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베르의 위기
콜베르의 위기
프랜시스는 앞서 달리다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콜베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따라오고 있었다.
마법사는 지식을 향한 집중에는 강한 면모를 보이지만 몸 쓰는 일은 많이 부족하다.
마법으로 피로감을 줄일 수는 있지만 신체의 근 손실까지 메꿔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요즘 들어 마법사의 신체 능력 저하를 우려해 강도 높은 훈련을 권장하고 있으나 마법사들은 그런 쓸데없는 시간 낭비 보다는 마법서 한 권을 더 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
고강도 전투에서도 신체 능력보다는 정신 집중을 요구하는 편이니 굳이 기사나 전사처럼 신체 강화에 시간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을 떠나 단체라면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난다. 그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탄생한 마법사 그룹이 베틀 워락이긴 하지만 베틀 워락 자체가 마법사 적인 능력보다는 국가를 지키기 위한 전투 마법사의 개념이기에 평생을 지식을 탐독하는 것에 헌신한다는 마법사의 교리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국가의 존망을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에 베틀 워락의 존재는 희생으로 여기며 오르도 왕국에서도 존경받는 위치에 있다.
"지원이 와야 해요. 지원이 오지 않는다면 감당할···. 헉, 헉 수 있겠어요?"
"모르겠어. 베틀 워락은 보이지 않는군."
"그럼, 우리가 가서 뭘 하죠?"
"조금 전 보지 않았나? 마교의 그녀가 갔으니 우리가 무너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겠죠?"
"그러길 빌어야지."
그때였다. 그들이 달리는 전면 하늘 위로 붉은 화염구 하나가 치솟아 오르더니 허공에서 폭발했다. 적의 위치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서두르자."
프랜시스가 전속력으로 달리자 콜베르는 인상을 구겼다.
"먼저 가세요. 전 숨이 막혀서요."
'쩝, 눈치 보고 빠지면 되는데 굳이 싸움터에 가려는 건 뭔가?'
콜베르는 숨이 목까지 차올라 더는 뛸 수 없었다. 눈치를 보고 뒤로 빠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많은 마법사가 화염구가 떠오르는 곳으로 달리고 있어 자신 혼자 정도 뒤로 처진다 해서 뭐라 할 사람은 없어 보였다.
프랜시스의 거리도 점점 벌어져갔고 이윽고 그의 모습은 달리는 다른 인파에 완전히 묻혀 버렸다.
"제길, 숨 막혀 죽겠어. 마법사에게 달리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이 어디 있어?"
혼자 투덜거리며 신체의 부조리를 합리화 시키더니 결국 달리는 것을 멈췄다. 그러든 말든 자신의 옆으로 마법사들이 꾸준히 스쳐 지나쳐 갔다.
"흥, 부나방들."
콜베르는 달리는 속도를 점점 늦추었고 아예 이젠 걷기 시작했다.
"어이구. 철없는 것들. 가면 죽을 수도 있는데 무엇이 좋다고 달려가는 건지 원 참. 이해가 안 되네."
어느새 그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없어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콜베르를 주변을 훑어보더니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길거리 옆에 주저앉았다.
"쳇, 하필 펼칠 수 있는 게 차가운 얼음뿐이라니 그때 화염계 마법을 선택한다고 우겼어야 했는데···."
지금처럼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추울 때는 그저 따뜻한 물 한 모금이 그만일 터였다.
화염계라면 당장 물을 데울 수 있건만 냉 법사인 콜베르는 몸을 데울 만한 기술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품에 있는 통각의 맥박을 사용할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는 아예 눈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혼자 이렇게 있으면 눈에 띄니 차라리 숨어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확실히 몸을 움직이니 조금은 추위가 가셨다.
길가 쌓여 있는 눈구덩이 속을 파고 눈을 꽁꽁 얼리니 제법 그럴싸한 이글루가 되었다. 다른 이들은 싸움터로 향했지만, 콜베르는 아예 그걸 생각이 없었다.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곳에 제 발로 뛰어들 멍청함이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눈치 보고 숨을 수 있다면 숨는 것이 이곳에서는 최고의 선택이라는 것을.
이글루 안에 들어 있었는데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냉 법사인 만큼 냉기 면역에 있어서는 월등했고 동상 따위 걸릴 일도 없으니 차가운 바닥에 누웠을 때의 냉기 침입 정도는 간단히 막을 수 있었다.
이럴 때는 또 냉 법사가 편하다고 느껴졌다.
조용하다.
저 멀리서 공기 떨림과 작은 소리가 들려오긴 했지만, 그 소리조차 곧 멎어 버리고 세상이 정말 조용해진 것 같았다.
사실 자신이 차출되었을 때는 진심 믿을 수 없었다. 콜베르는 사이렉 가문 출신으로 오르도에서는 중견 마법가로 그래도 제법 명성이 있는 가문 출신이다. 사이렉 가문이 명성을 떨친 것은 네크로맨서의 전란 때였다.
사이렉 가문의 마법사들은 네크로맨서와의 전쟁에서 큰 공훈을 세우고 가문의 이름을 만방에 떨쳤다. 콜베르는 그런 사이렉 가문의 차남이었다.
원래는 싸움을 싫어하고 모험 보다는 조용히 지내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가문의 장남은 곧 결혼을 앞두고 있으며 사이렉 가문을 이을 장손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이번 원정은 가문별로 한 명씩 강제 차출되었는데 원래 대상은 자기 형 월터였다. 그러나 가족회의를 거쳐 콜베르가 월터 대신 원정대에 차출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속으로 오만가지 욕과 저주를 있는 대로 퍼부어 댔으나 가문을 저버리는 패륜적인 짓은 할 수 없었기에 어쩔수 없이 끌려 오게 된 것이다.
거기다 사문의 명예까지 덤으로 있으니 싫은 내색을 하거나 잘못 입을 놀리면 양쪽 다에서 좋지 않은 시선을 받을 것이 뻔했다.
"버티면 되는 거지.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이런 황무지에 와서 죽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아무렴. 그렇지."
콜베르는 그렇게 자기 행동을 합리화했다.
-퉁, 쾅, 퉁~
저 멀리서 울리는 소리는 바람의 흐름을 멈추게 할 정도라는 것을 알았다. 그 소리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워 있는 지면에서도 잔 떨림이 전해져 왔다.
아무래도 싸움 장소가 이동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에이 설마 이쪽으로 오는 것은 아니겠지?"
우려와 바램은 원래가 일맥상통하는 법이다. 아니겠지란 바람은 당연히 그래야지. 이야기되는 거지처럼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갔다.
콜베르는 어찌할까 고민하다 뛰쳐나가기로 했다.
그가 막 움직이려는 찰나 근처에서 무언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어떻게 되어 가는가?"
"일단 마교 여자 한 명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지세가 좋지 않아 넓은 지역으로 유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음, 이곳이 평원이라 포위하기도 좋고 하니 이곳으로 유인하도록 하자."
"그럼 신호를 올리겠습니다."
콜베르는 하염구가 솟구치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화염구를 쏘아 올린 자는 자신이 숨어 있는 곳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도 않는 곳이었다. 다행히 얼음으로 입구를 막아 놓아 주변 환경과 쉬이 구분되지 않았던 것이 천운이라면 천운일까.
지금 목소리를 들어 봐서는 지원 부대 총책임자인 발즈베브가 확실했다. 10개의 챕터 총책임자다. 베틀 워락은 타이탄 그놈 장군이 이끌고 후속 부대이자 지원 부대의 책임자가 바로 발즈베브 마법사다.
그는 평의회 소속 마법사로 나이 60에 지원 부대 일 천명을 거느리고 이번 원정길에 올랐다.
콜베르는 생각했다. 지금 숨어 있는 것을 들킨다면···. 지독히도 재수가 없으면 명령 불복종에 무단 탈영 죄까지 덮어쓸 수 있어 즉결 처분 조처가 내려질지도 모른다는 거다.
이는 죽는 것을 떠나 가문과 사문의 얼굴에 똥칠을 오지게 하는 경우라서 이 위기를 어떻게 하든 넘겨야 했다. 그는 혹시 숨소리가 새어 나갈까 하여 양손으로 입까지 틀어막았다.
그러나 진짜 골치 아픈 일은 아직 발생하지도 않았다. 주변을 향해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숨어 있는 곳 바로 옆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이 정도쯤에서 놈들을 잡아 놓고 메테오를 떨어뜨리면 어떨까요?"
"그래 마침 이곳이 평원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니 저 서쪽 언덕 위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놈들을 이곳에 쓸어 모은 다음 메테오로 정리하는 것이 좋겠어."
콜베르는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대화하는 목소리를 들어 보니 지휘관급이 분명했다. 게 중에는 귀에 익은 목소리도 들렸다.
이제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됐다.
-쾅, 쾅!
무언가 터지는 폭음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생생한 고함 그리고 비명이 사방에 가득하였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수가 없다.
적은 괴물 아이가 아닌가?
지금 괴물 아이 한 명과 싸우는 것일까? 그런데 이 괴상한 소리는 무어지?
폭음과 비명에 곁들여 괴상한 울부짖음이 한데 어우러져 밖의 상황을 추측하기 힘들었다.
-투타다닥. 투탁.
자신이 숨은 곳 앞으로 뛰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요란했다.
"됐다. 놈들이 반응한다. 이쪽으로 모아라."
"육칠 팔 챕터는 최대한 놈들을 막아라. 나머지는 이쪽으로 몰아넣도록 해."
지휘관의 목소리에 콜베르의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두려웠다.
-크갸갸, 카르르, 크카카.
조금 뒤 듣고 보지도 못한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목구멍에 가래가 심하게 끼어 숨을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때 억지로 캑캑거리는 것과 같은 비슷한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자니 모발이 다 곤두설 지경이다.
"그녀닷!"
"마교의 여신이다."
"좋아. 이대로 놈들을 몰아붙여라."
"신호가 울리면 메테오를 쏜다."
콜베르는 검지와 중지를 주둥이에 밀어 넣고 신음을 삼켰다. 진작에 뛰쳐나갈걸. 아니 이곳에 숨지 말걸. 미친 듯이 후회해도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지금 밖에 무엇이 있는지 알수가 없다. 고함에 괴물의 가래 끊는 소리가 함께 뒤엉켜 엉망이었다. 메테오가 떨어진다고 하지 않았나? 어디쯤인 거지?
여기 숨어 있다가 메테오에 직격당하면 뼛조각 하나 못 추리고 증발해 버릴 거다.
나갈까 말까? 입에 침이 고이고 삼킬 때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신호. 신호닷!"
그 소리에 콜베르의 머리칼이 거꾸로 치솟아 올랐다.
-쉬이이이이이이잉
머리 위에서 거대한 바윗덩이가 바람을 가를 때 나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엄마."
콜베르는 자신도 모르게 엄마를 부르짖었다.
-쾅
거대한 폭음과 동시에 콜베르는 좁은 이글루 천정에 대가리를 처박혔다. 지축이 뒤흔들리며 지면이 파도처럼 출렁거리며 콜베르의 몸을 튕겨 올렸다. 이글루 천정은 꽝꽝 언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콜베르의 머리가 처박힐 정도이니 얼마나 강한 파괴력이 지면을 훑고 지나간 건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으,"
누가 굵은 나뭇등걸로 강하게 머리를 내려친 것 같은 충격을 받았고 그 충격에 비례해서 고통이 밀려왔다. 이마에서 축축한 것이 쏟아져 내렸고 그것은 콧잔등을 타고 내려와 입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약간 따뜻하고 비릿한 냄새가 전해왔다. 콜베르는 그것이 자기 피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수 있었다. 그리고 곧 뜨거운 열기가 주변의 눈을 빠른 속도로 증발시키고 있음을 알았다.
콜베르는 마지막 순간이 오자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저 멀리 머리 위에서 또 하나의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진정한 죽음의 전주곡이었다.
콜베르는 가진 마나를 모두 꺼내 주변에 콜드 아이스를 뿌렸다. 두꺼운 얼음층으로 충격을 받아 내기 위해서였다. 물론 메테오의 직격 범위 안에 있다면 장난질에 지나지 않을 걸 알지만 최후의 발악이었다.
-쾅
-쩌저적
이번에는 땅거죽이 쪼개지면서 주변의 얼음이 바스러지며 유리 조각처럼 파편이 되어 흩날렸다.
"으왓!"
콜베르는 생각할 짬도 없이 갈라진 바닥 틈 사이로 몸을 날렸다. 얼음 파편이 단검처럼 주변을 휘감아 버렸다. 다시 한번 땅거죽이 출렁거렸고 자기 머리 위로 뜨거운 무언가가 태풍처럼 스쳐 지나갔다.
시뻘건 화염이다. 갈라진 지반 틈새는 양팔을 벌려 지탱할 수 있는 폭이었다. 그 밑으로는 얼마나 깊은지 알수가 없었다. 머리 위로 붉은 화염의 폭풍이 지나가고 있고 콜베르는 이빨을 깨물고 양팔을 벌리고 벌어진 틈 사이에 매달려 버둥댔다.
점점 팔의 힘이 빠지고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는 지옥의 화염이 시뻘건 악마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휘날렸고 허약해 빠진 두 팔은 몸무게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거품을 물고 발작하는 환자처럼 달달 떨어댔다.
죽음의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니까 고통을 고통이라 생각할 짬도 없었다. 기어 올라가지도 못하고 밑으로 떨어지지도 못하고 그저 양팔에 힘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하늘이 도움을 주는 걸까 허둥대던 발끝에 무언가 닿았다. 갈라진 한쪽 벽면에 툭 튀어나온 부분인데 마침 디딤돌이 되기에 충분했다. 콜베르는 그 돌 위에 발을 올리고 겨우 팔에 걸린 무게감을 분산할 수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불길에 그을려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위로 스쳐 가는 화염의 열기에 머리카락이 타기 시작한 것이다.
납작 벽에 붙었다. 한 번 더 충격이 오면 그냥 끝장나는 거였다.
이때 하늘도 무심하게 세 번째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아예 자기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 엄마. 살려줘. 흐엉,"
콜베르가 할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벽틈에 붙어 있기도 힘든 상태였다. 이번 메테오로 끝장나는 거였다.
그가 28살이 되도록 살아왔던 일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가기 시작했다.
"살려줘. 살려 주세요. 살려줘. 어, 엄마~~~~"
콜베르는 바들바들 떨려 눈물을 찔끔댔다.
-쾅
- 작가의말
이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 갑니다.
아팠던 분도 다 복귀했고 야근도 없을 거고.
문제 없이 계속 연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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