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에서 전직 용사로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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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아
작품등록일 :
2024.08.20 22:56
최근연재일 :
2024.09.0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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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0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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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비니아 노아 (8)

DUMMY

과거의 악의와 미래의 죽음, 현재의 위협이 머릿속에서 뒤섞이며 소녀를 침잠시켰다. 이제는, 마지막 남은 이성조차 세계와 동화되어 소녀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다.

소녀는 더 이상 미래도, 두려움도, 죽음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가 된 세상의 온기만이 남아 소녀를 품어주었다. 그 속에서 소녀는 영원히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녀의 지성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기억도, 이성도, 감정도 모두 세계와 동화되었지만, 오직 지성만이 생존 본능에 따라 계속해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쳤다.


그리고 지금 소녀에게 가장 큰 위협은 저 소년이다.

소녀의 지성은, 소년을 배제하기 위해. 무의식이 할 수 있는 모든 마법적 역량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 모든 걸 뚫고 소녀에게 다가왔다. 상정 외였다.


결국, 소년은 실드를 부수고, 소녀에게 검을 겨눴다.

목에 서늘한 검날이 느껴졌다.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봐도 소녀가 생존하는 미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지성은 마침내 그렇게 판단했다.

그러나 소년은 어째선지, 검을 바로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가만히 있을 뿐.


“레이비니아 노아.”


피 칠갑이 된 소년은, 계속해서 그 이름을 불렀다.


“레이비니아.”


아마 저건 이제는 세계와 하나가 되어버린, 소녀를 향한 외침일 것이다.

소년은 그 소녀를 애타게 찾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레비....”


아마, 이 소년은 소녀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지성은 그리 판단했다.

따라서 소녀의 지성은 마지막 생존 본능에 따라, 잠들어버린 이성의 편린을 깨우기로 했다.


소년이 그 편린을 보고 소녀에게 동정을 베풀게끔. 그래서 소녀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성은 티끌만큼 남은 이성을 그러모았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지성에 의해 결집한 불완전한 이성이 깨어났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깨어나자마자 바라본 것은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소년. 자신을 죽이려는 소년이다.

하지만 소녀가 바라본 이 소년의 눈은, 어딘가 슬퍼보였다.


소년의 눈에는 두려움이 담겨있었다. 그것은 소녀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 소년은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괴롭게 만들었을까. 모를 일이다. 소녀의 편린에, 그에 대한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하지만, 소녀는 그 두려움을 위로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렇기에 소녀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움직이지 마라.”


소년이 딱딱한 목소리로 경고했지만, 소녀는 그저 다가갈 뿐이었다.


경고와 달리, 소녀가 코앞까지 다가가도, 소년은 검을 뻗은 자세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그 표정만이 일그러져, 고통을 표현한다.


소녀는 천천히 다가가 상처투성이 소년을 마주했다. 소녀가 그 눈을 들여다볼수록 소년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져만 갔다.


소녀가 명확한 판단을 내리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지금 몸에 남아있는 건, 오로지 소녀의 편린이었으니.


허나, 이건 소녀가 평생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결코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렇기에 소녀는 이것을 기억하며, 소년에게 줄 수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간 소녀는, 상처투성이 소년을 끌어안았다.

그리고선, 당황하는 소년의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소년의 피가 소녀에게 흘러 피투성이가 되어갔다. 그럼에도 소녀는 계속 소년을 끌어안고 있었다.


차가웠던 소년의 몸이 소녀에게서 온기를 가져간다.

온기를 나누어 가진 소년의 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와 비슷한 온도가 되었다.

이제는 소녀에게도 조금은 온기가 느껴진다.


소년도, 소녀도, 그 온기에 기대어, 버티고 있었다.

소년은 무너질 것만 같은 정신을, 소녀는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이성의 편린을 붙잡는다.


죽이려는 이가, 죽을 이에게 위로받고, 용사가 소녀에게 구원받는다.


그 아이러니함 속에서 소년이 다시 검을 들었다.


“....”


소녀의 등에서, 서늘한 날붙이가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소년은, 이제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소녀는 그에게 생긋 웃어주었다.


[푹-]


소녀의 위로와 함께, 날붙이가 살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그럼에도 소녀의 편린은 계속 미소를 띠었다.


“다 괜찮아.”


오로지 그 말을 반복하며, 소녀는 소년을 끌어안았다.





#





내 검이 레비의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것은 내 복부를 관통했다.


우리는 서로 끌어안은 체, 하나의 검으로 이어져 있었다.


“괜... 찮아.”


레비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스쳤다. 고통에 떨리는 그 목소리가 견디기 어려울 만큼 괴로웠다.

온몸의 상처보다도 그 목소리가 더 괴롭다. 겨우 편린이 하는 말에 위로받는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미안하다.”


모두를 구원하고 싶었다.

화면 너머로, 주인공을 바라보며, 나도 그녀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미안하다.”


처음 이 세상에 처음 떨어졌을 때도, 그러길 바랐다.

뼈가 부서지고, 내장이 흘러나와도, 고통받는 건 나 하나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동화 속 용사님이 되고 싶었으니까.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현실을 직시했다.

선의가 악의로 돌아오는 것을 봤다.

동료를 구하려다,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는 것을 봤다.

악을 벌하니, 수많은 이들이 불행해지는 것도 봤다.


“미안하다.”


인간을 구원하는 건 그야말로 동화 속의 용사님만이 가능한 일이니까.

그러니, 현실을 목도한 용사는 타협하게 된다.

동화 속 용사가 아닌, 현실의 용사가 된다.


“미안하다.”


모두를 구원하려는 자는 불행해질 뿐이니, 사람들은 그들을 손가락질하고 가짜라 불렀다.

현실적인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용사라 불렸다.


“미안하다.”


그러니 내가 하려는 짓은 어쩌면, 용사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일지도 모른다.

레비를 죽이고 모두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용사의 길일지도 모른다.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동화 속 용사가 되고 싶었다.


나는 모두를 구하고 싶었다.


그런 용사이길 바랐다.


“미안합니다.”


레비를 끌어안은 채로, 온몸의 마력을 폭발시켰다.


반동은 생각하지 않고, 마치 저주가 없었을 때처럼 전력으로 부딪혔다.

초월에 닿았던, 그리고 마왕에 닿았던 마력이 회로를 뚫고 터져 나온다.


기괴한 언어로 된, 온갖 악의적인 활자가 압도적인 빛을 내며 온몸을 불태웠다.


내장 하나하나, 핏줄 하나하나가 모조리 작열하며, 끔찍한 고통이 몰려왔다.

마검을 붙잡았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마력을 단번에 때려 부었기에, 저주가 활성화되는 정도도 차원이 달랐다.


온몸이 소멸하는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어쩌면 진짜 온몸이 불타서 소멸해 버릴지도 몰랐다.


신격이 새긴 저주는, 초월에 이르렀던 마력을 격렬하게 해체했다. 내게서 마력을 완전히 박탈하겠다는 악의가 느껴진다. 허나, 그 악의가 지금의 내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서로를 끌어안은 우리는, 여전히 같은 검에 찔려 이어진 상태였다. 내게서 빠져나온 피가, 그대로 검신을 타고 레비의 상처에 닿았다. 그리고, 서로의 피가 이어졌다는 것은, 서로의 마력이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지금의 레비는 이성이 없는 상태이기에, 자신의 마력을 보호할 방어기제가 작동하지 않았다.

나는, 내 몸에서 마력을 끌어올린 것처럼, 마력의 흐름을 조작해 레비에게서 마력을 끌어왔다.


우리를 꿰뚫은 검은, 서로의 마력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어 은은하게 빛났다.

반면 내 마력을 넘어서, 레비의 마력까지 분해하기 시작한 내 몸은, 더더욱 격렬히 불타올랐다.


“....!”


비명조차 뱉기 힘든 고통이다. 우리를 연결한 검마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기...기기기기긱]


온몸에 새겨진 저주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폭주했다. 악의가 담긴 문자가 몸에서 튀어나올 듯이 진동하며 마력을 해체했다.


마법사가 평생 사용할 마력이 찰나에 분해되지만, 레비에게는 티끌만 한 마력이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마력을 끌어왔다.


폭주하기 시작한 저주문은 미친 듯이 마력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그에 동반되는 고통은, 말 그대로 시간 감각을 소멸시키고, 나를 영겁 속에 가두었다.

그 영겁 속에서, 나는 구도자처럼 계속해서 마력을 불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서히 시야가 암전되어 갔다. 내가 안고 있는 레비의 감촉이 사라져 간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마력을 불태웠다.


[지지지지직-]


저주문이 쇳소리를 내며 과부하 되었다. 온몸의 핏줄이 터지며, 몸에 붉은 반점이 새겨졌다.

그리고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았다. 감각이 사라지고, 고통마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본능적인으로 마력을 불태웠다. 얼마나 남았을까.


다시 시간이 지나고, 이제 실낱같은 이성마저 흐릿해졌다. 죽음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마물을 사냥하면서 느꼈던 죽음과는 달랐다. 그 서늘했던 감각과 달리, 이건 따스했다. 너무나도 따스해 모든 걸 버리고 몸을 맡기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그곳에 몸을 맡겼다.


결국, 나는 동화 속 용사가 아니었다. 그 뿐인 이야기.

그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의식이 가라앉았다.

저편으로.

서서히.


“....”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무언가를 부르고 있었다.


“....”


누굴까. 누구를 부르는 걸까.


“....”


모르겠다.


“....”


나와는 상관 없겠지.


“....”


“....”


“....”


[....!]


한순간, 나와 연결된 이의 격렬한 감정이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날카로워진 감각이, 나를 의식의 저편에서 끌어올렸다.


그곳에는 나를 바라보는 소녀가 있었다. 피가 너무 빠져나간 탓에 얼굴은 온통 창백했지만, 귓가에 닿은 그 숨결만은 따뜻했다.


격렬하게 진동하던 저주문이 가라앉았다. 몸의 감각이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한다. 끔찍한 고통도 다시금 찾아왔지만, 그걸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앞을 바라봐야 했으니까.


“아.”


그곳에서, 흑백의 세상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소녀의 뒤편으로 빛이 들어오며, 이상권역의 흔적을 지워갔다.

마경의 흔적도, 검은 이형의 존재도 서서히 소멸했다.

마력을 전부 불태운 것이다.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세상이 그렇게 말하는듯 했다.


"로벤토...."


떨리는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그 목소리를 따라 앞을 바라봤다.

​​

그곳에는 보랏빛 눈동자가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이어져,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서로의 눈에 비친 소년과 소녀는, 희미하게나마 웃고 있었다.


온갖 피와 상처에 더러워진 얼굴이었지만, 그 미소는 어떤 때보다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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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레이비니아 노아 (7) 24.09.05 11 0 10쪽
27 레이비니아 노아 (6) 24.09.04 12 0 11쪽
26 레이비니아 노아 (5) 24.09.03 12 0 15쪽
25 레이비니아 노아 (4) 24.09.02 14 0 15쪽
24 레이비니아 노아 (3) 24.09.01 13 0 11쪽
23 레이비니아 노아 (2) 24.08.31 15 0 16쪽
22 레이비니아 노아 (1) 24.08.31 13 0 13쪽
21 스승의 은혜 (2) 24.08.30 15 0 10쪽
20 스승의 은혜 (1) 24.08.29 16 0 15쪽
19 이물질 24.08.28 15 0 14쪽
18 마물 연구부 (2) 24.08.28 16 0 11쪽
17 마물 연구부 (1) 24.08.27 18 0 16쪽
16 축제의 히든피스 (2) 24.08.27 18 0 16쪽
15 축제의 히든피스 (1) 24.08.27 21 0 10쪽
14 용사와 변경백 (2) 24.08.26 20 1 18쪽
13 용사와 변경백 (1) 24.08.25 22 0 11쪽
12 입학시험 (5) 24.08.25 24 0 11쪽
11 입학시험 (4) 24.08.24 25 0 13쪽
10 입학시험 (3) 24.08.24 25 0 12쪽
9 입학시험 (2) 24.08.23 25 0 12쪽
8 입학시험 (1) 24.08.23 27 0 9쪽
7 마검 24.08.22 31 0 10쪽
6 모든 무기의 왕 24.08.22 33 0 13쪽
5 신성도시 가르티나 24.08.21 34 0 11쪽
4 패배 이벤트 (2) 24.08.21 40 0 10쪽
3 패배 이벤트 (1) 24.08.20 54 0 9쪽
2 100년은 늦은 지원생 24.08.20 60 0 10쪽
1 드디어 기어나온 주인공 24.08.20 74 1 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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