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급 홀아비의 탑공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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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찬TO
작품등록일 :
2024.08.04 22:24
최근연재일 :
2024.09.03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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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8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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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25화. 평가

DUMMY

지환의 머리 위에 뚫린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엘린은 시린 눈을 반개한 채 구멍의 숫자를 세아렸다. 총 6개, 저번에 봤던 때보다 2개가 더 늘었다.



지환의 주먹이 오크의 들창코를 뭉개버렸다. 오크는 비명을 지르며 피가 줄줄 새는 자신의 콧구멍을 쥐었다.


지환이 기민하게 오크의 뒤로 움직여, 녀석의 목을 백초크로 졸랐다. 오크의 신체는 강건할 뿐, 인간의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동맥에 혈류가 막히자, 잠시 발광하던 오크가 인형처럼 추욱 늘어졌다. 지환은 발목에 채워둔 단검을 꺼내 잠잠해진 오크의 멱을 그었다.



엘린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커져있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지환이 오크를 처리하는 일련의 과정은 엘린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상식들을 전복시켰다.


오크를 처리할 때, 지환의 여섯개의 구멍 중에 두곳에서 새하얀 빛이 강렬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빛에 반응하듯, 지환의 정수리로 옅은 그림자가 지더니 머리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마에 뿔이 솟은 인간 형태의 옅은 그림자가 마치 수호령처럼 지환의 육신을 갑옷처럼 덮었다.


강신한 상태처럼 변해버린 지환이 오크의 두툼한 목을 졸라서 제압했다.



퍽 퍼억 퍽 퍽


지환이 주먹질로 달려드는 두 마리의 오크를 쓰러뜨렸다. 두 마리가 당하는 틈을 타 오크 하나가 지환의 뒤로 달아났다.


녀석의 뒤통수를 빤히 보던 지환이 큼직한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가 주먹을 말아 돌멩이를 꾸욱 쥐자, 머리 위에 다른 구멍에서 갑자기 새하얀 빛이 발광했다.



‘맙소사··· 저건 또 뭐야.’


엘린은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입을 손으로 막았다. 새롭게 반짝이는 빛이 이전과 다른 그림자를 만들었다. 이번 그림자는 꼬리가 긴 그림자였는데, 언뜻 보기에 생김새가 리자드맨을 닮아있었다.


슈아아아악―――――퍽!


총탄처럼 쏘아진 돌멩이가 오크의 뒤통수에 직격했다. 앞으로 고꾸라진 오크는 바들바들 떨더니 이윽고 움직임이 멎었다.



엘린은 어이가 없었다. 무당의 피를 이어받은지 어언 27년, 저런 식으로 혼을 이용하는 형태는 처음봤다.


무당에게 접신이나 강신은 영혼과 대화를 나누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영혼을 빌어 육체의 능력을 향상시킨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악신이나 원혼이 다른 이의 육신에 침입하여 원주인의 정신을 흐트러뜨리고 강제로 육신을 빼앗는 경우, 약간의 신체적 향상이 이뤄진다.


그렇다하더라도 혼과 육신의 불일치로 제정신이 아니고, 신체적 능력 향상 이래봐야 미친 사람이 힘이 쎄지는 정도 이상은 기대할 수 없었다.


지환은 엘린이 알고 있던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온전한 정신을 유지한 채, 혼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강력한 힘을 빌려왔다.



엘린이 굳은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애초에 저걸 혼이라고 부르는 게 맞나. 계속 자세히 지켜보니, 별처럼 빛나는 구멍에서 나오는 저 그림자들에게서는 의지라고 부를만 게 한톨도 보이질 않았다.


마치 혼에서 축출된 껍데기라고 해야할까. 저걸 진정 혼이라고 명명한다면, 실제하는 영혼들에게 모욕적인 처사였다.


불현듯 그녀는 지환의 능력이 영적인 현상과 상관없는 거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차라리 일종의 특성 아닐까. 다른 이들의 특성과는 다른 구조로 발동되는.



엘린은 1급 각성자였다. 각성 웨이브를 통해 레벨과 상태창, 그리고 특성 하나를 부여받았다.


그녀는 도축 길드를 창설하기 위해, 다각도로 검은탑과 각성자를 연구했다.


걔중에서 가장 신비롭던 파트는 바로 특성이었다. 그녀는 특성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타고난 영적 능력으로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탐색했다.


특성은 심장 안쪽에 존재했다. 구체 형태에 황금빛이 은은하게 번지는 특성은, 심장 안쪽에서 끓는 물에 잠긴 달걀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각성자가 특성을 발동하면 달걀처럼 생긴 특성이 갈라지며, 혈관을 따라 황금색 기운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뻗어나간다.


그건 다시 보기 어려운 경이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비록 자신의 심장으로 실험을 하느라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녀가 목숨을 걸고 파악한 특성이라는 기적은, 신체 내부에서 발동하는 척력에 가까웠다.


사람에게 기적을 불러오지만, 특성은 위험한 능력이다. 말 그대로 심장 내부에서 안전하게 처리된 폭탄이 터지는 격이었다.


각성 웨이브가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이 급사하는 궁극적인 원인도 여기에 있었다. 심장이 감당할 수 없는 양의 특성이 폭발하면 심장마비로 이어지는 거다.



“으랏차-!”


지환이 기합소리를 내며 오크를 가볍게 들어, 어깨 뒤로 깔끔하게 넘겼다. 엘린은 그가 뒤집어 쓴 외뿔 도깨비처럼 생긴 그림자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특성의 기적을 자신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끌어올 수 있는 자가 존재한다면?


지환의 능력이 특성의 일종이라면, 그는 다른 헌터들과 달리 특성을 외부에서 끌어와 사용하고 있는 격이다.


‘분명 4개였는데, 불과 며칠 사이에 6개라니.’


···이건 감히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능력이다. 레벨이든 상태창이든 그딴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만약 특성을 무한대로 확장하여 사용이 가능하다면, 현존하는 헌터 중에 지환의 적수는 없을 거다.



엘린은 평가판을 들어 지환의 이름 옆쪽에 커다란 별을 그렸다. 아마 지환의 능력은 헌터 측정기로 검출되지도 않겠지. 측정기는 헌터의 신체를 점검하여 결과를 내리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지환은 계속 2급 무특성일 거다. 타인의 착각 또한 헌터로서 상당한 메리트였다.


엘린의 입매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천지가 개벽할만한 능력을 소유한 헌터가 도축 길드원이었다. 거기다가 그가 가진 진정한 능력을 길드장인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었다.


지환은 조커였다. 판을 뒤흔들 정도가 아닌, 판을 무너뜨릴만한 조커.




“음, 아직도 평가 중이신가요?”

“아, 아뇨. 평가는 끝났어요. 두분 정말 대단하시던데요.”


엘린은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죠? 저희 사냥 방식이 험한 편이라 비위가 상하셨을까봐 걱정이네요.”

“정말 괜찮아요.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엘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지환과 레드가 그녀를 보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탑에 입장할 때까지만해도 냉기만 풀풀 날리던 그녀가, 갑자기 더없이 환하게 웃으며 친절하게 응대를 하자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하는 게 어떨까요? 식사시간도 다 됐는데.”

“아, 네. 편하신 대로 하시죠.”


지환은 잠시 머물만한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수풀지형이라, 너른 공터쯤은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은 뭐임?”

“파스타 먹을 생각인데.”


레드의 얼굴이 단박에 구겨졌다. 그에 반해 엘린은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지환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 평가자의 취향을 신경쓴 메뉴 선정이었다.


돈까스를 싫어하는 남자가 없는 것처럼, 파스타를 싫어하는 여자는 거의 없었으니까.


“그런데 파스타 하기에는 준비가 어렵지 않나요?”


엘린은 지환의 요리에 관심을 보였다. 그녀 또한 당연하게도 H매거진을 읽어봤다. 기자 양반이 미려한 문장으로 묘사한 요리들은 그녀의 상상력을 자극했었다.


“소스와 밑반찬은 미리 준비해온 터라, 면만 잘 끓이면 돼서 어렵지 않습니다.”


지환은 준비해온 버너 위에 물을 채운 냄비를 올리며 대답했다. 오늘 메뉴는 크림 파스타와 토마토 파스타. 예린과 혜빈이 좋아하는 메뉴라, 나름 자신이 있었다.


엘린은 요리를 준비하는 지환은 곁을 기웃거렸다. 그녀는 그의 전투 실력을 평가할 때보다, 훨씬 집중했다.


“요리 좋아하시나요?”

“아뇨, 먹는 걸 좋아하죠.”


엘린이 질색하며 대답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굿판을 벌이기 위해 제사 음식을 준비했었다. 덕분에 요리는 그럭저럭하는 편이었지만, 매달 전을 부치다보니 요리 자체는 지긋지긋했다.


“저는 요리를 좋아합니다.”

“그래요?”

“네, 딸들이 제가 한 음식을 좋아하거든요.”


딸바보라고 하던데, 진짜였네. 딸 이야기가 나오자 지환은 티없이 맑은 얼굴로 웃었다. 찰나간 엘린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가 돌아왔다.


지환의 미소에서 누군가 언뜻 비쳤다 사라졌다. 오랜만이었다. 돌아가신 아빠가 떠오른 건.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지환은 준비해둔 채반에 잘 익은 면을 담고, 얼음물을 부으며 채반을 털었다. 혼자 하기 어려운 작업이었는데도, 그는 능숙하게 면을 식혔다.


“크림이 좋으신가요? 토마토가 좋으신가요?”

“저는 토마토로 할게요.”


지환은 보온병에 담긴 토마토 소스를 탱글탱글한 파스타 면 위로 조심스럽게 부었다. 잘 익은 면 사이로 따뜻한 김이 나는 토마토 소스가 배어들었다.


“토마토 주셈···”


왕두를 닦고 있던 레드가 다가와 퉁명스럽게 말했다. 레드는 국밥충이었다. 생전 파스타랑은 인연이 거의 없었던 녀석이었다.


“레드, 날 믿고 크림에 한 번 도전해봐. 레드페퍼가루도 잔뜩 뿌려줄게.”


처음이었다. 지환의 요리를 앞에 두고 레드의 눈빛에 불신이 깃들었다. 그러나 레드를 보는 지환의 눈동자는 한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믿어 보겠삼.”


지환은 빙그레 웃으며 레드의 접시 위로 크림 소스를 부었다. 레드에게 새로운 세계를 영접하게 해주고 싶어서 정성을 다해 만든 특제 소스였다.


새하얀 크림 파스타 위로 레드페퍼가루를 잔뜩 뿌려줬다. 레드페퍼가루는 크림과 뒤섞이면 얼큰한 맛을 낸다. 처음 크림 파스타를 접하는 국밥충에게는 꼭 필요한 조치였다.



“정말··· 우와···”


토마토 파스타를 맛본 엘린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녀는 값비싼 파스타를 많이 먹어본 경험이 있는 미식가였다.


실제로 지환의 파스타가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따로 예약해서 먹는 파스타보다 맛있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지환의 파스타는 피자를 주문하면 리뷰이벤트로 딸려 오는 인스턴트 토마토 파스타에 가까웠다.


그런데 뭔가, 싸구려 파스타가 최고급 조리와 재료를 만났달까? 맛에서 고급스러움이 느껴졌다.


고급스러운 맛에 동화가 된 싸구려 파스타의 은근한 자극이, 한층 입맛을 돋구어서 포크를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지환씨, 만점이네요. 만점.”

“감사합니다.”


지환은 엘린이 건네는 빈 접시를 받아들며 수제로 만든 레모에이드를 건넸다. 살얼음까지 띠운 레몬에이드를 빨대로 쪽 빨아들인 엘린은 눈을 질끈 감고 가볍게 몸서리쳤다.


크림 파스타를 들고 갔던 레드도 쭈뼛거리며 다가와 깔끔해진 접시를 내밀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지환이 레드에게도 레몬에이드를 따라줬다.


“어땠어?”

“뭐··· 먹을만 했삼.”


레드가 머쓱한 투로 대답했다. 새로운 맛의 신세계를 느꼈다고 해서, 국밥충의 자존심을 쉬이 내던질 수는 없었다.


처음치고는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지환은 음흉한 미소를 띠며, 다음에는 어떤 음식으로 레드를 공략해볼까 궁리했다.



세 명은 잠시 레몬에이드를 마시며 앉아서 멍하니 쉬었다. 수풀지대의 날씨는 언제나 맑음이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오고, 주변에 초록이 흔들리는 소리가 시원한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지환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도시를 살며 느낄 수 없는 평안함과 안정감을 탑에서나 느끼다니.


가끔 천국이 무얼까라고 고민할 때, 아마도 이런 장소겠지라고 상상하던 그림이 지금과 닮아있었다.



“코롱~ 코롱~”


지환이 엘린을 보며 실소했다. 고개가 앞으로 푹 꺾인 그녀가 신기한 소리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레드는 아까 전부터 안대까지 착용한 채, 잔디가 깔려있는 맨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본격적으로 수면 중이셨다.


지환도 졸음이 쏟아졌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까지 잠들면 안 된다. 그는 너무나 편안하게 잠든 젊은이 둘을 번갈아 감상하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미리 정리를 해둬야, 둘이 깨어나면 바로 출발할 수 있겠지. 지환의 입새로 피식, 작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른 노릇이라는 건 참으로 쉽지가 않았다.



“잠시만 젊은 양반.”


지환은 깜짝 놀라, 엘린을 쳐다봤다. 분명히 엘린이 말한 것 같은데,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앉아봐.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았는데, 이 할미가 보답해야지.”


나이가 지긋한 노파의 목소리. 분명히 엘린쪽에게서 들려왔는데,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잠든 모습 그대로였다.


“걱정 말고 앉아봐. 저기 잠든 아해한테도 전할 말이 있었는데, 딱 보니 못 일어날 꼬락서니구만. 자네가 대신 전해줘야 쓰겄네.”

“누구십니까?”

“저놈에 할배들은 왜 저리 투닥거려. 잠시만 기둘려 봐.”


지환은 등뒤로 돋는 소름을 애써 무시했다. 대신 그는 허리춤에 달아둔 장갑을 꺼내 손에 끼었다.


“아유 늙은쟁이들이 고집만 쎄져가지고.”

“......”


지환은 침묵을 지켰다.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지만, 상당히 공포스러운 상황임은 확실했다.


“할배들이 말하기를, 저기 잠든 아해는 이제 속성을 호흡하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구만.”

“속성을 호흡한다고요?”

“그렇다고 하네. 할미도 자세한 건 잘 몰라. 전해야 하는 업이기에 전하는 거지.”


속성을 호흡하는 단계라. 무엇을 뜻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실히 머릿속에 기억해놨다.


“그리고 복수 따위 안 해도 괜찮다고 전해달라네.”

“복수요?”

“그래. 사랑한다고 잘 하고 있으니 걱정말라고 하시네.”


목소리를 통해, 말이 아닌 감정 자체가 전달되는 감각이었다. 누가 레드에게 전해달라는 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진심이라는 건 느낄 수 있었다.



순간 엘린이 고개를 훽 쳐들었다. 지환이 깜짝 놀라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자신을 뚫어져라 직시하는 엘린의 눈동자에는 검은자위가 사라진 상태였다.


“불쌍한 지고··· 악신의 장난감이로구만···”

“......”


흰자위만 드러난 눈알에 가느다란 핏줄이 덩굴처럼 얽혀있었다. 지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네 딸이 크게 아프구만.”

“아, 예··· 저희 둘째 딸이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

“아니, 아니. 둘째 말고 첫째 딸 말이야.”


일순 얼음물이라도 뒤집어 쓴듯이 두려움이 싹 가셨다. 심각한 표정이 된 지환은 엘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말 그대로지. 자네 첫째 딸이 무척이나 아플 거라고.”


슬슬 노기가 차올랐다. 멀쩡히 잘 있는 남에 딸에게 아플 거라는 악담을 퍼붓다니. 지환의 눈매가 사납게 치솟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이구만. 자네가 부동명왕의 기운을 타고 났으니.”

“이쯤하고 그만 하시죠. 더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내 엘린의 입꼬리가 말아올라갔다.


“이 할미가 걱정되서 하는 말이니. 당분간 첫째 딸을 혼자 두지 말게나.”

“.....”

“자네가 꼭 곁에 있어 주게. 반드시.”


노파가 말을 맺자마자, 지환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두통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을 직시하는 엘린의 주변으로 세상이 어지러이 돌았다.


“...혹여나 시간나면 우리 손녀도 신경 좀 써줘. 참한 아이라네. 홀아비라고 무시하거나, 나쁜 계모가 되진 않을 아이야···”


지환은 점차 멀어지는 노파의 목소리를 들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머리가 깨질듯한 격통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만 같은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있었다. 먹먹해진 귓가로 소름끼치는 이명만이 웅웅거리며 울렸다.


설마 괴물이었나. 이건 환술에 빠진 건가. 지환이 눈을 뜨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눈꺼풀은 물론 전신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옴짝달싹 못하게 된 그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서서히 잠식되어 갔다.



*



아빠, 아빠··· 아빠아―!


지환이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자신의 어깨를 흔들고 있는 예린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아빠, 괜찮아? 요즘 많이 피곤한 거야?”


예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지환은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집이었다. 식탁 위에는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고,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 미안해. 예린아. 아빠가 좀 피곤했나보다. 이제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빠, 무리하지 말고. 혹시라도 많이 피곤하면 병원에 꼭 가봐. 아니면 연차쓰고 하루 이틀 정도 집에서 쉬던가.”

“아니야. 괜찮아. 얼른 밥먹자 아카데미 늦겠다.”


예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기 자리에 앉았다. 어금니를 한 차례 꽉 깨문 지환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물을 한잔 마셨다.


“깜짝 놀래라. 밥먹다가 그렇게 조는 사람은 처음봤네. 난 아빠가 장난치는 줄 알았어.”

“미안해. 아빠가 어젯밤에 잠을 좀 설쳤나봐.”

“...그래. 아무튼 그럼 어떻게 할 거야?”

“응?”


예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환은 직전에 그녀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민망해진 그는 입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부모참관수업 말이야.”

“부모참관수업?”

“응, 아카데미 부모참관수업 참여할 거냐고.”


일순 지환의 뇌리에 노파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첫째 딸이 크게 아플 지도 모르니, 절대로 혼자 두지 말라는 말.


“무조건 갈게! 아빠 꼭 참석하고 싶어!”


갑자기 왜 저러지? 아빠의 갑작스러운 열의에, 약간 부담감을 느낀 예린은 고개를 뜨뜻미지근하게 주억거렸다.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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