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消滅)
박 선생님은 궁금하신지 연서에게 물었다.
“연서야 그 악령이 빠져나가니 까 몸 상태가 확실히 다르니? 확실하게 빠져나갔다는게 느껴져?”
“네네. 저야 뭐.. 평생을 찌뿌둥과 피로감과 눈 통증이나 기타 등등을 달고 살아서.. 다들 만성피로 얘기들을 하잖아요. 그래서 그냥 그런건 줄 알았어요.”
연서는 어떻게 비교가 될 수 있을지 잠시 생각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못했고. 현대인들 다 그런거니까. 이랬었거든요. 어.. 쉽게 비교하자면! 4계절 내내 두꺼운 겨울 가죽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반팔에 반바지 입은 느낌이요. 하하핫.”
“와 그정도야? 힘들었겠네 연서가..”
도윤도 옆에서 고생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솔직히 아직은 악령이 떠난것이 몸 컨디션을 빼면 실감나지 않았다. 익숙해 지려면 시간이 조금 걸리겠구나.. 하는 정도다.
이렇게 두 달의 대장정이 마지막 5일을 남기고 끝났다. 그리고 박 선생님 댁에 도착한 후에 가족들과 단체 통화를 했다. 박 선생님도 함께. 다들 기쁨에 난리가 났다.
***
“어머나 아휴,.. 흐흐흑.. 연서야..잘했다..너무 고생했어..우리 연서 장하다 정말..”
“그래.. 정말 고생 많았다. 이제 새로운 인생 시작이야. 우리 연서 대견하다 정말.”
“연서야 이제 행복하자. 진짜 우리 행복할 일만 남았네. 바쁘겠다 행복하려면~!”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 나중에 놀러도 가고 이것저것 추억도 많이 만들자.”
“도윤이도 고생이 많았어. 아들 멋지다. 든든하게 연서 옆에서 잘 챙겨주고. 내가 너를 낳고 지금이 가장 뿌듯하다.”
“내가 낳았지 당신이 낳았어요?”
“아니 그래도 이게 같이 그게. 좀 맞잖아요?”
“연서야 기분은 어때 느낌이 막 상쾌하고 그러려나?”
“우리 사찰에서 밥 먹고가라 연서야 절 밥이 그렇게 맛있다. 나중에 와서 밥먹자.”
“아니 너는 애한테 한다는게 겨우 절밥 먹으라는 말이나 하는거야?”
“아니~ 내가 뭘 크게 해줄 수 없으니 나는 그게 최선이지 수녀님아.”
“뭐 수녀님아? 이게 누나한테!”
“이 스님놈아!”
“아우~ 시끄러 시끄러 싸우려면 둘이 따로 통화를 해~”
“허허허.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지요~”
“아니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거예요! 서른도 넘은 것들이 애야? 어? 애야?”
***
박 선생님과 우리 둘은 한마디도 못하고 웃고만 있었다. 서로들 말하려고 앞서다 보니 누가 무슨말을 했는지도 구분이 안갔다. 그래도 즐거웠다. 이 상황이 재밌어서 웃고 있는데 도윤이 바로 통화 종료를 눌러버렸다.
결국 우리는 인사도 못하고 대답도 못하고 웃다가 끊었다.
“참.. 행복한 가정이야. 연서에게도 정말 잘해주시네~.”
박 선생님은 몸 보신을 위한 삼계탕을 준비하신다고 하셨다. 이집 냉장고에서는 닭을 키우나.. 열면 닭도 몇 마리 나오고.. 생선 나오고.. 호박잎나오고.. 화수분이야 화수분..
이 고성이란 지역이 점점 더 신기해진다. 정보 좀 알려고 물어보면 다나와.. 요리 재료도 다나와.. 아프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고성의 추억이 쌓여가는 마지막 날 이었다.
박 선생님께서 만들어주신 삼계탕을 오늘도 맛있게 뚝딱 먹었다. 다 함께 정리를 하고나니 선생님이 믹스커피를 타주셨다.
“와우~ 얼마만인가 이 믹스 커피!”
“믹스 커피 괜찮아?”
“그럼요~ 없어서 못마시죠~ 카페에서는 믹스 커피가 안팔잖아요.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도윤이 오늘따라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듯 혈색이 좋았다.
박 선생님은 커피를 마시며 연서에게 물으셨다.
“연서야. 기분이 좀 어때. 어찌보면 지금 연서의 인생이 뒤집어 진거 잖아. 어떤 기분일까 궁금하네.”
“사실.. 아직은 실감이 안나요. 그리고 전.. 악령의 어린 시절을 종종 꿈에서 보기도 했었고.. 그래서 그 아이와 현재의 악령을 분리해서 생각했어요. 지금은 악마지만. 어릴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어린아이였으니까요.”
연서도 달달한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그리고.. 그 아이의 외로움과 서러움이 저에게 계속 남아 있어서.. 그게 참 힘들었어요 마음이.. 어릴때의 저를 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어요. 아주 많이 외로웠겠구나 저 아이가.. 그래서 그 아이와 관련된 어른들에게 화가 났어요. 권자영과 권자영의 엄마 박이선, 할머니 신해주. 고조할머니인 이름 모를 사나운 그 할머니까지. 다.. 어른들의 문제 잖아요..”
박 선생님과 도윤은 말없이 연서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가슴이 아팠거든요 그 아이가. 하지만 악은 악이잖아요. 과거의 아이는 제 마음을 시리게 했지만 지금의 악령은 그냥 악마인거니까요. 그리고..”
잠시의 정적에 연서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악령은.. 저에게 일부러 권자영의 정보를 줬어요. 찾아낼 수 있게요. 권자영이라도 찾고 싶었던 거예요. 보고싶었던거죠. 그런데 미치도록 증오하기도 했어요. 결국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된 건 악령의 역할도 컸어요.
죽어서까지 그리움과 증오가 뒤섞여 버려서 그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이승을 방황한거죠. 지독하게 악한 모습으로. 저는.. 괜찮아요. 더 시간이 지나면 더 괜찮아 질거예요.”
말을 마친 연서는 편안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커피를 다 마신 후 연서와 도윤은 다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박 선생님은 아쉬워 하셨지만 더 머무르고 있기에는 가족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박 선생님은 두 사람은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리고 연서의 집 주소와 도윤의 집 주소도 물어보셨다. 좋은 생선이나 식재료가 들어오면 혼자 못드셔서 나눠드리곤 하신다며 보내주겠다고 하셨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아쉬운 발길을 서울로 돌렸다.
*******
그렇게 도윤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이틀을 보냈다. 이틀 내내 파티 분위기여서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어머니께서 싸주신 반찬들을 차에 가득 싣고 연서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 집이다~”
약속이나 한듯 둘은 문을 열자마자 동시에 외쳤다.
“하하하. 이것도 우리 시그니처다. 집에만 들어오면 와~ 집이다~”
“하핫. 그렇지~ 아 며칠은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쉬고 싶어~ 도윤아.. 정말 너무 고마워.. 고생도 많이 했어.. 너 없었으면 혼자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을거야.. 고마워.”
연서는 도윤을 끌어안고 고맙다는 마음을 전했다. 도윤은 그런 연서의 얼굴을 바라보며 괜찮다고 말한다. 그리고 후련하다고.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하는 말과 함께 도윤의 뜨거운 숨결이 연서의 입술을 핥았다.
부드럽고 따듯하게 입을 맞추며 더 깊은 숨결을 느꼈다. 연서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뭘 준비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지금은 이대로가 좋았다. 공부도 좀 필요하고. 흠.
도윤이 그런 연서의 마음을 알고 이야기를 한다.
“걱정하지마. 천천히 다가갈게. 달아나지만 마.”
붉어진 얼굴을 숙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연서를 도윤이 한 번 더 꽉 안았다.
이제. 우리의 사랑은. 자유다!
***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같은 일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연서야. 타로 샵은 언제 열거야? 좀 더 쉴거야?”
“음~ 좀 더 쉴거야. 두 달 동안 쉰게 아니라 더 바빴잖아. 후훗. 그래서 그냥 너랑 여행도 가보고 싶고 편하게 쉬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어.”
“여행 좋지~ 우리 두 달 동안 지출이 생각보다 적어서 여행갈 여유있어. 기름값 밥값 이런거 밖에 안들었어. 하하하.”
“어디로 여행을 가볼지 그것도 참 즐거운 고민이네. 신기해. 남들은 이미 진작에 다 해본걸 나는 이제 해보려고 생각을 할 수 있다는거 자체가 신기해.”
도윤은 연서의 손가락을 만지작 거렸다. 그리고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더 늦기전에 전해야 할 것 같다는 도윤의 표정이 긴장되어 보였다.
“뭔데? 편하게 말해 도 돼~”
“으흠.. 저기.. 다른게 아니고.. 너희 아버지.. 말이야.. 찾아볼 생각은 없어?”
“음.. 어떻게 찾지.. 그 분이 결혼을 하시고 아이도 있을지도 모르고.. 서류상 친부로 남아있는 기록도 전혀 없어. 그래서 어릴때부터 아빠라는 존재는 아예 내 것이 아닌 기분이어서.. 크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어. 근데 그건 왜?”
도윤은 한참 뜸을 들였다. 말을 하려다가 멈추고를 몇 번을 반복한 후에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기억하는 이름이.. 성민이라고 했지?”
“어. 그냥 엄마가 성민이라고만 불렀어.”
“그.. 수녀님이. 고성에 가면 김유범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했던 말 기억나?”
“아. 어어 기억나. 권자영 말한거 아니었나?”
다시 도윤은 망설이고 있었다. 분명히 꼭 해야할 말이다. 용기를 내자.
“그 성민이라는 분. 성이 박씨야. 나도 몰랐어. 그리고 고성의 박 선생님. 그분 성함이.. 박성민이셔..”
연서의 사고회로가 멈췄다. 그대로 얼어버렸다.
“어······ 어? 뭐라고?”
“하아.. 박 선생님. 그 분이 네 아버지인거 같아.”
멍해져 아무런 표정이 없는 연서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결국 그 눈물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우는지도 모른다. 그런 연서를 도윤이 품에 안았다.
‘울고 싶은만큼 마음껏 울어도 돼. 연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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