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급 홀아비의 탑공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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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찬TO
작품등록일 :
2024.08.04 22:24
최근연재일 :
2024.09.03 13:25
연재수 :
2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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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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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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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2화. 폐급 홀아비(2)

DUMMY

“다 모이셨으니까. 마지막으로 등록증 확인하고 진입할게요.”


헌터 제인이 빈손을 내밀었다. 희고 얇은 손가락. 그녀 앞에 늘어선 광부들은 그녀의 손에 차례대로 등록증을 제출했다.


“니콜라이씨, 청진씨, 트란씨...”


제인은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며 얼굴을 대조했다. 다채로운 유색인종들이 섞여있었다.


탑이 발생하고 한국은 아시아의 미국처럼 변해버렸다. 가난한 나라의 수많은 2급 각성자들이 한국으로 들어와 탑의 광부로 일하길 원했다.


친이민자 정책을 펼치던 정부로서도 반색할 만한 현상이었다.


대한민국 출생률 0.5%의 시대였다. 이민자 마저 부족했다면 인구부족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소멸했을 지도 몰랐다.


제인은 광부 중 유일한 한국인 앞에서 잠시 뜸을 들였다.


“오랜만이네요. 지환씨.”

“그러네요, 제인 헌터님. 병원에서 헤어진 뒤로 거의 3년 만이네요.”


지환을 보는 제인의 눈에서 기묘한 이채가 떠올랐다. 지환은 그녀의 눈빛을 덤덤하게 마주했다.


“벌써 40층 이상 진입하신건가요? 축하드립니다.”


지환은 제인의 제복 견장에 달린 4개의 무궁화 표식을 보며 말했다.


“그 때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마음 먹으면 적어도 40층까지는 가뿐하다고.”


제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지환은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 또한 기껍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손을 마주잡았다.


헌터가 된 지 겨우 1년만에 탑 40층까지 오르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수긍이 됐다.


특급 각성자인 그녀는 상태창, 레벨은 물론 특성을 5개나 개화한 성골 중에 성골.


특급 중에서도 특성이 5개 이상인 각성자는 0.1%도 채 되지 않았다.


“반갑지만 사담은 나중에 나누죠. 지금은 일하러 온 거니까요.”


제인은 회수했던 등록증을 지환에게 돌려줬다. 어느새 등록증에는 새로운 전화번호 하나가 저장되어 있었다.


지환은 쓰게 웃었다. 나름 젊었을 적 인기가 있는 편이긴 했지만, 불혹이 가까워진 나이에 20대 여성에게 번호를 받을 줄이야.



“자자, 여러분 이제 출발하시죠.”


제인과 네 명의 광부가 둥글게 서서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제인이 모두를 한차례 둘러본 후 눈꺼풀을 스르륵 내리자, 나머지 광부들도 그녀를 따라 일제히 눈을 감았다.


“9층 진입.”


제인이 나지막이 읊조리자, 지환은 갑작스레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감각에 몸서리쳤다.



*



사부작


잔디가 차분히 즈려밟혔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푸른 햇살이 망막을 찔렀다.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장소.


하늘과 바다를 가로지르는 하얀 지평선이 보였다.


광활한 지평선에서 몸을 돌렸다. 전면으로 작은 들판을 지나, 끝이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지환은 푸른 잔디가 펼쳐진 해안 절벽 위에 서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상쾌한만큼 낯선 공기.


“다행히 시작 지점이 나쁘지는 않아 보이네요. 엘리트 몬스터가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있을 것 같아요.”


손차양을 한 제인이 눈을 찡그린 채 숲에 멀리까지 시선을 던졌다.


지환과 나머지 광부 셋은 주변을 훑어보는 그녀를 잠자코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다시 한번 소개드리겠습니다. 저는 인솔을 맡은 헌터 제인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견장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저는 40층 헌터예요. 보통은 9층 계단은 20층 헌터가 오기 마련인데. 이번엔 특별히 제가 참가하게 됐어요.”


광부들이 그녀의 어깨에 달린 견장을 확인했다. 다들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는 듯한 내용이었지만, 그녀에게서는 어떠한 우월감도 비치지 않았다.


단지 다른 이들을 안심 시키기 위해 담담히 설명할 뿐.


“제 실력이면 9층 엘리트 정도는 어렵지 않아요. 그러니까 괜히 마음 무겁게 가지실 필요 없어요. 오늘 여러분은 무조건 탑의 10층으로 올라가실 테니까.”


제인의 확신에 찬 눈빛에 지환과 광부들은 묘한 열기까지 띠었다.


10층. 10층은 엘리트가 아닌 탑의 첫 보스가 지배하는 층이었다.


보스가 등장하는 층인만큼 1층부터 9층까지 조금씩 높아지던 하급 마정석의 순도가 몇 배로 뛰는 구간이었다.


그만큼 10층 광부들에게는 보수에 프리미엄이 붙는다.


지환은 10층 광부로 진급하기 위해 3년간 근속하며 차분히 시험을 준비했다. 필기와 면접이 치르고, 합격자가 발표되기 전날에는 얼마나 떨렸는지 밤을 지새웠다.


“그럼 바로 움직이죠. 일찍 처리하면 10층에 가서 짧게 나마 마정석을 채취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 지 몰라요.”

“넵!”


광부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지환 또한 그들과 동일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아내를 죽인 탑에서 마정석을 캐고 돈을 번다는 행위의 죄책감이 아직까지 마음속에 시퍼런 멍처럼 욱신거렸지만.


돈을 벌어야 했다. 아카데미의 입학금과 등록금은 상상을 초월한다. 혹여나 혜린이까지 각성자가 되면 지금보다 최소 두 배는 더 벌어야 아이들의 아카데미 생활이 감당된다.


아무리 죄책감에 시달려도, 죽은 사람보단 산 사람이 우선이니까.


씁쓸한 뒷맛은 홀로 삼키고 가면 된다.



짝짝


제인이 박수를 두 번 쳤다. 상념에 빠졌던 지환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럼 출발하기 전에 가는 순서를 정하죠. 제가 앞장설 거고 그 다음이 지환씨 그 뒤로는···”


일자로 늘어선 헌터와 광부들이 엘리트를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지환은 제인의 바로 뒤에 붙어 걸음을 바삐 옮겼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엘리트를 잡았으면 싶었다.


그럼 제인의 말처럼 잠깐이나마 10층의 마정석을 캘 수 있을 지도 몰랐으니까.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인이 미세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지환을 흘낏 쳐다봤다.


지환의 영문을 모르는 눈이 깜박이자, 그녀의 붉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 제 뒤에 꼭 붙어있어요. 금방 끝낼 테니까요.


귀로 직접 생각이 들려오는 기이한 전달 방식. 40층을 돌파한 헌터들만이 사용 가능하다는 전음이라는 탑의 축복이었다.


지환이 제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확인한 제인이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노랗게 물들었다. 동그란 형태의 홍체가 마치 야수의 눈동자처럼 부피가 좁아지며 날카롭게 빛났다.


제인이 혀로 자신의 붉은 입술을 핥았다.


사냥이 시작됐다.



***



“쿠에엑-!”


말 그대로 돼지 멱따는 소리였다. 9층의 계단 지킴이로 등장한 엘리트 오크 전사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듯 했다.


자신의 오크 군체가 이리 쉽게 무너질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테지.


매번 입장할 때마다 새롭게 생성되는 지역에서 엘리트나 보스 몹들은 자신이 그 층의 지배자라고 인식한다.


자기보다 강한 생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깨지는 순간. 흔들리지 않을 지배자는 없었다.


깔끔한 검은 바지 정장 세트에 검은 하이힐을 신고 있는 제인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오크들은 가뿐하게 맨손으로 찢었다.


마치 맹수 같은 그녀의 움직임은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했다.



“엄청 빠르구먼. 역시 40층 헌터는 달라.”


지환 옆에 서서 구경 중이던 니콜라이라는 광부가 옅은 긴장감이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다른 광부들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을 터였다. 2급 각성자들의 여상한 눈에 특급 각성자의 움직임이 보일 턱이 없지.


하지만 지환은 달랐다. 그는 눈에 힘을 주고 제인을 주시했다.


훈련을 통해 일궈낸 동체 시력과 고도의 집중력은 어렴풋하게나마 제인의 움직임을 읽어냈다.


“그러게요. 빠르긴 하네요.”


힘겹게 맞장구를 쳤다. 집중하느라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눈에 급격히 피로가 쌓인다. 지환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아내와 사별한 직후, 헌터가 되기로 결심하고 미친 사람처럼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폐급 각성자인 그는 단련 방식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전쟁통에 잔뼈가 굵은 용병들, 각종 스포츠 트레이너, 명망 있는 명상가, 심지어 헌터들까지 초빙해서 헌팅에 도움이 될만한 잡기들을 익혔다.


각고의 노력 끝에 달성한 쾌거 중 하나.


동체시력과 고도의 집중력.


둘을 동시에 사용하면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러너스하이처럼 몸상태가 전환됐다.


3년전 폐급 각성자였던 지환이 헌터로 탑 7층까지 입성할 수 있었던 비밀이었다.


‘폐급 헌터 7층을 달성하다!' 당시에는 작은 기사까지 났던 사건이었다.


예전 추억을 떠올리며 피식 웃던 지환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소름끼치는 통각이 그의 등을 뱀처럼 사선으로 가로질러 기어갔다.


화들짝 놀란 지환이 제인을 주시하던 시선을 억지로 돌렸다.


“이, 이봐. 괜찮은가?”


니콜라이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무릎을 집고 호흡을 고르던 지환이 고개를 들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환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상체를 세웠다. 등짝이 뻐근했다.


3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그 날의 끔찍한 고통이 등을 훑고 갈 때가 종종 있었다.


죽어라 노력했던 시간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함께 훈장처럼 박제된 채 탑의 7층에 멈춰버렸다.


비록 잃어버린 시간이 되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가끔 헌터들을 구경할 때나 사용되는 잡기 정도는 익힌 셈이니까.


자조적인 미소를 띤 지환이 다시 제인을 주시했다.




푸와악


오크의 팔뚝이 어깨 째로 뽑히며 괴악한 효과음을 냈다.


허공에 피가 점점이 흩뿌려졌다. 뜯겨진 오크의 팔을 바닥으로 집어던진 제인이 고개를 훽 돌려 지환을 힐끔 곁눈질했다.


집중하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아주 짧은 순간.


제인은 다시금 오크 무리로 뛰어들었다.


크음, 지환이 헛기침을 했다. 찰나긴 했지만, 제인은 벌써 전투 도중에 5번이 넘도록 자신을 흘낏거렸다.


그는 혹시나 제인에게 실수한 점이 있었는지 고민해봤다.


그럴 만한 일은 없었다. 괜한 걱정이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을 보거나 광부들 주변을 사전 경계한 거겠지.



어느새 오크들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제인은 기세를 몰아 단숨에 엘리트 오크 전사 코앞까지 질주했다.


엘리트 오크 전사는 괴성을 내지르며 쥐고 있던 도끼를 하늘 높이 쳐들었다.


거대한 도끼가 제인을 향해 단두대처럼 수직으로 떨어져내렸다.





강철처럼 단단해 보이던, 도끼의 자루부분이 제인의 손날이 스치자 나뭇가지마냥 부러졌다.


끊어진 도끼 날 부분이 오크들이 모여있던 방향으로 날아갔다.


눈먼 도끼 날에 서너 마리 오크의 머리통이 젤리처럼 짓뭉개졌다.


제인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한쪽 손을 옆구리 뒤쪽으로 당겼다.


이윽고 그녀의 손날이 섬광처럼 뻗어나갔다.



푸확


엘리트 오크 전사의 가슴 정중앙으로 푸른 햇살이 통과했다.


둥그렇게 뚫린 구멍의 테두리로 검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믿을 수 없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엘리트 오크 전사가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끝났군.’


지환은 집중하느라 피로가 쌓여 우묵해진 눈을 깜박거렸다. 지배자를 잃은 오크들은 숲속으로 헐레벌떡 도망쳤다.


제인은 허공에 손날을 휘둘러 손에 묻은 검은 피를 털어냈다.


구경거리는 끝이다. 뒤로 물러나 있던 지환과 광부들은 제인의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다행히 빨리 끝났네요. 다들 10층 진입을 축하드려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제인님.”


지환의 칭찬에 제인이 별 거 아니라며 빙그레 웃었다. 이어서 광부들도 들뜬 얼굴로 제인을 칭송했다.


“운이 좋았어요. 시작 지점 가까이에 엘리트가 있었고 상대적으로 쉬운 종인 오크였으니까요.”


제인은 포켓주머니에 들어있던 행거치프를 꺼내 얼굴에 점점이 묻은 검은 피를 꼼꼼히 닦았다.


“크룩···”


단말마와 함께 엎어져 있던 엘리트 오크 전사의 몸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절명한 오크 전사를 바라보는 제인의 무기질한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광부 중 일부가 오크의 시체들을 보며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지환은 딱히 별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혐오스럽지도 측은하지도 않았다.


헌터 생활을 겪어본 경험 때문인지, 탑에 대한 반감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괴물의 시체에도 감정에 동요가 일지 않았다.


엘리트 오크 전사의 시체에서 은은하게 빛이 흘러나왔다.


지환과 광부들은 엘리트 오크가 빛무리로 변해 흩어지는 광경을 기대에 찬 눈으로 지켜봤다.


빛무리가 날린 자리에는 단순한 형태의 목재창 하나가 놓여 있었다.


창을 내려본 제인이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상대적으로 쉬운 엘리트여서 그런지, 추가 마정석도 안 나오고 전리품조차 금속 무기가 아닌 목재였다.


“전리품은 그럭저럭이라도, 다행히 계단은 바로 열렸네요.”


전리품인 목재창을 챙긴 제인이 손가락으로 한 장소를 가리켰다.


처음 엘리트 오크 전사가 앉아있던 왕좌 앞에 검은 포탈이 열려있었다.


“가만보자. 지금 시간이···”


제인이 등록증을 확인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녀를 따라 등록증을 꺼내 시간을 봤다.


“아직 퇴근까지 4시간이나 남았네요. 적어도 3시간은 캘 수 있겠네요.”


광부들은 물론 지환까지 기대에 찬 눈동자로 포탈과 제인을 번갈아봤다.


언제나 층을 오르는 날은 야근까지 각오해야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개고생을 한 뒤에야, 간신히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무려 계단을 오른 당일 날 세 시간이나 추가 채굴을 할 수 있다니.


돈도 중요했지만 이건 기분상의 문제였다.


새물건을 얻으면 당장 사용해보고 싶은 게 인간의 욕구 아니던가.


“그럼 바로 가실까요?”


기대감에 가득 찬 네 명의 광부는 제인의 뒤를 따라 검은 포탈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



적당히 소란스러운 프렌차이즈 카페. 세련된 인테리어와 증권맨들처럼 포멀한 차림새의 손님들이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한 공간.


채굴량이 괜찮았던 날이면 여상히 들리는 카페였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아닌 척 하지만, 주변 손님들의 시선과 관심이 지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다른 이의 주목이 불편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애초에 제인과 함께 온 이상 각오한 일이었다.


그녀의 외모는 누가 봐도 뛰어난 편이었고, 거기에다 20대에 꽃다운 청춘까지 함유하고 있었으니까.


그에 비해 지환은 그저 키가 조금 큰 아저씨에 불과했다.


그는 남자들의 은근히 견제하는 듯한 눈초리를 애써 무시하며 제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제인 헌터님이 아니었다면 오늘 야근까지 하고 나서야 겨우 층에 오르고 빈손으로 퇴근했을텐데.”

“감사하긴요. 대신 이렇게 제가 아저씨 시간을 뺏고 있잖아요.”


제인은 노란 아이스티에 꽂힌 투명 빨대를 장난스레 빙빙 돌렸다.


“그나저나 제가 저녁 식사에 카페까지 얻어 먹어도 괜찮은 건가요?”

“그럼요. 오늘 3시간 일한 일당이 평소에 하루 종일 일하고 받던 일당보다 두배 쯤은 됐으니까요.”


확실히 10층의 마정석은 달랐다. 아래층에서 캐던 잡스러운 불순물이 섞인 하급 마정석보다 순도가 높고 색이 진한 마정석들이 포진해 있었다.


“제인씨가 도와주신 덕분에 채석량도 든든했는걸요. 저녁이랑 카페를 한번 더 대접해도 제가 손해 보진 않을 겁니다.”


제인은 빙그레 웃으며 입술로 빨대를 물고 아이스티를 빨아들였다.


지환도 진갈색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잔을 들었다.


아메리카노가 시원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씁쓰레한 커피향이 남아 입안에 맴돌았다.


“어차피 퇴근했는데. 옛날처럼 말 편하게 하시는 건 어때요?”

“그땐 학생이랑 아저씨였으니까요. 이제는 제인님도 번듯한 사회인이 되셨고··· 아니지. 40층에 오른 헌터님에게 번듯하다는 말은 부족하겠네요.”


제인은 재미없다는 듯이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지환은 머쓱하게 웃으며 커피를 한모금 더 마셨다.


“아저씨랑 병원에서 헤어진 뒤로 3년 만이네요.”

“그러게요. 시간 참 빠르네요.”

“그 때, 기억하시나요?”

“네. 그럼요. 잊기 어려웠던 시기였죠.”

“저랑 한 약속도 기억나요?”

“무슨···?”


지환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했다. 제인은 그런 지환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됐어요. 기억하고 있든 말든 크게 상관없으니까.”

“그래요? 죄송하네요.”

“아저씬 정말 달라진 게 별로 없네요.”

“그에 비해 제인씨는 너무나 멋지게 자라셨네요.”


어른이 된 제인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약속이라, 사실 지환은 그녀와 했던 장난스러운 추억을 잊지 않았다.


그 때의 약속이 제인을 이렇게 멋진 성인으로 거듭나게 하는데 일조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약속은 충분한 값어치를 다 한 거다.


세상엔 지켜지는 게 중요하지 않은 약속들도 존재하는 법이니까.


“제인씨 아버님은 잘 지내시나요?”

“그럭저럭이요. 제가 헌터가 된 이후로 좀 더 낫긴 하죠.”

“그래요? 내색은 잘 안 하시는 편이시지만, 제인씨가 40층 헌터가 되어서 마음속으로 엄청 좋아하셨을 거예요. 병원에서 제인씨 깨어났을 때 아버님께서 기뻐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답니다.”


제인이 투명 빨대를 입술로 꼬옥 물고서 눈만 들어 가만히 지환을 응시했다.


마치 그가 한 거짓말을 알아차린 사람처럼.


“아빠는 제가 40층 달성한 거 별로 안 좋아하셨어요.”

“네? 왜요?”

“제가 50층에 도달하면 원하는 걸 주기로 약속했거든요.”


지환은 그녀의 눈동자에 든 기묘한 이채가 부담스러워 저도 모르게 눈동자를 모로 돌렸다.


“크크, 아저씨 귀여우니까, 눈 좀 피하지 마세요.”

“자꾸 이상하게 쳐다보시는 거 같아서...”

“알았어요. 알았어. 안 그럴게요.”


지환은 다시 눈을 똑바로 했다. 어른스러움에 가려져 있던 장난스런 옛모습이 언뜻 비쳐, 둘은 서로를 보며 웃어버렸다.


“아저씨, 자녀분들은요? 잘 지내고 있죠?”

“예린이랑, 혜빈이요? 그럼요. 둘 다 잘 지내죠. 아참, 오늘 둘째 혜빈이가 중학교에 입학했답니다. 어찌나 기쁘던지. 오늘이 층을 오르는 날만 아니었으면 분명 입학식에 참석···”



두웅


이젠 몇 차례나 겪어본 익숙한 감각. 탑에서 발생한 보이지 않는 해일이 모두의 심장을 지나쳤다.


지환은 반사적으로 등록증을 꺼내 어디론가 황급히 연락을 걸었다.


“각성 웨이브···”


씹듯이 말을 뱉은 제인이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주기상으로 아직 발생할 시기는 아니었는데.


다행히 각성자들이 많이 방문하는 카페라 큰 문제는 없어보였다.


“지환씨. 아쉽지만 이제 일어나봐야겠네요. 각성 웨이브 터지면 저희 협회 쪽도 바빠지는 지라···”


제인의 말이 마치기도 전에 지환이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제인의 외침이 들리지 않았다.


지환은 반쯤 미친 사람처럼 카페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 바깥으로 나갔다.


아내를 잃은 뒤로 반사적으로 붙은 습관이었다.


각성 웨이브가 터지면 즉각 아이들에게 전화하는 건.


아이들 또한 알고 있었다. 웨이브가 터진 즉시,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아빠의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걸.


그래서 예전의 지환은 돈이 많이 들었음에도, 추가 등록증을 신청해서 두 개나 소지하고 다녔었다.


두 딸에게 동시에 연락을 취해야 했으니까.


다행히 2년 전 첫째 예린이는 1급으로 각성을 했다. 더는 각성 웨이브가 위협이 되지 않는 상황.


카페를 뛰쳐 나온 지환은 미친 사람처럼 도로로 뛰쳐나가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지환의 등록증 화면 위에는 지환과 혜빈이 어깨동무를 한 채 웃고 있는 사진이 떠올라 춤을 추듯 너울거렸다.



뚜- 뚜- 뚜- 뚜- 뚜- 뚜-


등록증에서는 야속한 통화 연결음만이 계속 울려퍼지고 있었다.


작가의말

연참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작품에서 등장하는 등록증은 마정석으로 만든 만능 스마트폰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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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7화. 10층(3) 24.08.18 108 4 15쪽
16 16화. 10층(2) 24.08.17 120 5 13쪽
15 15화. 10층(1) 24.08.16 135 4 15쪽
14 14화. 특성창 24.08.15 137 5 16쪽
13 13화. 멘토와 멘티 24.08.14 149 3 17쪽
12 12화. 특성 24.08.13 175 4 17쪽
11 11화. 기일 24.08.12 180 2 18쪽
10 10화. 만두 24.08.11 184 4 21쪽
9 9화. 탑의 주인 24.08.11 204 3 17쪽
8 8화. 습지(3) 24.08.10 192 5 15쪽
7 7화. 습지(2) 24.08.09 215 4 19쪽
6 6화. 습지(1) 24.08.08 222 5 13쪽
5 5화. 텃세(2) 24.08.07 263 5 15쪽
4 4화. 텃세(1) 24.08.06 297 5 16쪽
3 3화. 폐급 홀아비(3) 24.08.05 328 5 17쪽
» 2화. 폐급 홀아비(2) 24.08.05 365 6 20쪽
1 1화. 폐급 홀아비(1) 24.08.05 470 6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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