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복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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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블몽블
작품등록일 :
2024.08.0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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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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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도시, 아그렌 2

DUMMY

잿빛 성과 맞먹는 인원이라.

역시 레반티스의 위명은 헛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루카스 레반티스가 죽지 않는다면 이 위명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아니, 내가 힘을 보탠다면 그 위명이 보다 더 높아질수도 있겠지.


루카스를 따라 몇 걸음 옮기자, 지긋한 나이의 집사가 나를 발견했다.

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련님, 이 아이는······."


"아, 노르달에서 주웠다네."


······주워?

다소 황당한 단어 선정에 내가 입을 벌렸지만, 집사는 다른 것 때문에 당황한 것 같았다.


"노드달이요?"


"그래. 영리한 것이 제법 쓸만해보여 레반티스에서 후원하기로 했다."


루카스의 말에 집사는 물론 주변의 사용인의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차라리 이게 나을수도.


"아이를 데려가 씻겨라.

난 아버지를 뵙겠다."


루카스는 그렇게 말하고 성큼성큼 걸어 사라져버렸다.

나를 사용인들 사이에 내버려둔 채.


"이름은?"


황당할 법도 할텐데 집사는 얕게 한숨을 내쉬며 내게 이름을 물었다.

루카스의 이런 행동이 익숙한 것처럼.


"······리안입니다."


"그래, 리안. 따라와라."


집사는 별 의문없이 나를 데리고 성 안쪽으로 향했다.

루카스를 마중 나왔던 사용인 중 몇몇이 나와 집사를 따라왔고 나머지는 원래 할 일을 찾아 흩어졌다.




***




집사는 우선 날 욕실로 데려갔다.

제대로 된 목욕은 회귀한 뒤로 처음이었기에 멀끔한 꼴이 될 때까지는 여러번 씻어야 했다.

데온에 집에선 제대로 씻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으니까.


목욕을 마치고 나자 집사는 간단한 옷가지를 내줬고 나는 그 옷을 입었다.

아이 옷이 마땅치 않았는지 내어준 옷은 품이 맞지 않았지만, 원래 옷을 다시 입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단장을 끝나고 안내된 응접실에서 루카스를 기다리는데, 기다리던 루카스 대신 뜻밖의 불청객이 응접실에 먼저 나타났다.


"네가 형님이 주워왔다는 녀석이냐?"


요란한 기척을 내며 내가 있는 응접실로 들이닥친 사내.

루카스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나이대에 레반티스의 성 안에서 저런 오만방자한 태도를 지닐 법한 사내는 한 명뿐이다.

심지어 사내는 루카스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알브레히드 레반티스.

리하르트 레반티스 백작의 차남이자 레반티스 백작가의 망나니.


"누구십니까?"


난 알브레히드 레반티스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사내가 알브레히드 레반티스라 짐작했으면서도 다소 투명스럽게 말이 튀어나갔다.

어쩔 수 없었다.

사내가 알브레히드 레반티스임을 깨달았음에도 대놓고 얼굴을 구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내가 누구인지 모르나?"


되묻는 사내의 왼쪽 눈썹이 위로 솟았다.

저 표정은 루카스랑 좀 닮았을지도.

난 조금의 틈도 가지지 않은 채 곧장 대꾸했다.


"모릅니다."


망설임없이 튀어나가는 내 대답에 알브레히드 레반티스의 미간이 대번에 구겨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알브레히드 레반티스를 빤히 올려다 볼 뿐이었다.


"······나는 알브레히드 레반티스.

너를 데려온 루카스 레반티스가 내 형님이지."


알브레히드 레반티스가 제 이름을 밝히자 나는 마지못해 미묘한 각도로 고개를 숙였다.

절대 공손하지 않지만 책잡기는 애매할 정도로, 얕게.


"처음 뵙겠습니다."


내 인사를 받은 알브레히드의 얼굴이 다시 한번 사정없이 구겨졌다.

생각만큼 멍청한 건 아닌가?

하지만 화를 내기엔 애매할 텐데.


게다가 분명 알브레히드는 내가 루카스가 '주워온' 녀석이란 걸 알고 있었다.

내 태도의 미묘함을 알아챌 머리라면 내가 내키는 대로 대해도 되는 상대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을 거다.

알브레히드는 루카스가 날 '왜' 데려왔는지는 모를 테니.


"······너······."


하지만,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는 것은 또 다른 얘기다.

제 허리춤을 짚고 있던 알브레히드의 왼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허리춤 근처의 천이 구겨지고 있었으니까.


······터지나?


알브레히드가 언제 폭발할지 가늠하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알브레히드? 여기서 뭐하는 거냐."


때맞춰 나타난 루카스의 목소리가 문쪽에서 들렸다.

시선을 옮기자 루카스가 의아함이 가득한 얼굴로 나와 알브레히드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알브레히드는 나보다 한 박자 늦게, 구겨진 얼굴을 그대로 루카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참 시건방진 놈을 주워오셨습니다?"


"······뭐라고?"


대뜸 들려온 시비조에 루카스의 대꾸도 좋지 않게 튀어나갔다.

역시, 형제 사이가 좋은 것 같진 않네.


알브레히드는 루카스를 향해 제 기분대로 쏘아붙인 후 응접실을 떠났다.

문을 나서기 전에 나를 쏘아보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루카스는 그런 알브레히드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보다가 알브레히드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굳이 포장할 필요는 없었다.


"이름을 밝히시기에 인사를 했습니다."


거짓말은 없었다.

하지만, 루카스는 알브레히드의 반응과 내 대답에서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읽었을 것이다.

내 대답을 들은 루카스의 입매가 미묘하게 뒤틀렸으니까.


"······맹랑한 녀석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다소 기가 찬 듯 중얼거리는 말.

질문은 아닌 것 같기에 이번에는 잠자코 있었다.


······과했나?

하지만, 내 딴에는 꽤 참은 건데.


다행히 루카스는 혼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화제를 돌렸다.


"씻겨놓으니 훨씬 낫구나."


아르다르보가 놀릴 정도였으니 루카스 또한 한마디 보탤 거라고 생각했다.

거지꼴이나 다름 없었던 내가 고작 목욕만으로 이렇게 바뀐 건 내가 느끼기에도 꽤 드라마틱한 변화이니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루카스가 주목한 것은 아무래도 다른 쪽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생각보다 눈동자가 도드라지는군."


"······아무래도 흔한 색은 아니니까요."


붉은 눈동자는 드물다.

오로지 랑게르나만이 타고나는 색은 아니지만 독특한 외모적 특징이 될 정도로 붉은 눈동자는 희귀하다.


"머리를 자르는 게 좋을 듯한데."


어조는 권유였지만 권유가 아니었다.

상관없었다.

힘을 기르기 전까지는 아예 눈을 가리고 다닌 적도 있으니까.

난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내 대답을 들은 후 루카스는 응접실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건너편 의자를 향해 눈짓했다.


"아버지와 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이다."


루카스는 내가 의자에 채 앉기도 전에 이어 내뱉었다.

빠르게 뱉어진 본론에서 나는 약간의 조급함을 읽었다.


"아과와 홍화열 치료제, 노크시스의 활약까지 들으시더니 네가 꽤 흥미를 보이시더군."


"백작 님께서요?"


의자에 앉으며 루카스의 말을 난 천천히 곱씹었다.

루카스가 레반티스 백작과 나눴다는 대화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방향이 조금 달랐기 때문이었다.


'······의외네요.'


- 왜?


'백작에게 그걸 다 보고할 거라곤 생각 안 했거든요.'


내가 지식을 선보이고 활약한 것은 루카스의 눈에 들기 위해서 한 일들이었지만, 이를 백작에게 전달하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귀족이 공로를 가로채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게다가 루카스의 말에는 모순이 있다.


"······제가 랑게르나임을 알리지 않으시려던 게 아닌가요?"


"그랬지."


"백작 님께는 말씀드릴 건가요?"


"아니. 그건 아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루카스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난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물었다.


"백작 님께 어디까지 말씀드릴 생각인가요?"


'어디까지'란 나와 루카스가 공유한 비밀을 의미했다.

나의 원래 이름부터 불꽃술사의 힘, 그리고 나와 루카스의 거래까지.


마물의 숲에 관해선 레반티스 백작의 허락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어떠한 핑계가 필요할 것이란 건 짐작하고 있었다.

그 핑계에 나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 또한.


다만, 걱정하지 않은 것은 루카스는 알브레히드 레반티스처럼 멍청하지 않으니 알아서 잘 둘러댈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몰락한 랑게르나의 아이를 거둬 후원한다는 것에는 분명 리스크가 존재한다.

성공하다면 큰 이득이 따를 것이고 성공하지 못한다면 나는 물론이고 루카스 자신도 발목이 잡힐 손해가 발생하겠지.


물론 나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내가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것들 외에는 전적으로 루카스에게 달렸다.

내가 가진 이점을 어떻게 활용할지, 같은 것 말이다.


때문에 루카스가 내게 이름과 불꽃술사의 재능을 숨기자 제안했을 때 나름 상정해둔 상황이 몇 가지 있었다.

하지만, 루카스 본인이 백작에게 내 이야기를 먼저 털어놓는 것은 그 상정해둔 이야기 중엔 없는데.


백작은 루카스의 이야기를 듣고 어디까지 눈치챌 수 있을까?

루카스도 알아챘는데, 백작 또한 내가 랑게르나인 것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백작 님께선 네가 아드리안 랑게르나임을 의심하진 않으실 거다."


내 걱정을 들여다본 것 같은 말이 루카스에게서 쏟아졌다.

······아닐 것 같은데.


내가 영 미심쩍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자 루카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도 내겐 밝힐 생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내 아버지는 알아내실 거라 확신하느냐?"


루카스가 그렇게 말했으나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루카스가 알아낸 것을 백작이 모른다?

그것도 내 이야기를 들은 후에도?


난 한숨이 튀어나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루카스 님도 알아내셨는데 백작 님이 모르실 것 같지 않은데요."


내 떨떠름한 대답에도 루카스의 입가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다는 태도.


······아, 잠깐.

그렇구나.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얼굴에서 나는 루카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았다.

젠장, 귀족이란.


"······표면적으로는 그렇다는 건가요?"


내가 물었지만 루카스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의뭉스러운 미소로 날 마주보고 있을 뿐.

질문은 아르다르보가 했다.


- 무슨 말이냐?


'표면적으로 그렇다고요.'


- 표면적으로?


난 잠시 생각해서 말을 골랐다.


'지금도 백작은 제가 누구인지 이미 알았다는 소리예요.

하지만, 표면적으로 백작은 제가 아드리안 랑게르나가 아닌 노르달의 리안이라고 알고 있다는 겁니다."


- ······그게 뭐가 다른 거지?


'공식적으로는 제가 누군지 몰랐다는 거죠.'


- 복잡하군. 그럴 필요가 있나?


'이건 결국 명분의 이야기니까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에는 명분이 없다.

내가 누구인지 확신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는 한 나는 아드리안 랑게르나가 아닌 노르달의 리안이다.


랑게르나의 정당한 마지막 핏줄이 아닌 레반티스 백작령 시골 마을 출신의 리안.


- 처음부터 백작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는 것과 다른 건가?


'그럴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루카스가 책임져야 할 범위가 훨씬 넓어지게 될 겁니다.

······뭐, 백작에게 이야기를 털어놓은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지만요.'


- 다른 이유가 있나?


······이유는 아마······.


"······백작 님께 마물의 숲에 대한 인가를 받기 위해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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