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은 진행되고 있어
사건은 진행되고 있어.
롱홀드 최북단에 있는 데미오스 성은 성이라 불리기에는 모양새가 초라하다. 돌덩이로 쌓은 외벽은 꽤 훌륭한 편이었다. 남서쪽으로 하루거리에 솔라리스 왕국 최고의 채석장이 있다.
여기서 출토되는 석재는 소량의 마력까지 담고 있어 주신 제국 내에서 최고의 가치를 가진다. 일전 마법사들이 엠버스피어에 머물 때 때 동탑을 지은 석재가 바로 이곳에서 채석된 것이다.
얼마나 귀한 석재였으면 맨시티로 이전할 때 동탑을 해체하고 석재를 그대로 가지고 왔을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폐쇄되었고 석공들도 모두 철수한 상태였다.
솔라리스 무역 품목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채석장의 폐쇄, 수도 아칸의 몰락 등 솔라리스 왕국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다.
데미오스 성은 채석장에서 나온 양질의 석재로 축조되었다. 단단함으로만 따지면 롱홀드에서 최고였으며 오크의 침공 때도 일부 성문만 부서졌을 뿐 성 자체는 멀쩡히 남아 있었다.
원래 데미오스 성이 축조된 것도 채석장을 보호하고 물자 수송하는 중간 기착점 역할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곳은 성으로 불림에도 성주도 없고 수비대조차 거의 없었다.
이곳으로 온 병력은 좌천되어 유배 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전쟁이 나거나 솔라리스 왕국이 쑥대밭이 되어도 이곳은 전쟁이 난 지도 모를 정도의 오지였다.
하지만 오크에 이은 마족까지 연이어 출몰하는 바람에 이곳은 죽음의 성이 되었고 오크가 모조리 약탈해 버려 성에 남은 것은 씨 한 톨도 없었다.
베틀 워락들이 모여들어 눈을 증발시키기 시작했다.
탈로스는 과거 데미오스 성을 두어 번 들른 적이 있다. 오크의 침공 때 파괴되었다고 하지만 단단한 성 자체는 무너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현재는 우뚝 솟은 성의 첨탑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을뿐. 남아 있는 성벽을 보지 못했다면 성의 위치를 찾지 못할 뻔했을 정도였다.
"이러면 문제가 심각한데요. 본대가 데미오스로 오는 것은 무리입니다."
한 마법사의 말에 탈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한겨울에 롱홀드에 발을 디딘 것은 그만한 각오를 해야 했소. 데미오스를 거치지 않고 에스카달로 가는 것은 전장에서 후퇴하는 것과 마찬가지요."
탈로스는 딱 잘라 말했다.
마법사들은 성 내부를 녹여 갈 때쯤 세렌이 달려왔다.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늘어선 시체는 오랫동안 눈 밑에 얼어붙어 있었다. 시체라고 하기보다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육편 조각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싶었다.
"갑옷 조각을 보니 반사르가의 문양입니다."
마법사들은 질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오십 명 정도 되는 병력입니다. 모두 기사로 보면 되겠네요. 말의 사체도 있는 것으로 보아 막 겨울이 시작되는 시점에 당한 것 같습니다."
눈이 오기 시작하면 이곳으로 말을 몰고 올 수 없다.
"북쪽으로 올수록 케이사르 개인 사병이 많아지는군."
"본드래곤이 네크로맨서의 소행이라면 케이사르는 테란 고원에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르마할의 이야기로 보면 완벽한 본드래곤을 소환할 수 있는 장소는 울드리히다. 그곳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이 있었으니 온전한 드래곤의 뼈가 대량으로 묻혀 있다고 했으니까. 지금은 테란 고원보다 그쪽을 조사해 보는 것이 먼저다."
"이들을 누가 그랬을까요? 먼젓번 시체의 제단도 그렇고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건 인간의 힘이 아니다. 이들도 포션 각성자다. 그런 기사의 몸뚱이를 육편으로 다질 정도면 엄청난 놈일 거다. 부러진 뼈를 자세히 보라고 온전히 부러진 것이 없어. 뼈까지 산산이 부서질 정도면 어느 정도의 힘이 가해졌는지 짐작할 수 있겠어?"
"오성 내공의 파천수라장을 쳐도 이렇게까지 못할 겁니다."
"오성? 십성의 파천수라장을 때려 박아도 이렇게까진 할 수 없어. 칠무신 사신왕이라도 어림없는 수준이지."
"그럼 이 세상에서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것은요?"
칼멘의 목소리가 짧게 떨렸다. 그만큼 시신의 형태가 끔찍했다.
"세렌 온두라스의 기술을 본 적이 있지?"
"아! 그렇군요. 그 이상한 기술. 인간의 몸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고 안에서부터 폭발해 버리는 기술 말이군요. 혹시 이것이?"
"온두라스의 기술과는 차이가 있어. 온두라스는 안에서 밖으로 폭발시키지만 이건 외부에서 힘이 가해진 거란 말이지. 마크라스는 절단의 기술을 썼었고 이브리엄은 그 기술이 다양해. 만약 또 다른 이브리엄이 존재한다면?"
"혹시 아르마할이 말한 말라키가 처음으로 소환한 그 이브리엄?"
"역사에서 사라진 존재다. 분명 해독서 편에서는 말라키가 처음 이브리엄을 소환했다고 했어. 그 이후의 사건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보라고 그 이후에 나온 것은 이브리엄을 통제하거나 막을 방법을 기록한 것이 훨씬 많아. 그렇다는 것은 처음 소환한 이브리엄이 말라키의 통제를 벗어나 버린 거지. 그래서 이브리엄을 통제하려는 방편을 찾으려 했던 거고."
"그때 소환된 이브리엄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수 없나요? 완벽한 신체를 손에 넣지 않으면 이브리엄도 불멸할 수 없지 않나요?"
"그게 수수께끼야. 처음 소환된 이브리엄이 어떻게 된 건지 기록이 전혀 없어. 만약 케이사르가 어떤 비밀을 알게 됐다면 그걸 건드리고도 남을 놈이지."
"아르마할은 말라키가 이브리엄을 처리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렌의 말에 탈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그 처리 방법이다. 영원히 죽여 없앤 것인지 다른 차원으로 추방한 건지. 어떻게 처리했다는 이야기가 없어. 지금 네크로맨서와 마녀가 함께 있다는 것도 마음에 걸려. 놈이 움직이는 것이 성황의 움직이는 것과 같아. 성황도 마녀와 네크로맨서를 손에 쥐고 있어. 그 둘의 공통점이···."
그때 탈로스는 뭔가 이상한 느낌에 잠시 호흡을 멈췄다.
'그래, 뭔가 계속 신경 쓰였어. 마치 우리를 누군가 지켜보는 것처럼 말이야. 좀처럼 잡히지 않아서 혹시나 했더니만.'
탈로스는 마법사 무리 중에서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풍기는 사람을 발견했다. 아니 정확히 누구인지는 밝혀내지는 못했다. 그들 중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흘리는 인간이 있다는 것만 겨우 느낄 정도였다.
탈로스는 문득 타이탄 그놈 장군의 말이 떠올랐다.
'베틀 워락에는 위치 헌터 출신이 많아서 말이지. 마녀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다고.'
"위치 헌터, 마녀, 네크로맨서. 칠무신 뭔가 수상한 조합이 이루어지고 있어."
세렌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케이사르가 또다시 이브리엄을 소환한 것은 아니겠죠?"
"그건 불가능해. 이브리엄을 소환하기 위한 재료가 없어. 구했다 할지라도 대신전에 마력을 집중시키지 않으면 안 되지. 온두라스와 마크라스 두 명을 소환하기 위해 십 년 동안 셀 수 없을 마력을 대신전에 쏟아부었어. 이브리엄을 소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야."
"그럼 지금 펼쳐진 학살은 설명이 안 되잖아요. 칠무신의 첫째 사신왕 말고는···. 성황뿐이라는 소리잖아요?"
"그래, 성황이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아니면 또 다른 이브리엄의 짓인가?"
"그럼 왜 케이사르의 졸개들을 학살한 거죠? 케이사르는 약삭빠른 녀석이에요. 제어도 되지 않을 것을 소환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칼멘 너의 생각이 옳아. 이건 뭔가 다른 것이 개입한 것 같아."
"도대체 롱홀드에서 겨우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걸 알아보려고 온 거잖아. 세렌, 칼멘 정신 바짝 차려라. 우리는 용의 입속으로 뛰어든 것 같아."
"저야 환영이죠. 용의 이빨을 다 뽑아 버릴 테니까요. 누군가 그 이빨에 씹히는 걸 걱정하지 않아야 한다면요."
칼멘의 눈썹이 지켜 올라갔다.
"누가 씹힐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죠."
'또 다. 어느 놈이지?'
탈로스는 또다시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정말 용의주도한 놈이라 좀처럼 기척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탈로스가 겨우 느끼는 정도니, 세렌이나 칼멘은 인지조차 못 했다.
'단순 호기심인가? 첩자인가? 정말 용의주도한 놈이로군.'
베틀 워락이 데미오스 성 내의 눈을 거의 다 녹였고 무너진 성의 첨탑과 내부로 가는 길이 뚫기 위해 무너진 돌덩이를 치우기 시작했다.
처참하게 당한 반사르가의 기사들은 오십여 명으로 말을 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기마대에 속한 모양이었다. 그들의 무기도 그대로 흩어져 있었고 심지어 보유한 금화, 은화도 육편과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누군가 인간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인간을 극도로 싫어 마족처럼 말입니다."
마법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뇌까렸다.
"화장해도 될까요? 아니면 이대로 내버려 둘까요?"
"그놈 장군에게 보고해야 할 조사는 끝이 났습니까?"
"그렇습니다."
탈로스를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또 한명의 마법사는 일천 워락을 이끄는 자다. 즉 탈로스가 전권을 가지고 있지만 원래는 이 사람 하비스트가 우두머리다.
두껍고 검은 로브에 전신을 묻고 있지만 그의 키는 180이 넘었고 어깨의 선이 굵직한 것이 난쟁이 탈로스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그는 항상 검은 두건을 뒤집어쓰고 있으며 추위 때문에 두꺼운 리넨 천으로 얼굴을 칭칭 동여매고 눈맨 빼꼼 내어놓고 있다.
물론 그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베틀 워락도 대부분 그러한 복장을 유지하고 있다. 베틀 워락의 로브 앞뒤에는 검과 마법 지팡이가 교차하는 이미지가 수놓아져 있다.
하비스트는 그놈 장군이 신뢰하는 최측근 중 한 명이며 유사시 장군을 대신해 일만 베틀 워락을 진두지휘하는 자다.
난쟁이 탈로스는 키가 150이라 고개를 한껏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이 시체가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지 짐작 가는 것이라도?"
하비스트의 무심한 눈길은 절대 흔들림이 없었다.
"왼쪽 갈비뼈에 직격당했고 함몰되면서 폐와 심장을 비롯한 내부 장기가 터진 근육으로 빠져나오기 전에 곤죽이 될 정도로 파괴되었소. 그건 상상 이상의 물리적 괴력이 가해졌다는 거요. 만약 익스플로전과 같이 마력을 이용한 공격이었다면 신체는 완전히 박살이 나서 사방으로 흩뿌려졌겠지만, 마력 측정 결과 아예 없었소. 즉 상대는 순전히 물리적 타격만으로 중무장한 기사를 터트린 것이오."
"그건 나도 예상한 바요. 문제는 제국에서 그러한 외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가 있느냐 하는 것이오."
"마력이 아닌 다른 것이 검출되었소."
"말해 보시오."
"마녀의 흔적이오."
탈로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혹시 순혈이라고 생각하오?"
"순혈은 백마녀에 해당하지, 문제 소지가 별로 없는 존재요. 문제는 주술 흔적이 흑마녀에 속한다는 거요."
"그런 구분은 위치 헌터가 하는 거요?"
"간단히 이치요.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마녀인지 도움이 되는 마녀인지 구분하는 정도는 위치 헌터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게 알고 있는 지식이오."
"그럼 이 소행이 마녀의 짓이라는 거요?"
하비스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녀는 저주나 뿌리는 것들이지. 그녀들의 목은 갈대처럼 부드러워 쉽게 부러지는데 외력으로 인간을 이렇게 만들지는 못하오."
"나는 호문쿨러스를 이야기하는 거요. 그거 그릇이라며?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말이외다."
"이곳에서 호문쿨러스를 만들 소재를 구했다 하더라도···."
"네크로맨서가 도와준다면?"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오. 하지만 인형은 인형일 뿐. 아무리 사악한 것을 넣는다 해도 인형의 몸으로는 절대 이 정도 외력을 낼수는 없소. 내가 아는 역사 안에서는···."
"흑마녀는 어떻게 구분하오?"
"피안화 가루를 뿌리면 눈동자가 붉게 물들어 알수 있소. 피안화 가루는 흑마녀 주술에도 반응하오."
"위치 헌터 출신이오?"
"마녀에 대해 이런 반응이라면 그렇게 믿어도 좋소."
"혹시 피안화 가루가 있다면 조금 얻을 수 있겠소?"
하비스트는 품에서 검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피안화 가루는 구하기 힘들다고 하던데 지금 세상에는 거의 소멸하여 없어졌다고?"
"피안화의 씨를 말린 것은 흑마녀들이오. 유일하게 피안화를 재배하는 곳은 위치 헌터의 본산뿐이오. 피안화 가루는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소."
"그런 피안화 가루를 내게 쉽게 줘도 되는 건지?"
"그놈 장군이 당신의 요구라면 거절하지 말라고 했소."
탈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사가 끝이 났다면 화장해도 좋소."
하비스트는 뒤돌아서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 뒤 칼멘과 세렌이 함께 내성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내부에도 몇몇 시신이 있긴 했지만, 부패가 된 걸로 봐서 사냥꾼 몇 명과 약초꾼이 겨울 이전에 당한 것 같습니다. 사인은 검에 베였습니다."
"그들은 입막음으로 죽임을 당한 거겠지. 어?"
손에 쥐고 있던 피안화 가죽 주머니가 갑작스럽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탈로스의 시선이 칼멘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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