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이나 하자고
수련이나 하자고
탈로스는 몇 구의 시체를 살피고 있었다. 경신으로 나아가는데 갑자기 품 안에 피안화가 반응한 것이다.
탈로스가 판 구덩이 밑바닥에는 괴상한 모양의 시체 여러 구가 있었다.
"왜 한 겨울에 알몸인 거죠?"
탈로스는 피안화가 든 주머니를 시체 위로 움직이면서 말했다.
"이놈은 마녀가 부리는 워울프야. 변신하면 육체가 부풀기 때문에 갑옷을 벗어야 하고 의복은 찢어지지. 전투가 벌어져서 그나마 있던 의복도 다 벗겨진 거야. 죽으면 원래대로 돌아오니 알몸이 된 거지."
"그럼, 여기 가죽만 남아 삐쩍 마른 해골은 어떻게 된 거죠?"
"네크로맨서의 사령술에 당한 것 같아."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이들 모두 케이사르가 움직이는 존재들이 아닌가요? 왜 서로 싸우는 거죠?"
"서로 싸웠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어."
탈로스는 쓰러진 사체의 형태를 유심히 살폈다.
"무기에 베이거나 찔린 상처는 없고 대부분 완력에 의해 뜯긴 상처야. 그리고 이 삐쩍 말라 가죽만 남은 녀석들은 몸 안의 내부 장기가 다 빨렸어. 이 녀석 중에 워울프도 있는 것으로 봐서는 서로 싸운 것이 아니고 뭔가에 당했다고 보는 것이 옳아. 엘드리치도 그렇고 도대체 어떤 놈이 설쳐 댄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아."
세렌은 시체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굉장히 기분 나쁜 느낌입니다. 이건 깨끗한 죽음이 아닙니다."
"시체를 보면 또 다른 네크로맨서들이 몰레이그와 합류한 것 같아. 몰레이그가 마지막 네크로맨서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세상에는 네크로맨서들이 많이 숨어 있었던 모양이야."
"시체는 세 부류군요. 반사르가의 문양을 가진 기사. 아마 이 워울프도 반사르가의 사람이겠지요? 그리고 네크로맨서. 만약 이들이 서로 싸우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 무엇일까요?"
"보통 포식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대상을 사냥해. 하지만 이건 단순히 재미로 죽인 것 같아. 본능에 의한 살인도 아닌 것 같아."
"저도 조금 걱정이 되네요. 울드리히로 가시겠습니까?"
"그래야 할 것 같아.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기는 힘들어. 아르마할도 모든 것이 울드리히에서 시작됐다고 하니까."
"그 영감이 하는 말을 다 믿을 수 있습니까?"
"케이사르 밑에서 금서 세 권이나 해독한 사람이야. 오간 이야기가 많겠지. 자 서두르자."
탈로스는 이번에는 칼멘의 속도에 맞춰 달렸다. 하루 꼬박 달리고서야 울드리히 근처에 도착했다. 원래 폐허가 된 성인데다 며칠 전 내린 폭설에 완전히 파묻힌 상태였다.
탈로스는 울드리히 주변을 살폈지만, 사방이 눈에 묻혀 작은 실마리 하나 찾아내지 못했다. 피안화도 큰 반응이 없었다.
당장 날이 저물어 무너진 폐성의 한쪽 벽면을 녹이고 임시 거처를 만들었다.
"규모가 커서 마법사들이 와야 파헤칠 수 있을 것 같아. 나 혼자는 괜한 체력 낭비밖에 되지 않겠어."
"음 그럼 사나흘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수련이나 하지 뭐. 육포는 얼마나 남았어?"
"하루 분량입니다."
"아껴 먹으면 충분하겠네."
밤은 깊어지고 매서운 추위가 몰려왔지만, 눈구덩이 안은 탈로스의 마법으로 인해 훈훈한 온기마저 감돌았다.
"스승님이 마음만 먹는다면 롱홀드 추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네요."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자연의 힘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워. 아무리 나라도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있다."
"하긴 그렇겠군요. 하지만 언제라도 포탈로 이동하실 수 있잖아요. 엠버스피어로 언제든 이동할 수 있으니까요."
"마법사는 왜 그런 스킬이 없는 걸까요?"
"이동 마법은 있지만 마력 소모가 많아서 효율이 떨어지고 포탈의 비밀은 네크로맨서만이 알고 있었고 그 비밀을 철저히 지켰기에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어. 사실 네크로맨서조차 방법을 안다고 하더라도 포탈을 쉬이 열 수가 없었어. 포탈에는 엄청난 영혼의 힘이 필요하거든."
탈로스가 포탈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라마단의 정수 때문이다. 라마단의 정수가 없다면 포탈의 기술을 알아도 열 수 없다. 거기에 카셈이 매직 오브까지 복용한 터라 탈로스의 몸에는 끊이지 않는 마력이 흘러넘치고 있다. 그것이 완벽히 조화를 이루어 쉽게 포탈을 여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라면 상상만으로 끝날 일이다.
예전 몰레이그와 그의 제자가 수십 년을 걸쳐 단 한 번 포탈을 연 것을 보면 얼마나 까다롭고 힘든 것인지를 보여준 예시다.
"여기서 마법사들을 기다리며 수련이나 하자."
세 사람은 곧 자세를 잡고 운기조식에 빠져들었다. 내공의 정점에 오른 탈로스는 요즘 들어 도력을 수련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도력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여서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다. 인간이 도력을 모으게 되면 신선이 되는 것이기에 신체적 결함을 벗어 던지고 영혼 자체가 육체를 탈피하여 우화등선하게 된다.
도력이 쌓이면 세상 삼라만상의 위치를 깨닫게 되고 신비한 도술까지 부릴 수 있게 된다. 탈로스는 이제 막 그 길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다.
지금의 도력은 아직 햇병아리 수준이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도력이 쌓이고 슬슬 능력이 하나둘 개안 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중 가장 먼저 개안한 것이 바로 천리안과 이원정심법이다.
이원정심법은 중원에서 보면 한 몸으로 두 가지 무공을 동시에 펼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마법과 다른 기술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도력이 필요하고 내공이 소요되는 것처럼 도력이 소요된다.
평소 끊임없이 수련하여 도력을 계속 갈고 닦지 않으면 기술의 한계점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천리안도 마찬가지 지금은 이미 알고 있는 상대나 장소가 있어야 그곳을 볼 수 있다. 보고 싶다고 여느 때든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운기조식처럼 방해받지 않을 장소에 앉아 정신을 최대한 집중해야 하며 천리안을 펼치는 동안 도력이 끊임없이 소비되며 보고자 하는 곳의 조건에 따라 집중의 강도가 달라지기에 많게는 삼십 분 이상 집중에 집중해야 겨우 상이 맺힌다.
즉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은 들여다볼 수 없고 천리안의 발동 조건은 머릿속에서 보고자 하는 곳의 환경을 계속 떠올리며 끊임없이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집중에 도력이 반응하며 머릿속에 상이 맺히는 것이다.
테츠는 그놈 장군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놈의 모습을 계속 떠올리니 머릿속에서 하나의 상이 맺혔다. 천막 안 그놈이 부관들과 회의하는 모습이 잡혔다. 아직 초기 기술이라 소리까지 들을 수 없다.
탈로스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무사하게 잘 있는가다.
다음날 날이 밝자 세렌과 칼멘은 눈밭 위에서 대련을 시작했고 탈로스는 오른손에 피안화가 든 가죽 주머니를 들고 눈 위를 돌아다녔다.
몇군데 반응이 있어 파보면 어김없이 시체가 나왔다. 대부분 워울프였다. 피안화가 마녀의 주술에 반응하므로 마녀의 하수인인 워울프에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비스트의 말로는 주술의 강도에 따라 피안화의 떨림 반응도 달라지는데 주술이 강하고 지독할수록 피안화의 떨림이 강하다는 것이다.
"음, 마녀가 한둘이 아니군. 어제와 같은 워울프지만 이쪽이 훨씬 강도가 세다. 즉 이 워울프를 부리는 마녀의 능력치가 어제 그 워울프의 마녀보다 높아. 그렇다는 것은 마녀가 한둘이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확실히 포션 각성하고 난 다음 워울프가 되면 능력도 배가 되는가 보군."
반사르가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사람들은 모두 포션으로 각성한 자들이다. 그들 중에서 워울프가 존재하고 있으니 각성자인 상태에서 마녀의 주술로 워울프가 되면 상당한 파워를 겸비한 워울프가 되는 것이다.
"이 정도면 마족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겠군. 그 때문에 마녀를 불러들였나? 케이사르 이놈은 도대체 어디까지 생각해 놓은 거지? 이곳에 무얼 하려 했던가?"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고용한 아침햇살 속에 실려 들어왔다. 세렌과 칼멘은 진심으로 맞부딪치고 있다. 그 소리가 아주 매력적이라 탈로스는 잠시 하는 일을 멈추고 두 사람이 대련하는 곳으로 향했다.
내공에서 한참 밀리는 칼멘은 방어하기에 급급했고 세렌은 그런 칼멘을 여유롭게 몰아붙였다. 세렌은 다른 장로들이 구사할 수 있는 검법은 대부분 구사할 수 있어서 다양한 검법을 펼쳤다.
그에 비해 칼멘은 우직하니 지옥참마도법 하나만으로 세렌의 파상공세를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물론 세렌이 칼멘의 내공에 맞춰 공격하고 있긴 했지만 칼멘의 능력 또한 배움의 기간만 따진다면 정말 미친 능력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지 않겠다는 그 확고한 신념 하나가 칼멘을 채찍질하여 집중력을 높인 결과다. 애초에 네크로맨서의 사막에 있는 세렌에 칼멘을 보낸 이유도 칼멘이 워낙 남자를 싫어하는 것도 있었고 둘이 경쟁하면 칼멘의 능력이 더욱 빨리 늘어갈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대련하는 것을 보니 몸이 근질근질하기 시작했다.
탈로스는 두 사람 사이로 뛰어내리며 말했다.
"음, 두 사람 전력으로 나를 공격해 봐. 특히 세렌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구경해 보자."
세렌의 눈빛이 싹 돌변했다. 사실 칼멘을 상대하는 것은 시시했었다. 칼멘의 능력이 한 참 모자라는 것도 있었고 세렌의 성격상 능력을 제어하면서 싸우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호랑이는 들소를 사냥하든 토끼를 사냥하든 늘 최선을 다한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모두 쏟아붓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던 세렌은 기회다 싶어 내공을 한계껏 끌어 올렸다.
세렌이 호흡을 내뱉자 입속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다시 들숨과 함께 코와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호? 삼화취정의 단계더냐?"
-팟
세렌의 신형이 돌연 눈 속으로 쑥 꺼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주변이 고요해졌다. 칼멘은 어찌할 바를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이런 전투는 몸에 익지 않은 거겠지. 네 꼬락서니를 보니 한심함만이 가득하구나."
"익."
탈로스의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칼멘은 검을 세워 잡고 막무가내로 덤벼들었다. 그녀의 손에서 지옥참마도법이 펼쳐지는 순간 탈로스의 발밑에서 눈덩이가 폭발하듯 흩날리며 바이올렛을 앞세우고 일직선으로 솟아올랐다.
"뻔히 보이는 공격을 맞을 일은 없겠지?"
탈로스는 손가락으로 바이올렛의 검신을 튕기자 세렌이 휘청했다.
"저런!"
칼멘은 탈로스의 움직임을 순간 놓쳤다.
"멍청한 것."
그 대가는 고스란히 돌아왔다.
왼쪽 젖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밀려오더니 그것은 끔찍한 고통이 되었고 순간적으로 폐가 경직되어 숨이 턱 막혀버렸다. 그러자 내공의 순환이 멈추며 근육이 굳어져 버려 도법의 연계가 끊어져 버렸다.
고수 간의 대결에서 그런 틈은 죽음과 직결한다.
-짝
칼멘은 눈에서 불똥이 튀었고 눈앞에서 수많은 별이 왔다 갔다 하며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상대가 어떻게 움직였는지조차 보지 못했다. 자기 뺨을 치고 지나간 조차 느끼지 못했을 정도였다.
"쳇!"
세렌은 모든 것을 담은 혼신의 일격이 간단히 막히자 허공에서 몸을 틀어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며 천마수라검을 떨쳐냈다.
"이번에는 제법 날카롭다만은 눈에 뻔히 보이는 공격이라 실망이다. 넌 공격이 너무 정직해서 탈이야."
탈로스는 그녀의 공격 범위를 간단히 피해버렸다. 세렌의 공격은 엄청난 암경을 담고 있었지만, 상대를 맞출 수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쾅
그녀의 공격은 쌓인 눈덩이 위에 떨어졌고 새하얀 눈덩이가 사방으로 휘날리며 주변을 집어삼켰다.
칼멘은 다시 중심을 잡고 탈로스를 쫓으려 했다. 그러나 그때 그녀의 앞으로 세렌의 공격이 떨어졌고 칼멘은 깜짝 놀라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뒤로 튕겨 나가듯이 물러났다.
그러나 언제 움직였는지 그녀의 뒤에는 탈로스가 빙그레 웃으며 서 있었다.
"악"
칼멘은 등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눈밭으로 엎어졌다.
"쯧쯧 둘이 연계해도 나를 잡을까 말까 하는데 서로의 움직임에 부딪혀 공격마저 제대로 되지 않는구나. 실망이 큰걸?"
"후아~"
세렌은 깊은 호흡을 내뱉었다. 늘 그렇지만 스승 앞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지는지를 늘 뼈저리게 느꼈다. 정말 상상도 못 할 거대한 벽이 눈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통한의 벽 같은 압박감이다.
"아니, 어느 정도는 레벨이 되어야 싸움이 되는 거지. 이건 성인이 애들 둘 가지고 장난치는 것 같은데···. 세렌 너도 별거 아니구나."
칼멘은 볼멘소리하며 일어섰다. 왼쪽 뺨이 부어올랐고 등짝과 가슴이 얼얼한 상태였다. 그러나 기분은 개운한 것이 몸은 한결 더 가볍게 느껴졌다.
탈로스가 그녀의 경혈을 자극해 내공이 더욱 원활하게 순환되었기 때문이다.
"잠깐만!"
탈로스가 손을 들어 싸움을 중지시켰다. 그는 조금 전 세렌이 공격한 부근을 바라봤다. 세렌의 천마수라검이 떨어진 곳은 푹 팬 상태였고 그곳에서 뭔가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가만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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