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 vs 마녀(175)
천천히 소리 없이 침입한다.
스카레이는 고개를 돌려 제딘을 바라봤다.
제딘도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모두 준비해라. 범상치 않은 놈들이다."
그때 스카레이가 천마비행으로 커다란 고목을 차고 올랐다. 손에는 언제 뽑았는지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새하얀 예광을 뿜어내는 검은 바로 엘리시움으로 제련된 검이다.
"이 검만 있었다면 반사르성에서 그렇게 애를 먹지 않았을 거다. 바로 이렇게!"
스카레이의 손에서 구화마검이 펼쳐졌다.
주변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어지러이 휘날렸다.
-쿵
무언가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는데 제자들이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어 꿈틀거리는 그것에 검을 쑤셔 박았다.
검을 뽑자 검신을 타고 검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것을 본 제딘이 크게 고함쳤다.
"놈을 확실히 죽이려면 목을 끓어야 해."
-파악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쓰러졌던 사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쉬이이익
검이 번쩍 예광을 날렸고 잘린 머리통이 어깨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달리는 속도가 심상치 않아서 혹시나 했더니 역시 마족이군."
"보고에 의하면 이놈들 외성을 나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왜 여길?"
"보면 모르겠어? 케이사르 그놈이 의뢰한 거겠지. 마족만큼 확실히 처리해줄 놈이 어디 있겠어?"
"그럼 케이사르도 마족입니까?"
"아니 그놈은 뭔가 달라."
-파시시식
"조심해 지하다."
마교의 제자들은 일제히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경공을 배웠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두 다리만 있으면 못 갈 곳이 없고 못 오를 곳이 없다.
어찌 보면 경공이야 말고 마교 최고의 무예라고 불러도 될 만했다.
-불쑥
땅거죽이 불쑥 솟아오르자 스카레이는 검과 함께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검은 자루까지 바닥에 꼽혔고 스카레이가 기합을 지르며 검을 들어 올리자 꼬치 꿰듯 꼽힌 마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더지 머리의 괴물인데 검을 뽑아낸 스카레이는 단칼에 목을 쳐 냈다.
제딘도 나무 위에서 수풀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그 위로 날아내렸다. 이번에는 엘리시움 검을 잡고 있었기에 두려움이라는 것이 없었다.
"너희들도 기분이나 풀어라. 반사르성에서 당한 울분이라도 풀어야겠다."
제딘이 토끼 머리 마족의 머리를 참수시키며 말했다.
"마족과 싸울 기회다. 가진 능력을 모조리 꺼내라. 포탈이 근처니 여차하며 탈출할 것이다. 마음을 놓고 싸워라."
수풀에서 튀어나온 마족은 모두 여덟이었다.
스카레이 일행은 즉시 마족과 어울렸다.
동탑의 조사관 레노번은 마족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 레노번은 철들기 전부터 마족에 관한 서적을 모조리 탐독할 정도로 마족에 푹 빠졌다.
당연히 마족은 전설상에서나 존재하는 종족이고 세상에는 다시 볼 일 없는 종족이었다.
노력하는 자보다 더 무서운 것이 취미로 그 일을 하는 자다. 레노번은 후자에 속했고 마족에 대한 그의 지식은 테일리아드에서 손꼽을 정도가 되었다.
테츠는 레노번을 초청해 장로와 당주를 모아놓고 매주 강의했다.
마교인은 각 마족의 특징과 그들을 효율적으로 제압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마족이 공멸할 수밖에 없는 것은 말라키의 위대한 힘이 아닌 잉겔리움이라는 금속 때문이다.
잉겔리움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말라키였으며 그의 이름을 따 잉겔리움이라 불렸다. 잉겔리움이 발견 되었을 때는 마족은 거의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래서 흐지부지 역사 속에 묻혀 버렸던 거였다.
-사각
또 한 마리의 마족 머리가 바닥으로 뒹굴었다. 신체 반사 신경이나 스피드는 당주들을 상회했으나 무공이 부족한 신체 능력을 완벽히 보완해 주었다.
마족이 누군가? 인간을 식량 이하로 취급하는 족속이다. 마족과 동등하게 싸울수 있는 인간은 몇 안 된다.
강력한 마법사가 마족의 상대라고 하지만 마법사는 가장 취약한 신체 능력을 갖췄다. 마법으로 마족을 격살시키지 못하면 되레 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무공을 익힌 마교인들은 근접전에서조차 마족을 압도했다.
마교에서 스무 손가락 안에 드는 스카레이와 제딘은 그렇다고 쳐도 그들의 제자까지 별 어려움 없이 마족을 쓰러뜨렸다.
"이상하네. 교주님은 뭘 하시는 거지? 이 정도 소동이면 나타나실 텐데?"
침묵의 숲은 망자로 덮여 있었다. 교주는 레번이라는 사내의 몸에 사령으로 들어가 침묵의 숲에서 포탈을 지키고 있었다.
한데 무려 마족이 침묵의 숲에 침입했음에도 망자들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짙은 숲속이라 하늘도 보이지 않았다.
마족 여덟을 처리한 스카레이는 옷을 털고는 말했다.
"이대로 돌아가도 좋은 거야? 우릴 따라서 오던 용병 놈들은 포기했나? 마족이 어떻게 여길 들어왔지?"
"군사에게 받은 명령은 눈길을 끌고 도주하란 것입니다. 그 임무만 생각합시다. 괜히 다른 일에 손을 댔다가는 일이 꼬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그룩과 아가므네가 세렌 장로와 만날 시간을 벌어주면 되는 겁니다."
스카레이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검을 검집에 넣었다.
"마족이 생각보다 허약하지 않아?"
"마족이 왜 허약합니까? 저희가 너무 강해진 것이지."
"그런가? 하긴 잉겔리움 검이 없다면 무척 애를 먹었을 거야."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운이 좋았을 뿐이고 이들이 운이 없었을 뿐입니다. 철수하도록 합시다."
"쩝, 움직이자. 스승님과 막내가 무척 걱정되는구나."
***
모그룩은 아가므네의 허리를 감싸 안고 끌어당겼다.
"우리 부부는 여행 중입니다."
모그룩과 아가므네는 상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귀티가 줄줄 흐르는 부유한 상인 차림이다.
"어디서 오셨소?"
"어반마르스입니다."
"허, 제국의 수도에서 왔으니 이곳은 시골구석으로 보이겠습니다. 그려. 하하."
"그럴 리가요. 솔라리스 왕국의 수도는 어반마르스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습니다. 정갈하고 깔끔함은 어반마르스보다 위입니다."
"하하. 그런가요? 우리 마누라 꿈이 죽기 전에 어반마르스 구경을 한 번 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첫발을 내딛기가 힘들지 결심만 선다면야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쉿! 조용히 말씀하십시오. 마누라가 들었다면 당장 짐을 꾸리자고 할지도 모릅니다."
"결심은 빠를수록 좋지요. 하하."
모그룩은 넉살 좋은 웃음을 지으며 검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잉? 그 검은 솔직히 장식용에 가깝습니다. 호신용으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만."
"그러려고 구매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제가 수집광입죠. 아칸에 왔으니 기념이 될만한 검을 찾고 있는데 모두 아이언 캐슬에 가보라고 하더군요."
모그룩은 허리춤에서 가죽 주머니를 살짝 풀었다. 그곳에서 금빛 누런 물체가 언 듯 비쳤다.
아이언 캐슬의 주인은 단번에 눈빛이 변했다.
"저희 가게 명성이 있지. 그걸 컬렉터분에게 드리기에 민망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권할 만한 무기가 있긴 있습니까?"
모그룩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뭐, 금액이야 상관하지 않고 왔으니 물건만 괜찮다면야."
"하하, 혹시 아름다운 부인께서 화를 내지 않으실지?"
"괜찮다오. 괜찮아. 그녀는 남편의 취미 생활을 방해할 정도로 철부지는 아니요. 하하." "나 제이콥 아이언 캐슬의 명성을 걸고 명품을 추천해 드리지요. 괜찮으시다면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호오, 기대가 큽니다."
"중요한 물건은 손을 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진열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금고에 보관 중입죠."
"오오, 그럼 금고에 희귀한 물건이 많겠군요. 돈을 더 가져왔어야 했나?"
"하하 컬렉터께서 눈이 높으시니, 마음에 들 물건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다행이겠습니다."
모그룹은 제이콥을 따라 상점 내부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상점 내부는 매우 넓었고 벽을 빙 둘러 세워진 진열대에는 각종 무기류와 장비류가 아름다운 빛깔을 내며 진열되어 있었다.
아이언 캐슬은 아칸 시티에서 가장 잘 알려진 무기 상점이고 주먹 망치 윌슨 대장간의 주 납품처이기도 했다.
특히 귀족들이 많이 애용하는 상점으로 제이미도 단골 중 한 명이었다.
케이사르 후작이나 시몰레이크 후작 같이 성을 보유한 귀족은 성내 따로 대장간을 두었기 때문에 상점을 이용하는 귀족은 대부분 평범한 부류에 속했다.
그들은 과도하게 귀한 물품을 살만한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제이콥은 가게 명성을 위해 레전드 칭호가 붙은 무기류를 오랜 시간을 통해 수집해 왔다.
오크와의 전쟁이 나고 무기 특수철을 노려 짭짤한 이익을 보나 했더니 군단이 오크를 쫓아 엠버스피어로 가버린 후 상점은 파리가 날리기 시작했고 심지어 검날을 세우러 오는 기사들의 발걸음도 뜸해졌다.
장사가 안될 때쯤 어디라도 여행이나 갈까 했지만 역시 만만치 않은 경비가 문제였다. 그런데 오늘 완전히 봉을 잡을 것이다. 물건 하나 잘 팔면 여행 경비는 빠지고도 남을 요령이니 미소가 절로 입가에 머물렀다.
"여긴 함부로 보여 주는 곳이 아닌데 특별히 손님에게만 보여 드리는 겁니다."
상점의 뒤쪽은 공방으로 꾸며져 있었다. 무기의 날을 세우거나 방어구도 직접 수리하기 때문에 공방은 필수다.
제이콥이 공방의 오른쪽 벽에 걸려 있는 방패를 걷어내자 작은 손잡이 하나가 나타났다.
익숙한 동작으로 손잡이를 내리자 벽 바로 아래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호? 굉장한 시설입니다. 과연 아이언 캐슬 명성에 걸맞은 장치입니다."
"하하. 선조 때부터 있었던 시설인데 이곳에 상점이 차려지기 전부터 있었던 거라고 들었습니다."
"오호? 그래요? 정말 유서 깊은 곳이군요. 그런데 저같이 모르는 사람에게 공개해도 됩니까?"
"뭐,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곳이라서 비밀까지도 안되는 곳입니다."
"그래도 좀도둑들은 눈독을 들일 만한 곳이지 않습니까?"
"어림없습니다. 이곳에 한 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기 힘든 곳이지요."
"억, 그런 무서운 곳에 지금 들어가려 하십니까?"
"하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법의 추만 있으면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지요."
"혹? 아칸이 세워지기 전 전황 시대의 유물이 아닙니까?"
"오오. 전황까지 아시고 식견이 대단하십니다. 역시 컬렉터 다우십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 상점은 전황 시대 유물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렇군요. 오늘 제 눈이 호강합니다. 이런 고대 유물을 직접 구경할 기회라니 이건 절대 공짜로 봐서는 안 됩니다. 저희를 위해 이곳을 보여 주시니 감격스럽습니다. 이걸 받으십시오."
제이콥은 손바닥에 떨어진 차가운 금속을 바라봤다. 금속의 색깔은 누런색이었다.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애써 꾹 참으며 말했다.
"이곳을 외지인에게 보여 드리는 것은 십 년 만에 처음인 것 같습니다."
"호오? 혹시 왕궁에서 뭐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이곳은 매우 중요한 유물인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하하. 팬텀 가드너가의 사람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희가 이곳을 지키는 역할도 겸하고 있답니다."
"여보, 조금 무서워요." "부인 보시오.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느냔 말이오. 우리는 지금 수천 년 전 인간이 만든 귀중한 자산을 보고 있는 거요. 지금 이 이끼 낀 벽은 사천 년 전의 사람이 만들었다고 생각해 보시오.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소. 하하."
제이콥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목에 건 목걸이를 풀어 손에 잡았다. 목걸이에는 엄지 크기의 동그란 원형 추가 달려 있는데 어느샌가 그것이 푸른 빛을 은은하게 내 뿜기 시작했다.
전황 시대.
수천 년 전 아칸 시티 터에 인간의 왕국이 있었다. 말라키의 등장으로 인간의 문명은 파격적인 진보를 이루었다.
그 발전 속도가 너무나 막강하였고 인간은 급속도로 빠르게 번영했다.
주신 제국이 있기 사천 년 전 텔모어 대륙에서 모든 위협이 사라지고 최정상에 오른 것은 인간이었다.
그들의 번식은 상상을 초월했고 각각 자연환경이 좋은 지역을 중심으로 군집 문화가 생겨났고 말라키의 지식은 땅을 파고 하늘을 오르는 등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다.
이 지하 유물도 그 시절 지어진 것이다. 사람이 많아지면 다툼이 생기기 마련이고 작은 다툼은 큰 다툼으로 이어져 촌락 간의 전쟁으로 다시 도시로 그리고 국가로 이어지는 전쟁의 불길은 불보다 더 빨리 텔모어 대륙으로 번져나갔다.
제이콥이 내려가는 지하는 당시 번성했던 한 도시 국가의 유적이었다.
아칸의 지하에 이런 유물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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