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는 자와 쫓기는 자
쫓는 자와 쫓기는 자
후아신 왕이 보내온 것은 촌각을 다루는 급한 일이었다.
"적이 득실한 굴속으로 혼자 들어가려 하십니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약간의 모험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야."
"모험 정도가 아닌데요?"
"그래 모험 정도가 아니겠지···. 여기 온 건 네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야."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교주님이 원하신다면 무엇이라도···."
"엘리제."
에르제베트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왜? 그 애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어쩔수 없이 생긴 아이잖아. 네가 철천지원수처럼 여기는 자의 딸인데도?"
"어떻게 하시려고요?"
에르제베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끼로 쓸 거야."
"미끼가 될 수 있을까요?"
"너 내가 모르고 있는 줄 알고 있는 모양인데 네가 그토록 엘리제를 아꼈던 이유가 무얼까? 케이사르에게 복종까지 해 가며 엘리제를 위한 삶을 살았어. 아무리 모정이라고 하지만 누구의 자식인지 뻔히 알면서 그 많은 애정을 쏟을 수가 있을까?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자식을 대하듯 말이야."
"···."
"애초에 날 속일 생각일랑 하지 말았어야지. 그냥저냥 넘어갔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난 마교를 이끌어가는 우두머리다. 교칙에 벗어난 행동을 한 자에는 그만한 처벌을 내릴 수밖에 없어."
"···."
"그것이 엘리제의 목숨이라도 말이지. 그 애의 운명이 거기까지라면 나도 어쩔수 없다. 그 애의 운명을 그렇게 만든 것은 모두 너와 토러스 가든인 거지. 내 말이 맞지? 내가 처음 네게 했던 말 기억나?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거짓과 배신입니다."
"그래 잘 알고 있네. 난 이 두 가지를 절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로 생각하고 있어. 마교의 교칙을 만들 때도 무력으로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보다 더 질 나쁜 것이 상대를 속이는 행위, 그리고 배신하는 거라고 못 박았지."
"전 마교를 배신할 생각은 지금도 없습니다."
"말 돌리지만. 배신이 아니라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잖아. 너희 마녀는 입만 떼면 거짓을 쏟아내. 레베카도 그랬고 너도 지금 그러고 있잖아. 철저히 동료를 기만하고 이용하려 하고만 있어. 네가 진정으로 동료를 믿을 때 그만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거지. 지금처럼 날 속이면 나도 널 이용할 수밖에 없어. 이번에는 너 대신 네 딸이 그 일을 대신 하겠지만···."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교주님 제발 그 애만은···."
"네가 진실을 먼저 이야기하고 이렇게 빌었다면 나는 너의 믿음에 답해 주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거짓된 속임으로 일관된 너의 말에는 진실이 담겨 있지 않아. 적어도 난 그렇게 느끼고 있어. 그 애의 운명을 만든 것은 너 자신이야. 진실로 대했다면 나도 진실로 너를 대할 수 있어. 이처럼 간단한 이치를 너는 외면 한 거야."
"앞으로 교주님 앞에서는 일절 거짓을 입에 담지 않겠습니다. 뜻대로 하소서. 제가 어찌 교주님의 명을 거스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날 케이사르 따위와 동일선상에 올리지는 말아줘. 난 받은 만큼만 되돌려 주는 것뿐이니까."
에르제베트는 고개를 숙이고 더는 말을 잊지 못했다.
"마교는 널 붙잡지 않을 거야. 나가고 싶으면 네 두 발로 걸어 나가도 돼. 단 마교 교칙에 따라 무공은 폐쇄 될 거다. 떠나는 사람은 절대 붙잡지 않아. 케이사르처럼 엘리제를 볼모로 너를 옭아매지는 않을 테니까."
"태자 전하를 믿겠습니다. 태자 전하를 위해 이 한목숨 기꺼이 바칠 겁니다. 모든 것을 뜻대로 하소서."
"후후, 교주에서 갑자기 태자 전하라. 나에게 뭔가를 바라지 마라. 바라기 전에 그만큼의 행동을 먼저 보이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모든 것을 잊고 용서하실 때까지 면벽수련에 임하겠습니다."
"하든지 말든지 상관 안 해. 너는 나를 속였을뿐만 아니라 너 자신도 속이고 있어. 실제는 토러스 가든을 사랑한다고 왜 말 못해?"
"그는 제 눈앞에서 부모와 언니를 죽였습니다."
"그게 너의 가식이다. 넌 엘리제를 통해 그 가식을 희석하고 있던 것뿐이었어. 엘리제가 그에 대한 미련의 덩어리였지? 엘리제가 없어지면 남은 것은 그에 대한 미움뿐이니 겁이 난거지. 넌 그걸 받아 드릴 자신이 없었던 거야. 부모와 언니에 대한 복수 이상으로 말이다."
탈로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타인에게 네 삶을 맡기지 말아라. 삶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
탈로스는 방문을 힘껏 걷어찼다.
아울은 화들짝 놀라 읽고 있던 책을 떨어뜨리며 벌떡 일어났다.
"아주 태평하구먼. 태평해."
"교주님 어떤 일로···?"
"어떤 일? 흥, 내 뒤통수를 칠 생각 하다 들켜서 놀랐나 보지?"
"끙, 그 일로 평생 다그칠 생각이십니까?"
"오냐. 내 그럴 생각이다. 네 두 연놈의 작당이 분해 아직 두 다리를 쭉 펴고 잠을 자지 못하고 있어."
"모두 다 태자 전하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약은 영감탱이 주둥이만 떼면 그냥 거짓말이 술술 나오지? 그 나이 먹도록 쌓은 지식만큼 간교함도 쌓였겠지."
"저번 일은 다 말씀드렸고 그 내막 또한 이해시켜 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미 지나간 일이고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음을 태자 전하께서도 이해하시고 넘어가시지 않으셨습니까?"
"응, 그랬어. 옛날 병이 도진 모양이야."
"옛날 병은 무슨 병입니까?"
"뭐긴 뭐야 개망나니 병이지.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너희 두 놈이 그걸 건드렸어. 그때부터 분함이 가시질 않아. 두 다리 펴질 못하고 있거든. 조금 전에 에르제베트를 만나고 왔다."
아울은 흠칫하며 말했다.
"그녀에게 무엇을 하셨습니까?"
"왜? 죽이기라도 했을까 봐? 그건 너무 쉽지. 그녀를 더한 나락으로 빠뜨리기 위해 엘리제를 뺏어 간다. 미끼로 쓰기 위해서···. 막 나가려고 하다 보니 한 놈이 더 생각나더군. 이 망할 영감탱이가 엘리제를 데려갔다는 것을 알면 혹 이상한 곳에 주둥이를 놀릴 우려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녀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왜? 가서 위로해 주려고? 네 생각이나 하지 그래?"
"어차피 이 목숨 태자께서 살리신 것 아닙니까? 저야 그때 죽임을 당했다 해도 오늘내일 했던 터라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해도 마찬가지인데 손해날 게 없습니다. 그럼 고통 없이 빠르게 처리 부탁합니다."
"흥, 네가 없다면 금서 해독을 못 할 것 같지?"
"아마도요."
"에메트라 위트 워놈 브릴랑카 크셈 위트라 아니뇸 트라센."
말라키의 언어에 아울은 매우 놀랐다.
"아니 그 장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오직 저와 이숍뿐이었는데?"
"네가 말라키 언어를 가장 많이 안다고 자부하지 마라. 벌써 따라붙었으니까."
"후, 이제야 재미있는 일을 좀 하려 했더니만 그것도 못 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적당히 살다가 적당한 때에 가는 것이 순리지. 오래 살아 봐야 삶의 목적만 흐려질 뿐이거든."
"됐습니다. 빠르게 해결해 주십시오."
아울은 곳곳이 선체로 두 눈을 감았다.
"어차피 죽었던 삶. 또 한 번 죽는다고 손해날 것은 없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지. 성황이 네게 진짜로 보장한 것은 무엇이더냐?"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여섯 번째 금서를 해독해 주는 대가는 여러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앞으로 테일리아드 왕국은 절대 건들지 않겠다는 절대적인 맹세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마족을 완벽히 퇴치하는 것, 인간의 번영을 방해하지 말 것. 불멸자가 되어도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지 말 것입니다만."
"그 약속이 지켜질 것 같은가? 자네와의 약속은 자제가 죽고 나면 그만이지 않은가?"
"제가 할수 있는 제일 나은 방법이 그것뿐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성황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 성황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은 더 평온해졌습니다."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거지?"
"마녀의 속삭임 덕분입니다.""레베카가 쓸데없는 일을 했군."
"그녀 또 한 불멸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전에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탈로스는 품 안에서 둘둘 말려진 책 한 권을 아울에 던졌다. 엉겁결에 받아든 아울은 그 책이 무엇인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순간 아울의 눈빛이 지식을 향한 갈망을 넘어 탐욕으로 번뜩했다.
"쯧쯧, 늙으나 어리나 탐욕 앞에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구먼."
그 말에 아울은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최대한 해석 해 놔."
"성황과의 약속은 어떻게?"
"네 맘대로 해도 돼. 어차피 내용은 인간을 위한 것일 테니. 성황이 들어줄지 말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주둥이에 밥을 처넣을 시간마저 아깝군요.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아울은 그 자리에서 등을 돌리더니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둘둘 말린 책을 펼쳤다.
그건 윈드러너의 온몸에 새겨진 문신이었다. 물론 실제는 말라키의 언어다. 그걸 탈로스가 그대로 적어 놓은 책이다. 세상에서 오직 한 권만 존재하는 필사본인 셈이다.
당연히 원본은 윈드러너의 몸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
타이탄 그놈 장군은 부하들을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계획이군."
"모두가 머리를 맞대어 찾아낸 결과물입니다."
"마교의 두 용병을 선두에 세운다."
그놈 장군의 말이 끝나자 함께 앉아 있던 베틀 워락 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놈은 표정만 봐도 부하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자존감이 아니라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존감을 찾겠다고 앞서 나가는 자는 네 검을 먼저 상대해야 할 것이다."
그의 말은 무겁고 확신에 차 있었다. 부관들은 모두 표정을 굳혔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자는 없었다.
이미 마교 용병에 대해서는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들의 보여준 무력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차원에 속하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 누구도 마교를 일개 용병 집단으로 치부하지 않을 정도였다. 마교와 협약을 맺었다는 소식 하나만으로 베틀 워락의 사기가 크게 올랐을 정도니까.
베틀 워락이 누구인가? 성군과 자웅을 겨루어도 밀리지 않을 만큼 오르도 왕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기재들이 모여 만든 집단이다.
전사와 기사의 무력에 맞서기 위해 기사 이상의 검술 실력을 갖추었고 전사의 투기를 배우기 위해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드라고나 왕국에서 수련할 만큼 자존감으로 똘똘 뭉친 자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인간 중에는 가장 강력한 집단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 그들조차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것이 마교라는 용병 집단이었다. 이건 그들로서는 도저히 말이 안 되는 현실이었다.
최고 존엄 자들이 모인 평의회에서 내려온 명령이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평의회에서 다크 디멘션 포탈의 유지 재가를 기각했다. 그들은 포탈을 통해 변이 마족이 타마신으로 침입할 수 있다는 탁상공론에 따라 다크 디멘션 포탈을 끄기로 했다.
그건 달리 말해 가장 중요한 보급로가 원천 차단된다는 소리였다. 후아신 왕조차 반대하며 극구 말렸지만, 타마신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판단에 평의회에서 즉시 포탈의 철수를 명령했다.
이것이 오르도 왕국이 가지는 오래된 병폐이며 또 장점이기도 했다. 오르도 왕국의 왕은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왕은 나라를 대표하는 얼굴일 뿐 그 이상의 권력은 평의회에 있었다.
장점이라면 성군이든 악군이든 왕 개인이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거나 전복 시킬수 없다는 것이다. 단점은 입이 많으니 의견 합일에 수달이 소요됐고 심지어 몇 년을 끄는 안건도 있었다.
평의회의 결정은 단 한 명의 반대 없는 만장일치제가 기본이다. 다크 디멘션 포탈의 철거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괴물 아이가 타마신으로 넘어온다면 막을 수 없다는 불안감과 공포가 평의회 소속 파벌의 마음을 일치시켰기 때문이다. 덕분에 적진 한가운데로 내던져진 베틀 워락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졌다.
그 사기를 올리는 데는 마교만 한 인물이 없었다. 그것도 아름다운 미녀라면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이미 세렌과 칼멘의 존재 자체는 베틀 워락들 사이에서 영웅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여신들.
그들 스스로가 두 여인에게 여신이라는 호칭을 붙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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