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급 홀아비의 탑공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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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찬TO
작품등록일 :
2024.08.04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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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3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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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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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기일

DUMMY

철사를 열십자로 얼기설기 꼬아 만든 불판 아래에는 구멍이 송송 뚫린 번개탄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지환은 갈색 양념으로 잘 숙성된 돼지 갈비를 불판 위에 펼쳐 올렸다.


치지지직


회색 연기가 타올랐다. 연탄불의 매캐한 냄새와 달짝지근한 양념 타는 냄새가 혼재되어 가게 안으로 은은하게 퍼졌다.


지환은 유리문으로 푸르름이 한창인 밖을 바라봤다. 막 떠오른 해는 아직 지평선에 가까웠다.


역시 돼지 갈비 먹기에는 너무 화창한 봄날 아침이었다.



“이야, 지환이 너! 옛날보다 낭만이 늘었어? 니가 낮술을 다 권하고?”

“그런게 아니라, 제가 저녁에는 선약이 있어서 그렇다니까요.”


홍백기가 초록 술병을 들어 지환의 소주잔을 채웠다.


솥뚜껑만한 손에 붙들린 술병이 꼭 아동용처럼 보였다.


병을 기울이는 홍사장의 전완근이 굵은 덩굴이 얽힌 것처럼 꿈틀댔다.


잔 위로 볼록한 표면장력을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는 소주.


저런 손과 팔뚝으로 어떻게 이렇게까지 정교하게 술을 따를 수 있지?


예나 지금이나 홍사장 술 채우는 기술 하나는 예술이었다.



“사장님은 여전히 자비가 없으시군요.”

“무슨 섭섭한 소리! 정이 넘치는 거지!”


둘은 서로 눈짓만 보내고, 짠을 하지 않은 채 각자 잔을 비웠다.


“캬하! 술맛 좋다! 올만이다, 진짜. 그치?”

“그러게요. 여전히 건강하고 활력 넘쳐 보이셔서 다행이네요.”

“됐어, 띄워주지마! 너는 옛날부터 그랬어! 괜히 그래가지고 사람 부추겨놓고 혼자 쏙 빠지고! 니 땜에 임마, 내가 다 늙어서 오토바이 미쳐서 개고생한 걸 생각하면!”


지환은 군소리를 늘어놓는 홍백기를 멈추기 위해 술병을 들었다. 코웃음을 친 홍사장이 잔을 내밀었다.


“그래서 딸들은 잘 크고?”

“네. 너무나 이쁘고 착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여전히 팔불출이구만. 이제 혜빈이가 고1, 예린이가 고3 아닌가?”

“네. 혜빈이는 예술고에 입학했고, 예린이는 아카데미 졸업반이에요.”

“아따마! 잘 키웠네! 딸내미들 잘 키웠어!”


또다시 부푸는 잔 위의 표면장력. 지환은 술을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전부 받았다.


“사장님은요? 무탈하셨습니까?”

“나야 뭐. 그럭저럭 잘 지냈지.”


웃고 있는 홍백기의 얼굴에 옅은 그늘이 졌다. 그는 단숨에 술을 털어넣었다.

“캬하, 탑이 생기고 얼마 안 되서 전처가 암으로 죽어버렸어.”

“애들은요?”

“둘다 민짜인데. 당연히 내가 다시 데리고 왔지.”


홍백기 사장은 젊었을 적 혈기왕성한 청춘을 주체하지 못했다.


참다참다 못참은 와이프가 결국 이혼을 선언했고, 그후로 홍백기 사장은 아이들을 만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아직도 애들은 날 싫어해. 푸핫, 하긴 나라도 싫어하겠다! 지 애미 홧병으로 죽인 살인마 새끼인데.”

“뭘 또 그렇게 까지 비약합니까··· 이혼하고 십년은 더 지난 후에, 암이 발병한 걸 가지고···”

“아니지, 임마! 십년이고 백년이고, 마누라가 암 걸린 건 내탓이지! 사람은 지가 저지른 죄를 잊어서는 안 돼! 그딴 파렴치한 새끼는 사람 새끼가 아니야! 개새끼지!”


또 한 잔. 지환은 술기운이 담긴 뜨뜻한 날숨을 길게 내쉬었다.


“우리 애들은 성인되자마자 헌터가 됐어. 거지발싸개 같은 아빠 아래서도 훌륭하게 자라줬지. 나름 헌터로 이름도 날리고 잘사나 보더라고.”

“어쨌든 잘 됐으면, 사장님 덕도 있는 거죠. 그나저나 사장님은 뭐하고 지내세요?”

“나? 송충이가 솔잎이나 뜯을 줄 알지. 다른 거 뭐 하겠? 지금도 출판사랑 신문사 조그맣게 하면서 입에 풀칠하고 있지.”

“헌터까지 겸엄으로 하면서요?”

“헌터는 최근에 시작했어. 자료 수집하고, 이래저래 기사거리도 찾을 겸해서. 늙으막에 취미 삼아 운동처럼 시작한 거지.”


순간 홍사장이 눈을 반짝거렸다. 지환은 그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움찔했다.


“왜, 왜요. 갑자기 무섭게 왜 그렇게 쳐다봐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너 진짜 2급에 무특성 헌터냐?”

“그런데요.”

“근데 10층 보스를 도전한다고? 레드인지 뭔지 걔한테 버스 타는 거야?”


버스라. 헌터들은 다른 헌터에게 얹혀서 탑을 등반하는 걸 버스라고 불렀다.


지환은 곰곰이 생각을 정리해봤다. 솔직히 아닌 것도 아니지. 버스 타는 게 맞지.


리자드 퀸을 압도하던 레드를 떠올려보면, 그는 적어도 20층 헌터 수준이었다.


그에 비해 자신은 간신히 10층 턱걸이 헌터?


레드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다지만, 둘이 같이 다닌다면 자신이 버스 타는 거 맞다.


“네. 버스 타는 거죠.”

“이야, 이제 겸손도 떨줄 아는 구만. 니가 언제부터 남의 등에 업혀서 다니는 성격이냐? 뒤지면 뒤졌지.”


지환은 피식 웃으며 술잔을 털어넣었다.


실없이 웃기는··· 짜슥이. 홍사장도 입꼬리를 올린 채 술을 마셨다.


“버스고 아니고 상관없이. 2등급 무특성 헌터, 속된 말로 폐급이 탑의 11층을 목표로 도전하는 건 상당히 이례적이니까.”


홍사장의 까만 송충이 같은 눈썹이 씰룩거렸다. 지환은 고기를 뒤집는 척하며 그의 부담스러운 눈길을 피했다.


분명 저 눈은 예전에 베스트셀러 작가를 납치해오라며 닦달하기 직전의 눈빛이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어떤 축복도 없이 쌩몸뚱아리만 가지고 무모하게 탑을 등반하는 거니까. 대단한거지, 폐급의 11층 도전.”

“별로 대단한 일 아니에요. 저도 먹고 살려고 하는 거죠. 실패할 수도 있구요.”

“실패하건 성공하건 상관없지. 사람들은 그저 신선한 도전과 흥미로운 과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꺼이 돈을 지불할 테니까.”

“......”


동물원 원숭이 비슷한 거 아닌가? 여전히 박한 2급 무특성 헌터의 현실이었다.


“전 관심없어요. 돈이야 헌터 일로 벌면 되요.”

“돈보다 더 좋은 게 생길텐데?”

“뭔데요?”

“인기와 명망이지. 그건 돈 주고도 못 구하는 것들이야.”

“제 꿈은요. 아무도 날 모르는데, 돈이 많은 사람이네요.”

“그으래? 너 몇 층까지 올라가는게 목표냐?”


산도적처럼 생긴 얼굴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으니, 상당히 살벌했다.


“그래도 21층 이상은 가야죠.”

“21층이라. 딱 15층이 니 마지노선. 너는 그 이상 탑에 오를 수 없을 ?”

“왜요?”

“왜긴 왜야? 아무도 너랑 파티를 안 맺을 테니까.”


순간 지환은 말문이 막혔다. 예전부터 홍사장님은 팩트로 상대방 기를 고 설득하는 게 특기였다.


“아무리 내가 널 좋아하고 신뢰한다지만, 탑의 16층을 넘어가면 솔직히 나라도 너랑 파티하기는 부담스럽지.”


15층까지는 튜토리얼이랄까? 16층부터는 수준 높은 엘리트가 등장하며, 심지어 지형 트랩까지 생성되기 때문에 난이도가 급상승한다.


16층에서 20층. 초보 헌터들의 사망률이 가장 높은 구간이었다.


입장을 바꿔 보고 생각해보면, 지환도 16층 공략을 다른 2급 무특성 헌터와 함께 하기는 부담될 것 같았다.


“그런 네가 어떻게 팀을 구할 거냐고? 방법이 있지. 인기랑 명망이 있으면 자연히 해결된다, 이 말씀이야!”


홍사장님이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지환의 눈 앞에 턱 내밀었다.


‘H헌터 매거진.’ 얇은 잡지였다. 언뜻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유명 헌터들의 연애 가쉽은 물론 일부 여성 헌터나 길드원들이 그라비아 모델처럼 등장하기는 남성향 잡지책.


“들어본 적 있지? H헌터 매거진. 출판 초기에는 도색잡지네, 여성편향적인 유해물이네 라며 우리 잡지를 깔아뭉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완전 다르지!”

“설마 H가 홍백기의 홍이었어요?”

“크하하, 역시 넌 내 스타일이야! 단번에 알아 맞췄쓰!”


지환은 잡지를 스르륵 넘기며 훑어봤다. 가끔 수영복을 입은 여자나 남자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유명 헌터의 인터뷰나 탑 층 공략 및 생존 물품 소개 등··· 헌터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내용에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다.


“헌터 잡지 간행물 중에서는 단연 압도적 1등이야. 헌터 매체 영향력 부분에서도 올해 3위를 차지했지.”


당연한 말이지만 탑에 진입하면 인터넷은 물론, 방송 송수신도 불가능했다.


“며칠씩 이어지는 고단한 탑 공략 중. 대기 시간에 달리 무슨 유흥거리가 있겠나? 미친 놈이 아닌 이상, 탑에서 술은 안 마실테니, 진짜 할 게 없다고.”


잡지를 다시 건네받은 홍사장님이 탁탁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으로 잡지책을 두드렸다.


“고럴 때, 이게 헌터들의 지루함을 달래주는 거지.”


역시 홍사장님의 사업적 안목은 탁월했다. 이런 세기말적 현상에 잡지를 끼워 팔다니. 예전부터 느꼈지만 참 대단한 양반이긴 했다.


“여하튼 이 잡지에 2급 무특성인 니가 헌터 생활 하는 걸 체험기나 인터뷰 형식으로 연재하는 거야. 일명 폐급 홀아비의 탑공략법.”

“그러면요?”

“잘 풀리면 넌 인기 헌터가 될 거고. 그럼 너랑 파티 한번 해보겠다는 헌터들도 자연스레 생기지 않을까?”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 보는 게 탐탁지는 않았지만, 파티 매칭은 지환도 계속 고민하던 문제이긴 했다.


홍사장 말대로 정말 겨우 이런 잡지에 실리는 정도로 문제가 해결될까 싶긴 했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고민 좀 해볼게요.”

“그래, 그래. 당연히 고민이 필요하지! 그리고 실명이나 얼굴 드러나는게 부담스럽다면 따로 방법도 있고 하니까. 긍정적으로 검토해 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지환이 술잔을 들었다. 헤벌쭉 웃은 홍사장이 술잔을 비웠다.


“됐다! 이제 지루한 이야기는 그만! 진짜 술자리다운 이야기만 하자고!”


지환과 홍사장은 서로를 잊고 산 세월 동안 겪었던 힘든 일, 행복한 일, 슬픈 일, 기쁜 일, 불행한 일 등을 잔뜩 취한 채 웃으며 주절주절 늘어놨다.


그들의 세상은 하루 아침에 급변했다. 격동의 시간을 살아온 만큼 술자리는 지루하지 않게 오래 이어졌다.




“사장님, 이제 그만하고 들어가요.”

“에이쒸··· 너만 또 멀쩡하네이··· 진짜 괴물이란 말이야···”


혀가 꼬부라진 홍사장이 원망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환은 냉수를 한 잔 따라서 홍사장에게 건네줬다.


냉수를 벌컥벌컥 마신 홍사장이 흔들거리며 앉아있었다. 지환은 테이블에 올려진 빈 술병을 아래로 내려놨다.


지환의 발치로 초록색 빈병이 오와열을 맞춰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적어도 한짝은 넘긴 병의 개수. 출판사에서 일할 때부터 홍사장님의 술 상대가 가능한 건 오로지 지환 뿐이었다.


“아따마··· 벌써 노을이 지는구마이···”


홍사장이 비틀거리는 손가락으로 문밖을 가리켰다. 어느덧 거리는 주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만 가요. 홍사장님. 오늘만 날인가요. 다음에 또 만나서 마셔요.”

“어디일··· 자아꾸 가려고···! 못간다 못가! 나를 두고는 못가안다아~ 이히~ 사라암아아~”


홍사장이 민요 가락을 읊으면 완전 끝난거다. 지환은 아까 전부터 문 밖에 대기하며 자신들을 흘끗거리던 검은색 양복남들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보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별 말씀을.”


홍사장을 좌우로 보필하는 검은 정장들이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야 임마드라아··· 싸내 놈 둘이서 나 하나를 감당못혀? 하여튼 허약해가지고.. 니그들 눈 앞에 있는 싸람은.. 맨날 혼자서 취한 나를 업어 댕기고 다녀써어···”


홍사장은 검은 정장들에게 꿍얼거리며 술주정을 계속 늘어놨다.


지환은 그런 홍사장 대신 미안하다고 고생 많으시다고 사과하며, 검은 정장들 주머니에 5만원씩 돈을 찔러넣었다.


“이제 진짜 들어가요. 사장님. 늦었네, 늦었어.”

“야 임마.. 오늘 계산은 무조건 내가 산다.. 절대~ 저얼~대로! 네가 내면 안 돼! 오늘 내가 안 사면.. 나 너 다시는 안 볼 거다..”


홍사장이 자켓주머니에서 통통한 지갑을 통째로 꺼내 테이블 위로 던졌다. 그를 보필하던 검은 정장 하나가 얼른 지갑을 주워서 카드를 꺼냈다.


“아니에요. 제가 내면 됩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홍사장님이 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오시기 전부터 신신당부를 하신터라.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검은 정장이 카드를 들고 서둘러 계산대로 향했다. 지환은 별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알겠어요. 알겠어. 오늘은 사장님이 저한테 쏘신거예요. 술 한잔 거하게 잘 얻어먹었습니다.”


잠시 의자에 앉은 홍사장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 대신 휘유우 하는 이상한 숨소리를 길게 뱉었다. 지환은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반대편에 앉았다.


“와따마··· 오랜만에 니랑 이리 취하니까.. 제수씨가 끓여줬던 김치콩나물국이 와이리 생각나냐.. 그게 참 기똥차게 해장이 잘 됐단 말야··· 내가 세상 비싼 음식을 그리 많이 먹어봤는데도.. 이상하지··· 술만 마시면 그게 자꾸 기억에 남더라.. 너희 제수씨의 김치 콩나물국··· 정말 엄청 개운하이 맛있었다고..”

“그러게요. 제 와이프가 김치콩나물국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끓여줬었죠.”


지환의 대답에 홍사장은 힘겹게 고개를 끌어올렸다. 그는 불콰해진 볼따구를 끌어올리며, 안 어울리게 따뜻해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가서 제수씨한테 내 안부도 전해줘라··· 오랜만에···”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홍사장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오늘이 현아의 기일이라는 것을.




홍사장이 검은 세단에 실려 솥두껑 같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사라졌다.


술에 취해 홀로 남은 지환은, 연탄 불고기 가게 앞에 멍하니 서서 잠깐 방황하다가, 이윽고 노을 진 거리를 밟으며 조용히 걸어나갔다.


아내의 유골함이 보관된 성당을 향해서.



*



“여보 나왔어. 미안해, 이번에도 내가 꼴찌네.”


지환은 아내의 유골함 옆에 놓인 싱싱한 흰색 안개꽃에 자신이 가져온 흰색 안개꽃을 조심스레 하나로 합쳤다.


“오늘 말이지. 정말 오랜만에 우연찮게 홍사장님을 만났어. 홍사장님 알지? 가끔 만취해서 우리집에 와서 자고 가곤 했던 근육민폐남.”


아내의 유골함 안쪽에는 수 장의 가족 사진이 보관되어 있었다. 지환은 물끄러미 사진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분 덕분에 살았지. 여보 죽고나서 나 일년동안은 폐인이었잖아. 매일 술만 마시고.”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시간이었다.


“그 때 홍사장님이 챙겨주신 퇴직금이랑 퇴직 연금 아니었으면··· 애들까지 굶겼을 거야.”


그야말로 파격적인 처사였다. 당시에 세상은 현아의 사망보험금조차 지급이 밀리던, 혼란스럽게 짝이 없던 시기였다.


그런데 작은 중견기업에서 일개 직원의 퇴직금까지 챙겨준다?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나 다름없었다.


하수상한 시절, 홍사장은 개소리를 힘차게 짖었다. 기업의 지분을 팔아서 부득이하게 퇴사하거나 힘든 일을 겪은 직원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심지어 오토바이까지 훔쳐가 부셔먹었는데도. 지환은 아내와 사별했다는 이유로 퇴직금을 두 배나 더 받았다. 거기다가 퇴직 연금까지 전부다 챙겨줬다.


홍사장이 준 돈 덕분에 상실의 시기를 버텨냈다. 비록 술과 훈련에 취해 살았지만, 아이들을 굶기지 않을 수 있었고.


조금씩이나마 정신을 차릴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홍사장은 지환에게 있어서 은인 중 한 사람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늘 당신 기일이라고. 술도 사주셨다니까. 여전하셔, 사장님은.”


정신을 차렸을 즈음에는, 홍사장의 회사는 망해있었다.


틈이 날 때마다 사라진 홍사장의 안부를 수소문해봤지만, 도통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오랜만에 뵀는 데도 잘 지내고 계시더라. 아, 그리고 사모님은 암으로 돌아가셨다네. 혹시 여보 그쪽에서 만날 수 있으면 대접 잘 해드려. 홍사장님이 사모님한테 엄청 미안해 하시더라···”


“혜빈이는 이제 곧 깨어날 거야. 교수님이 이번 주라고 확하셨어...”


“홍사장님은 예전보다 더 부자된 것 같더라. 아무튼 재주꾼이셔...”


“예린이도 아카데미 잘 다니고 있어. 걔가 자기 앞가림은 똑부러지게 하는 아이긴 하지만. 왠지 혜빈이보다 항상 더 신경이 쓰이더라...”


“아참, 나 헌터야. 다시 헌터가 됐어. 아마 당신이 살아있었다면 뜯어 말렸겠지. 그래도 나름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 벌써 꽤 친해진 동료도 한 명 생겼고...”


“저번 주 아침에 말이야. 예린이한테 고등어 구이를 해주는데, 오븐이 말썽인 거야. 그래서 내가···”



지환은 한참동안 텅빈 추모관에서 홀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댔다. 당연하게도 아무도 그에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윽고 조용해진 그가 손을 뻗어 유골함을 막고 있는 투명 유리 위를, 마치 아내의 얼굴을 만지듯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매번 내 이야기만 하네. 아주 가끔이라도 좋으니, 당신 이야기도 듣고 싶다.”


기도하듯 눈을 감은 지환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소리가 들렸다. 지환은 침묵의 소리 속에서 한참동안 아내의 목소리를 찾아 귀를 기울였다.




“사랑해.”


지환은 유골함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5년째, 그는 기일마다 아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여겼다.


밤이 늦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일 맑은 정신으로 예린이 아침을 차려줘야 하니까.


몇 안 되는 아내의 유언 중 하나였다. 애들 아침밥은 잘 먹여달라는 거.


“계속 있으면 혼나겠지? 이만 갈게.”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남긴 그가 성당 밖으로 나왔다.



사위가 어둑했다.


혼자서 비척거리며 거리를 걸어갔다.


아침부터 마셨던 술은 어느샌가 전부다 깨버렸다.



취기로 막아내던 슬픔이, 댐이 무너져 쏟아지는 물처럼 온몸으로 밀려왔다.


고개 숙인 지환은 어린 아이처럼 훌쩍거렸다.



그는 외톨이였다.


모든 사별한 남편들과 마찬가지로, 외톨이였다.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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