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 찐 머리를 한 아이들
유정 스님의 말대로 악령이 잡귀를 흡수하는 것이라면 다가오는 귀신들을 지금처럼 방관하다 악령이 가로채려고 할 것이 뻔했다. 악령은 계약을 위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성실하게 이행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성실하게 이행할 생각이 없는 건 당연지사지만. 그렇다면 날짜의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이 있을까. 그마저도 악령이 어긴다면 당장 내일 죽어도 모를 일이다.
악령은 가끔 이런 말을 했었다. 인간이 내 손에 들어오면 미치거나 죽거나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연서와 같은 계약자들이 더 있지 않았을까 했던 연서의 추측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사람의 몸을 더 빨리 차지하기 위해 계약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버티지 못하는 상황들이 발생했기 때문에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인간에서 인간으로 갈아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연서의 엄마도 그 계약자 들 중에 하나 일 수 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놔주지 않아서 새벽녘에야 잠들 수 있었다.
**
이른 아침부터 도윤과 연서는 출발할 채비를 했다. 어머니는 더 일찍 일어나셔서 만드신 샌드위치 도시락통을 자신 있게 들이미셨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니 가면서 먹자!”
센스쟁이 어머니. 출발한 후 근처에서 시원한 아메리카노까지 샀다. 오늘의 도착지는 구미다. 장거리 운전이니 도윤과 연서가 바꿔가며 운전을 하기로 했다.
날도 좋고. 커피도 한 잔 마시며 정성이 담긴 어머니표 샌드위치를 먹고 있자니 귀신 때문에 급하게 가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이건 거의 여행 급인데.. 악령만 아니면 얼마나 좋았을까..
<쇼하고 있네. 목숨이 간당간당하는 팔자에 안 맞게 호사스럽지?>
연서는 듣는 둥 마는 둥 신경도 쓰지 않았다. 네가 속이 타는구나. 난 살 거 같은데.
어머니는 연서에게 친한 이모님을 뵈러 간다고만 얘기해 줬다. 도윤은 이미 1번 채팅 방에서 다 확인한 내용이었다. CCTV 못지않은 귀신이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연서는 이렇게 멀리까지 가는 게 처음이라 상황에 맞지 않게 설레었다. 여행을 다녀 본 적도 없고 딱히 놀 거리를 즐겨보지도 않았다. 악령이라는 알의 껍데기를 이제야 부리로 쪼아 부수고 나오려는 것이다.
시간이 꽤 걸리는 거리라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다. 연서는 아이처럼 그저 신이 나서 휴게소를 구경하느라 바빴다. 그 사이 잠시 어머니는 도윤을 불러 더 자세한 내용을 알려주었다.
휴게소를 구경하며 연서는 악령을 살짝 찔러봤다.
“근데 너. 쥐새끼. 힌트 줘야지 왜 안 줘? 약속 이행 안 해?”
<지난번에 한꺼번에 줬잖아~ 키키키킼킼. 며칠 치 한 번에 준 건데?>
“내가 아는 게 90%인 힌트는 크게 의미 없어. 네가 양으로 때려 박으면서 방해하는 거 밖에 안돼. 머리 꼭대기에서 다 아는 것 마냥 굴더니. 너도 뭐 없어? 소리만 요란한 빈 깡통이야?”
<이 X이! 누가 더 안 준대!! 어디서 기어올라!! 니 주제에!!>
“하긴. 귀신이 양심 같은 고귀한 게 있겠냐.. 사람도 아니고.. 머리 쓴다고 쓰는 게 고작 그 정도니.. 쯧쯧쯧.”
<허! 뭐 던져주면 써먹지도 못하는 게 생 난리네.>
이번에도 마지막 대화는 무시했다. 좀 찔러보니 또 혼자 씩씩거리는 악령. 이렇게 한 번씩 무시를 해줘야 흔들리게 할 수 있다.
각자 간식거리를 조금 사서 다시 출발했다. 뒷자리에 앉은 연서는 어떻게 또 힌트를 얻어낼지 생각 중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악령이 갑자기 몇몇 장면을 노출했다.
연서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눈을 감고 집중했다.
***
굿. 굿판이다. 보이는 장면이 꽤 오래전의 풍경인 듯했다. 굿의 상차림은 상당히 화려하고 푸짐했다. 중년의 무당과 20대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십 대 정도로 보이는 한복을 입은 어린 여자아이 둘이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굿을 돕는 사람들로 보인다.
그 여자아이들은 똑같은 한복을 입고 있다. 누가 누군지 모를 만큼 쪽 찐 머리도 같았다. 약간 닮은 얼굴이기는 했지만 잘 보면 많이 닮지 않았다.
무당은 작두인지 뭔지 모르는 큰 칼 덩어리를 들고 뛴다. 그러곤 먼저 한 아이에게 무속 행위를 했다. 무당은 이 아이가 잘 되게 해달라는 것인지, 도와 달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하늘에 고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첫 번째 여자아이에게 칼을 여기저기에 대거나 치는 듯한 행위를 한다. 연서는 그것이 어떤 뜻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한참을 하고 두 번째 아이를 불러와 이불인지, 천 인지를 뒤집어 씌운 뒤 뭔지 모를 것들을 이어갔다.
몇몇 장면들만 숏폼으로 딴 것처럼 보여줘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작두까지 타고 굿은 끝이 났다.
***
중요한 장면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등장인물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다시 한번 떠올려 중년의 무당과 20대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여자아이 두 명의 얼굴에 집중했다.
무당과 20대의 여자는 닮은 점이 많았다. 그리고 둘 다 어딘가 낯이 익은 기시감이 들었다. 첫 번째의 어린 여자아이도 어딘가 낯이 익었다. 이 굿은 무엇을 상징할까.
연서는 2번 채팅 방에 지금 본 내용을 자세히 써서 올렸다. 앞 좌석의 어머니는 채팅을 읽고 나서 놀란 표정으로 잠시 연서를 쳐다보며 눈을 맞췄다.
연서는 다시 움직이는 차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레지나 수녀님은 친구인 송민진에게 올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바쁠 텐데도 도와주는 친구한테 서둘러 달라고 닦달을 할 수도 없는지라 인터넷을 검색하는 것 외에는 지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예전 기사부터 블로그나 카페 등도 다 둘러보았다. 하. 뭐 이렇게 꽁꽁 숨었나. 하는 찰나에 너튜브에 오래전 짧게 올라왔던 어떤 방송 프로그램의 영상을 찾았다.
김주성의 피해자를 인터뷰하는 장면과 김주성의 악행에 관해 축약된 편집본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때 당시 주목을 받지 못했는지 조회 수가 높지 않았고 댓글도 없었다. 피해자의 인터뷰는 모자이크 처리와 음성 변조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영상을 보고 있는 중에 피해자의 인터뷰 중의 한 마디가 귀에 꽂혔다.
“그래서.. 저희가.. 피해자 모임을 만들어서.. 소송을 하기로 했어요.”
피해자 모임? 피해자 모임이 있었다면! 더 파면 무언가 나올지도 모른다!
수녀님은 바로 송민진에게 이 영상의 링크를 보냈다. 나보다 송민진의 정보력이 더 넓을 것이므로. 이 세상에서 지우개로 지워버린 듯 사라졌던 김주성의 추악한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
한참을 달려 구미에 도착했다.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다 보니 더 이상 차가 들어갈 수 없었다.
모두 내려서 천천히 산을 올랐다.
“연서야 괜찮니? 힘들지 않아?”
어머니는 줄곧 연서가 신경 쓰였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 괜찮아요~ 산도 낮아서 가파르지도 않고. 한 거라고는 뒷좌석에 앉아서 편하게 온 것 뿐이라 아직 팔팔해요. 하핫”
“어머니는 괜찮으세요?”
“하도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좀 뻐근한데 나쁘지는 않네.”
도윤은 두 사람의 뒤에서 손으로 밀어주며 웃었다.
“왕비님 공주님은 제가 뒤에서 밀어 드리겠습니다~”
어머니는 웃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그럼 너는 왕자야? 시종이야?”
“저는 당연히 왕자죠! 어마 마마랑 공주님이 있는데 왕자죠. 아 황태자로 할게요. 공주님 있으니까.”
연서는 어머니를 따라 웃으며 생각했다.
‘먼 소리야.’
***
사람이 다니지 않는 외진 곳. 도윤이 앞서서 나뭇가지를 주워 길을 터주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잠시 걷다 보니 깃발과 함께 낡은 나무판자가 보였다.
[천왕 대신당]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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