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렌의 검
세렌의 검.
손아귀에 전해지는 감각에 집중하는 찰나 순간 상대의 움직임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세렌의 고함에 즉시 반응해 몸을 비틀었다. 올망졸망한 귀여운 손이 왼쪽 가슴을 살짝 치고 지나 나갔다. 왼쪽 젖가슴이 살짝 갈라지고 시뻘건 피 냄새를 풍겼다.
칼멘은 전혀 흔들림을 보이지 않았다. 세렌의 고함에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틀었기에 망정이지 왼쪽 젖가슴이 아니라 심장에 구멍이 날 뻔했다.
'실제 전투는 보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
중심을 잡을 사이도 없이 제2파가 날아왔다. 칼멘의 눈에 아이의 얼굴이 생생하게 비쳐 들었다. 아무 감정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에서 섬뜩함이 느껴졌다.
산적 때라면 상상도 못 할 싸움이지만 칼멘의 본능은 배움을 적용하는데 막힘이 없었다. 일단 아이의 움직임에 적응할 동안 참마도법을 펼쳐 방어에만 치중했다.
"저 아이 하나 때문에 베틀 워락을 뺀 건가?"
타이탄 그놈 장군 옆에는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온 마법사 한 명이 꾸부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긴 원뿔형의 모자와 은색 로브를 걸친 초로의 노인이 그놈 장군과 함께 싸움을 주시하고 있었다.
"꼭 여기까지 오셔야 했습니까? 어련히 알아서 결과를 보고 드릴 텐데요."
"아무리 나이가 많아 움직이기 그렇다고 해도 무료한 삶보다 가끔 이렇게 야외로 나와 주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돼."
"나이도 나이 나름이지요. 이제 연세가 백이십구 세십니다."
그가 바로 7인의 현자 중 여섯 번째인 리안니 버논이다. 지식의 현자 중 가장 높은 반열에 오른 자다. 이제는 배움을 접고 후아신 왕의 조언자로 지내고 있으며 오르도 왕국에서 가장 추앙받는 당대 최고의 현자이기도 하다.
롱홀드에서 거대한 마력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가장 처음 알아차린 사람도 리안니 현자이다. 그는 디멘션 포탈이 열렸다는 것에 크게 고무되어 포탈을 직접 보기 위해 거동했다.
늙으나 젊으나 마법사들의 지식을 향한 탐욕에는 나이 따위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포탈을 통해 이곳으로 건너오다 보니 어쩌다 타이탄 그놈 장군의 호위 아래 전투를 지켜보게 된 것이다.
"저 아가씨의 움직임은 아주 신선하구나. 생명의 근원을 마나처럼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니. 말로는 들었지만 직접 보니 놀랍구나."
"적이 물리적인 공격에 특화 되어 있으니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마교의 용병뿐입니다."
"쯧쯧, 그걸 알았으면 애초에 그녀에게 부탁하지 어찌 애꿎은 젊은이의 목숨이 저리되도록 방치 한 거냐?"
"경험은 직접 부딪쳐 봐야 몸에 깊이 베입니다. 만약 저 괴물이 오르도 왕국으로 건너온다면 저희 힘으로 싸워 막아내야 합니다. 언제까지 마교 용병에 기댈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교 용병이 어떻게 싸우는지 지켜보면 놈의 약점을 알아낼지도 모릅니다."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 같아 마음이 쓰이는구먼. 그때 느낀 마력은 결코 저 아이가 아니야. 저 아이에게서는 그 어떤 마력도 느껴지지 않아."
"저도 처음에는 호문쿨러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녀의 주술도 아니더군요. 결론은 하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놈은 어쩌면 이브리엄일지도 모릅니다."
"그건 아닐세. 이브리엄이라면 성력이 아니겠는가? 저 아이는 성력과도 관계가 없어."
"그럼 도대체가 어떤 존재일까요? 죽음의 공포도 전혀 없습니다. 감정 자체가 없는 인형과도 같습니다. 바로 전날 있었던 마교 용병과의 전투에서는 패색이 짖자 스스로 자폭하여 주변 일대를 초토화했습니다."
그놈 장군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자네 설명을 들어보니, 마치 살아있는 무기와 같군."
"맞습니다. 적절한 표현입니다. 저놈은 우리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군요. 당연히 말도 하지 못합니다. 마치 본능 하나만을 위해 움직이는 인형 같았습니다."
"그건 그렇고 저 아가씨의 움직임은 정말 훌륭하네. 언 듯 보면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대의 공격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내고 있어. 마나도 없이 저런 움직임을 보이다니 정말 놀랍고도 신기한 기술이야. 내가 나이를 헛먹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네. 만약 그녀의 능력이 더욱 향상되면 마법사 따위로는 그녀를 막을 수 없게 될걸세."
"마교 교주와 처음 대련했을 때 그 생각을 했습니다. 오만 오크와 단신으로 싸울 때의 그 패기를 보고 있노라니 저 자신이 초라해질 정도였습니다. 일만의 오크를 단번에 쓸어 버리는 그 기술. 아직 두려움에 몸서리가 쳐질 정도입니다."
"그래 그때 오크의 시체를 해부해보니 몸 안의 생명력을 모조리 뽑아냈더군. 남은 것은 빠짝 마른 가죽뿐이었으니까."
"그 생명력의 힘을 다른 타인에게 나눠 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마교의 용병들은 교주에게 생명력을 나눠 받고 포션 강화 없이도 마족과 대등하게 싸울 정도였습니다."
"마교 교주라는 사람을 한 번 만나고 싶네. 기회가 된다면 자네가 주선해 주게. 아리스토틀이 그렇게나 감탄한 인재를 나도 한 번 만나 보고 싶네."
칼멘은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지옥참마도법은 공방이 조화로운 도법이다. 이 도법의 가장 큰 특징은 공격 보다 방어에 있는데 상대가 쾌검을 사용하든지 변화가 다양한 환검을 사용하든지 파괴력을 앞세운 무거운 도법을 사용하든지 간에 완벽에 가깝게 방어해 낼수 있다.
지옥참마도법은 원래 천마의 무공은 아니었다. 도 한 자루로 천하를 호령했던 신천신군 마검 유월랑의 독문 도법이었다.
원래 무공의 명칭도 지옥참마도법이 아니었다. 신천도. 단 삼식으로 구성된 이 도법은 패도적이면서도 유연함까지 갖춰 어떤 무공도 방어할 수 있는 전대미문의 도법이었다.
특히 신천도가 빛을 발했던 것은 유월랑이 사파 무리 일백에 둘러싸였을 때 옷자락 하나 베이지 않고 일백을 베어 넘긴 일화는 유명하다.
유월랑은 워낙 신출귀몰한 사람이었기에 말년까지 제자를 두지 못해. 아니 제자로 들어온 자는 몇 명 있었으나 신천도의 오의를 깨닫지 못하고 파문당했다.
그 이후 유월랑은 신천도의 모든 것을 담은 비급서 하나만을 중원에 던져 놓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신천도의 비급서는 삼백 년 넘게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쳤지만 신천도를 완벽하게 구사한 사람은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비급서는 우연히 혁련광의 스승인 천마신군 강운비의 손에 들어갔다. 혁련광은 스승의 서재에서 이 신천도를 발견하고 도법에 매료되어 바로 익혔다. 당시는 신천도가 세상에서 잊혔기 때문에 혁련광이 사용하는 도법이 신천도인걸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신천도는 움직임이 조금 괴팍하여 언 듯 보면 광인이 미친 듯이 도를 휘두르는 모양새고 거기다 천마신군 혁련광이 사용하니,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광신도가 도를 휘두르는 것 같아 사람들이 이 광란의 도법을 가리켜 지옥참마도라 불렀는데 혁련광은 그 명칭이 마음에 들어 도법의 이름을 지옥참마도법으로 바꾸었다.
참마도법이 무서운 것은 깰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검법이나 도법을 무너트려 틈을 만들어야 하는데 참마도법은 깨어지지 않는 도법이었다. 그 어떤 도법과 검법도 지옥참마도법을 깨지 못해 불패의 도법이라 불리기도 했다.
괴물 아이의 움직임에 점점 적응하자 도법의 날카로움이 살아났다.
-사각
싸움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칼멘의 도가 수세가 아닌 공세로 변화되었다.
'베었다.'
확실히 손에 걸리는 느낌은 도 날에 무언가 베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괴물 아이는 멀쩡했다. 상처하는지 없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재차 칼멘을 향해 덤벼 왔다.
치열했다. 칼멘도 물러서지 않았고 괴물 아이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지켜보던 마법사들은 칼멘이 곧 나가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칼멘의 움직임은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고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적극적으로 괴물 아이를 압박해 가기 시작했다.
"저 아이의 검술은 참 특이하구나. 어떻게 저런 움직임을 만들어 낸 것인지 놀랍구나."
"마교는 신기한 단체입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무공이란 것은 제국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역사에서도 거론된 적이 없는 신기한 기술입니다."
"아이가 창이라면 저 아가씨의 검은 방패로구나."
칼멘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한번 검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베었다는 느낌인데 괴물 아이는 멀쩡하게 덤벼왔다.
'속도만 빠르지, 공격은 너무 단조로워서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검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아. 설마 잉겔리움 금속으로도 상처를 줄 수 없는 신체인가?'
칼멘은 내공을 끌어 올려 다시 한번 공격하여 정확히 괴물 아이의 가슴을 베었다. 그 순간 칼멘은 보았다. 검날이 괴물 아이의 피부를 가르고 지나가는 것을 피부가 갈라지고 붉은 살점이 보였는데 순식간에 아물어 버리는 거였다. 검이 빠져나오는 순간에 맞춰 상처는 아물어 버렸다.
"치잇. 미친 재생 능력이군."
베는 속도와 치유되는 속도가 거의 같았기 때문에 눈치를 채지 못한 것이었다.
-쉬이이익
"익"
괴물 아이는 무심한 표정으로 주먹을 내질렀고 칼멘은 급히 검신으로 소년의 주먹을 막았다.
-따땅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검이 반으로 부러졌다.
"뒤로 물러나 이제 교대할 차례다."
눈덩이 위에서 세렌이 날아내렸다. 그녀의 온몸은 자색 기류에 휩싸여 있어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자색 연기가 스스로 움직여 소년을 향해 날아가 가는 것처럼 보였다.
"맙소사! 잉겔리움으로 만든 검이 주먹질에 부러져···."
칼멘은 말을 잊지 못했다. 소년의 주먹이 재자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쉬이이이잉
"이야야압!"
세렌의 기합성이 하늘 끝까지 들릴 정도로 쩌렁 울렸다.
그녀의 바이올렛이 윙윙거리며 비명을 토했다.
세렌은 득달같이 달려들며 천마수라검을 펼쳤다. 그녀의 몸이 검과 일체가 되어 소년을 향해 폭사 되어 갔다.
-팟. 파파팟.
그녀의 검은 방어는 아예 도외시한 공격 일변도의 검이다. 단 한 번의 공격에 괴물 아이를 세 번이나 베어 냈다.
"언니! 상처 재상 속도가 너무 빨라서 검으로는 죽일 수 없어요."
"넌 빨리 물러나 내 공격 범위 안에서 벗어나. 위험해."
"쳇!"
칼멘은 천마비행으로 뒤로 물러났다.
현자 리안니는 세렌의 싸움을 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아주 반대되는 사람이구나. 이번 아가씨는 오로지 공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네, 세렌 라메이트라는 야센족 여성인데 마교 내에서 교주 다음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저 붉은 머리. 야센족 이라면 혹시 패왕 트로이안과 관계가 있는 아이더냐?"
"네, 그렇습니다. 붉은 갈기의 사신이라 불린 트로이안의 딸입니다."
세렌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전력을 다해 싸워 본지가 언제던가? 바이올렛마저 흥분하여 비명을 내질렀다.
앞뒤 안 가리고 괴물 아이를 행해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괴물 아이도 지지 않고 세렌을 향해 달려들었다.
주변에서 이들 싸움을 구경하던 마법사들은 침을 꼴깍 삼키고 두 사람의 싸움에 몰입했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 칼멘의 싸움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싸움이었다. 서로서로 잡아먹기 위해 달려드는 두 마리의 호랑이가 맞부딪친 것처럼 말이다.
"칫. 조금만 기다리라고요. 나도 곧 따라갈 테니."
칼멘은 세렌의 위용에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렌은 점점 신이 났다. 잠자고 있던 천살궁의 기운이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하자 그녀의 몸에서 자색 연무가 더욱 진하게 풍겼다.
'죽인다!'
포탈을 타기 전 스승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렌 잘 들어. 어설프게 놈을 자극하면 자폭할 거다. 죽이려면 단칼에 결딴을 내 버려야 한다. 자폭할 순간을 놈에게 주어서는 안 돼.'
"키아아아아아"
괴물 아이는 처음으로 비명 비슷한 괴성을 질러댔다.
"녀석이 흥분했어. 제대로 된 적수라고 인정한 거다."
칼멘은 속으로 부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적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니까.
그 순간 자색 연무 안에서 커다란 거인의 팔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곧 그 팔은 여섯 개로 늘어났고 여섯 개의 팔은 모두 거대한 검을 들고 있었다.
칼멘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검법이었다. 세렌의 몸에서 거대한 거인이 튀어나오는 듯한 멋진 장관이 연출되었다.
마법사들은 넋을 잃고 그 장면을 바라봤다.
아수라멸천검. 테츠가 펼치면 그 파괴력이 상급 메테오를 뛰어넘는다.
여덟 개의 팔이 팔괘의 방향에서 쏟아져 들어오니 피할 방법이 아예 없는 죽음의 검이다. 오직 상대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절세 무적의 검법이다. 천마의 상징과도 같은 검법이 아수라멸천검이다.
-팟
잘린 아이의 머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각 기 여덟 방향으로 잘린 팔, 다리가 튕겨 날아갔다.
"끔찍한 검법이군."
칼멘이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세렌은 바닥을 차고 날아올라 떨어지는 아이의 머리통을 움켜잡았다.
상상할 수 없는 막강한 위력을 보였던 괴물 아이도 세렌의 아수라멸천검을 버텨 내지 못했다.
-탁
바닥에 가뿐히 착지한 세렌의 손에 잘린 아이의 머리통이 흔들거렸다.
"우와~"
"와."
"봤어?"
"믿을 수 없어."
"맞아. 이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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