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급 홀아비의 탑공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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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찬TO
작품등록일 :
2024.08.04 22:24
최근연재일 :
2024.09.03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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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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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13화. 멘토와 멘티

DUMMY

“예린아, 여기야. 여기!”


하교길, 학교 뒤편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예린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이랑 차가 다르네요.”

“이래봬도 언니가 40층 헌터야. 소위 말하는 갑부라고.”


저번에는 스포티한 노란 외제차였는데. 오늘은 대형SUV 차량이었다.


“엄청 번쩍거리네요.”

“SUV는 유광에 검정이 제맛이지.”


예린은 제인의 차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옆자리에 탑승했다. 오늘은 물어볼 말이 있었으니까.


“저기···”

“안전벨트부터 매야지. 그리고 출발하면서 이야기합시다. 아니면 퇴근시간 겹치니까.”


예린은 잠자코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제인은 라디오를 크게 틀고 엑셀을 밟았다.


육중한 배기음과 함께 거대한 SUV가 도로를 질주했다.


창밖으로 주변 차들이 눈치를 보며 길을 비키는 게 보였다.


“돈이 좋네요.”

“탑이라는 재앙이 발생했는데도 소멸하지 않는 걸 보면, 돈이 참 대단한 요물이긴 해.”


라디오에서는 신나는 아이돌풍 노래가 흘러나왔다. 예린은 티비를 거의 시청하지 않기에 누구 노래인지 몰랐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대답해줄래요?”

“질문이라. 사적으로 물어보는 걸 보니 사적인 질문이겠네?”


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이 시원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물어봐. 대답을 못 들어도 상관없다면.”

“우리 아빠 지금 무슨 일하고 있는 건지 알죠?”


예린은 잠깐의 고민도 없이 질문을 던졌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 사이, 차량이 터널로 진입했다.


흔들리는 노란 불빛이 제인과 예린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스쳐지나갔다.


“넌 지환씨 딸이니까. 좋아, 알려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이요?”


차량이 터널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노을이 주황빛으로 본네트를 물들였다.


“오늘 날 끝까지 쫓아오는데 성공하면 답해줄게.”


제인이 어딘지 헛헛한 미소를 지으며 정면을 주시했다.


그녀의 입체적인 얼굴 위를 주황빛이 휘청거리며 타고 놀았다.


예린은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고, 한낮 여름 태양이 뜨겁게 달궈둔 아스팔트가 노을에 식어가는 걸 알았다.


그녀는 감각 특성의 소유자였다. 굳이 제인의 대답을 듣지 않아도 파악할 수 있었다.


짐작대로 아빠는 헌터가 되었나 보다.


*


“알겠지? 오늘 단번에 11층까지 돌파할 거야.”


제인은 예린에게 팔찌 하나를 건네줬다. 자신의 손목에 있는 팔찌와 동일한 팔찌.


“이게 네가 미성년자임에도 탑에 올라갈 수 있는 이유지.”


멘토와 멘티. 뛰어난 아카데미 학생을 선별하여, 급이 높은 헌터가 멘토로서 탑 견학을 가능케 해주는 제도.


“지금까지 네 아카데미 성적과 활동을 통해서 널 내 멘티로 삼은 거야. 물론 뒤에서 내가 힘을 좀 더 쓰긴 했지만.”


아카데미 내에 멘토, 멘티 제도는 초고위층 자제 중에서도, 한정된 엘리트들에게만 허용될 만큼 좁은 문이었다.


“우리가 탑에 진입하는 건, 형편 좋은 친구들처럼 관광 겸해서 즐거운 경험이나 쌓으려고 올라가는 게 아니야.”

“알아요.”


둘은 딱딱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눴다. 검은 탑 앞, 농담이나 시시덕거릴 장소는 아니었다.


“이전에도 약속했듯이 네 몫은 3분에 1이야. 멘토와 멘티가 획득한 전리품은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협회에서 정확한 비율로 분배해서 지급하게 되어 있어.”


예린은 팔찌를 손목에 착용했다. 회색 바탕에 황금색 물결이 새겨진, 촌스러운 팔찌였다.


마치 한 쪽만 끊어 놓은 수갑과 모양이 비슷했다. 예린의 콧잔등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준비됐지? 잘 따라와야 해.”

“네, 걱정마세요.”


예린은 천천히 심호흡하며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탑에 첫 입성이다.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래도 자신은 아카데미에서 탑과 헌터에 대해 몇 년동안 수학한 1급 각성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긴장되는데···


아빠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2급 무특성 헌터가 탑에 오르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아빠가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거다.


아빠를 떠올릴 수록,


예린의 요동치던 심장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빠의 심정을 이해한다. 애초에 자신과 혜빈이 관련됐다면 목숨이라도 가벼히 내놓을 사람이었으니까.


가족들 몰래 헌터 생활을 하며 집에서는 광부인 척 행세를 했다는 사소한 이유로, 아빠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예린은 심장 어림에 작은 가시라도 박힌듯, 가슴 안쪽이 따끔하고 화끈거렸다.


마음 속에서 갈피가 없는 짜증이 치민다. 짜증의 대상은 혜빈도 아니고,아빠도 아니었다.


검은탑, 그리고 무력한 자신.



예린이 오감을 개문했다. 주변에 정보를 이루는 입자들이 그녀의 감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녀를 응시하는 제인의 노란 눈동자가, 어둑해지는 사위를 뚫고 이채를 발했다.


제인이 악수하듯 손을 내밀었다. 예린이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가자.”


각자의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가 미미하게 진동했다. 이윽고 두 여자의 신형이 자취를 감췄다.


검고 푸른 저녁에 뒤덮이는 검은탑. 그곳에서 자라난 짙은 그림자가 한층 더 길게 늘어났다.


*


“저런 개같은 년이···”


검은 탑 중심으로 광활히 펼쳐진 폐허. 폐허의 외곽에서 마정석으로 가동되는 최신식 망원경을 쥐고 있던 여성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드득, 그녀의 입안에서 사탕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렸다.


“감히 예린이의 첫 탑 동정을 뺏어가?”


포복자세로 엎드려 있는 여성의 등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녀의 손아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망원경이 콰직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절대··· 절대 용서 못해.”


어떤 전조도 없이 손아귀가 새빨간 화마에 휩싸였다.


삽시간에 망원경이 새까맣게 타버렸다. 그녀는 망원경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흥, 콧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여성이 먼지가 붙은 교복 앞섶을 탁탁 털었다.


“두고 보자. 노랑 눈깔.”


무염길드의 막내 딸, 염화소녀 한서윤. 그녀의 눈에 담긴 진득한 불꽃이 지글지글 타올랐다.



*



“커억, 헉. 헉.”


신선한 공기. 후덥지근하고 끈적한 여름 밤공기였지만 예린에게는 시원하고 달게만 느껴졌다.


“후아, 사우나하고 나온 것 같네.”


제인은 땀에 젖은 노란 머리카락을 입술에 문 머리끈으로 동여맸다.


“운이 별로였어. 화산지대라니.”

“언니, 콜록. 때문에 그런 거, 콜록. 아니에요?”


예린이 잔기침을 하며 퉁명스레 말했다. 아무래도 제인의 레벨이 높아서 탑의 지형 중 최악이라는 화산지대에 걸렸을 가능성이 컸다.


“에이, 그거 다 미신이야. 탑은 랜덤이야. 오로지 랜덤.”

“이 옷 때문에 더 힘들었어요. 땀 배출도 너무 안 되고, 덥고 답답하고.”

“너 그거 아니면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걸?”


예린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입고 있는 검은색 전신 타이즈를 둘러봤다. 탑에 입장하자마자 제인이 반강제로 입힌 보호장비였다.


“죽지는 않았을 걸요. 다치기는 했겠지만.”

“너 다치면 나중에 우리 지환씨가 날 얼마나 원망하겠어.”

“진짜 우리 지환씨라고 하지 좀 말라니까.”


정색한 예린을 향해 제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실수.’라며 눈웃음을 쳤다.



정말 저 언니는 멍청한 거야. 순박한 거야.


함께 개고생을 하며 탑을 오르다 보니, 자연스레 제인을 언니라고 부르게 됐다.


임프의 날카로운 손톱이 코앞을 스치고, 불덩이들이 발치로 떨어지는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보다 연장자인 여성을 언니 말고 딱히 부를 만한 마땅한 호칭이 없었다.



분명히 나쁜 사람은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우리 지환씨’를 허용해 줄 수는 없었다.


“너 그래도 헌터로서 자질이 상당하더라.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좋았어.”


제인이 예린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예린은 목까지 채워져 있던 광택 타이즈의 지퍼를 가슴 어림까지 주욱 내렸다.


“타이즈랑 채찍 잘 썼어요.”

“어차피 나랑은 잘 안 맞더라고. 앞으로 네가 자주 쓸 거니까. 걍 맡아둬.”


제인은 예린에게 무기로 채찍을 골라줬다. 특성이 감각에 특화되어 있다면 유연한 무기가 유리할 거라며.


예린은 아카데미에서 다양한 무기를 써보긴 했지만, 채찍은 처음이었다.


왜 진작 써보지 않았을까. 채찍은 마치 예린에게 달린 꼬리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괴물들을 찢어발겼다.


“이제 가자. 언니 집에 가서 씻고 다시 나오자. 저녁 사줄테니 먹고 가. 당연히 집까지는 태워줄게.”

“아직 버스 다녀요.”


제인은 예린의 매몰찬 대답에도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제인은 예린의 땀에 젖은 머리를 부둥켜 안았다.


풍만한 가슴이 예린의 얼굴을 마구 비볐다.


“에이, 그러지 말고. 언니가 데려다 줄테니까~ 먹고 가자. 응? 너가 궁금해하던 비밀도 전부 밝힐게. 언니 외롭단 말이야~”

“우욱! 숨 막혀요!”


제인의 가슴에 눌린 예린의 머리통이 부표 마냥 흔들렸다.


제인의 출렁 가슴 공격은 크기만큼이나 지독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알겠어요! 알겠어!”

“좋아, 좋아.”


예린에게서 떨어진 제인이 콧노래를 부르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출발할 때 차 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아이돌 노래였다.


예린은 등록증을 켜고 밝게 빛나는 화면을 내려봤다.


벌써 밤 11시를 지나고 있었다. 이미 귀가 시간치고는 너무 늦어버렸다.



“다 챙겼어. 가자.”


제인과 예린은 구릉처럼 솟은 폐허의 밑으로 터덜터덜 내려갔다.


“줄까?”


제인이 마나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며 넌지시 권했다. 예린은 사양하지 않았다.


예린이 마나 담배를 입새로 물었다. 연초 끝에 불을 붙이자 뭉게구름이 피어올랐다. 마나 담배의 레몬 향이 주변으로 은은하게 번졌다.


사실 몇 차례, 크게 다칠 뻔했다. 제인의 말처럼 채찍과 괴상한 타이즈가 아니었다면, 팔 하나 정도는 잃었을 지도 몰랐다.


탑의 층을 오르며 점차 늘어나는 위기의 순간들을 맞닥뜨릴수록, 예린은 자신의 아빠가 헌터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 2등급 무특성 각성자인 우리 아빠가 헌터라고? 괴물들이 즐비한 탑에서 사냥을 하고 다닌다고?


도대체 몇 층에 다니시는 걸까? 2층? 3층? 설마··· 4층?



딱, 딱


예린은 손가락 튕기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제인이 그녀를 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정신차려, 발 꼬이겠다.”

“아, 죄송해요.”


제인은 예린의 앞으로 나서서 걸었다. 그녀는 등록증에 네비게이션을 확인하면서 길을 찾았다.



“이제야 보이네.”


둘은 멀리서 반짝이는 검은색 SUV를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차에 도착한 예린이 잠시 뜸을 드리다가 등록증을 꺼내 문자를 적었다.



-아빠 집에 도착했어. 씻고 자려고.

-응. 딸. 고생했어. 푹 쉬고 내일 봐.



‘아빠도 사소한 비밀 하나 정도는 있으니까. 나도 가끔은 괜찮겠지.’


서로가 서로를 걱정해서 하는 착한 거짓말이다.


문자를 보내느라 잠시 잊었던 여름 밤이 치밀었다. 들숨이 후덥지근하고 끈적했다.


예린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탑승했다.


열기에 상기됐던 뺨이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빠르게 식었다.


그녀는 밥을 먹으며 제인에게 어떤 질문을 해야할 지 머릿속으로 차분히 정리했다.



부르릉


차량에 전조등이 켜지자 전방 10미터까지는 대낮처럼 환하게 보였다.


검은색 SUV는 울퉁불퉁한 폐허를 아무렇지도 않게 달렸다.


운전 중인 제인의 얼굴엔 옅은 피로감이 드리웠고, 창밖을 바라보는 예린의 얼굴엔 헛헛함이 머물렀다.


차에 탄 이후로 둘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나른함과 적막함만이 주변의 어둠 사이로 뒤섞였다.


*


“정말 괜찮겠어? 예린이한테 안 알려줘도?”

“언니 지금 집에 들어갔다며. 이미 11시도 넘었는 걸. 너무 늦었어. 내일 보면 되지.”

“그래? 그러자.”


지환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거의 세 달만에 혜빈과 나누는 대화가 꿈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혜빈이의 부탁이라면 별도 달도 따다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차후에 연락하지 않은 예린이의 삐짐을 감당해야겠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괜찮았다.


혜빈이 젓가락을 들다가 놓쳤다. 세 달만에 움직이는 거라 아직 몸이 정상은 아니었다.


“이리줘. 아빠가 해줄게.”

“아냐, 괜찮아.”


지환은 웃으며 혜빈이 떨어뜨린 젓가락을 주워 만두를 집었다.


“자, 아~ 해.”

“아이참, 내가 무슨 애기도 아니고.”

“얼른 아~”


지환이 직접 준 만두를 혜빈이 한입에 넣었다. 그녀는 살짝 부끄러웠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환은 만두를 먹는 그녀를 보며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아빠.”

“응?”

“간장 안 찍었지?”


지환이 당황하며 나무젓가락에 간장을 콕콕 찍어 내밀었다.


그 모습에 혜빈은 손으로 만두가 가득한 입을 가린채 쿡쿡대며 웃었다.


깨어나서 참 다행이야.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똑같은 문장을 떠올렸다.




“아빠, 이제 그만 자.”

“혜빈이는?”

“아빠 자면 나도 자야지.”

“혜빈이가 자야 아빠도 자지.”


말똥말똥한 눈망울과 광대까지 내려온 시꺼먼 다크서클의 기묘한 조화. 어쩔 때 아빠는 도통 설득이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알겠어. 그럼 나부터 누워서 눈 감는다.”

“그래. 얼른 눈감고 자.”


혜빈은 아빠에게 손을 흔들어서 인사를 하고 눈을 감았다.


지환은 잠시 그런 그녀를 지그시 감상하다가, 조심스럽게 침대 아래 있는 간이 침대를 꺼냈다.


“잘자.”


지환은 나지막한 목소리를 끝으로 병실에는 모든 불이 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그는 조용히 간이 침대에 누웠다. 낡은 건 똑같지만 확실히 이전보다 커져서 몸이 편했다.


감정도 에너지였다. 혜빈이 깨어남을 알게 된 이후로 기쁨에서 비롯된 충만감 온몸을 채웠다.


지환은 금세 미소를 띠고 잠이 들었다. 얼마나 꿀잠에 빠졌는지, 그는 코까지 작게 골았다.



아빠의 코골이가 혜빈의 귀로 들어왔다. 어지간해서 코를 고는 사람이 아닌데.


그녀는 두 팔로 침상을 짚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몸이 많이 상한 것 같았다. 이런 작은 동작에도 숨이 차올랐다.


그녀는 간이 침대에 잠든 아빠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피곤에 절어있었음에도, 잘생긴 얼굴은 더욱 도드라졌다.


저 정도 외모면 충분히 재혼이 가능하겠지. 혹을 두 개나 달고 있긴 하지만.


물론 자신과 예린이 없다고 해도 시도하지 않을 거다. 아빠는 재혼을 염두에 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빠의 등록증에는 아직도 엄마 사진이 한가득이었다.


혜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가족들을 보면 습관처럼 웃었다.


우는 방법은 잊고 웃는 방법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언제 마정석 중독이 심장을 쥐어잡고 비틀지 모르지만, 그날이 오늘은 아니었다.


그럼 웃어야지. 그것말고 자신이 힘든 가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으니까.



밤이 깊어졌다. 혜빈이 짧게 심호흡을 하며 미소를 지웠다. 이제 아빠가 잠들었으니 제대로 확인해봐야 한다.


그녀가 미간을 구긴 채 각성 웨이브 이후로 몸속에 깃든 힘에 집중했다.


눈앞에 어른거리던 글자가 서서히 형태를 갖춰갔다. 둥둥 떠다니는 반투명한 글자들.


심장이 두근거렸다. 잠깐 집중했다고 빈혈처럼 머리가 핑 돌았다.


혜빈은 다시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이마에 손등을 올린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1급 각성자. 그리고 특성은 한 개 뿐.



빈혈기가 가신 혜빈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침대 테이블에 올려진 과도를 들었다.


날카롭게 날이 선 과도에 어둠이 묻어 검푸른 색으로 번뜩였다.


아직 확인해 볼 게 더 남아있었다.


그녀는 과도로 자신의 오른손 엄지를 살짝 베었다.


피가 한 두 방울 맺힌 엄지 손가락을 검은 허공에 내밀었다.


엄지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이 하얀 침대보 위로 뚝뚝 떨어져 번졌다.


‘일어나.’


하얀 침대보에 번지던 핏방울 얼룩이 물이 끓어 오르듯 부글거렸다.


침대보에 흡수됐던 핏방울이 기화되며 붉은 연기로 변해 혜빈의 눈앞까지 피어올랐다.


혜빈은 무언가에 홀린 듯한 눈빛으로 솜사탕처럼 뭉친 붉은 연기를 응시했다.


‘들어가.’


속삭이듯 명령한 혜빈의 목소리에는 지엄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붉은 연기가 반응했다. 연기가 이리저리 꿈틀대며 침대를 타고 아래로 흘러내려갔다


붉은 연기가 지환의 몸을 감싸고 맴돌았다. 이윽고 지환의 콧구멍 아래에 도착한 연기가 그의 호흡에 맞춰 순식간에 콧구멍 깊숙이 침입했다.



“콜록! 콜록! 크, 크음! 혜빈이 아직 안 자니?”

“아, 잠이 잘 안 와서 이제 자려고.”


지환이 기침을 하며 일어나 혜빈을 살펴봤다. 침대에 누운 혜빈은 침대보를 목까지 끌어올린 채 헤헤 웃고 있었다.


잠이 덜 깬 지환이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주고 다시 침상에 누웠다.


금세 다시 작게 코고는 소리가 이어졌고, 혜빈은 손을 들어 자신의 엄지 손가락을 달빛에 비춰봤다.



그녀의 손끝에는 티끌만한 상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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