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荒酒)로 데워 만든 온주(溫酒)입니다
이젠 윤서의 마음도 몸도 지쳤다. 더 이상 갈 곳도 없다. 천자(天子)를 만나야 할 것 같다.
“如果你願意的話,我會保守你和金義英的秘密。 但有一個條件。(원한다면 당신과 김의영과 있었던 사실을 비밀로 해 주겠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什麼是?(무엇입니까?)”
“請把這些人藏起來,直到我見到皇帝為止。(제가 황제를 만나고 올 때까지 이 분들을 숨겨 주세요.)”
윤서는 그녀가 없는 동안 홍자성이든 아니면 최이척의 농간이든 화적들이 조선으로 다시 강제송환 당하는 것을 염려했다. 진안수령 이놈은 죄지은 것이 있으니 이 정도의 협상은 통할 것이다.
“好的。(알겠습니다.)”
“這些人就是你的生命。 我不在的時候應該不會有什麼問題。(이 분들은 당신의 목숨입니다. 제가 없는 동안 탈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我知道。 我會用我的生命來保護這些人。(알고 있습니다. 제 목숨을 다해 이 분들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조선에서야 말이 통하고 지리를 알 수 있어, 화적들 스스로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르다. 말을 몰라 벙어리가 되고 세상물정은 어두워 눈 뜬 장님이 된다. 그래서 노예로 팔려갈 뻔한 것이다.
윤서는 진안수령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아 두고 막란과 함께 말을 빌려 천자가 있는 남경으로 향한다.
*
진안의 어느 농장.......
진안수령이 화적들에게 내어준 곳이다. 화적들은 모두 명나라 의복으로 갈아입었다. 윤서와 막란이 올 때까지 여기서 지내야 한다. 윤서가 어떻게 겁을 주었는지는 몰라도 자는 곳은 넓고 깨끗했으며 먹는 것도 풍족하게 있어 화적들에게는 천당이 따로 없다.
그러나 진안수령은 홍자성의 비밀지령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조선의 파병은 없다. 반정의 명분중 하나인 중립외교를 배척하고 친명정책을 표방해, 새로 임금에 옹립이 되었어도, 지금은 명에 군사를 파견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최이척은 임금이 광해의 아들 폐세자를 사사(賜死)하는 것을 눈감아 주는 대신 화적들을 원했다. 반정을 하는데 화적들을 동원했다는 세간의 비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최이척의 심경을 이용해 홍자성은 화적들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조선의 군사 만 명의 파병을 요구했다. 최이척은 이를 승낙한다. 명의 사대를 내세우고 화적들을 얻고자 하는 자신의 실리를 얹어, 임금과 조정을 설득해서 명에 파병을 하려는 것이다.
최이척과의 협상으로 인해 홍자성은 진안수령에게 조선에서 군사가 올 때 까지 화적들을 붙잡아 두게 했다. 또한 최이척의 부탁으로 윤서를 화적들과 떨어져 있게 하기 위하여, 그녀와 천자를 만나게 하려는 거였다.
그러나 윤서는 홍자성의 계략대로 천자를 만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화적들이 위험에 빠졌다고 진안수령이 윤서에게 거짓을 말해, 그녀가 직접 천자를 찾아가게 만든 것이다.
모든 것이 최이척과 홍자성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윤서만 남경으로 오면 그녀만 잡아놓고 있으면 되는 일이다.
*
남경에서.......
남경에 도착한 윤서와 막란은 홍자성 집을 찾았다. 김의영에게 잡혀간 화적들을 구하기 위해 며칠 전 왔던 집이다. 홍자성은 집에 없었다. 대신에 윤서가 전에 왔을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그의 첩 서린이 나와서 맞는다.
“대인은 출타중이십니다.”
그녀는 조선여인이다. 홍자성이 어떻게 해서 능수능란하게 조선말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일반적인 홍자성의 손님 접대는 정실부인이 하겠지만 조선에서 온 윤서를 맞는 것은 그녀의 몫인 것 같다. 크지 않은 몸매에다 뚜렷한 이목구비가 윤서와 견줄 정도로 미인이다.
별실로 안내하는 서린의 뒷모습이 아름답다. 막란이 넋놓고 보자 윤서가 그를 가재 눈으로 흘긴다.
“대인은 언제 오십니까?”
“오래 걸린다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북에서 내려오는 후금에 대항해 지방 호족들을 관리하러 가신 듯합니다. 괘념치 마시고 이 방에서 편히 쉬세요. 아씨가 오시면 언제든 융숭하게 대접하라 당부하시고 가셨습니다.”
서두를 것은 없다. 어차피 화적들은 진안수령이 잘 보살펴 줄 것이고 천자를 구워삶기 위하여 계략을 세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이 나라는 오신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올해가 계유년(1623년)이고 제가 임신년(1613년)에 공녀(貢女)로 왔으니 벌써 십년이 되었습니다.”
“어느 가문의 태생이십니까?”
귀족은 귀족을 알아본다. 몸가짐이 꾸미지 않아도 귀품이 있어 보이고, 말하는 목소리가 나지막하지만 발음이 맑고 청아하여, 옆에 있는 막란서방이 침을 질질 흘리고 있어, 윤서의 질투심이 발동해 그녀의 신상을 캐고 싶었다.
“청주 한가(韓家)이며 본가는 한양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사대부 집안의 후예란다. 그런데 어쩌다 이 머나먼 타국 땅에 공녀로 오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사연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술은 명나라 전통주 황주(荒酒)로 따뜻하게 데워 만든 온주(溫酒)입니다. 멀리서 오셨으니 한 잔 하시고 주무시면 피로가 풀릴 것입니다.”
서린은 그녀의 이야기를 하기 싫어했다. 말 못할 사연이 있거나 해서는 득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윤서는 궁금했다. 막란 서방은 서린이 따라주는 술을 잘도 받아 마시고 있다. 그녀가 나가면 상을 엎어야겠다.
“그럼 두 분 편안히 쉬시기 바랍니다.”
서린이가 나가자 막란이가 따라 나가려 하자 윤서가 강제로 끓어 앉힌다.
“어딜 가시려구요!”
“집이 커서 구경하려구 그럽니다.”
“집을 보려 그러는 겁니까? 저 여인을 조금 더 보고 싶어 환장한 겁니까?”
“나를 어떻게 보고....... 말 안할 겁니다.”
홍자성의 집은 크긴 크다. 대문에서 이곳 별실까지 일각(15분) 이상 걸어왔으니 조선에 있는 경운궁 보다 규모가 더 큰 것 같다.
이런 집을 갖게 되기까지 홍자성은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또 황제가 공녀로 받은 서린을 홍자성에게 준다는 것은 얼마나 그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는지 알 수 있다.
서린은 사대부 집안이다. 그런 그녀가 공녀로 오는 것은 최소한 황제의 후궁이 되기 위해서다. 홍자성의 첩이 된 것은 결코 빠지지 않으나 황실의 가족이 되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조선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어떤 사연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막란이 집 구경을 하자고 우겨서 윤서도 따라 나왔다. 건물들은 북쪽을 향하여 있고 남쪽이 열려 있는 중정을 가진 화려한 단청을 한 목구조이다. 중정에는 산의 일부를 옮겨 온 듯한 작은 계곡과 폭포도 흐르고 있다. 옆으로는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고 이들 건물은 사방으로 뻗어 있어 누구든 함부로 들어오면 길을 잃을 것 같다.
저녁이 되자 건물 모퉁이에 걸쳐있는 조적 등에 하인들이 돌아다니며 불을 넣자 은은한 불빛에 건물들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그렇게 막란과 한참을 집구경을 하는데 역시 길을 잃었다.
“부인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서방님은 별자리 전문이시니 우리 방 찾는 거야 문제없겠지요.”
“홍자성의 첩 서린이라는 여인의 방을 찾는 것입니다.”
“서방님 미쳤습니까! 제가 지어밉니다. 저를 앞에 두고 다른 여인의 방을 찾는다니요!”
“부인 그 여인 이름이 뭐라 했습니까?”
“한서린이라고 했어요. 이 미친 양반아!”
“그 여인이 한계란 언니입니다.”
하는데....... 중국 황제하고 순장시켰다던 그 한계란 언니라고????
“그 서린이라는 한계란 언니는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것입니다. 뒤 늦게 그것을 알고 그녀 방을 찾아 돌아다녀 봤지만 길을 잃은 거구요.”
그러면 막란 서방이 서린의 모습에 홀려 침을 흘린 것이 아니란 말인가?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 여인이 한계란 언니라는 것을?”
“우리를 맞을 때 혼자였습니다. 주위를 물리치고 비밀스럽게 도움을 청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행색을 보고 포기한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도와주게 보이지는 않았잖아요.”
“우리가 아니라 서방님보고 그랬겠지요.”
“그리고 한씨 성을 가진 공녀는 흔치 않지요. 거기에다 무엇보다 소문대로 얼굴이 예쁩니다. 한계란 언니는 황제하고 순장당한 것이 아니고 이 집에서 잘만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계란 언니가 순장 당했다는 헛소문을 말했을 때 홍자성은 왜 가만히 있었을까요?”
“그것이 한서린이라는 여인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막란 서방의 말이 모든 면에서 맞아 떨어진다. 이 큰 집에서 윤서를 시중드는 사람이 그녀 외에는 아무도 없다. 저번에 왔을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틀리다. 그때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 십 명이 윤서의 수발을 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녀가 아무도 근접치 못하게 미리 손을 써 놓았으리라.......
결국 서린이 제 발로 찾아오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 날은 오지 않았다. 홍자성의 기별도 없었다. 분명 윤서가 집에 왔다는 기별이 갔을 텐데 말이다. 식사를 주고 간 하인도 귀가 먹었는지 아무리 뭐라 해도 답이 없다. 결국 하루가 지나고 밤이 돼서야 서린이가 다시 윤서 일행을 찾았다.
“방 안에 갇혀 지내시니 답답하지 않으십니까?”
“다시는 뵙지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
“한계란 언니가 맞으십니까?”
놀라는 표정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동생 한계란이 워낙 유명하기에 그 언니가 순장 당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거짓을 꾸미지 않고 한서린이라는 본명을 사람들에게 당당히 말했다. 그런데 윤서와 막란이 알아차린 것이다.
“한계란 언니는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저는 한서린입니다.”
“사연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한계란 언니는 어떻게 죽었습니까?”
“순장을 당한 건 제 시녀였습니다. 대인의 은덕으로 겨우 살아남게 된 것입니다.”
“어떤 도움을 바라십니까?”
윤서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막란의 말에 의하면 생사가 달려있을 정도로 급하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제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분들입니다.”
“협상하는 겁니까? 협박하는 겁니까?”
서린이가 도움이 필요 없었으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윤서만이 도울 수 있기에 그녀를 택했고 뜸을 들여 우위를 점하려는 것이다.
“천자가 있는 궁궐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
“그 사람을 빼 올 수 있습니까?”
“대인도 알고 있습니까?”
“제가 여기서 도망가는 날이면 그 사람의 사지를 자른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도움으로 그 사람을 빼온들 두 분이 홍자성 대인으로부터 무사히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없습니다. 그 사람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죽든 그 사람이 죽든 둘 중의 하나일 겁니다.”
막란 서방의 눈이 빛난다.
“우리보고 홍자성을 죽여 달라는 부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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