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동
준동
중년인은 입에서 게 거품을 물고 양다리를 쭉 뻗고 발발 떨었다.
생나무로 급조한 티가 풀풀 나는 의자에 양팔과 가슴이 굵은 밧줄에 칭칭 감겨 있었다.
그의 몰골을 보면 아주 아주 험한 꼴을 당했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수 있을 정도였다.
마법사들은 마녀와 네크로맨서를 경멸한다. 특히나 그가 잡혀 있는 곳은 베틀 워락의 본거지였으니 말할 필요가 없다.
아직 죽지 않은 것은 그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다 뽑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 네크로맨서도 아는 것을 다 토해내면 자신의 생명이 끝이라는 것을 알기에 용케 버티는 중이었다. 그와 함께 잡혀 온 동료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이미 세상을 등진 상태다.
말을 하지 않고 참는다고 해서 능수는 아니다. 마법사는 그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과거의 기억까지 모조리 쥐어 짜내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심연 깊숙이 가라앉은 기억까지 모조리 말이다. 하지만 그런 기술은 네크로맨서의 소울 슬립과 마찬가지로 피술자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도출한다.
지금은 깜깜한 한 밤이다. 고통스러운 고문의 시간도 이 시간만큼은 한 수 양보하고 있다. 모두 피곤함에 지쳐 잠에 빠져드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각성자인 베틀 워락은 문제가 없지만, 보급대는 죽을 맛이다. 마차도 오르지 못하는 가파른 산비탈 경사를 무거운 짐을 마력으로 들어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 쏟아내는 정신력의 고됨은 머리를 땅이 붙이는 순간 바로 잠에 떨어질 정도였다.
천막이 살짝 걷히고 한 인형이 모습을 보였다.
그는 천천히 네크로맨서가 앉아 있는 나무 의자로 다가갔다. 경비가 있었지만 아무도 이 자의 출현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능숙하게 네크로맨서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
"제기랄! 놈이 자결했다."
동이 터오고 날이 밝자 경비는 점검 차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가 입가에 피를 철철 흘리고 죽어 있는 네크로맨서를 발견했다.
잠시 뒤 몇몇 마법사들이 속속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이거 자살이 아니잖소?"
"조금 잔인하지만, 확인은 해 봐야겠소."
늙은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 서 있던 마법사 한 명이 나서 재빠르게 단검을 그었다. 그러자 네크로맨서의 두개골이 수평으로 잘렸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단검을 든 베틀 워락은 얼굴을 찌푸리며 잘린 두개골을 들어냈다.
"역시."
뇌가 있어야 할 곳은 죽처럼 녹아내려 있었다.
"혹시 이 원인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있소?"
대답하는 이가 없다. 다들 난색의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 한 사람 현자 레노번을 제외하고 말이다.
"현자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 이런 기술은 마법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건 그렇습니다. 마법의 효과 중에 뇌를 죽처럼 녹이는 것은 없습니다. 눈, 귀, 코, 입에서 녹아내린 뇌수가 흘러나온 것으로 보아 상당한 압력이 가해진 것 같습니다."
"오, 정확히 보셨습니다. 뇌압에 의해 녹아내린 뇌수가 빠져나온 것이지요."
"혹 현자님은 이 스킬을 알고 계시는 것 같은 생각입니다?"
"음, 추측이지요. 전에 이와 비슷한 스킬을 본 적이 있긴 합니다만 당사자가 여기 없으니 섣불리 입에 올리기 곤란합니다."
"현자님께서 말씀하시기 곤란하다니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만. 혹시 가능하다면 한 부분만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마지스터."
"삼엄한 베틀 워락의 경비를 뚫고 여기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손에 꼽을 정도지요. 혹시 황제와 관련된 자가 아닙니까?"
레노번은 알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황제라. 글쎄요. 아니라고 할수도 없고 또 맞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오묘한 분이시라.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적은 아닙니다."
마지스터라 불린 늙은 마법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사체를 불태워라."
***
"뭔 일이야? 이른 새벽에 왜 불러낸 거지?"
세렌의 말에 브렌시스는 말없이 히죽히죽 이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야! 말이 말 같지 않아? 네가 평의회의 개든 후아신 왕의 개든 나와 상관없는 일이야."
"아니 그런 뜻으로 웃은 것은 아니고. 말해 줄 것이 있어서 말이지."
세렌은 평상시 가장 경계해온 인물이 바로 브렌시스다. 그가 펼치는 무공은 천마비행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건 내 쪽이 먼저지. 어떻게 천마비행을 배웠지? 그 내공은 어디서 얻었고? 네 진정한 정체가 뭐야? 묻고 싶었지만 며칠째 보이지 않더니 갑자기 날 불러내네?"
"병신아! 마교의 제자니까 무공을 배웠지. 제자 아니고서 어떻게 무공을 배웠겠냐?"
세렌의 눈썹이 확 치켜 올라갔다.
"마교에서 천마비행을 펼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야. 내가 아는 마교 인물 중에는 너 같은 마법사는 없어."
"로한슨이 있잖아. 그는 오르도 왕국에서 굉장히 유명한 인물이 되었어. 평의회에서도 그를 주목하고 있지."
"허, 그럼 로한슨 장로에게서 배운 거라고 둘러댈 참이야?"
"아니 그럴 짬도 없었는걸. 그렇게 배우다가는 몇 년이 걸릴지도 몰라. 속성으로 익히는 방법은 그 방법뿐이니까."
"속성, 그 방법이라면?"
"모른 척 하는 게 아주 귀여운데? 메모라이즈지 뭐긴 뭐야"
세렌의 얼굴이 잠깐 변했다. 하지만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찰나의 순간이어서 상대는 그녀의 감정을 읽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설마 교주님을 말하는 건 아니지?"
"아니긴? 그분이 아니면 어떻게 이른 시간에 무공과 그런 능력을 익혔겠어?"
"교주님이시라고?"
세렌의 콧구멍이 크게 벌어졌다. 그건 공기를 크게 삼키기 위해서였다.
"이런 진정해. 호흡이 흩어지잖아. 아, 아직 한 참 멀었는걸. 말 몇 마디에 감정이 들쑥날쑥 엉망이군."
"···. 부, 불러낸 이유를 말해봐."
"아니? 왜 갑자기 말까지 더듬고 그래? 내가 두려운 건가? 아! 하하. 설마 날 교주님으로 오해한 거? 그건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지. 그러니 안심해."
순간 세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검집에 손을 올리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교주님이 말씀하셨지. 넌 본능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말이야. 보니 확실히 아직 한 참 멀었군."
"말해 날 불러낸 이유를···."
"그러나 정말 검을 뽑겠다. 나는 단지 그분이 내린 명령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야. 너를 불러내라고 한 것은 내 의지가 아니고 그분의 명령이니까. 이해됐지?"
세렌은 검집에서 손을 떼고 한결 부드러운 자세를 취했다.
"그래서?"
브렌시스는 품 안에서 두툼한 편지 하나를 꺼내 든 손을 내밀었다.
세렌과의 거리는 어느 정도 격차가 있어 세렌이 천천히 다가와서 편지를 잡으려 했다.
그때
브렌시스는 손을 뒤로 빼며 편지를 건네주지 않았다.
"무슨 짓이야?"
"말했잖아. 난 늘 그분의 명을 따를 뿐이라고."
"그걸 전해 주라고 하지 않았어?"
"응, 그랬지."
"근데 왜 못 가지게 하는 거지?"
"그런 적 없는데?"
세렌의 눈썹이 꿈틀했고 잽싸게 접근해 편지를 낚아채려 했다. 하지만 이미 짐작하고 있던 브렌시스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세렌의 손길을 뿌리쳤다.
"뭐 하자는 건데?"
"말했잖습니까? 전 어디까지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라고요."
"그거 나 주라고 명령받았다며?"
"당연히 그렇지요."
"그럼 왜 방해하는 거지?"
"준다고 했지 그냥 준다고는 하지 않았거든요."
그제야 세렌이 싱그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뭔가 깨달은 것이 있었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후후, 후후후훗, 하하하하."
그녀는 간드러지게 웃더니 손가락으로 브렌시스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나더러 그걸 뺏어가라 이런 뜻?"
"뭐, 저야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상쾌한 운동은 서로 몸에 좋지 않겠습니까?"
세렌은 손가락으로 이번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교에서 교주님 다음으로 강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서 하는 소리 맞지?"
"글쎄요. 제가 듣기로는···."
갑자기 표정을 굳힌 세렌이 믿기 힘든 속도로 손을 뻗어 왔다.
"호오, 좋은 금나수."
그러나 브렌시스는 세렌의 팔의 각도만 보고서도 어느 쪽으로 접근해 올지 파악하고 잽싸게 허리를 뒤로 꺾어 피해버렸다.
서로 숨소리마저 느낄 수 있는 지극히 짧은 공간에서 몇 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상상도 할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는 세렌의 손길을 짐짓 편안하게 뒷짐까지 지며 피하고 있는 브렌시스다.
잠시 둘 사이에 작은 정적이 끼어들었다.
세렌은 혀로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오랜만에 투기가 바짝 솟아오르는 느낌이다.
남자는 다 개 이하다. 이것이 평소 세렌이 남자를 보는 눈빛에 담긴 의미다. 아 여기서 개란 멍멍 짖는 그 개 맞다.
"너, 입만 산 것이 아니었네. 교주님이 무슨 의미로 널 가르쳤지?"
"난들 어떻게 압니까? 그저 남자 사이에 주고받는 그러니까 계집애는 모르는 그런 남자만의 의미가 있는 거지요."
그 소리에 세렌의 눈꼬리가 확 치켜 올라갔다.
"저런 또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고 화를 돋우는 겁니까?"
"언제까지 그 주둥이를 놀리는지 보자."
각성자에 최상급 수준의 무공을 익힌 천살성의 무위는 이미 탈 인간을 외치고도 남았다. 지금이라면 아무리 칠무신이라도 해도 섣불리 세렌과 맞상대하기 힘들 정도인 거다.
솔직히 이제는 제국에서 그녀를 어찌할 인물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것이 마교 장로들의 지론이었다. 그녀와 제대로 싸우려면 루안은 반드시 끼인 상태에서 최소 두 명 이상의 장로가 사력을 다해야 할 정도다.
솔직히 세렌도 가장 겁내는 것이 루안의 은신전이다. 마교에 있을 때 호기롭게 장로들과 대결을 많이 했지만 단 한 번도 루안의 은신전을 깨뜨린 적이 없었다. 무지의 공포 그 자체가 루안의 은신전이다.
그것 때문에 장로들도 너도나도 루안의 은신전을 배우겠다고 난리 쳐서 테츠가 특별히 단검이나 비도 즉 던지는 무기로 은신전을 펼칠 수 있도록 장로들에게 전수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루안의 활 실력에 은신전이면 아직도 그것을 막아낼 수 있는 장로는 없다고 보는 편이다.
-핑
뭔가 눈앞으로 확 날아들자 세렌은 엉겁결에 낚아챘다. 손을 펴 보니 가장 흔한 싸구려 동전 한 닢이었다. 세렌은 살짝 놀랐다. 동전을 받아든 손바닥이 살짝 찌릿할 정도의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상대방도 적지 않은 내공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동전을 팽개친 세렌이 말했다.
"난 네가 다칠까 하여 전력을 다하지 못하고 있어. 마교 교리에 동료를 공격하지 말라 했거든. 그런데 너는 비겁한 짓을 스스럼없이 저지르는구나."
"좋은 핑계요. 그나저나 언제 뺏을 거요? 난 공격하지 않는다고도 말하지는 않았는데,"
"매를 벌겠다는데 그냥 있을 수는 없지. 다치더라도 원망하지 말기를 부탁하네. 즉 내 말을 교주님에게 하소연하지 말라는 이야기야."
"물론이죠. 아침밥 먹기 전에는 끝낼 수 있는 거죠?"
세렌은 참지 못하고 내공을 끌어 올렸다. 천마비행으로 번개같이 다가가 날렵하게 손을 뻗었다. 이건 작정하고 덤빈 것이라 교주 이외에는 피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사사삭
그러나 항상 예외는 있는 법이다. 세상 이치가 그러할지니.
"천마잠행!"
눈앞에서 쑥 꺼지는 이 신묘한 신법은 잠행뿐이다. 천마잠행은 마교에서도 다른 장로들은 배우지 못했다. 오직 마테니와 그의 제자들만 특별히 배운 신법으로 엘빈 장로가 몇 날 며칠 애걸복걸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신법이다.
사각. 이 신법은 눈앞에서 상대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사각으로 이동 접근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즉 상대의 사각으로 파고들면 그 즉시 공격이 들어올 거란 것은 당연한 이치.
"칫!"
천마잠행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세렌은 찰나의 순간 공격을 멈추고 몸을 비틀어 거리를 벌렸다. 과연 자신의 왼쪽 옆구리 뒤에서 브렌시스의 발이 쑥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순간 식은땀이 흐른 세렌이다.
가소롭게 생각했던 브렌시스의 무력이 세렌을 긴장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핑
또 하나의 동전이 날아들었다. 세렌이 금나수로 낚아채는 순간 집중력을 높였다. 이건 집중력을 흩으려는 술책일 뿐. 이 뒤의 움직임이 진짜 공격을 위한 움직임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접근은 자신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사각일 것이 분명했다. 이제 왼쪽이냐 오른쪽이냐의 문제다. 그 짧디짧은 찰나의 순간 세렌은 야무진 기합 소리와 함께 양발을 힘차게 좌우로 뻗쳤다. 간간이 엘빈 장로에게 배워둔 백로마현의 한 초식을 사용한 것이다.
테츠는 장로들끼리도 서로 무공을 주고받는 것을 허락했다. 배움의 깊이는 본인이 가장 높으니 서로 배움을 나누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 교류를 허락한 것이다. 물론 마테니와 그의 제자는 늘 예외였다.
덕분에 엘빈 장로에게 배워둔 초식이 백로마현이었다.
-팍
과연 자신의 오른쪽 다리에 충격이 와 닿았다.
"호오? 생각보다 반응이 재빠르시군요."
뒤로 물러난 브렌시스는 확실히 다리를 절뚝였다. 세렌도 충격은 받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 사실은 간과하기 힘든 차이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후후, 수련에서 차이가 크게 나는구먼."
"어쩔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저는 속성으로 배웠거든요. 하하."
"그럼 시간 끄는 행위가 얼마나 손해 보는 짓인지도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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