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에서 전직 용사로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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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아
작품등록일 :
2024.08.20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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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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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6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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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와 변경백 (2)

DUMMY

시온이 검을 쓰는 것과 달리, 원래 베르하츠 가문은 대대로 도끼를 쓰던 가문이었다. 그래서 가문 문양에도 두 자루의 도끼가 그려져 있다.

하지만, 드리컨 베르하츠는 너무나도 유약했기에 베르하츠 가문의 도끼를 다루기 어려웠다. 큰 키와, 단단한 근육으로 몸을 고정하고 도끼의 원심력을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어야, 비로소 도끼의 위력이 나오는 법인데, 드리컨에겐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변경백 영지의 시종장은 내게 찾아와, 그 유약한 소년의 검술 스승이 되어 달라 부탁했었다.

귀찮았지만, 베르하츠 가문에는 빚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수락했었다. 어차피 베르하츠 영지에는 고아원 때문에 정기적으로 들리기도 했고.

 

첫 만남 때 다소곳한 걸음걸이로 걸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인사하던 그 드리컨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 크고 붉은 눈, 조막만 한 입술, 분홍빛으로 상기된 볼까지. 그야말로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귀족 영애였다.

당연히 사내 아이라 생각했던 나는, 당황해서 대충 인사를 받아주고는 시종장에게 다가가 물었었지.

 

“남자.... 맞지?”

 

“허허, 겉보기에 조금 여려 보이셔도 어엿한 소년이십니다. 다른 분들도 종종 착각하시더군요.”

 

의문스럽다는 듯 드리컨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내 표정이 무서웠는지 소년은 울먹이기까지 했다.

엉엉엉 울어대는 드리컨을 달래느라 한참을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뭐, 나중에 가서는 늦은 사춘기가 와서 나랑 맞먹으려 들길래 두들겨 패면서 검을 가르치긴 했다. 물론 그때도 내게만 그랬지, 다른 사람들에겐 항상 다소곳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소년이었다.


그랬던 녀석이.


  

“혹시 다른 문제가 있나?”

 

이렇게 수염 덥수룩한 아저씨가 돼서 왔으니, 내가 못 알아볼 수밖에.

 

애초에, 전대 변경백도, 전 전대 변경백도 겉보기는 거친 전사와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로판에 흔히 등장하는 북부 대공 이미지에 가까웠지.  그런데 왜 이 녀석만 이렇게 자란 걸까.


나는 고개를 돌려 시온을 빤히 바라봤다. 혹시 이 녀석도....


"....?"


내가 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시온은 눈썹을 찡그리며 의문을 표했다.

그나저나 드리컨과 시온이 대련한다고 했던가.

 

“변경백님.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습니까?"


"무슨 부탁인가? 가능한 한,  들어주겠네."


왠지 모르게, 드리컨은 내게 호의를 가진 듯 보였다. 자기 아들을 시험에서 두들겨 패고, 면전에서 비아냥거렸음에도 말이다.


"제가 드리컨 변경백님과, 시온님의 대련을 참관해도 되겠습니까? "


"나와 시온의 대련을?  이유가 뭔가?"


"저도 검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그 유명한 변경백님의 검술을 보고 싶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는 검을 다루는 사람이 맞고, 북부 변경백이 유명한 것도 맞다. 그리고 그의 검술이 궁금한 것도 맞았다. 어찌 보면 내 유일한 제자라고 할 수 있는 놈이, 저런 꼴이 돼서 나타났는데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다.


"뭐, 안될 건 없지. 허락하겠네."


옆에 선 시온은 떨떠름한 표정이었으나, 드리컨이 결정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정황상 시험에서 자신을 두들겨 팬 게 나라고 설명하지도 않은 것 같고.


나는 드리컨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내게 적의를 보내오는 기사 무리에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실례합니다."


갑옷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여전히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드리컨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그들이 내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잠시 몸을 푼 드리컨과 시온은 겉옷을 벗어 기사에게 맡기고는 연무장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럼 검을 들어라. 얼마나 늘었는 지 보자꾸나."


"네, 아버지."


둘은 마주 보고서, 검을 꺼냈다. 중재자도 없이 진검 대련을 하는 건가. 아무리 실력 차가 많이 나더라도, 부자간의 진검 대련은 참 북부인 답다고 생각했다.


왼발은 앞으로, 오른발은 뒤로, 시온은 옆으로 선 체 검을 머리까지 들어 올려 검 끝이 드리컨을 향하도록 겨눴다.

확실히, 입학시험 때보다는 자세가 안정된 느낌이다. 여전히, 방어를 도외시 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지만, 적어도 검을 놓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가겠습니다."


양손으로 붙잡은 시온의 검이 드리컨의 가슴으로 찔러 들어갔다. 역시나 방어를 도외시 했기에 그만큼 빠르고 위력적인 공격.

그러나 드리컨은 시온의 찌르기가 가속되기 전에 먼저 그 경로에 파고 들어가, 검을 비스듬히 들어 올려 찌르기를 흘려냈다.


흘려낸 시온의 검이 순식간에 경로를 틀어 드리컨의 목을 노리고 들어왔지만, 불안정한 자세에서 내지른 검격은 드리컨이 한 손으로 휘두른 검에도 힘없이 막혔다.

시온은 검이 막히자마자, 반격을 당하지 않도록 뒤로 뛰어올라 거리를 벌렸다.


"다시 갑니다."


얇게 읊조린 시온은 오른손으로 검을 움켜 쥔 체 다시금 달려들어 목을 향해 검을 찔러 들어갔다.

드리컨은 몸을 살짝 틀어 찌르기를 흘려낸 후, 오른손으로 잡은 검을 크게 휘두렀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반격에 시온은 급히 막으려 했으나, 한 손으로 너무 깊숙이 찔러 들어간 검을 빠르게 회수하기란 불가능 했다.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은, 드리컨의 검격은 시온의 어깨를 베기 직전에 멈췄다.


"....졌습니다."


시온의 패배 선언에 드리컨은 검을 거뒀다.


"많이 발전했구나 시온. 검이 예전보다 훨씬 안정적이야."


"칭찬. 감사합니다 아버지."


입으로는 감사하다 해도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온은 진심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넘어서고 싶은 것이리라.


"다시 들어와 보거라."


드리컨의 지시에 시온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번에는 찌르기가 아닌 베기.

손잡이의 최대한 끝부분을 붙잡은 시온이 가로로 검을 휘두르자, 드리컨은 뒤로 살짝 물러나 검격을 피했다.

그러나 시온은 멈추지 않고, 빗나간 검의 힘을 그대로 이용해 검을 다시 휘둘렀다. 마치, 검을 도끼처럼 사용하는 그 방법은, 외부의 힘을 자신의 힘처럼 본능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자만이 가능한 검술이었다.


드리컨도, 휘몰아치듯 가속하는 시온의 검격에 계속 물러서기만 했다. 그 힘은 점점 가속하여 함부로 빗겨내거나 막을 수도 없게 되었다.

계속해서 물러서던 드리컨은 마침내 연무장의 벽에 다다랐다. 시온 또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는지, 더더욱 거세게 검을 밀어붙였다.


침착하게 시온의 검을 지켜보던 드리컨은 검이 휘둘러지는 순간 자세를 낮췄다. 위력적이지만, 단조로운 시온의 검격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드리컨의 검이 시온의 다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가속할 대로 가속한 시온의 검은 파괴적이었으나, 유연하지는 못했다. 결국 시온은 그 힘을 억지로 통제해 무리하게 방어하려다 손목이 꺾이고 검을 놓치고 말았다.


"읏...."


드리컨은 검을 놓친 시온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웠다. 시온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지만, 손목의 고통 때문이라기보다 아버지에게 졌다는 사실이 분해서인 것 같았다.


"마지막 검술은 훌륭했다. 마치 옛날에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도끼를 보는 것 같았어."


위로의 말이라고 건넨 듯싶었지만, 시온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기사들을 따라 치료를 받으러 나갔다.


드리컨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내게 물었다.


"자식이란 알다가도 모르겠군."


“뭐, 다들 그렇죠.”


난 자식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러고보니, 자네는 이름이 뭐지?"


"로벤토입니다."


"로벤토.... 로벤토라. 아, 자네가 그 입학시험에서 시온을 이겼다는 그놈이구나!"


"맞습니다. 운이 좋았죠."


"하하하!"


내 대답에 그는 갑자기 박장대소했다.


"운이 좋았다고? 그럴 리가. 들은 바로는 아예 저 녀석을 농락했다던데."


"겉으로만 그렇게 보였을 뿐입니다."


"둘러댈 필요 없네. 자네를 탓하려는 게 아니야. 저 녀석은 한번 꺾일 필요가 있었으니. 오히려 내가 고맙지."


나에게 배워서 그런지, 생각하는 것도 놀랍도록 나랑 비슷했다. 내가 정확히 그 생각으로 시온을 입학시험 때 꺾은 것이니.

그리고 이번 대련으로 왜 시온의 검술이 그토록 공격에만 집중하였는지 알게 되었다. 바로 이놈이 원인이었다.


기본적으로 내 검은 마물을 잡아 죽이기 위한 검이다. 애초부터 인간을 상대로 하는 건 상정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 검술은 허초와 같은 기교나, 상대에게 압박감을 주는 동작조차 없이, 오로지 투박함만이 있었다. 또한 끝도 없이 변칙적인 마물을 상대하기 위해 한없이 방어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공격이 날아 올지도, 어디를 찔러야 죽는지도, 모르는 상대로 공격적으로 나갔다간 그대로 죽어버릴 테니까.


내 검술은, 오로지 공격을 피하고, 막고, 흘려내는 데 특화되어 있다. 쏟아지는 마물의 공격을 피하고, 막고, 또 흘려내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다 마침내 빈틈과 약점을 찾아냈을 때 비로소 그곳을 정확히 찔러 죽이는 것. 그것이 내 검술이다.


드리컨도 북부 마경의 변경백으로써 인간과의 전쟁 보다는, 마물 토벌을 가장 많이 할 것이기에, 나는 별다른 개조 없이 내 검술을 그대로 그에게 가르쳤다. 실제로도 내게 맞으면서 배운 검술이 대성하여, 북부 마경을 훌륭하게 수비하고 있었고.


문제는 마물을 잡아 죽이는 게 아닌, 사람과 대련할 때다. 자신의 공격 기회가 올 때까지, 빈틈과 실수만을 찾아 계속해서 공격을 막고 흘리는 검술은 인간 상대로도 유효할 수 있으나, 그걸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지치고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특히나 드리컨과 시온 같이 실력 차이가 크게 난다면, 상대가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방패처럼 느껴지리라. 합을 주고받지도 않으니, 대련 상대로는 최악이다.


승부욕과, 자존심이 강한 시온은 그 드리컨과의 대련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은 것이다. 평범하게 상대해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으니, 오히려 방어를 포기하고 공격만을 시도해 보기로. 적어도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게 아닌, 대련의 흐름을 자신이 주도해 보기로.


'조금 미안한데.'


원작에서 시온의 검술은 그야말로 용사에 어울리는, 정석적인 검술이었다.

저런 극단적인 방어를 뚫기 위한 기괴한 검술이 아닌, 균형 있고 유연한 검술. 애초에 시온 같은 천재에게는 그런 검술이 더 잘 어울렸다.

크게 본다면, 내가 시온의 검술을 망친 것일지도 몰랐다.


이런 내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드리컨은 그저, 치료받으러 가는 시온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시온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는 손짓으로 연무장에 남은 기사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이제 연무장 안에는 그와 나뿐이었다.


"아니, 시온과 같은 반에 합격했다 들었네."


"그렇게 됐습니다."


"대단하군. 원래 시험 입학자가 E반에 들어가는 경우는 5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다는데."


이 나이 먹고, 학교 합격했다고 한참은 어린 놈에게 칭찬받는 내 모습에 기분이 조금 미묘해졌다.


"시온을 잘 부탁하네.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많이 여린 아이야."


"그런 것 치곤 아버지를 상대로도 자비가 없던데요."


"하하하! 내 자식이 좀 승부욕이 강하긴 하지.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라네. 시온은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면 말을 안 들을 녀석이니까."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는 놈이었다. 그래도 어차피 프레아를 키우는 겸, 겸사겸사 키우려고 했으니, 부탁은 들어줄 수 있으리라.


"도대체 뭐가 좋다고 이런 고생을 자처하는지. 내 자식이지만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아."


드리컨의 말에는 왠지 모를 고민이 담겨있는 듯했다.


"뭐, 어차피 자기 인생 아니겠습니까."


그는 무심하게 던진 내 대답에 그것도 맞는 말이라며 웃었다. 어쩐지 옛날보다 웃음이 많아진 것 같다.


"하지만, 그 애는 마치 날 따라오기 위해 검을 드는 것 같아서 말이지...."


그는 한참을 웃다가도 시온 얘기를 하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네는 왜 검을 들었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복잡한 건 아닐세. 그냥 뭘 하려고 그 검을 들었느냐는 거지."


그 똘망똘망하던 소년이 늙더니 많이 이상해졌구나, 라는 생각도 잠시. 나는 이 질문이 어디서 나온 건 지 떠올랐다.


"별거 없습니다. 그냥 살기 위해 들었죠. 개죽음당할 수는 없으니."


"허허, 그렇지. 많은 사람이 그렇게 대답하더군. 내 스승님도 똑같이 대답하셨었네."


역시나 내 이야기다.


"내게 처음으로 검술을 가르쳐준 사람이 내게 물어봤었다네. 너는 검을 왜 들었냐고. 그래서 대답했지."


기억난다. 그 연약한 소년이, 손이 짓무르고 근육이 찢어지도록 검을 휘두르자, 내가 물었다. 너는 왜 검을 들었냐고. 그러자 소년이 대답했다.


"마물을 죽이기 위해. 내 어머니와 내 아버지와 내 누이를 앗아간 그들을 씹어 삼키기 위해."

'마물을 죽이기 위해. 내 어머니와 내 아버지와 내 누이를 앗아간 그들을 씹어 삼키기 위해.'


그래, 그게 소년이 검을 휘두르는 이유였다.


"제국에서도 꽤 유명한 이야기지. 마물에게 가족을 잃고 저주에 걸린 변경백. 평생  마물만을 죽이며 살아야 하는 저주에 걸려 미친놈처럼 마물을 처죽인다고. 뭐, 진짜 저주에 걸린 건 아니지만 미친놈처럼 살아오긴 했지."


저주는 아직도 그의 몸에 수많은 흉터가 되어 남아 있었다. 커다란 상처를 가리기 위한 흉터들이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식이 아카데미에 가지 않았으면 했다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난 저 녀석이 편안하게 살길 원했거든. 더러운 마물이나, 지긋지긋한 설원이 없는 북부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살길 바랐지. 검술이나 마법은 그냥, 호신용으로 충분해. 더군다나 저 녀석은···."


드리컨은 뒷말을 얼버무리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가  멀리서 기사들에게 치료받는 시온을 바라본다.


"아카데미에 간다는 건 그 영역을 넘어서 내 자리를 이어받을 거라는 선언처럼 들렸다네. 졸업을 하고 내게 돌아온다면, 나는 저 녀석과 같이 전장을 나가며, 또 가족을 잃을 거라는 공포에 시달리게 되겠지."


겉보기에는 덤덤한 말투지만, 내게는 그의 손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만약, 혹시라도, 내가 마물에 죽는다면? 저 녀석도 나와 같은 저주에 걸리지 않을까? 그런 두려움이 매일 밤 떠올라 잠을 설치곤 했지."


사랑과 기대, 그리고 공포와 후회가 복잡하게 들어찬 드리컨의 붉은 눈은, 처음 만났을 때의 울보 소년을 연상케 했다.


그래서 나는 무심코 제자의 등을 두드렸다.


그 옛날, 마물의 울음소리에 제자가 겁먹을 때면,  나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몰라, 그저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며 제자의 등을 두드렸었지.


"괜찮을 겁니다."


가족 모두를 마물에게 잃은 소년. 그 소년에게 최전선인 북부는, 마치 지옥이었으리라. 

마물의 울음소리에 가족의 비명을 듣고, 마물의 시체에 가족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그런 지옥 속에서 평생을 살아오며, 또다시 자기 자식을 그 안으로 들이밀어야 한다는 고통은 어떠할까.


그 마음을 나는 헤아릴 수 없어서. 그저 한참을 가만히 서서 제자의 등을 두드리고만 있었다.


"미안하네. 나이 먹으니 더 감성적으로 되는 것 같아. 처음 만난 아들뻘 소년에게 이런 말을 하다니 말이야."


"뭐, 그런 날도 있는 거죠."


"사실, 이런 이야기는 가족에게도 안 하는 데 말이지. 어쩐지 자네는 처음 만나는 것 같지가 않아."


내 제자는 나를 닮아 쓸데없이 예리했다.


"아 그래, 스승님이랑 비슷한 분위기가 나는군. 그래서 내가 조금 풀어진 걸지도 모르겠어."


"...."


사실, 드리컨은 입이 무거워, 내 정체를 들켜도 별 상관없었으나, 지금 들키면 여러모로 내 체면이 깎일 듯했기에, 차마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저와 닮았다는 그 스승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스승님? 아, 그분 말인가. 음....."


드리컨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하늘을 바라보고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얼굴이 무서운 분이셨지. 온통 흉터로 뒤덮인 채로 항상 무표정이었으니. 처음에는 쳐다보기만 해도 울 정도였어."


"성격은 또 어떻고. 막무가내로 시켜보고 안 되면 이것도 못 하냐며 짜증 냈지. 이 악물고 따라가면, 이 정도가 당연한 거라고 칭찬 한마디 없이 넘어갔지. 그야말로 최악의 스승이었어. 차라리 다 때려치우고 그분 옆에 가끔 따라오셨던, 예쁜 엘프 마법사님에게 마법이나 배울까 생각할 정도로."


"옷도 맨날 낡은 거적때기 같은 거나 입고 다녀서 거지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았지. 성의 사용인들이 스승님을 못 알아보고 거지는 나가라 소리치면, 바로 잡아다가 성 창문에 매달아 놓기로 유명했다네. 아니, 거지처럼 입고 다니는 데 누가 그걸 구별할 수 있겠나?"


쌓인 게 많았는지, 나의 제자는 스승의 험담을 쉴 틈 없이 늘어놓았다.


"그.... 스승님의 좋은 점은 없었습니까"


뒷담 같은 앞담에 정신이 피폐해진 나는 결국 추하게 장점을 구걸했다.


"스승님의 좋은 점이라...."


나의 제자는 단점을 말할 때와 달리 한참을 고민했다. 여러모로 이놈을 가르친 세월에 대한 자괴감이 몰려오려던 찰나에, 제자가 대답했다.


"가끔 스승님이 후원하는 고아원에 데려가 주셨던 게 기억나는군. 내가 가문의 마지막 핏줄이라 성 밖으로 거의 나가지 못했거든. 그걸 알고 그분이 몰래 나를 성에서 빼내어 고아원에 있는 친구들과 놀게 해주셨다네. 그 친구들과의 추억이 기억에 남아. 몇몇은 지금 내 측근이 되어 일을 해주고 있기도 하고."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언제나 우울하고 소심했던 소년이, 고아원에서만큼은 신나서 뛰어놀았었지.


"그리고 그분은 절대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지. 마물의 울음소리만 들려도 몸이 굳어버리는 나를 믿고 끝까지 가르쳐 주셨어. 어찌 보면 내가 나로서 살 수 있게 해주신 분이라고 할 수 있겠군. 가족의 복수를 내 손으로 이루게 해주셨으니."


제자의 눈동자에 추억이 스친다.


그 추억 속에 내가 있음을 떠올리자, 이세계에서의 삶이 무의미하지만은 않았음을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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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레이비니아 노아 (7) 24.09.05 11 0 10쪽
27 레이비니아 노아 (6) 24.09.04 12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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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레이비니아 노아 (2) 24.08.31 15 0 16쪽
22 레이비니아 노아 (1) 24.08.31 13 0 13쪽
21 스승의 은혜 (2) 24.08.30 15 0 10쪽
20 스승의 은혜 (1) 24.08.29 16 0 15쪽
19 이물질 24.08.28 15 0 14쪽
18 마물 연구부 (2) 24.08.28 16 0 11쪽
17 마물 연구부 (1) 24.08.27 18 0 16쪽
16 축제의 히든피스 (2) 24.08.27 18 0 16쪽
15 축제의 히든피스 (1) 24.08.27 21 0 10쪽
» 용사와 변경백 (2) 24.08.26 20 1 18쪽
13 용사와 변경백 (1) 24.08.25 22 0 11쪽
12 입학시험 (5) 24.08.25 24 0 11쪽
11 입학시험 (4) 24.08.24 25 0 13쪽
10 입학시험 (3) 24.08.24 25 0 12쪽
9 입학시험 (2) 24.08.23 25 0 12쪽
8 입학시험 (1) 24.08.23 27 0 9쪽
7 마검 24.08.22 31 0 10쪽
6 모든 무기의 왕 24.08.22 33 0 13쪽
5 신성도시 가르티나 24.08.21 34 0 11쪽
4 패배 이벤트 (2) 24.08.21 40 0 10쪽
3 패배 이벤트 (1) 24.08.20 54 0 9쪽
2 100년은 늦은 지원생 24.08.20 60 0 10쪽
1 드디어 기어나온 주인공 24.08.20 72 1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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