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나르트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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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모
작품등록일 :
2024.07.17 0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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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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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살인사건

DUMMY

벨라시타로부터 답장이 온 것은 나흘이 지난 후인 9월28일이었다.




서신에서 드라구노프는 자신도 교단의 폐해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이를 바로 잡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노라며 노벨도르프에게 바덴부르크 대교구에 대한 특별감찰을 승인했다. 한 번 건드려 보고 교단의 대응에 따라 이후 행보를 정하겠다고 덧붙였다.




노벨도르프는 벨라시타로 전서를 보냈을 때 이미 승인이 날 것이라는 전제 하에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드라구노프의 승인이 떨어졌으니 이제 실행만 하면 됐다.




대주교 수사는 세속 권력이 종교 권력을 상대로 사실상 전면전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노벨도르프는 이 중차대한 일을 누구에게 맡길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었다.




그러다가 결국 슈피온에서 정보수집과 수사 등 경험이 많은 헤르만 비켄바우어 중령을 낙점했다. 그는 매사 신중하고 정석대로 일을 처리하는 강직한 인물로 성모정교라는 거대 권력을 상대로도 결코 피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다.




노벨도르프는 비켄바우어를 군수사대 지휘관으로 임명한 뒤 베르나우 대회당으로 병력을 급파했다.




비켄바우어는 병력 20여명을 대동한 채 베르나우 대회당에 도착했다. 군수사대가 왔다는 소식에 대회당의 사제들은 바깥으로 나와 이들을 저지하려 했다.




사제들의 저항은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비켄바우어는 지체없이 병사들에게 칼을 뽑을 것을 명령하고 사제들에게 길을 비키라고 위협했다. 비켄바우어의 기세로 볼 때 계속 버틸 경우 실제 칼을 쓸 것이라는 판단이 선 사제들은 순순히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대회당에 들어선 비켄바우어는 베르나우 대교구장 가니에 대주교의 집무실로 직진했다.




대주교 집무실 앞 사무실에 있던 비서 베르덩 주교는 갑작스런 군인들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혁명정부의 명령에 따라 가니에 대주교를 만나러 왔소."




비켄바우어는 고압적인 자세로 베르덩에게 말했다. 베르덩은 즉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가니에에게 이 일을 알렸다.




"들어 오시랍니다."




비켄바우어는 너무 많은 병력을 데리고 들어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보고 부관 2명만 대동한 채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기도를 하고 있었는 지 가니에는 집무실 안 성모조각상 앞에서 막 일어서고 있었다. 그는 군인들을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 온화한 얼굴이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오."




비켄바우어는 가니에의 안내에 따라 넓은 집무실 한 켠에 있는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았다.




"혁명으로 바쁘실텐데 어쩐 일로 이렇게 오셨습니까?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나요?"




온갖 술수가 난무하는 교단에서 대교구장까지 오른 가니에를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비켄바우어는 가니에 앞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지난 9월17일 미어덴 교구에서 일어난 에르탱 주교 살인사건의 용의자 파블로 짐머만의 신병 인도를 공식 요청하는 바입니다."




가니에는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듯 서류를 멀찍이 물리며 실눈을 뜨고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서류를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본인도 이 사건에 대한 보고는 받은 바 있소이다. 이 사건은 주교를 살해한 사건으로 이미 우리 교단 재판소에 회부된 상황이에요. 세속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을 일은 없을 것 같군요."




"그래서 이렇게 혁명정부 이름으로 요청드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 세상에는 세상법이 있듯이 우리 교단에는 교단의 율법이 있어요. 주교를 살해한 것은 교단 율법에서 그야말로 금기 중의 금기. 파블로씨는 교단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아야 해요."




가니에는 온화한 말투였지만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의지는 충분히 읽혔다.




"거기 서류에 써 있듯이 사망한 에르탱 주교는 주교의 신분으로 고리대금업을 했을 뿐 아니라 수습사제모집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멀쩡한 여인의 딸을 강탈해간 파렴치범입니다. 세속의 법률을 위반한 사안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고 이에 대한 사법권은 우리 혁명정부에 있음을 통고드리는 바입니다."




'파렴치범'이라는 말에 가니에는 발끈했다.




"성모를 모시고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에게 파렴치범이라니오. 너무 나가신 것 아닙니까?"




이번에는 오히려 비켄바우어가 차분하게 말했다.




"대주교님, 저는 명령대로 집행할 뿐입니다. 사실 이렇게 통고를 드리는 것도 교단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 혁명정부에서는 결정된 사안이라는 걸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 교단을 핍박한다면 교황청에서 가만 있지 않을 것이오. 중령은 천벌이 무섭지도 않습니까."




"언제부터 우리 프란디아가 교황청의 속국이었습니까? 우리 혁명정부는 명확한 정교분리가 원칙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일리야 폰 드라구노프 공작 각하께도 보고드렸고, 승인을 받았습니다."




젊디 젊은 장교의 위압적인 말투가 고희를 넘긴 가니에 귀에는 몹시도 언짢게 들렸다. 하는 행동으로 볼 때 쉽사리 물러날 것 같지도 않았다.




"주교가 살해된 사건이라 교황청에서도 이 일에 대해 주시하고 있소이다. 아마 조만간 로텐부르크에서 파견된 재판관들이 이쪽으로 도착할 것이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번 사건의 관할권은 분명 우리 교단에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는 바이오. 이에 대해 어떠한 간섭이 있다면 교황청에서 개입할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할 것이오."




가니에는 비켄바우어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만약 교단의 결정을 무시한다면 교황청에서 물리력을 동원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였다.




둘 사이에는 잠시 적막감이 흘렀다. 비켄바우어는 한참 동안 가니에의 눈을 응시하다 군모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겠습니다. 관할권을 넘길 생각이 없다는 말씀이시죠? 그럼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의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치를 취한다고 에둘러 말했지만 이는 곧 군사를 동원해서라도 파블로의 신병을 확보하겠다는 말이었다.




"중령님, 만약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다면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걱정마십시오. 저는 명령대로만 움직일 뿐입니다. 책임은 아마 우리 정부에서 질 것입니다."




비켄바우어가 짧은 면담을 마치고 대회당을 떠났다. 비켄바우어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가니에는 베르덩을 불러 파블로의 현재 위치를 즉각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한편 파블로는 사건 당일 자수를 한 후 미어덴 회당의 회개실에 감금됐다. 사안의 심각성을 깨달은 기욤 부주교는 즉각 베르나우의 가니에 대주교에게 이 사실을 알려 이후 조치를 하달해달라고 요청한 바 있었다.




가니에는 벨라시타 대교구장 가브리엔 대주교와 교황청 산하 내사원에 즉각 통보했다. 내사원은 베르나우로 즉각 재판관을 파견할 것이며 파블로의 신병도 베르나우 대회당 측에서 확보해놓으라고 지시했다.




베르덩은 파블로 호송대가 9월20일 미어덴을 떠났기 때문에 하루 이틀 안에 도착할 것이라고 가니에에게 보고했다. 가니에는 혁명군이 중간에 파블로를 가로챌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수도회성 소속 호교사제 20명을 파견하라고 지시했다.




교황청 포교국 산하 수도회성은 수도회의 수도사들을 관리하는 게 주임무지만 당대에 이르러서는 호교사제라는 무력집단을 보유한 사실상 교황청의 군사조직이었다. 이런 호교사제를 20명이나 보낸다는 건 파블로를 빼돌리려는 시도에 무력을 써서라도 막겠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가니에 나름대로 빠르게 대처했지만 군수사대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이들은 이미 나흘 전 파블로 호송대의 위치를 파악해 베르나우로 오는 길목인 빌다우에서 파블로의 신병을 확보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파블로 호송대의 책임자는 기욤 부주교였다. 그는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직접 호교사제 4명을 대동해 베르나우로 오고 있었다.




기욤 일행이 빌다우에 도착한 때는 미어덴을 떠난지 여드레가 지난 9월28일이었다.




마을 인구가 300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어서 이곳 회당은 100명도 수용하지 못할 만큼 자그마했다. 일단 이곳 회당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결정하고 회당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회당 쪽으로 가던 기욤 일행은 마을로 들어가는 대로 입구에서 일단의 군인들과 마주쳤다. 노벨도르프가 미리 파견한 군수사대였다.




"잠깐 멈추시오."




갑작스런 군인들의 등장에 기욤은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혁명이 일어난 이래 지금까지 혁명정부와 교단이 부딪힌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군인들이 사제들의 행보를 막아서다니...




"우리는 죄인을 호송하고 있는 교단의 사제들이오. 무슨 일로 그러시오?"




베르나우에서 벌어진 일을 알 리가 없던 기욤은 별 일이 아니기를 바라며 물었다.




"이 죄수가 에르탱 주교를 살해한 파블로 짐머만이 틀림없소?"




사건이 발생한 지 열흘 정도 지났을 뿐인데 어떻게 이곳 병사들이 주교 살해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일까. 기욤은 뭔가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소. 주교 살인죄로 베르나우에서 재판을 받을 예정이어서 우리가 호송 중이오."




이 말을 듣고 병사들이 물러나길 바랐지만 헛된 희망이었다. 병사들의 지휘관은 손에 쥐고 있던 명령서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성모정교 미어덴 교구 교구장 에르탱 주교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파블로 짐머만의 신병은 991년 9월28일부로 혁명정부 베르나우 사령부로 이관됨을 통보드리겠소."




이 말과 함께 병사 10여명이 호송대를 둘러싼 뒤 호교사제를 뒤로 물리치고 수레를 빼앗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기욤은 당황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이 자는 우리 교단에 죄를 저지른 죄인이오. 당장 돌려주시오."




"지금 당신들이 여기서 우리랑 실랑이할 시간이 없을 것이오. 당장 미어덴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오."




"그게 무슨..."




"조만간 바덴부르크주를 관장하고 있는 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미어덴 회당에 대한 특별감찰이 실시될 것이오. 에르탱의 고리대금업을 비롯한 회당 사무 전반에 관한 특별감찰 말이오."




"아니 세상에, 하늘이 무섭지도 않소이까? 감히 에쉬르의 전당에 특별감찰이라니 이 무슨 무도한 망동이오."




"더 이상 프란디아에서 교단의 특권 같은 것은 없을 것이오. 이는 드라구노프 공작 각하의 뜻이니 알아서 잘 처신하시오."




군수사대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파블로를 실은 수레를 끌고 베르나우 쪽을 향해 나아갔다. 기욤 일행은 군인들이 지평선 너머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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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테동하는 잠룡 24.08.05 5 0 10쪽
90 태동하는 잠룡 24.08.05 3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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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태동하는 잠룡 24.08.05 2 0 10쪽
87 태동하는 잠룡 24.08.05 4 0 12쪽
86 태동하는 잠룡 24.08.05 5 0 14쪽
85 태동하는 잠룡 24.08.05 3 0 12쪽
84 주교살인사건 24.08.04 5 0 11쪽
83 주교살인사건 24.08.04 4 0 11쪽
» 주교살인사건 24.08.04 7 0 11쪽
81 주교살인사건 24.08.04 5 0 9쪽
80 주교살인사건 24.08.04 3 0 10쪽
79 주교살인사건 24.08.04 3 0 11쪽
78 주교살인사건 24.08.04 5 0 10쪽
77 주교살인사건 24.08.04 3 0 10쪽
76 주교살인사건 24.08.04 4 0 9쪽
75 주교살인사건 24.08.04 5 0 10쪽
74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4 0 10쪽
73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3 0 11쪽
72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4 0 11쪽
71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3 0 11쪽
70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4 0 10쪽
69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5 0 10쪽
68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4 0 10쪽
67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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