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야 사는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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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김버드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7.20 13:16
최근연재일 :
2024.08.30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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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4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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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오디션

DUMMY

섭외 전화는 분명 기쁜 소식이지만. 다들 영문을 모르니 당혹스럽다는 얼굴이었다.


“뭐, 뭐야? 뮤직 타임에서 연락이 왔다고?!”

“오디션 장에서 분위기 나빴다며? 근데 뽑혔다고? 공 실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유 사장과 공 실장만 당황한 게 아니다. 김해성도 이게 어찌 된 것인지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MBS에서 전화했다면, 김화영 역으로 미소를 뽑겠다는 건가? 하긴. 미소 연기가 대단하긴 했지. 그런데 뮤직 타임에서는 무슨 일이지? TBC 방송국이면 장위준 피디가 힘 써준 건가?’


오디션에서 연락한 것은 그나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뮤직 타임에서 연락이 왔다니. 거기에 오디션을 합격해 버렸다면, 깡패들에겐 또 뭐라고 할지.


생각할 거리가 많았지만 어쨌거나 공수혁이 자신을 쫓아내려 한 지금. 이것만큼 반가운 희소식이 있으랴. 김해성은 표정을 정리하고 나섰다.


“우선 수락부터 하죠.”

“그, 그러지! 뭐해? 김 매니저 말대로 빨리하겠다고 답부터 해!”


아직까지 당황한 공수혁과 달리 침착한 김해성이었다. 두 사람을 보자 유새홍 사장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김해성 때문에 망하고 있다는 공수혁의 발언이 정말 사실인가? -하는 의구심이.


때문이었다. 섭외 전화에 응하고 미팅 날짜가 잡혔을 때. 유새홍 사장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실무란 실무는 모두 직원에게 맡기던 양반이, 미팅 장소까지 따라나선 것이었다.


먼저 잡힌 MBS 제작진과의 인사 자리. 커피를 돌린다는 명목으로 따라온 유새홍 사장은 제작진의 칭찬 세례를 직관하게 되었다.


“유미소 배우가 바로 이예리 배우를 보고 분위기를 잡는데, 이야. 저 진짜 깜짝 놀랐잖아요. 물 뿌릴 때부터 현장감이 팍 살아나서, 내가 진짜 강력하게 추천했어요. 미소 배우는 꼭 함께해야 한다고! 첫사랑 배역이야 그냥 예쁘기만 하면 되지만 감정 싣는 악역은 더 어려운데. 비결이 뭐에요?”


메인 작가 박일혜의 질문에 유미소는 김해성을 가리켰다.


“저희 매니저님이 저한테 더 잘 맞을 배역을 추천해 주셔서요. 덕분에 잘한 것 같습니다.”

“이야. 매니저 능력이 좋네! 배역을 바꿔서 오디션 보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잘됐네요.”

“아닙니다. 미소가 열심히 한 결과죠 뭐.”


김해성은 손사래를 쳤지만 이 또한 겸손으로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래? 미소가 배역을 바꾸고 오디션에 붙은 게 전부 김 매니저 능력 덕분인 거야?! 근데 김 매니저는 이걸 자기 공으로 안 돌리고 겸손했던 거네. 별걸 다 자기 덕으로 돌리는 공 실장이랑은 완전히 다르구만?’


유새홍이 김해성을 더 새로이 보고 있을 때. 제작진 아닌 다른 사람들이 김해성에게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가는 모습도 보았다.


“김 매니저. 아까 인사한 사람들은 누구야? 서로 아는 사이 같던데.”

“아, 이예리 배우와 O&D 엔터의 양지현 팀장이라는 사람입니다. 촬영 동안 잘 해보자고 먼저 말해주네요.”

“그으래?”


‘오디션 때문에 O&D 엔터랑은 완전히 텄다고 공수혁이 호들갑 떨지 않았나? O&D는 핫칠링 소속이라 우리랑 원래 사이가 안 좋은데 그래도 인사할 정도면···. 김 매니저 때문에 매장될 분위기라고 난리를 치더니만, 그리 나빠 보이지 않는데?’


물론 이것은 착각이었다. 인사하는 두 매니저를 가까이서 보았다면 두 사람의 떫은 표정이 누구나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눈치챘을 테니 말이다.


같은 배역을 두고 경쟁하던 사이에서 이제는 동료 배역으로 함께 촬영해야 하는 사이로 변한 탓에, 이예리와 O&D 엔터 쪽도 별수 없이 성질을 죽인 것이었지만···.


먼 자리에 있는 데다가 사정을 모르는 유새홍 사장 눈에는, 이 또한 공수혁의 헛소리로 느껴졌다.


*


뒤이어 잡힌 TBC의 뮤직 타임은 더욱 의외였다. 뮤직 타임의 섭외 전화가 온 뒤로, 공수혁은 이 모든 것을 자기 공으로 돌렸다.


공수혁이 아니면 뮤직 타임에서 연락할 이유가 없기도 하니, 더욱 말이다. 김해성을 빼놓고 유새홍 사장과 함께 TBC로 향하는 내내, 자기 자랑에 열을 올린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제가 또 뮤직 타임 이 피디님과 막역한 사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다리를 놓은 덕분에 뮤직타임에 블루문도 매번 뮤직 타임에서 컴백무대 한 거잖아요.”

“그렇지. 출연할 때마다 지갑이 엄청 깨지긴 했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죠. 원래 방송이 다 그런 것 아닙니까? 뜨기 전까지는 돈으로 서포트 해야 하는 게 소속사 일이지 않습니까 사장님. 뭐, 김 매니저처럼 시답잖은 라디오만 나갈 게 아니라면요.”

“아휴···. 너무 높게 부르지 않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TBC에 도착해서도 공수혁은 거드름을 피웠다.


“어, 저기 저쪽 회의실에 계신 분이 뮤직 타임 이한솔 피디입니다. 제가 먼저 인사드리죠. 아이고 이 피디님! 저 버드 엔터의 공수혁이입니다!”

“아, 네! 처음 뵙겠습니다 공수혁 매니저님.”

“푸흡···!”


공수혁의 주장은 꽤 그럴싸했었다. 친한 척 인사하는 공수혁 실장을, 이한솔 피디가 기억해 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공수혁이 망신을 당하면서. 유새홍 사장은 비웃음과 동시에 돈 걱정이 더 심해졌다.


‘뭐야. 인맥 때문에 부른 것도 아니면···. 혹시 우리한테서 돈 뜯어내려고 부른 건가? 공 실장이 워낙 돈을 많이 쓰니까···?!’


유새홍 사장의 걱정은 점차 심해졌다. 이한솔 피디가 직접 설명해주는 방송 취지가 그랬다.


“저희가 이번에 특집 방송을 만들 겁니다. 아이돌을 두 팀씩 묶어서 자신들 노래와 다른 그룹의 히트곡을 바꿔 부르는 거죠. 이벤트 성으로 팬들이 딱 좋아할 무대 아닙니까. 이미 하겠다고 답한 아이돌이 많습니다. 탑맨즈, 고고몬, 퀸걸스···. 아, 그리고 핫칠링도 컴백 일정만 조율되면 참가할 거고요.”


이한솔 피디가 불러준 명단을 들어보니 다들 면면이 화려했다. 대형 기획사 출신의 탑 아이돌에, 차트를 씹어먹는 대세 그룹 핫칠링까지···. 무명은 블루문 뿐이랄까.


생각지도 못한 대단한 규모에, 버드 엔터 대표로 테이블에 앉은 공수혁도 쫄은 기색이었다.


“어, 엄청나네요···. 여기에 저희 블루문도 불러주신다는 거죠? 그, 그러면 혹시 무대 비용은 얼마쯤 필요할까요? 이천만 원 정도면 되겠습니까···?”


일부 음악 방송에서는 방송 출연을 대가로 무대 설치 비용을 높게 부르곤 했다. 방송사의 미술 예산으로는 무대를 제대로 꾸미기 힘든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제안서에 나온 시안을 보니 이번 특집 방송의 무대 미술 구성은 대략 오백만 원 선. 즉, 공수혁은 이한솔 피디에게 천오백만 원의 차익으로 성의를 보이려는 것이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유새홍은 이에 동의하면서도 어쩐지 속이 탔다. 같이 출연하는 핫칠링이 걸쩍지근하다는 점에 더해 돈 걱정 때문이었다.


‘이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으니까 무조건 해야 하지만, 이천만 원은···. 크윽···. 활동 기간도 아닌데 음악 방송에 이렇게 많은 돈을 태워야 한단 말이야? 공 실장이랑 일하면 어째 돈 나가는 것밖에 없어···!’


버드 엔터야 실질적 주인인 유새문 회장이 음지에서 손꼽히는 부자이고, 그 덕에 소형 기획사답지 않게 빵빵하게 지원받는 환경이라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바지사장인 유새홍의 입장에서는 유새문 회장을 만나 제작비를 타 쓰는 게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만사를 돈 지랄로 해결하려는 공수혁의 비즈니스 성향은 골치 아팠다.


그런데 이런 유새홍 사장에게 한 줄기 광명이 비췄으니. 공실장의 무대 설치비 이야기에 이한솔 피디가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무대 비용을 내신다뇨! 아닙니다. 저희가 먼저 출연 부탁을 드리는 건데 그럴 수 있나요. 이번 특집 방송은 편하게 오시면 됩니다.”


“네?! 아니, 정말입니까? 저희가요?”

“자, 잠시만요. 저희 애들은 블루문입니다. 뭐 다른 그룹이랑 착각하신 것 아니죠?”


그전까지는 무대 비용 명목으로 뒷돈을 엄청 찔러야 겨우 한번 출연이 가능했던 프로에서, 아무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니···.


그건 대형 기획사 출신의 탑 아이돌만이 받을 수 있는 호의였다. 믿지 못하는 유새홍과 공수혁의 표정을 보고 이한솔 피디가 웃었다.


“하하. 아직 블루문이 유명한 그룹은 아니지만···. 제가 블루문한테 투자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가 볼 때 블루문의 신곡은 무조건 뜰 각이거든요.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하납니다. 이번 특집 무대를 기깔 나게 꾸려서, 버즈량(화제성)만 높여주세요!”

“네? 시, 신곡이라면···. 다크소울 말씀하시는 거죠···?!”


이한솔 피디가 화제성을 부탁했지만, 공수혁 귀에 박힌 것은 신곡 이야기였다.


공수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점핑은 음악 방송도 돌지 않고 신문에 광고도 때리지 않은, 사실상 홍보비 0원의 깜짝 발매 음원이었다.


김해성이 나름대로 점핑을 영업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시장판을 돌아다니고 돈도 안 되는 라디오를 들쑤신 것뿐이다. 팬들 외엔 점핑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공수혁은 그리 믿고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활동을 종료한 지 꽤 되었음에도, 이한솔 피디가 언급한 신곡이 다크소울이길 바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다크소울은 자신이 프로듀싱한 곡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한솔 피디는 웃는 얼굴로 공수혁의 바람을 무참히 박살 냈다.


“다크소울요? 아 그건 모르겠고···. 제가 말하는 건 점핑입니다. 이번에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바로 귀에 딱 꽂히더라고요. 뉴튜브에 올린 뮤직비디오랑 녹음 과정 비하인드도 좋았고요. 멤버들이 진지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는 게, 뭔가 느낌이 좋던데요. 이 정도면 넷상에서 좀 먹힐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달까?”

“아, 하하! 그, 그러시구나. 뭐 뭐로 알게 되었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보다 다음 미팅은 언제입니까? 멤버들도 다 데리고 인사드리고 싶은데.”


공수혁은 필사적으로 말을 돌렸다. 이한솔 피디의 발언은 위험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욕했던 김해성의 모든 행동이 오히려 이번 섭외의 키가 되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유새홍 사장은 바보가 아니었다. 공수혁이 애써서 화제를 돌렸지만, 유 사장의 마음속에는 이미 전보다 커진 의심이 자리했다.


‘김 매니저가 잡은 라디오 스케줄 덕분에 점핑을 알게 된 거고, 그 덕에 돈도 안 뜯기고 뮤직 타임에 섭외된 거라고? 그럼 공 실장은 이번에도 입만 턴 거잖아. 실제로 따온 건 김해성 매니저고 말이야.’


김해성이 프로듀싱을 잘하는 줄은 알고 있었으나, 방송 섭외와 인맥 관리는 공 실장이 더 전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마저 아니었다니!


심지어 김해성 매니저는 홍보비에 큰돈을 쓰지도 않았는데, 효과는 오히려 더 좋은 것 아닌가? 공수혁을 바라보는 유새홍 사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


결정타는 걸시속 방송이었다.


김해성이 딱 한 번, “녹화 잘 하고 왔습니다.” 이리 언급한 이후로 깜깜무소식이었던 걸시속. 그 걸시속의 방영 날이 왔다. 저번 주 예고편으로 양평 이야기가 나왔으니, 오늘은 블루문이 나갔던 축제가 분명했다.


유새홍 사장은 다시 한번 공수혁을 불렀다.


“공 실장. 저번에 말한 거 진짜야? 정말로 걸시속 촬영을, 김 매니저가 처참히 말아먹었어?!”

“그럼요! 오늘도 보세요, 김 매니저가 같이 방송 보자는 말을 꺼냅디까? 자기도 찔리는 게 있으니까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직도 의심스러우면 아예 대놓고 물어보세요. 오늘 방송은 같이 모니터 하자고 말입니다.”

“그럴까?”


공수혁의 조언대로, 유새홍은 김해성을 불러 물어보았다. 아예 회사에서 다 같이 걸시속을 보는 것은 어떻냐고 말이다.


김해성이 주장한바 정말로 걸시속 촬영이 성공적이었다면, 굳이 본방 모니터를 회피할 필요 없으니까.


하지만 김해성은 단칼에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오래전에 약속한 선약이 하필 오늘이라서요.”

“뭐? 아니, 블루문 애들이 처음으로 유명한 예능에 나오는 건데. 이보다 중요한 선약이라는 거야?”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오늘 선약은 죽어도 빠지면 안 되는 자리라서요···.”


김해성이 이리 나오니 유새홍도 놓아줄 수밖에. 자초지종을 들은 공수혁이 자신만만했다.


“보세요, 유 사장님! 제가 말했죠? 걸시속 촬영 잘됐다는 건 김 매니저 거짓말이라고. 쫄리니까 튄 겁니다. 거짓말한 게 아니면 같이 보자는 말에 냉큼 응했겠죠!”


MBS 오디션에 뮤직 타임 섭외까지. 최근에 창피를 많이 당한 공수혁이라 그런가? 그는 김해성을 깎아낼 건수라면 지독하게 물고 늘어졌다.


“역시 그렇겠지···?”


다른 부분에서는 김해성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는 유새홍이었지만 아무래도 걸시속만큼은 공수혁의 주장이 맞아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버드 엔터에서는 역사적인 날이 될 걸시속 출연 일에, 김해성이 일부러 자리를 비우진 않을 테니 말이다.


‘촬영이 망했으면 망했다고 솔직히 말해도 될걸. 김 매니저는 뭣 하러 거짓말을 한 거야···. 그 거짓말 때문에 나도 곤란해지잖아···!’


유새홍의 심경을 눈치챈 것인지, 공수혁이 김해성을 더 거칠게 매도했다.


“거짓말하는 인간이랑 어떻게 같이 일합니까? 이건 기본적인 신뢰가 없는 겁니다. 김해성 그놈을 조심해야 한다니까요!”

“아이참! 알았어, 공 실장. 이제 그 건은 그만 말해. 멤버들은 어떻게 하겠대?”


“걔들이야 뭐. 오늘은 숙소로 일찍 돌아갔습니다. 듣기로는 무대에서 정말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데, 자기들이 망친 걸시속 촬영을 멤버들이 보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래서 다들 자리를 피하는 거죠.”

“그래? 아이고. 진짜 거하게 말아먹었나 보네···.”


블루문 멤버들이야 김해성이 없다니 굳이 공수혁과 같이 있고 싶지 않아 퇴근한 것이지만. 유새홍 사장과 공수혁은 멤버들의 마음을 모르니 헛다리를 짚었다.


“아후···. 됐다 공 실장. 그럼 나도 안 보련다. 애들 망신당하는 걸 뭣 하러 찾아서 봐···.”

“그래도 저희는 또 모니터할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뭐가 문제인질 알아야 다음에 같은 실수를 안 하죠. 게다가 퇴근도 미루고 회의실에 모인 직원이 꽤 많지 않습니까? 사장님도 같이 하셔야죠.”

“아잇 참···. 그거 방송 좀 보겠다고 퇴근까지 미루고 모여 있단 말이야? 요놈의 입이 방정이지, 방정이야!”


직원들 이야기에 유새홍 사장이 자신의 입을 쳤다. 공수혁 말마따나 대형 TV가 있는 회의실에는 꽤 많은 수의 직원들이 모여있었다.


얼마 전 공수혁에게서 걸시속 촬영이 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유새홍은 그간 걸시속에 나간다는 기쁨에 취해 직원들에게 은근히 입을 털고 다녔다.


심지어 몇몇 직원에게는 직접, 같이 방송을 보자고 약속까지 한 상태였으니···. 이러한 사정 탓에 유새홍 사장은 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공수혁 손에 이끌려 억지로 참석한 회의실. 아직까지 걸시속 촬영이 망했다는 것을 모르는 직원들은 밝은 얼굴이었다.


“드디어 걸시속 본방날이네요!”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멤버들도 다 같이 보면 좋을 텐데. 오늘 연습이 일찍 끝나는 바람에 다들 숙소로 일찍 돌아갔더라고요. 아쉬우시겠습니다, 사장님.”


쏟아지는 직원들 이야기에 유새홍 사장이 우거지상으로 답했다.


“됐어. 방송에 안 좋게 나올 수도 있으니까, 너무 설레발 치지 말고들.”


유미소가 창피당하는 꼴이 생방송 된다는 점에서 유새홍은 극심하게 불편했다. 한동안 괜찮았던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다시 느껴질 정도로. 차라리 지금이라도 취소할까 싶었지만···.


유새홍이 나서기 전에 공수혁이 먼저 수를 썼다.


“이번 걸시속 섭외, 다 김해성 매니저가 계획한 스케줄인 거 알지? 아주~ 중요한 일을 김 매니저가 해냈단 말이야? 근데 김 매니저가 바빠서 오늘 모니터를 못 한다니까, 우리가 대신 열심히 봐줘야 한다고. 알겠어?”

“네, 실장님.”


공수혁이 김해성을 챙기는 척하면서까지 유새홍 사장과 직원들 시선을 TV에 묶어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멤버들이 따르는 모양새나 프로듀싱 능력과 연기 오디션, 무엇보다 뮤직 타임의 파격적인 섭외까지. 입사 이래로 김해성은 연전연승을 달리고 있었다.


파죽지세의 김해성을, 공수혁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쯤에서는 반드시 김해성 그놈의 기세를 꺾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반격할 기회는커녕, 아예 내 자리를 빼앗길 거라고!’


그러니 김해성이 유일하게 실패한, 그것도 아주 크게 개망신을 당한 걸시속 방송에 모든 기대를 걸 수밖에.


본인이 술수를 써서 망한 방송을, 어떻게든 김해성의 탓으로 돌리며 깎아내리려고 말이다.


이런 공수혁의 음흉한 속마음을 모르는 직원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초조한 것은 유새홍 사장과, 그리고 회의실 맨 끝에 자리한 조영철 로드 매니저뿐이었다.


공수혁의 명령으로 양평 행사를 망친 이후. 조영철은 걸시속 이야기나 김해성을 마주치면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불안한지 눈알을 굴리다가, 공수혁과 눈이 마주치자 할 말이 있다는 듯 신호를 하는 조영철이었다.


‘저 소심한 새끼. 또 저러네.’


공수혁은 조영철의 불안을 시답잖은 양심의 가책으로 여기고 무시했다.


마침내 시작한 걸시속.


익숙한 인트로와 함께 ‘걸어서 시장 속으로’의 로고가 뜨고. 방송 초반부는 빠르게 편집되어 양평 축제에 돌입했다.


가벼운 축제 소개 이후 연예인들은 잠깐 구경하자며 관객석에 마련된 플라스틱 의자에 앉고. 화면은 축하 무대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무대에 올라온 것은 무명의 걸그룹, 블루문이었다. 생각보다 비중 있어 보이는 등장씬에 직원들은 기뻐했다.


“오오! 우리 애들 나온다!”

“사장님, 블루문이 걸시속에 나옵니다!”

“으, 으응···. 그러네···.”


반면 답하는 유새홍 사장은 똥 씹은 얼굴이었다. 블루문에 맞춰진 포커스가, 곧이어 나올 망신살 무대를 위한 밑밥으로 보였으니까.


트로트에 이어 걸그룹 메들리를 할 때까지, 방송 자막은 꽤 호의적이었다. 걸시속 연예인들의 집중한 모습도 교차로 보여주면서 말이다.


-트로트로 분위기를 띄우는 블루문

-노래 왜 이렇게 잘해? 아저씨 염 배우 입덕각?

-대세 걸그룹 노래도 전부 소화한다! 블루문의 매력 발산!


하지만 편안하던 흐름은 여기까지. 초고음 댄스곡 ‘잔인한 여자’가 시작되기 직전, 중간 광고가 걸리는 타이밍.


화면은 갑자기 불길한 BGM을 깔았다. 이어 경악한 걸시속 연예인들의 리액션 장면이 빠르게 지나가더니 의미심장한 자막을 띄웠다.


-순조롭던 무대에 이상이 생긴다?!

-양평 축제에서 일어난 초대형 무대 사고···!

-블루문이 커버한 잔인한 여자는 과연···?!


시청률에 목숨 건 장위준 PD답게 지독하게 자극적인 마무리였다. 바로 이어진 중간 광고에서는 아이돌 핫칠링이 상큼한 얼굴로 만두를 먹으며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버드 엔터 회의실은 찬물을 끼얹은 분위기였다. 유새홍 사장은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꾸르륵거리는 배를 움켜잡았고. 다른 직원들도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사고라니 뭐지? 수연이 무대 공포증이 또 도진 거 아니야?”

“또 말 한마디도 못 하고 덜덜 떤 거 아니에요?”

“앞 무대는 잘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휴 참. 수연이 걔는···.”

“이거 당장 TBC에 문의 전화 넣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애들 이미지 나락 가겠는데요.”


지금까지 괜찮게 무대 했음에도, 직원들의 구수연 불신은 뿌리 깊은 것이었다. 공수혁도 방송을 보면서, 구수연의 립싱크 실력이 꽤 늘었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아니, 저 그게···.”


직원들 반응에 구석에 서 있던 조영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으나 금세 다물어야 했다. 허튼소리 말라는 뜻으로 공수혁이 조영철을 노려보았으니까.


어쨌거나 공수혁에게 중요한 것은 김해성의 몰락이었다. 금방 끝난 중간 광고 이후 다시 시작된 블루문의 무대.


무시무시한 자막과 직원들 걱정과 다르게 이어진 무대는 순조로웠다. 시원시원한 가창력에도 립싱크 티가 나지 않고, 마치 라이브처럼 자연스러운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공수혁만은 알고 있다. 무대의 어디에서 지뢰가 터질지.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에서 구수연이 마침내 하이라이트를 부르려 할 때. 공수혁이 흥분하여 주먹을 쥐었다.


드디어 시작이었다.

공수혁이 짜놓은, 천하의 김해성마저 쫓아낼 비장의 무대 사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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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3. 변곡점 +2 24.08.11 132 11 14쪽
22 22. 연기만큼은 +2 24.08.10 137 9 14쪽
21 21. 연기만큼은 +2 24.08.09 149 9 15쪽
20 20. 새로운 퀘스트 +2 24.08.08 152 10 16쪽
19 19. 새로운 퀘스트 +2 24.08.07 155 8 14쪽
18 18. 새로운 퀘스트 +2 24.08.06 159 9 17쪽
17 17. 위기를 기회로 +2 24.08.05 157 11 17쪽
16 16. 위기를 기회로 +2 24.08.04 155 10 15쪽
15 15. 위기를 기회로 +3 24.08.03 155 9 21쪽
14 14. 뜻밖의 인맥 +3 24.08.02 165 10 21쪽
13 13. 뜻밖의 인맥 +3 24.08.01 165 10 19쪽
12 12. 뜻밖의 인맥 +3 24.07.31 174 9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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