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임은 커서는 안 돼
속삭임은 커서는 안 돼
주변 공기가 너무 무거워 이 방 안의 분위기가 어떤지는 앉아 있는 사람 모두 공감할 정도였다.
"문젯거리는 하루빨리 해결하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외다."
"문젯거리라고 칭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라의 신민이 원하는 일이오."
"신민이요? 후작이 말하는 신민이 누구란 말입니까?"
원탁의 탁자를 빙 둘러앉은 인물은 세 사람의 남자와 한 명의 여성이었다.
시몰레이크 후작은 연신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이미 윌리엄 대공에 대한 판결은 내려진 상태외다."
"흥 그 판결은 누가 내린 것인가요? 전 들은 적도 없습니다."
"누가 내린 판결이라니! 아칸 시민이 내지르는 원통함의 비명이 공주 귀에는 정녕 들리지 않는다는 겁니까?"
"그건 오해와 누명에 의해 비롯된 것. 그것을 바로 잡을 시간이 필요할 뿐이에요. 만약 후작님이 틀렸다면 향후 일어날 일에 대해 책임을 지실 수 있는 겁니까?"
"물론이외다. 공주! 지금 중요한 것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이요. 그 초석이 되어야 하는 것이 잘못을 바로잡는 거외다. 그 잘못을 바로잡고 신민이 마음을 모아 솔라리스 왕국을 재건해야 하오. 지금 동쪽에서 벌어지는 요상한 일을 그냥 구경만 하고 있을 셈이오? 왕국의 허락도 없이 타국의 군대가 본국의 영토를 무단으로 침입하였는데도 그들을 막기는커녕 아칸 시티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오. 이건 나라가 이미 와해 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지 않겠소?"
"그럼 후작님이 반란이라도 일으켜 아칸 시티를 점령하세요. 그편이 차라리 속 편한 것이 아닙니까?"
-쾅
시몰레이크 후작은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외쳤다.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할수 있는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소이다. 공주는 말을 가려서 하시오."
"맘에도 없는 말씀하실 필요 있으신가요? 그냥 왕 자리가 탐이 나니 내놓으라고 하시죠?"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공주. 당신의 신분을 보고 참는 거지. 조만간 윌리엄 대공이 폐위되면 당신은 온전히 못 할 거외다."
"제이미 백작 당신은 듣고만 있는 겁니까? 후작의 언행에 대해 어찌 반론조차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진정하시오. 이건 누구를 윽박질러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소."
"나라의 안위가 중요한 거요? 아니면 한낱 아비의 목숨이 중요한 거요?"
"한낱 이라니! 제이미 백작! 당신은 이러고도 솔라리스 왕국의 사위라 할 수 있나요?"
"공주 너무 흥분한 듯하오. 진정하시오."
노르딕 백작의 말에 아그니스 공주는 화를 인내하며 분을 삭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바로 노르딕 백작이다. 그의 말 한마디에 따라 양분된 세력의 균형이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시몰레이크 후작을 위시한 구 귀족은 하루라도 빨리 팬텀 가드너가를 몰아내고 왕위에 앉으려 한다.
그 중요한 출발점이 윌리엄 대공의 교수형을 집행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과거의 잔재를 확실히 씻어 낼 가장 멋진 이벤트니까.
당연히 아그니스 공주 측은 무고죄를 주장하면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증거를 아직 손에 잡지 못했다. 아니 잡을 수 없었다. 그 증거는 바로 케이사르의 증언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버틸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된 것도 바로 케이사르 존재였다. 노르딕 백작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칸 사건이 윌리엄 대공이 꾸민 일이 아닌 케이사르 단독 범행이라면 한 나라의 왕을 자기 손으로 처형하는 꼴이 된다.
그러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시몰레이크 후작은 계속 쪼여 오고 지금과 같은 4자 회담이 벌써 수십 번째며 매번 자기주장만 되풀이하다 끝이 났다.
그러니 나라 꼴이 올바르게 돌아갈 리가 만무했다. 그나마 제이미가 직접 정치에 뛰어들어 아칸 시티를 안정화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제이미의 정치는 구 귀족은 물론 현 귀족에게까지 심한 반발을 샀으며 시몰레이크 후작은 그런 귀족을 규합하여 세력을 조금씩 확장 시켜 나갔다.
이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등에 업게 된 시몰레이크의 입담이 조금씩 무게감을 실어 가지 아그니스 공주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든 정황적 증거만 손에 쥘 수 있다면 이 판세를 한 번에 뒤집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지만 케이사르는 오리무중 어디에 있는지조차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아칸은 제이미 덕분에 안정화 되어 가고 있지만 왕국 전체로 놓고 봤을 때는 이미 붕괴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방 귀족 세력들이 하나둘 독단적으로 지역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끓는 산적의 출몰에 지역 영주들은 큰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산적 토벌을 위해 나라에 부대를 보내 달라 건의하기도 힘든 시국이다. 그나마 제이미가 지역별로 몇 명씩 각성자를 보내 주었는데 그것도 말썽이 끊이질 않았다.
보내 놓은 각성자는 처음에는 정의감에 사로잡혀 영주를 돕다가 자신의 힘에 스스로 도취 되어 과신한 나머지 탐욕에 쉽기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히려 어떤 기사는 산적을 토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산적 두목이 되어 귀족의 영지를 공격해 점령해 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제이미는 실수를 바로 잡으려 짧은 기간 교대 임무로 전환했으나 갑자기 사라지는 등 돌발 사태가 빈번히 발생했다. 사람이 분에 넘치는 힘을 손에 넣으면 어떤 악이 자라나는지 잘 보여주는 예시였다.
노르딕은 그 이후 각 영지로서의 인원 파병을 전면 금지 시켰고 탈영병은 무조건 사형에 처한다고 공표했다. 그런데도 이탈하는 자는 점점 늘고 있으며 그들 중에서 좋은 쪽으로 가는 이보다는 악한 길을 걷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가진 가공할 힘은 평범한 인간 따위는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각성자 한두 명이 작은 영지 정도는 며칠 만에 초토화해 버릴 능력이기 때문이다. 노르딕은 가장 충성심이 많은 부하를 추려 추격대를 꾸리고 이들을 토벌하는 데 주력하고 있으나 그것조차 만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노르딕은 하루빨리 솔라리스 왕국을 안정시키는 데에 사력을 집중했다.
제이미도 각종 민원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통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정도로 일에 치이고 있었다.
그런데다 아내 아그니스 공주는 그런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하든 윌리엄 대공을 구하려고 시키지도 않은 짓을 벌여 제이미를 더욱 곤란에 빠트렸다.
***
"정말 잘 되어 가는 거 맞소?"
"물론이오. 이제 조만간 스스로 무너지게 되어 있소."
두 사람은 붉은빛이 도는 액체가 담긴 포도주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염소수염 불룩한 배 그 위에 걸친 화려하게 치장된 비단옷은 누가 보더라고 그가 시몰레이크 후작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맞은편 인물은 나이를 조금 가늠하기 힘든 중년인이다.
그는 얼굴에서는 귀족 이상의 기품이 스며 있고 장골이 장대한 한 마디로 기사다운 기사라 할 수 있는 인물. 그는 바로
드라고나 왕국의 왕 브리완 로만 울프의 삼촌 토멘트 오버로드 공작이었다.
반란죄로 모든 것을 잃고 고향 영지인 발베도니아에 감금되었던 그가 아니던가? 그가 자국도 아닌 타국의 후작 영지에 있다는 것이 어찌 된 일인지 모를 일이다.
토멘트 공작은 붉은 포도주를 단숨에 마셔 버리고 기분 좋은 뱉음을 내었다.
"후, 역시 생떼마르노는 최고의 와인이오."
"우리 왕국이 자랑하는 와인입니다. 타국에서는 빚을 수 없지요."
"이제 이 와인을 마음대로 마셔야 하지 않겠소?"
"곧 그리 될 것입니다."
"나는 곧이라는 말은 잘 믿지 않는 주의요."
"그럼 오늘 자리를 함께하자고 한 이유가?"
"며칠 전 필포드 경을 만났소."
그 말에 웃음이 걸려있던 시몰레이크 후작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
"그 일을 왜 지금 하는 거요? 필포드 경은 이곳까지 왔으면서 왜 나를 만나지 않고?"
"아니, 오해하지 마시오. 필포드 경이 온 것은 후작이 아니라 나와의 사적인 일 때문이외다."
"혹, 그 일 때문입니까?"
토멘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그것에는 문제가 없는 듯하오."
"그럼 다른 문제가?"
"받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소? 내 쪽에서 줄 수 있는 것이 미흡하다는 게 문제요."
"무엇이 그들의 마음에 들게 하겠소?"
"윌리엄 대공의 머리요."
순간 시몰레이크 후작의 눈빛이 확 바뀌었다.
"그것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닙니까? 이거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을 듯한데?"
"왜 아니겠소? 우리가 미적거리니 도움의 손길을 보태 준다고···."
-짝
토멘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시몰레이크 후작은 크게 손뼉을 치며 이빨을 뿌득 씹었다.
"그 귀찮은 종기를 이제 짤아낼 수 있을 것 같소. 몇 년 묵은 채증이 한꺼번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외다."
"아, 서둘지 마시오. 아직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니까."
"그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토멘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마도 비밀리에 진행하는 듯하외다. 나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 말이오."
"필포드 경이 그리 말했다면 조만간 어떤 행동이 있을 거란 건 확실할 거요."
"바로 그렇소. 내가 온 것은 그 준비를 서두르자는 의미에서요."
"그 말은?"
"계획이 성공하여 혼란할 때 단번에 뒤를 잡자는 거지요."
"음, 그래도 노르딕의 오군단은 쉬운 상대가 아니오. 노르딕의 부대를 완전히 우리 쪽으로 끌어···."
시몰레이크 후작의 얼굴에 놀람이 가득 번졌다. 토멘트 오버로드 공작의 품에서 나온 물건 때문이다.
"다, 다크시럼 포션! 어디서 그걸?"
"조만간 이걸 대량으로 공급할 계획이오. 그럼 후작의 충실한 사병들을 각성 시킬수 있을 거요. 재빨리 아칸 왕궁만 점령하면 노르딕 장군도 어쩔수 없을 거란 거요."
"정말 포션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겁니까?"
"물론이오. 솔직히 말해 이건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 케이사르 공작이 주선한 것이오. 난 그의 부탁을 들어 줘야 하는 처지니까."
"조심해야 하오. 아칸에는 황제의 인커젼이 셀 수도 없이 깔려 있소. 이 사실이 새어 나가면 침공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나 다름없소."
"왜 아니겠소? 이건 정말 위험한 도박이요. 실수하면 후작이나 나나 다 끝장일 테니."
"그, 그렇긴 하오만."
"생각해 보시오. 노르딕의 각성자 부대와 밀리지 않을 부대를 가질 수 있는 기회요. 나중에 솔라리스 왕이 되더라고 주변을 탄탄히 보호해야 할 세력은 둬야 하는 거요. 그때가 되면 황제도 어쩔수 없을 거요."
"조심해야 하오. 정말 조심해야 해. 특히 그 한 명은 무섭도록 눈치 빠른 놈이라."
"황제의 개를 말하는 거요?"
"그렇소. 그는 사람의 속내를 뚫어 보는 눈을 지녔소. 사실 아칸 시티가 이렇게 된 것에는 그자의 입김이 작용했기 때문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난 노르딕 사령관을 바로 포섭했을 거요."
"주의할 인물이군. 이번 계획이 거행되기 전까지 절대로 그자에게만은 들키지 않아야 하오. 아시겠소? 잘못하면 후작 당신이나 나나 파멸로 직행할 수도 있단 말이외다"
"흠, 그를 피하면 더 모양새가 이상해질 테고···. 혹시 독하나 제조해 줄 수 있겠소?"
"독? 독은 내 딸아이 전문이외다. 무엇에 쓸려는 거요? 각성자에게는 독이 닿지 않는···."
"나에게 쓸 거요. 죽은 자는 말을 하지 못하는 법 아니오?"
"그게 무슨 말이오? 죽는다니?"
"실제 죽는다는 것이 아니오. 흉내를 내겠다는 거요. 일전에 윌리엄 대공도 그러지 않았소?"
"아! 하하. 그것 좋은 방법이외다. 내 바로 딸아이게 연락을 취해 놓겠소."
두 사람은 그 이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좀 더 나눈 뒤 헤어졌다. 먼저 토멘트 공작이 자리를 뜨고 시몰레이크 후작만 남았는데 시종이 차를 들여왔고 그는 향기를 음미하며 천천히 차 한잔을 다 마셨다. 그 직후 프로이시어가 들어왔다.
시몰레이크 후작은 프로이시어를 보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프로이시어가 살며시 눈을 감고 영창을 외자 그를 중심으로 밝은 빛이 방안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그리고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프로이시어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옷소매를 탁탁 두 번 털더니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닫힌 창문이 살짝 열리더니 무언가가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열린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그 직후 다시 창문은 원래대로 닫혔다.
방안에는 자그마한 먼지 몇 개만이 공중에서 부유하다 탁자 위 두꺼운 책자 표지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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