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무림인의 미궁견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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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하
작품등록일 :
2024.08.01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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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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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14화 악의(1)

DUMMY

미궁에는 악의가 있다.


이제 하유성과 로엘리아도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갑자기 땅이 꺼지고, 그 아래에 포탈이 있을 줄이야···.”

안젤로가 절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와는 동굴 속 갈림길을 지도화하던 세 사람은, 방처럼 생긴 곳에 들어갔었다.

방 안에는 마치 제단처럼 생긴 돌이 중앙에 있었고, 함정이나 마물을 대비해 조심스럽게 움직인 세 사람은 무사히 방 중앙까지 다다랐지만.

그때 갑자기 바닥이 꺼졌다.


어떤 함정을 밟은 게 아니었음에도, 바닥은 원래 모래로 되어있던 것처럼 바스러지며 붕괴했고, 세 사람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냥 떨어진다면 곤죽이 될 만큼 한참 추락한 뒤에 그들이 마주한 건 다행인지 불행인지 검은색 포탈.


덕분에 추락사를 면하긴 했지만, 포탈을 타고 도착한 곳은 그걸 비웃듯 흉흉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당신 탓이 아니니 자책하지 마시오.”


“아뇨. 이건 탐색꾼인 제 탓입니다···. 레벨만 높았어도 이깟 함정은···.”

하유성의 위로에도 안젤로는 반쯤 패닉 상태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이곳은 어디지? 나갈 길은 찾을 수 있나?”

하유성은 침착하게 상황을 물었다.


“······붉은빛을 띤 벽돌과도 같은 바닥. 하늘을 덮고 있는 진녹색의 천장과 같은 구조물···. 여긴 4층입니다.”


“4층? 3층이나 1층이 아니라 두 개를 이동한 건가요?”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로엘리아가 당황한 채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빨리 출구를 찾지 않으면 우린 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1레벨 두 명과 2레벨 한 명이 미궁 4층에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


“진정해라. 일단 위로 올라가는 출구를 찾지. 방법은 알고 있소?”


“···대강은 알고 있습니다. 4층은 지형이 난잡하지 않고 직선적이거든요.”

안젤로는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고 대답했다.

하유성의 침착함 덕에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 그는 출구의 위치를 가늠했다.


“4층의 구조는 크게 ‘회랑’ ‘진열장’, ‘무기고’까지···. 다행히 별다른 구조물이 없는 평원이 이어지는 걸로 봐선 여긴 출구에 가장 가까운 ‘회랑’인 것 같습니다. 문제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출구가 나오냐는 건데···.”


4층에는 하늘이 없기에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하늘을 덮고 있는 거대한 진녹색 구조물은 번쩍거리는 게 금속 같기도 하고,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 게 생물의 기관 같기도 했다.

녹색 천장과 붉은빛 바닥이 어우러지자 어지럽고 불쾌감이 올라왔다.


“저쪽에, 뭔가 기둥 같은 게 보이는데.”

하유성이 한쪽을 가리키고 말했다.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엄청나게 기다란 기둥들이 하늘의 구조물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곳이 바로 진열장입니다! 저게 보인다는 건···. 다행이자 불행이군요. 우리는 저기와 반대방향으로 가면 됩니다. 다만···.”


“다만?”


“저게 보인다는 건 출구까지 거의 이틀은 걸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틀.

그동안 마물을 만나면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미궁에서 이틀 거리를 걸으면서 마물을 하나도 안 만난다는 건 불가능한 일.


셋 다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고는 표정이 조금 굳었다.


“이런 임무···. 받는 게 아니었는데.”

안젤로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본격적인 개척자로 사는 게 아니라, 저층의 정보를 사고팔면서 먹고 살기로 마음먹은 그에게 이런 상황은 상정한 걸 아득하게 뛰어넘는 위험이었다.


“4층엔 어떤 마물이 있죠?”

이번에는 로엘리아가 안젤로를 달래며 물었다.

그래도 공부한 가락이 있기 때문에, 안젤로는 기계적으로 답을 내놨다.


“···무기고에는 골렘과 샐러맨더, 진열장에는 유니콘과 레이스와 미믹 등, 회랑에는 트롤, 가고일, 오크 부락···.”


“가장 만나서는 안 되는 건?”


“셋 다 저희 전력으로는 무리입니다만···. 오크 무리를 마주친다면 빼도 박도 못하겠죠.”


“좋소. 엄폐물이 없는 평야 지대긴 하지만, 역으로 우리 쪽에서도 멀리서부터 마물을 발견하고 전투를 피할 수 있으니 해볼 만하오.”


“주변과 비슷한 색을 칠하고 낮은 자세로 이동하면 눈에 덜 띌 거예요.”

로엘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마법으로 바닥 색과 비슷하도록 반투명한 붉은 막을 형성해 진행 방향에 씌웠다.


“훌륭하오. 이건 얼마나 지속할 수 있소?”


“아무런 기능 없이 빛만 나게 하는 건 지금이라면 반나절 정도에요.”


“당신들은 대체···. 어떻게 이 상황에서 그렇게 침착할 수 있죠?”

안젤로가 아직도 겁에 질려 창백한 얼굴을 떨리는 손으로 매만지며 물었다.


“글쎄요. 더 잃을 게 없어서일지도 모르죠.”


“아니면 이미 너무 많이 잃었거나.”


로엘리아와 하유성이 차례로 대답했다.


세 사람은 더는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생존에 집중했다.

하유성이 마력을 시야에 집중해 먼 거리를 살펴보며 진행 속도를 결정했고,

로엘리아는 최대한 빛의 각도와 일행의 움직임을 계산해 가며 은폐 마법을 사용했으며,

안젤로는 주변 환경과 자신의 지식을 접목해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계산했다.


하늘에 태양과 구름 대신 뭔지 알 수 없는 구조물이 서 있는 미궁의 4층이었지만, 놀랍게도 이곳에는 밤낮이 존재했다.


어떤 원린진 알 수 없었지만, 구조물이 몇 시간을 주기로 은은하게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길 반복했던 것.


그 주기는 대략 로엘리아의 마법이 유지되는 시간의 두 배 정도.

덕분에 세 사람은 낮에 한 번 마법을 사용해서 이동하고, 밤에는 은폐 마법 없이 천천히 이동했다.

나머지 반나절은 바닥을 파고 들어가 휴식을 취하는 극한의 일정.


물론 아무도 불평 따윈 하지 않았다.

그저 극한의 긴장감 속에서 조금이라도 체력을 아끼려고 최선을 다할 뿐.


“후우우···.”

로엘리아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장거리를 최대한 숨어서 이동하는 데다 마력까지 계속 쓰면서 이동해야 하니, 가뜩이나 체력도 부족한데 소모량이 남들의 두 배가 되는 셈.


그래도 세 사람은 멀리 있는 마물을 몇 번이나 포착했음에도 운 좋게 들키지 않고 우회하며 꽤 많은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다.


성체 곰보다도 큰 트롤이 먼 거리에서 이쪽을 향해 갸웃거리며 조금씩 다가오려다 말았을 때는 세 사람 다 식은땀을 흘렸다.


원래 이틀이 걸릴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그들이 하루 동안 이동한 거리는 목적지까지 총 거리의 삼 분의 일 정도.


하루를 이동했는데도 이틀을 더 이동해야 했다.


그리고 언제나 미궁에선 예상외의 사태가 벌어지는 법.

세 사람이 은폐 마법을 쓰며 이동을 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정지.”

하유성이 멀리 있는 형체를 먼저 인지하고 말했다.


멀리서 여러 형체가 꾸물거리는 게 보였다.

“저기··· 사람 아닌가?”

안젤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더 가까워지자, 점차 윤곽이 뚜렷해지면서 개척자 파티라는 게 확실해졌다.


“세상에! 여신님 맙소사. 우린 살았어요! 4층의 개척자라면 상당한 실력자들일 거예요.”

안젤로가 신이 나서 말했다.

그러나 신고식 때 다른 개척자들에게 당한 적 있는 두 사람은 갈등했다.


“저들이 우리에게 우호적일지 장담할 수 있을까요···?”

로엘리아가 말했다.


“지금 그런 걸 따질 땝니까? 마물이 나오면 그냥 죽는 판에, 그래도 사람은 대화라도 가능하잖아요!”


“우릴 같은 사람으로 봐준다면 말이지···.”

하유성이 말했다.


“그럼, 이대로 숨어서 지나가길 기다리자고요? 그러다가 만약 저쪽에서 우릴 발견하면 오히려 수상하게 여겨서 더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당장 구조 요청을 해야 해요. 낙오자인 당신들은 물론 사람을 믿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달라!”


급기야 안젤로는 다른 두 사람을 버리고 떠나려는 기색을 보였다.


“기다리시오. 구조 요청을 하겠소.”


결국 백기를 든 건 하유성이었다.

어찌저찌 안젤로 없이 출구에 간다고 해도, 3층에서 지상까지 되돌아가는 데에도 그가 필요했기 때문.


“역시! 진작에 그랬어야죠. 이런 당연한 걸 거절하는 줄 알았잖습니까.”


“···저도 따를게요.”


세 사람은 몸을 일으키고, 저 멀리 사람들이 다가오는 쪽으로 향했다.


“대신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괜히 우리가 마물을 끌고 가기라도 하면 저쪽에서 뭐라고 할지 모르니까.”


“알겠다구요. 유성 씨. 이제 긴장 좀 푸셔도 돼요. 우린 살았다니까?”


안젤로는 신이 나서 빠른 걸음으로 앞장섰다.


그러자 인기척을 느낀 저쪽 파티가 이쪽을 바라봤다.

미궁에서 다른 파티는 만나지 않으니만 못한 법.

그들은 잠깐 경계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구호 요청 수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안젤로는 그렇게 말하더니 팔을 높게 들고 열십자(十)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과연 저쪽에서도 구조 신호를 확인한 후 활을 맨 남자가 머리 위로 동그라미 표시를 그렸다.

어쩌면 이쪽 수준을 파악했는지도 모르겠다고. 하유성은 생각했다.


“거봐요! 내가 뭐랬어!”

안젤로가 거들먹거리며 그들에게 뛰어가려는 찰나.


“―――해!!”

저쪽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을 질렀다.

그러자 그들은 무기를 빼들었고, 하늘을 바라봤다.


슈우우우우우!!!!


하늘에서 녹색 천장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물론 일부 조각일 뿐으로 보였지만, 하유성은 그 조각에서 악의를 느꼈다.


아직 눈치채지 못한 안젤로가 영문을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하유성과 로엘리아의 대처는 빨랐다.


하유성이 안젤로의 멱살을 잡고 끌어 몸을 숙였고, 로엘리아는 그 위로 다시 은폐 마법을 걸었다.


쿠콰과과광!!


작은 점처럼 보였던 녹색 덩어리들은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작은 초가집만 한 크기가 돼서 땅에 처박혔다.


“···저게 뭐지?”

하유성이 묻자, 안젤로도 겨우 고개를 들고 떨어진 녹색 덩어리를 쳐다봤다.


“가고일···. 가고일이에요. 그것도 세 마리나.”


과연 돌덩이처럼 보였던 물체는, 한 쌍의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몸을 일으켰다.


박쥐와 개를 합쳐놓은 것 같은 얼굴에, 거대한 창을 든 우람한 몸통.

그것의 몸은 근육과 살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날개를 비롯한 주요 부위들에는 초록색 바위가 갑옷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천장에 붙어있다가, 적을 식별하면 떨어지는 거였군. 지금까진 운이 좋았어.’


로엘리아의 은폐 마법은 고작 1레벨이 사용하는 마법인 만큼, 윗면까지 펼쳐지진 않았다.

이동 방향이나 마물이 있는 방향으로 치는 게 고작.


그런데도 천장의 가고일에게 지금껏 걸리지 않았던 이유는, 세 사람이 몸을 낮추고 이동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가고일과 구조를 승낙했던 개척자 파티는 곧바로 전투에 들어섰다.


과연 4층까지 들어온 파티.

온갖 고위 마법과 특수 효과가 부여된 화살이 전장을 수놓았다.


“대형도 무너지지 않았고···. 그럭저럭 공격을 버텨내고 있다. 이길 수 있나?”

하유성이 중얼거렸다.


“가고일은···원래 무리를 짓지 않습니다.”

안젤로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책을 읽듯 중얼거렸다.


“자기 영역이 확실한 놈들이고···. 무리를 만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필드 보스나 마찬가지. 여럿을 만났다면 재수 없게 영역이 겹친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쿵―!!

안젤로의 넋두리가 끝나기 무섭게, 저쪽 파티의 전위 중 검을 든 한 명이 가고일의 창에 맞아 날아갔다.


바로 성직자가 빠져 치료를 시작했지만, 그동안 방패를 든 다른 전위 한 사람은 혼자 세 마리의 가고일을 감당해야 했다.


콰과과광!!

그러자 후위에서 강력한 폭발 마법을 사용해 잠깐 가고일과 거리를 벌렸다.


과연 고위 파티답게 능숙한 연계.

마법에 직격당한 가고일 한 마리는 거의 외피가 벗겨진 채 가까스로 몸을 움직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력은 열세였다. 창에 맞은 검사가 복귀하지 못하고 뒤로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때. 하유성이 은폐 마법 바깥으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힘을 보태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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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6화 마검(3) 24.08.25 98 3 12쪽
25 25화 마검(2) 24.08.24 100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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