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
저녁 식사
젊은 사내의 웃음에는 아름다움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만큼 절륜한 미모를 가진 사내였다. 길을 가다가도 눈에 확 띌 만큼 아름다운 얼굴의 소유자였다.
그는 찻잔을 슬며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참에 노르딕의 본심을 떠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노르딕의 본심?"
"그렇죠. 지금 당장 노르딕에 서신을 하나 보내는 겁니다."
"무슨 내용으로 말인가?"
"만약 자네가 나를 도와준다면 솔라리스 왕좌를 자네에게 양보한다고 말입니다."
순간 시몰레이크 후작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솔라리스 왕좌는 자신의 꿈이자 모든 것이다. 그걸 노르딕에 양보하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뜻은?"
"그러니까 본심을 알아보자는 것 아닙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노르딕이 사심이 있다면 시몰레이크 후작님의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 겁니다. 제이미를 도와 팬텀 가드너가를 부활시키면 자신이 왕이 될 기회를 놓치게 되는 거죠. 반란을 일으켜 팬텀 가드너가를 무력으로 제압하면 신성불가침 조약에 따라 성군이 개입할 거고 성군과 싸워 이긴다는 보장이 있을 수 없죠. 칠무신 한명만 출전해도 싸움의 승패는 이미 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런데 시몰레이크 후작님을 통해 정당하게 밀어붙이면 가능하다는 이야기죠. 아무리 신성불가침 조약에 묶인 팬텀 가드너가라 할지라도 아칸의 죄를 물어 합당하게 처리한다면 성군도 어쩔수 없다는 거죠."
"음, 만약 신성불가침 조약을 밀고 나온다면 윌리엄 대공의 문제를 처리하더라도 차기 왕권은 브렌든에 넘어가 버려 그러면 제이미가 섭정이 되겠지.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은 팬텀 가드너가를 무너뜨리는 거지. 그들을 살려 둬서는 안 돼."
"그래서 노르딕이 필요한 겁니다. 만약 노르딕이 제이미를 제거 해 준다면 섭정은 후작님에게 넘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럼 신성불가침 조약에 제재받지 않고 왕좌에 앉을 수 있는 거지요."
"노르딕이 제이미를 제거하는 것은 둘째치고 그자에게 왕좌를 양보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지 말고 성군이 그냥 밀고 들어와 솔라리스 왕국을 접수하고 왕위를 내게 양위하면 되지 않는가?"
"후작님. 오르도 왕국과 드라고나 왕국의 시선은 상관없다는 말입니까? 그들은 성군이 국경을 넘는 합당한 이유를 바랄 겁니다. 성군이 강제로 솔라리스 왕국을 침범하면 오르도 왕국과 드라고나 왕국은 보란 듯이 신성불가침 조약을 들먹이며 반발할 것이 뻔합니다. 합당한 이유를 후작님이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내가?"
"그렇습니다. 노르딕에 왕좌를 양위하는 척하고 오르도 왕국과 드라고나 왕국에 사신을 보내 노르딕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성군 개입을 허락해 달라고 하면 되는 간단한 이치입니다. 성군 또한 합당하게 국경을 넘을 수 있으며 노르딕의 군세를 토벌하면 후작님의 세상이 열리는 것이지요."
"듣는 것은 이토록 쉬우나 막상 하면 일이 꼬일 수가 있단 말이지."
시몰레이크 후작의 얼굴이 불안감이 가득 드러났다.
"만약 당장이라도 제이미 백작이 노르딕의 제안을 허락해 버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만 병력이 일시에 후작님의 성을 공격하면 그것으로 후작님은 꿈은 끝나는 겁니다. 그에 반해 제이미 백작 측에게서는 단순한 반란 진압이지 않습니까?"
"반란 진압이라니 말이 안 돼."
"자고로 진자의 말은 변명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금 후작님이 잡고 계신 것은 썩은 밧줄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지금 그 밧줄에 누가 칼을 대려 하고 있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게나. 적어도 오늘 하룻밤만이라도···."
"늦지 않게 해 주셔야 합니다. 제이미 백작도 오늘 밤이면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사내는 후두를 깊숙이 눌러 쓰고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홀로 남은 시몰레이크 후작은 식은 찻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의 부관이자 하나밖에 없는 조언자인 프로이시어가 들어왔다.
"이야기는 잘 되었습니까?"
"음, 골치 아픈 것만 머릿속에 한가득하네."
"어찌? 제가 들어도 될 일이라면···."
"잠시 앉게나."
시몰레이크 후작은 황제의 인커전과 나눴던 대화를 프로이시어에 해 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이 상황에서 누굴 믿을 수 있겠습니까? 노르딕? 황제?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실리를 추구하느냐 목숨을 걸고 한 판 승부수를 띄우느냐에 달려 있죠."
"음, 노르딕에 서신을 띄우는 것은 위험한 일이야. 노르딕이 만약 내 청을 수락한다 해도 그다음의 성군 비중이 너무 커. 만약 성군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꼼짝없이 덜미를 잡히는 거고. 만약 제이미가 노르딕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릴 공격한다면 그것 또한 큰일일세. 성군에 도움을 요청한다 해도 나머지 이국의 합당한 승낙이 없으면 침략으로 간주할 테니···."
"그렇습니다. 그자의 말대로 노르딕이 4군단과 5군단을 완벽히 제압한 상태라면 저희에게는 승산이 없습니다. 노르딕이 제이미를 도와준다면 그는 영원한 이인자로 만족해야겠지요. 그가 야망을 품은 자라면 제이미 측 보다는 저희와 손을 잡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바로 그렇지. 문제는 노르딕이 우릴 도와준다고 해도 문제일세. 정당한 절차에 의거 일을 진행하려면 윌리엄 대공의 죄를 물어 그를 처리해야 하고 그 이후 황제는 신성불가침 조약에 따라 팬텀 가드너가의 핏줄인 브렌든을 차기 왕으로 임명하게 될 거고 제이미가 섭정 자리에 앉게 되겠지."
"결국 노르딕이 됐건. 저희가 됐건 반란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서 쓰지 않으면 성군의 개입은 없다는 거군요. 그럼 누가 오명을 뒤집어서 쓰느냐에 달려 있겠군요."
"그놈이 말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우리가 오명을 뒤집어쓰는 대신 노르딕이 제이미 일가를 제거하라는 것이지."
"그리고 일이 끝난 후에 그 일을 빌미로 노르딕을 제거한다는 말이군요."
"그렇다네 그 일은 성군이 직접 개입할 수 있으니 칠무신이 알아서 처리해 줄 거라는군."
"계획을 들어보면 확실히 말은 되는데 노르딕이 어떻게 나올지가 첫 번째 함정이군요."
"노르딕이 내 서한을 들고 제이미에게 붙게 된다면 난 반란군으로서 토벌되는 거지. 이건 기름을 껴안고 불어 뛰어드는 격이라."
"황제의 인커전은 노르딕이 확실히 야망이 있다고 보는 거군요."
"그렇지. 그놈은 절대 빈말을 나불댈 놈이 아니야. 무려 황제가 신임하는 놈이니 뭔가 나름대로 조사는 충분히 했겠지. 생각해 보게 이곳에 황제의 인커전이 얼마나 득실하겠나?"
"만약 그렇게 진행 하더라도 우리는 적어도 퇴로를 생각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퇴로?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퇴로가 있을 수 있나?"
"있긴 있습니다. 우리 뒤를 봐줄 사람이···."
"누구? 설마 황제의 패거리 중 하나인가?"
"설마요. 제가 말한 그 사람은 바로 케이사르입니다."
"케이사르? 그는 행방불명 된 지 오래지 않은가? 아칸 사건 이후로 그를 본 사람은 없네."
"제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필포드 경은 인커전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의 인커전 또한 아칸 시티에 수도 없이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필포드 경에게 접근하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시가 급하네. 만약 노르딕과 제이미가 손을 잡는 날에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져."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전 그와 연락을 취하고 있습니다. 급하면 오늘 저녁에라도 만나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그가 아칸 시티에 있다는 말인가?"
프로이시어는 뜻 모를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
"후."
사내는 후드를 젖히고 식탁에 앉았다.
"혼자 먹는 식사는 확실히 밥맛이 없네요."
"호호. 그럼 누님이 동석해 줄까?"
2층 천장에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아래층으로 조용히 떨어져 내렸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바람 하나 일지 않았다.
"허, 거미줄을 타고 내려오는 거미 같습니다. 섬뜩 한대요?"
여성은 온몸을 검은 가죽으로 감싸 육감 있는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검을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은 것에 아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벌써 2인분의 식사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으셨잖아요. 제가 돌아올 시간도 정확히 아시고, 음식이 식지 않았으니."
육감적인 몸매의 여인은 식탁으로 다가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복면을 벗자 역시 기대한 만큼의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쩝, 마테니 장로님은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을 두고 바쁘시니 안타까울 노릇이군요."
"각자 사정이 있는 법이니 어쩔수 없잖아."
그녀는 가느다란 팔을 뻗어 적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델리오. 오늘 간 일은 어때? 잘 됐고?"
미모의 사내 아델리오는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우물우물 씹으며 말했다.
"누님의 요리 실력은 갈수록 늘어가는군요."
"말을 회피하네? 그거 알아? 이건 너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냄새도 없고 맛도 전혀 나지 않은 치명적인 독이 완성됐다는 거."
아주 맛있게 고기를 씹고 있던 아델리오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칼칼칼! 걱정 마 그 음식에는 독 따위 넣지 않았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여자를 꼽으라면 누님을 1순위에 올려놓겠습니다."
"세렌이 섭섭해서 울겠는데?"
아델리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세렌은 검 한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기절해 버릴 겁니다."
"자꾸 말 돌릴 거야? 그러다 진짜에 걸리면 혼난다?"
그 말에 아델리오는 경기 들릴 듯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그분 이야기는 왜 해요? 저기 맘 편히 밥 좀 먹으면 안 될까요?"
"알았어. 그럼 편안하게 식사하자고."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식사를 마쳤다.
"설거지 부탁해."
"제가요?"
"뽀득뽀득 소리 나게 씻어줘. 음식물 제때 처리하지 않으면 냄새가 퍼져 나가. 괜히 빌미를 남기지 말자고. 대신 네가 좋아하는 차를 끓여 줄 테니까."
"어휴."
두 사람은 찻잔을 두고 마주 앉았다.
아델리오는 시몰레이크 후작과 나눴던 이야기를 아가므네에 들려주었다.
"어때? 분위기는? 미끼를 물을 것 같아?"
"아마도요. 프로이시어는 간교한 자지만 궁지에 몰리면 뭐라도 잡으려 할 테니까요."
"자. 그놈이 모습을 드러낼지 아닐지는 이제 기다림만 남았네?"
"음, 시간은 죄어 오고 있어요. 아마도 황제가 냄새를 맡은 것 같아요. 야생왕이 아칸으로 들어온다는 정보가 있어요."
"에? 그래? 귀찮아지겠는데···."
"네, 아주 귀찮아질 거예요. 아칸의 분위기를 심상치 않게 생각하거든요."
"그놈이 나타나겠지?"
"아마도요. 워낙 신중한 놈이지만 이제 구석까지 몰렸으니까요."
아가므네는 양손을 탁자 위에 올려 교차시키고는 그 위로 턱을 괴였다.
"황제가 진짜 바라는 것은 뭐야? 황태자의 몸뚱이? 아니면 다른 뭐라도 있는 거니? 이 중요한 시기에 왜 웅크리고만 있는 거야? 그가 직접 칠무신을 데리고 움직인다면 주신 제국 통째로 먹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일 텐데?"
아델리오는 차 한 모금을 음미한 뒤 말했다.
"저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황제가 보는 것은 주신 제국 따위의 인간 사는 동네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는 좀 더 큰 뭔가를 보고 있어요.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 한 황제 또한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황제의 몸은 죽음으로 가고 있어. 싱싱한 육체가 꼭 필요할 텐데? 황태자를 손에 넣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걸?"
"황태자 건은 2순위입니다.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있어요. 그건 아무도 몰라요. 에르제베트 황비도 레베카도 모르죠. 오직 황제만 알고 있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물론 저도 모르지만요. 그렇기에 황제는 딜레마에 빠진 겁니다."
"왜?"
"왜긴요. 황태자 때문이죠. 원래 계획은 황태자의 몸을 얻어 주신 제국을 먼저 통일하고 그것을 상대하려 했어요. 헌데 황태자는 황제의 손바닥에서 뛰어내렸고 이제는 허리를 숙여도 잡을 수 없을 존재가 되어 버렸죠. 이건 정말 산정 외였어요."
아가므네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태자 전하도 지금 찾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야. 그것이 인간의 운명을 쥐고 있는 거지?"
"하. 아마도요."
아델리오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과분한 힘을 손에 넣었고 그 힘을 제한 없이 사용했어요. 많은 결과물 중 하나지만 이브리엄 종족을 이 땅 위로 불러왔죠.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성력이라는 힘을 휘두르는 존재를 말이죠. 우리는 과거 우리 조상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놓인 겁니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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