14화 리더 24.08.06 37 0 13쪽
14 13화 물밑 작업 24.08.06 43 0 12쪽
13 12화 카르텔 24.08.05 51 0 12쪽
» 11화 진실 24.08.05 54 0 12쪽
11 10화 승부조작(2) 24.08.04 59 0 12쪽
10 9화 승부조작(1) 24.08.04 58 0 12쪽
9 8화 구원투수, 배팅볼러 24.08.03 65 0 13쪽
8 7화 100마일짜리 배팅볼 24.08.03 68 0 12쪽
7 6화 이글아이 24.08.02 70 0 13쪽
6 5화 목격자 24.08.02 71 0 11쪽
5 4화 배팅볼 24.08.01 98 1 12쪽
4 3화 스카우트 24.08.01 142 1 12쪽
3 2화 유일한 수 24.07.31 189 3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