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나르트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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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모
작품등록일 :
2024.07.17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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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살인사건

DUMMY

파블로는 에르탱이 쓰러져 있는 테이블 너머로 갔다. 에르탱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바닥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엄살 피우지 말고 일어나. 그런다고 내가 그냥 물러설 것 같아?"




에르탱이 엄살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한 파블로는 옆에 서서 빨리 일어서라고 다그쳤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에르탱의 입에서 거품이 나오며 신음소리가 끊어졌다.




뭔가 잘 못 됐음을 직감했다. 파블로는 에르탱의 뺨을 때리며 정신 차리라고 소리쳤다.




"형님, 죽은 것 같은데요?"




에르탱의 상태를 살피던 미겔이 말했다.




"숨을 쉬지 않아요."




"뭐 겨우 그걸로 죽었다고?"




파블로는 난감해졌다. 에르탱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형님, 이제 어떡하죠?"




주교를 죽인다는 건 성모정교의 위세가 여전한 프란디아에서 죽음을 면치 못하는 죄였다. 잠시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던 파블로는 체념한듯 말했다.




"내가 책임 질테니 너희들은 걱정마."




"형수님의 동생이 베르나우에서 법무관으로 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께 부탁드려보는 게 어떨까요?"




처남 토마스 부르켄에게 부탁을 한다고? 파블로의 생각에 엘라이자의 동생 토마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선처를 요청한다 하더라도 과연 사형을 면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렇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썩은 동앗줄이라도 일단 움켜잡아야 한 가닥 희망이라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여기서 자수할테니 넌 빨리 형수에게 가서 동생에게 연락하라고 해. 가능성은 작지만 종교재판이 아니라 일반재판을 받아야 내가 살 구멍이 있어."




에르탱을 죽일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일이 닥치자 죽음이 두려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미겔은 같이온 백정 3명을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파블로는 사제에게 회당 내 2인자인 부주교 기욤을 불러달라고 한 뒤 사고로 에르탱이 죽었다고 자수했다.




기욤은 에르탱의 사망에 경악했다. 파블로는 추궁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불의의 사고란 점을 강조했다. 기욤은 파블로의 애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기욤은 호교사제들에게 명령해 파블로는 회당 지하 뇌옥에다 감금하라고 지시했다.




미겔이 엘라이자와 함께 바덴부르크의 주도 베르나우에 도착했을 때는 사건이 발생한 지 이레가 지난 9월24일이었다. 이곳에서 미겔은 드라구노프 공작의 쿠데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미겔은 국왕이 강제로 폐위되는 등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엘라이자의 동생 토마스의 신변에도 이상이 있을까 걱정됐다. 다행히 토마스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단 자리를 지키는 것뿐 아니라 일찌감치 혁명세력과 손을 잡아 위세가 이전보다 더 당당해져 있었다. 엘라이자는 토마스에게 지난 이야기를 모두 들려줬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도리아가 그렇게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니..."




"네 매형을 살리려면 교단이 아니라 이곳 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하는 길밖에 없어. 만약 종교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다면 사형을 당하고 말거야. 도리아도 그렇게 보냈는데 네 매형마저 그렇게 간다면 난 살 수가 없어."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엘라이자를 보자 토마스는 마음이 아팠다. 엘라이자는 토마스보다 열다섯 살이 많은 큰누나로 어릴 때 토마스를 업어서 키워 사실상 엄마 같은 존재였다.




"누님,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지금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요. 제가 힘 닿는데까지 노력해볼게요."




"그래 고맙구나. 도리스를 그렇게 죽인 에르탱이 나쁜 놈이지 네 매형은 정말 아무 잘못이 없어."




"네 너무 걱정마시고 제 집에서 며칠 머무르세요. 제 집사람이 잘 보살펴 줄 거예요."




엘라이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은 했지만 토마스 입장에서는 사실 난감했다. 주교가 죽은 사안이기 때문에 교단측이 쉽사리 파블로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곳 베르나우에 진주한 혁명군 사령관 글라트 노벨도르프 장군과 상의하면 뭔가 방법이 나올 것 같았다.




혁명군은 법무청 건물에서 한 블럭 떨어진 거리에 있는 시청에 사령부를 차리고 있었다. 토마스는 법무청을 나와 시청으로 향했다.




토마스와 동갑인 45세의 노벨도르프 장군은 스피글리츠의 군개혁 덕분에 평민으로 장군의 지위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일찌감치 드라구노프 공작의 쿠데타 계획에 동참한 초창기 멤버로서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정치와 종교를 엄격히 분리해야한다는 정교분리주의 신봉자였다.




노벨도르프는 역시 평민 출신으로 고위 테크노크라트가 된 토마스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비록 둘이 만난지는 채 한 달이 되지 않았지만 기존 왕정에 깊은 불신을 가지고 있던 토마스와 쉽게 의기투합했다.




드라구노프의 혁명정신에 매료된 토마스는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많은 관료들에게 혁명의 당위성을 설파하며 혁명세력에 동참하라고 설득했다. 이런 토마스의 노력 덕분에 노벨도르프는 큰 어려움 없이 베르나우를 장악할 수 있었다.




토마스의 이런 노력을 잘 알고 있던 노벨도르프는 따로 토마스를 불렀고 둘이 향후 정국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뜻이 같다는 걸 알게 됐다. 이후 둘은 마치 어린 시절부터 사귀었던 친구처럼 격의없이 만나는 사이가 됐다.




토마스의 방문 소식에 노벨도르프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집무실로 불렀다.




"토마스, 한창 바쁠텐데 어쩐 일인가?"




"바쁘긴 하지만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바쁜 거라 힘든줄 모르고 일에 푹 빠져 있네. 하하."




"그래, 조만간 우리는 좋은 세상을 보게 될거야."




서로 덕담을 나누며 안부를 주고받은 후 토마스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사실 부탁할게 있어서 왔네."




"부탁? 그래 말해보게.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들어줘야지."




토마스는 엘라이자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를 노벨도르프에게 모두 들려줬다. 노벨도르프는 자못 심각하게 이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자네 이야기는 자네 매형 파블로를 이곳 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해야한다는 말이지?"




"그렇다네."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교단이 양보하려 하지 않을거야. 자기네 주교가 회당 내에서 살해된 사건인데 우리 법원으로 사건을 가져오기 위한 명분도 부족하고..."




토마스도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섰다가는 사랑하는 누님의 남편이 교단의 손에 화형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노벨도르프를 설득해야 했다.




"드라구노프 공작 각하께서 혁명을 일으킨 이유가 뭔가? 바로 이 같은 폐단을 척결하기 위한 것 아닌가. 그래서 나도 적극적으로 혁명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네."




"알아, 알고 있네. 하지만..."




"자, 이번 사건을 단순히 일반인이 주교를 죽인 사건으로 본다면 당연히 우리 법원에서 처리하기 힘들지. 그러나 한 번 발상을 전환해보게."




"발상을 전환하라니 어떻게?"




토마스는 노벨도르프를 설득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떠오른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토마스의 아이디어는 나름 일리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 사건을 주교 살해사건이 아니라 사제들의 만연한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단초로 이용하자는..."




"바로 그렇네. 매형이 에르탱을 찾아간 이유가 바로 딸 도리아의 억울한 죽음 때문이었지. 에르탱은 고리대금업으로 치부를 한데다 멀쩡한 사람에게 빚을 지게 해 도리아의 딸을 빼앗았고 도리아를 죽였네. 그리고 교단의 수습사제모집 사업이 이런 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해야하네. 이 같은 폐단을 바로 잡는 게 바로 혁명정부가 할 일이야."




노벨도르프 역시 어린 시절 고향에서 회당 사제들의 각종 비리와 폐단을 두 눈으로 목격한 바 있었다. 춘궁기에 구휼식량을 나눠준 뒤 가을 수확기에 몇 배로 빼앗아가는 일은 일상 다반사였다.




교단의 폐단은 너무도 심각했지만 수백 년 동안 이 땅의 종교를 지배해온 기득권은 너무도 강건했다. 왕이 바뀌고 심지어 왕조가 바뀌어도 교단은 여전히 승승장구했다.




이번 혁명은 게오르크의 반개혁적 정책을 뒤집고 다시 스피글리츠의 개혁을 이어가 부강하고 깨끗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추진됐다. 하지만 드라구노프 공작의 혁명공약에는 교단에 대한 조치는 빠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 만연했던 민중 폭동의 원인 중 하나가 교단의 폐단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너무 교단의 눈치를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모험을 시도해볼 만했다. 노벨도르프의 눈에도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교단을 그대로 두고서는 도무지 혁명정부의 개혁이 성공하기 어려워 보였다.




"일단 벨라시타로 전서구를 보내 이 같은 내용을 공작 각하께 알리겠네."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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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태동하는 잠룡 24.08.05 2 0 10쪽
92 태동하는 잠룡 24.08.05 5 0 11쪽
91 테동하는 잠룡 24.08.05 5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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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태동하는 잠룡 24.08.05 2 0 10쪽
87 태동하는 잠룡 24.08.05 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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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태동하는 잠룡 24.08.05 3 0 12쪽
84 주교살인사건 24.08.04 6 0 11쪽
83 주교살인사건 24.08.04 4 0 11쪽
82 주교살인사건 24.08.04 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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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4 0 10쪽
69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5 0 10쪽
68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4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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