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나르트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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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모
작품등록일 :
2024.07.17 04:50
최근연재일 :
2024.08.05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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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5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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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동하는 잠룡

DUMMY

"아버님도 이제 일흔을 넘가면서 많이 노쇠해지셨는데 이제 후계문제를 매듭지어야 하지 않을까요?"




헬무트가 먼저 운을 뗐다.




"서방님,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보기에는 아버님은 아직 정정하세요."




"형수님도 잘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제가 3년 만에 아버님을 뵙는데 예전에 비해 이마에 주름도 많이 늘었고, 판단력이 예전 같지가 않아 보여요."




"제가 아는 건 아버님께서 아직 정정하시다는 것과 판단력도 예전 못지 않다는 것뿐이에요."




카타리나는 지금 후계문제가 언급돼봐야 카를로스에게 전혀 유리할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헬무트가 자꾸 후계문제를 언급하자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형수님, 제 말은 아버님께서 당장 물러나셔야 한다는 게 아니라 후계자를 미리 정해 두는 게 여러모로 좋다는 뜻이에요."




"가문의 어른이 건재한 상황에서 후계문제를 들먹이는 건 불효이자 불충 아닌가요?"




"드라구노프 공작의 쿠데타 이후 이곳 트란베스트는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에요. 아버님께 모든 짐을 지우고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누군가 짐을 나눠지는 게 좋다는 것이죠."




"좋아요. 그럼 누가 후계자가 돼야 한다는 거지요? 서열로 본다면 당연히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 할텐데 서방님도 여기에는 동의하시죠?"




"아, 아니 그건 우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지요. 후계자는 아버님께서 알아서 고르시지 않겠습니까?"




"아버님의 판단력이 예전 같지 않다면서요. 그런 판단력을 믿는 것보다는 기존 서열대로 후계자가 정해져야 뒷말도 없을 것 아닌가요?"




카타리나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헬무트가 아니었다.




"그야 그렇죠. 근데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은 비상상황 아닙니까.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 가문을 보다 잘 이끌 수 있는 사람이 이끄는 게..."




"그게 서방님이라는 말씀이시죠? 그렇게 형님을 제치고 후계자가 되고 싶으세요?"




"아니, 꼭 제가 돼야 한다는 게 아니라 말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와인을 연신 들이키고 있던 카를로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이야기는 그만 하도록 해. 아직 아버님이 정정하신데 후계자는 무슨 후계자야. 아버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하실거야."




적당히 취기가 오른 헬무트는 카를로스의 말에 피식 웃었다.




"너 지금 형이 말하는데 비웃었냐?"




헬무트는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형님, 고정하세요. 제가 비웃은 게 아니구요."




"이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우스워 보여? 어디서 감히 후계자 운운하면서 내 앞에서 떠드는 거야?"




카를로스가 흥분하자 헬무트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형님, 정말 모르셔서 그러세요? 이번 임무가 끝나고 드레멘에 들린 게 여자 때문이라는 걸 사람들이 계속 모를 거라 생각하세요?"




노기등등했던 카를로스의 기세가 순식간에 꺽였다. 벌떡 일어났던 카를로스는 제대로 화풀이도 못한 채 민망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형님, 세상에는 영원한 비밀이란 없어요. 형수님께 죄송하지만 이 이야기는 안 할 수 없네요. 형님이 애인 만나려고 드레멘에 들린 건 금세 소문이 퍼질 거예요."




이번에는 카타리나가 나섰다.




"형님이 애인 만나러 드레멘에 갔다는 증거가 어디 있나요? 괜한 말로 트집잡지 마세요."




"어떻게든 형님의 허물을 덮으려는 형수님의 노력이 가상합니다만 안타깝네요. 증거는 당장 없지만 증인은 있습니다."




"증인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죠?"




"그야 두고보면 알겠죠. 어쨌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게 전부입니다."




"정말 어떻게든 형님을 자리에서 끌어내리겠다는 거군요. 말씀대로 한 번 두고보죠."




"더 있다가는 정말 형수님과 서먹해지겠네요. 앞으로 계속 얼굴을 봐야할 사이인데 오늘은 이만 하죠."?




헬무트는 술 잘 마셨다며 인사를 한 뒤 호탕한 웃음과 함께 연회실 문을 열고 나갔다.?




카타리나는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헬무트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은 알폰소의 귀에도 들어갔다는 의미였다.




고작 옛애인을 만나러 갔다가 이 사단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난다면 카를로스는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카타리나는 알폰소가 이 일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다음 일을 모색해봐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카를로스는 언제 알폰소가 호출할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카를로스보다 더 마음을 졸이는 사람은 카타리나였다. 비젠도르프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으리, 후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중신회의에 참석하라고 지금 당장 집무실로 오시라고 합니다."




카를로스는 올게 왔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여자 때문에 병사 100명을 잃은 데 대한 징계를 받을 것만 같았다.




관복을 챙겨입은 카를로스는 어깨가 축 늘어진 채 문밖을 나섰다.




"저도 같이 가요."




카타리나가 따라 나섰다. 불길한 생각이 든 카타리나는 알폰소가 만약 카를로스의 후계자리를 박탈하려 한다면 온몸으로 막을 요량이었다.




"남자들 일하는 데 여자가 왜 나서? 그냥 집에 있어."




"지금 남자 여자 따질 때예요? 당신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데 제가 집에 편하게 있을 수 있나요?"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아버님이 중신들을 불러 회의를 하는데 당신이 끼어서 될 일이 아니야."




"딱 봐도 당신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는 자린데 뭐라도 해봐야죠. 당신이 아무리 그래도 전 참석할 거니깐 더 아무 말도 마세요."




카타리나는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그 고집을 꺾은 적이 없었다. 카를로스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휙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알폰소의 집무실에 들어섰을 때 내부는 자못 심각한 분위기였다.




알폰소가 중앙 의자에 앉아 있고 양쪽 소파에는 가신들이 쭉 앉아 있었다. 알폰소의 바로 왼쪽에는 헬무트가 보란듯이 앉아 있었다.




원래 카를로스가 앉아야 할 자리였다. 카를로스가 빈자리가 있나 둘러보고 있을 때 알폰소는 오른쪽 끝자리에 빨리 앉으라고 손짓했다.




카를로스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알폰소가 지정한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러자 카타리나가 카를로스를 제지했다.




"이건 아니죠, 아버님. 가문의 장자가 이런 말석에 앉는 게 어느 나라 법인가요? 당신은 어서 저쪽에 가서 앉으세요."




"당신 왜이래 정말. 왜 여기까지 따라와서 이러는 거야? 아버님 보기 안 부끄러워?"




"당신이 제 자리를 못찾고 말석에 앉는 게 더 부끄러워요. 잔말 말고 어서 저 앞자리로 가세요."?




헬무트는 자신의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카를로스는 그 자리에 앉지도, 자기 자리를 찾아가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모습으로 있었다.




그때 알폰소 바로 오른쪽에 앉아 있던 제쿠 경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를로스 경,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제가 그쪽에 앉겠습니다."




제쿠의 눈치빠른 양보로 어색한 상황은 겨우 종료됐다. 카타리나는 이 정도는 양보할 수 있다며 카를로스를 어서 가서 앉으라고 손짓했다.




카를로스는 바늘방석에 앉는 기분이었다. 가까이서 알폰소의 노기등등한 얼굴을 보자 더 주눅이 들었다.




알폰소가 헬무트에게 손짓하며 시작하라고 말했다.




"방금 전 드레멘의 베른슈타인 대령이 우리 쪽에 서신과 함께 시신 3구를 보내왔습니다."




'드레멘, 시신 3구'라는 말에 카를로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헬무트는 카를로스를 향해 야릇한 미소를 지은 후 말을 이었다.




"베른슈타인 대령은 서신을 통해 우리 가문의 병사 96명을 반혁명죄 혐의로 구금 중임을 알려왔습니다. 그리고 교전 중 3명이 사망했다며 그 시신을 보내왔습니다."




회의 석상에서는 탄식이 흘러 나왔다.




"그 많은 병력이 모두 붙잡혔다니... 큰일이군요."




"죽은 병사는 에드바르트 키실링을 포함해 카를로스 경을 호위하던 병사 3명입니다."




에드가 죽었다는 말에 카를로스는 깜짝 놀랐다. 자기를 대신해 붙잡혔을 것이라고 생각만 했지 죽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헬무트의 말이 끝나자 알폰소가 카를로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카를로스, 여기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카를로스는 쥐구멍이 있다면 기어 들어가고 싶었다. 가문의 쟁쟁한 가신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이런 공개망신을 당하다니.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카를로스는 들릴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전부 제 불찰입니다."




알폰소는 천천히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막중한 임무를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일 때문에 드레멘에 들러 물의를 일으킨 카를로스의 행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소. 이에 본인은..."?




카타리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여기서 만약 후계자 자리를 박탈한다는 말이 나온다면 다시 주워담기가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그 말이 나오기 전에 막아야 했다.




"잠깐만요. 제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회의 석상 끝자락에 서서 지켜보던 카타리나가 소리를 외치며 손을 번쩍 들자 시선이 모두 카타리나에게로 향했다. 헬무트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아니, 형수님. 여기가 어디라고 끼어드는 겁니까? 중신들이 회의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세요?"




카타리나는 헬무트의 질책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버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그런 것이니 서방님은 참견 마세요."




"뭐라구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알폰소는 벌떡 일어서려는 헬무트를 제지했다. 알폰소도 며느리가 갑작스럽게 끼어들어 화가 났다. 그러나 남편을 위하는 마음에 그러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가, 네가 여기 참석한 것만 해도 이례적이거늘 발언권을 달라는 게냐?"




"네, 아버님. 지금 말씀드리지 않으면 평생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요. 그렇게 되느니 지금 아버님께 야단 맞더라도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도저히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알폰소도 큰며느리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냥 체념했다.




"그래, 할 말이 있다니 말해보거라."




"제가 끼어드는 건 주제 넘는 짓인줄 잘 알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런 것이니 이해해주시길 바랄게요."




"길게 시간을 주진 않겠다. 너 하고 싶은 말을 빨리 하거라."




카타리나는 일단 숨을 가다듬고 차분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님께서 그이가 여자 문제로 병사들을 잃게 만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많이 화나신 건 저도 잘 알아요. 하지만 모든 일은 공과를 따져야 한다고 봐요."




"공과?"




"네, 공과요. 그이가 비록 개인적인 볼 일 때문에 드레멘을 들러 이번 사단이 벌어졌지만 아버님께서 맡긴 임무는 성실히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봐요. 그런데 이런 공은 전혀 몰라주시고 실수 하나만 문제삼는 건 공평한 처사가 아니라는 게 제 생각이에요."




헬무트는 카타리나의 말을 계속 듣고 있을 만큼 인내심이 없었다.




"아니 형수, 그게 말이나 됩니까? 이번 아버님께서 형님에게 맡긴 임무라고 해봐야 얼굴 마담으로 회의에 참석하는 것. 그리고 이미 사전에 합의한 합의문에 사인하는 것밖에 더 있었나요? 베스타노프 장군과의 동맹건도 그래요. 말이 동맹이지 서로 각자 싸우자는 거잖아요?"




카타리나는 먹이를 본 야수의 눈빛으로 헬무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보자 헬무트도 적잖이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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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태동하는 잠룡 24.08.05 3 0 9쪽
93 태동하는 잠룡 24.08.05 2 0 10쪽
92 태동하는 잠룡 24.08.05 5 0 11쪽
91 테동하는 잠룡 24.08.05 5 0 10쪽
90 태동하는 잠룡 24.08.05 3 0 10쪽
89 태동하는 잠룡 24.08.05 3 0 10쪽
88 태동하는 잠룡 24.08.05 3 0 10쪽
» 태동하는 잠룡 24.08.05 5 0 12쪽
86 태동하는 잠룡 24.08.05 5 0 14쪽
85 태동하는 잠룡 24.08.05 4 0 12쪽
84 주교살인사건 24.08.04 6 0 11쪽
83 주교살인사건 24.08.04 4 0 11쪽
82 주교살인사건 24.08.04 7 0 11쪽
81 주교살인사건 24.08.04 6 0 9쪽
80 주교살인사건 24.08.04 3 0 10쪽
79 주교살인사건 24.08.04 3 0 11쪽
78 주교살인사건 24.08.04 5 0 10쪽
77 주교살인사건 24.08.04 4 0 10쪽
76 주교살인사건 24.08.04 5 0 9쪽
75 주교살인사건 24.08.04 5 0 10쪽
74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4 0 10쪽
73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3 0 11쪽
72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4 0 11쪽
71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3 0 11쪽
70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4 0 10쪽
69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5 0 10쪽
68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4 0 10쪽
67 반혁명동맹 결성 24.08.03 8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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