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늙은 군인의 노래
우리 한민족의 조상은 과연 아프리카 초원에 살던 흑인 일까요?
43. 늙은 군인의 노래
“자, 자. 황대령! 술이나 한 잔 더하고 흥분을 가라앉히게. 허허.”
비싼 발렌타인 양주 한 병들고 모처럼만에 찾아온 후배에게 별 하나 단 죄로 된통 야단을 얻어맞은 전 제13 공수특전단 여단장이 술을 따라주며 달랜다.
“아, 예. 장군님! 제가 그만 너무 열이 받혀서요. 죄송합니다.”
잔을 받는 황대령의 손이 부르르 떨린다.
두 사람은 말없이 양주를 비워 마시고 다시 한 잔씩 서로 잔을 채워준다.
“이거, 청포도 먹어봐. 아주 맛있어.”
장군이 하얀 쟁반에 담긴 잘 익고 굵직한 청포도 알을 골라내어 황대령에게 건네준다.
겸연쩍은 얼굴로 청포도를 받아 든 황대령이 입 속에 넣고 아삭하게 씹어본다. 얇은 껍질이 터지면서 시원하고 달착지근한 과즙의 감미로움이 혀끝에 감돌고 아작아작 씹는 맛을 더해준다.
“예, 씨도 없는 게 아주 맛이 좋습니다. 청포도는 7월에 익지요? 장군님 농장에도 청포도 나무 있습니까?”
“응, 이건 아마 칠레 산 수입품일 거야. 적포도주 담그려고 일반나무 스무 그루 심어놨고 청포도는 다섯 그루 있는데, 우리식구 따 먹을 정도는 나오네. 이따 갈 때 적포도주 한 병 가져가게. 여기도 해풍이 불어와서 포도 맛이 아주 좋아!”
우리는 일제 강점기 때 민족 저항시인 이육사가 지은 청포도라는 시를 잘 알고 있다.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 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육사는 23세가 되는 1927년 가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반입사건에 연루되어 1년5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나왔다. 그는 264라는 수인번호를 딴 이름으로 시와 작품평론을 발표하게 된다. 경북 안동출신인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이며, 40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혹자는 이 청포도라는 서정적인 시에서 푸른 옷 청포를 입은 손님이 해방을 뜻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지금의 우리가 이 시를 읊는다면 과연 청포를 입은 손님은 무엇을 의미할까?
청포도라는 시는, 미래의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푸른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그 기다리는 손님은 바로 `평화로운 세계`인 것이다.
지금 몇 년 만에 만나 청포도 안주에 술잔을 나누고 있는 이 두 사람은 혹시 그들이 몸담았던 군대의 부조리를 해결해 줄 푸른 옷 입은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 속으로 이 노래를 부르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늙은 군인의 노래
양희은 (1997)
나 태어나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 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내 청춘
아들아 내 딸들아 서러워 마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군인의 아들이다
좋은 옷 입고프냐 맛난 것 먹고프냐
아서라 말아라 군인 아들 너로다
내 평생 소원이 무엇이더냐
우리 손주 손목 잡고 금강산 구경일세
꽃 피어 만발하고 활짝 개인 그 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이 내 청춘 다 갔네
푸른 하늘 푸른 산 푸른 강물에
검은 얼굴 흰 머리에 푸른 모자 걸어가네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우리 손주 손목 잡고 금강산 구경가세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곽지수 장군님! 제가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언제고 꼭 여쭤보고 싶었는데, 오늘은 무례를 무릅쓰고 그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황대령이 약간 취기가 오르자 용기를 내어서 자기가 평소에 지니고 있던 상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한다.
“그래, 황일관 대령, 뭐가 궁금한가? 내 기탄없이 말해주겠네. 허허.”
곽 준장은 취기를 빌려 자기 이름을 불러대는 황대령이 더 정이 가고 동생처럼 이무럽게 느껴진다.
“장군님은 왜 특전사 전우회 임원진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습니까? 우리 특전사를 거쳐간 모든 장성들이 앞다투어 감투자리 차지하려고 고문이다, 자문위원이다, 비집고 들어가면서, 기수도 선배인 양반들이 한참 아래인 후배를 고문으로 모시고 그 아래 자문위원 자리도 차지하는데 말입니다. 왜 장군님은 일부러 피하시는 겁니까?”
황 대령이 일부러인지 약간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낸다.
“나 아니라도 훌륭한 선배 분들이 많은데 회원가입만 해있으면 되지, 뭐 하러 나까지 임원명단에 올리나? 그게 무슨 벼슬이라고. 허허.”
곽 장군이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술을 한잔 더 따라 마신다.
“저는 혼날 각오로 제 진심을 다 드러냈는데, 장군님은 자꾸 감추시기만 하실 겁니까? 저를 못 믿어 그러시면 제가 너무 서운하지 않습니까?”
황 대령의 눈에 물기가 고이려고 한다. 사나이는 아무 때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육군 특전사 대령의 눈에 눈물이 비치면 곤란하지!
“허허, 참 이사람. 사람 곤혹스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고만! 그래 내 속 시원하게 얘기해 줄게. 그 특전사 회장직에 지금은 5.18 원흉 정장군이 앉아있지 않나? 그 밑에 고문자리에도 같은 한 명, 장장군이 들어있고! 그런데 나더러 어떻게 그 사람들과 같은 명단에 내 이름 석자 곽지수를 올리라는 건가? 자네 같으면 그렇게 하겠어?”
곽 장군의 눈에 불빛이 일면서 서릿발 같은 호령을 지른다.
“아, 예. 그럼요! 저도 절대로 그렇게 못합니다, 장군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군요.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모르시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장군님! 역시 제가 남은 평생 모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감사합니다.”
황 대령이 감격해서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굽실거린다.
“자네, 그러면 4년 전 18대 대통령선거 3일을 남겨두고 특전사 전우회 일부 회원들이 여당후보 지지선언 할 때 내가 앞장 선데 대해서는 왜 정치개입이라고 비난하지 않는 건가?”
이왕 속내를 터놓은 곽 장군이 황 대령의 생각을 마저 확인 점검한다.
“그거야, 그 보다 며칠 앞에 일부 특전사 전우회 회원들이 야당후보 지지성명을 발표해서 그에 대응한 조치를 취한 것 아닙니까? 대통령이 누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다수의 임원진들은 뒤로 물러나 관망할 때, 장군께서는 그 당시 회장이던 김석훈장군, 육군참모총장출신 박희도장군, 육사교장출신 김충배장군에 이어 네 번째로 이름을 올리셨습니다. 장군님 뒤에 있는 장성급은 전 9공수특전여단장 송 장군뿐이었고, 나머지 20여명은 전부 영관급 이하 부사관급이었습니다. 40명에 가까운 장성급 회원 중에서 겨우 5명이 참여했고 그 중에 한 분이신데 제가 왜 비난을 합니까? 너무 잘 하셨다고 쌍수 들고 박수를 쳐도 부족한데요. 하하.”
황 대령이 자기가 모실 분을 아주 잘 선택했다 싶은지, 대령 체통에 안 어울리게 낮 간지러운 칭송을 늘어놓는다.
황 대령은 경남 고성이 고향이다. 그는 육사출신 장교 중에 보직 구분 없이 자기와 인생관이 비슷하거나 애국심이 투철한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돈독한 인간관계를 맺으며 특별히 관리를 해오고 있다.
그들은 고향이 거의 대부분 PK쪽이고, 후배들 몇 명을 합쳐 모두 30여명이나 된다.
대령에서 장성급으로 승진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다.
혹시 자기가 승진에 탈락하고 대령으로 예편이 되더라도, 언젠가는 이들과 힘을 합쳐 군부와 민간이 아우르는 세력을 형성하고, 불의를 척결하는 단체를 구성하여 조국수호에 한 목숨 바치리라는 원대한 꿈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심점이 될 선배 장성급이 있어야 하는데, 충북 증평에 있는 제 13공수특전여단에서 여단장으로 모셨고, 고등학교 선배이면서 남달리 군인정신과 애국심이 투철한 곽지수 장군을 그 분으로 내정하고 있었다.
*** ***
경기도 평택시 모 호텔 로비로 고문도가 들어섰다.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로비에서 멀지 않은 커피숍을 향해 걸어 들어간다.
“하이고, 고 보스. 아니 고 사장! 이거 참 오랜 만이오. 잘 지냈소?”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계두식이 일어서며 반갑게 손을 내민다.
“예, 계 보스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식구들은 다 잘 있지요?”
고문도가 약간 허리를 숙여 악수하며 땅벌 도동파 보스 계두식에게 예의를 갖춰준다.
금년에 45살인 계두식은 진주 땅벌파 오야붕 이화수의 내정된 후계자로, 작년에 자본금 6억으로영화제작사 `㈜남강비전`을 차리고 액션영화 `사하라`를 만든 인물이다.
`비행칠면조` 전국체인점 본사 사장인 고문도는 그 영화에 남우주연으로 출연했었다. 문도는 33살로 나이는 적지만 오야붕인 땅벌 이화수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어서, 땅벌의 직속인 중앙파 보스를 맡고 있다.
두 땅벌파 보스는 커피를 시켜놓고 마주보고 자리에 앉아 서로의 내면을 읽어나간다.
계두식이는 대학을 나온 먹물로 일찍이 부동산사업에 눈을 돌렸었다.
서부경남 지리산 자락의 경치 좋은 택지를 조직을 동원해 헐값에 사들여 뒀었다. 시대의 흐름을 탄 귀농과 웰빙 바람에 실려 아주 비싼 값으로 되팔면서 꽤나 큰 돈을 벌어들였다.
“땅벌 형님은 요새 지방유지들하고 어울려 노시느라고 바쁘시오. 하하.”
문도는 금년에 오야붕 땅벌을 자기가 대표이사인 진주 문산에 있는 `㈜비행 육류가공`의 감사로 등록시켰다. 회사정관에 감사보수도 상당한 금액을 정해 올려서, 연간매출이 100억원이 넘는 회사의 감사가 된 땅벌은 조직폭력배 두목에서 갑자기 지방유지가 되었다. 진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 `사하라`의 영향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아, 그래요? 전화만 드리고 자주 못 찾아 뵈어서 송구하네요. 남강비전은 새 영화 촬영계획은 없습니까?”
문도가 넌지시 `사하라`에 여우주연으로 함께 출연했던 신주연에 대한 근황을 체크해본다.
“하하, 뭐 하나 더 찍어야 되는데, 내가 액션영화밖에 아는 게 없어서 고민이요. 사하라에 참여했던 감독이랑 스태프들은 레전드 같은 판타지 블록버스터 찍어보자고 하는데,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게 어디 그리 쉬운 거라야 말이지. 하하.”
계두식이 즐거운 고민을 털어놓는다.
“하나 찍으십시오. 이번에도 제가 남우주연 되면 출연료는 좀 주시고요. 하하. 그런데, 평택에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문도가 커피를 홀짝 마시며 계두식의 눈치를 살핀다. 경남에서 노는 사람이 경기도남부 충청도에 인접한 평택에는 무슨 작당을 하러 왔나 싶다.
“아, 고 사장은 모르고 계셨겠지. 이번에 평택에 우리가 큰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소. 내가 예전에 오늘이 올 줄 알고 황무지 땅에 큰 돈을 좀 묵혀뒀었거든.”
“예? 계 보스가 건축사업에 손을 댔어요? 그건 엄청난 자본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수백억은 있어야 될 텐데···”
문도가 처음 듣는 소리에 깜짝 놀란다. 그런 일이면 땅벌이 자기에게 미리 얘기를 했을 것이다.
“수백억이 뭐요, 수천억도 더 있어야 되지! 하하. 실은 내 땅을 신창원사장이 사고, 신 사장이 아파트단지를 조성해서 짓고 있는 거요. 그 양반은 가진 게 돈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하하.”
신창원은 조직폭력배 창원파의 오야붕이다. 창원공단에서 자수성가한 부친의 사업을 물려받은 46살 신창원은 건축업에 눈을 돌려 레저스포츠분야로 진출해서 계열사도 여럿 거느린 준 재벌 회장님이다.
작년에 진주 남강 변에서 땅벌파와 창원파 간에 대표선수 7명씩을 뽑아 정식으로 결투를 벌렸고 이긴 땅벌파에 약속한 보상금 2억원을 흔쾌히 건네줬던 통 큰 인물이다.
결투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며 7명중에 5명을 혼자서 때려 누인 고문도에게 호감을 가지고 영화 사하라에는 별도의 영화배급사를 차려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던 사람이다.
이 소설은 판타지가 아닙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닥쳐 올 사실을 미리 알려드리는 겁니다. 여러분의 가까운 미래를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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