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 너무 치사하네
이야 너무 치사하네.
그 꼴을 본 프랜시스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망할! 이제 어쩌라는 거냐고."
이렇게 되면 칼멘은 영원히 자신을 죽이려 쫓아다닐 것이다. 그것도 죽을 때까지 말이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프랜시스는 방방 뜨고 난리를 피웠다.
"그때 마시는 건데. 마시는 편이 좋았었는데! 이런 미치고 환장할 노릇을 봤나!"
그때까지도 세렌은 멍한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었다. 왼팔에 매달린 라그는 바둥대며 몸부림치고 있고 칼멘은 일어서려고 난리를 피워댔다.
"이봐, 네가 벌인 일이니 알아서 하라고 난 이곳을 떠날 거야. 아니면 칼멘을 죽여야 할지도 몰라. 그럼 고생하라고."
프랜시스는 뒤로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칼멘은 프랜시스가 멀어지자 발광하며 세렌을 밀어냈다.
그 순간 소년이 세렌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대로 세렌의 가슴을 머리로 들이받았다.
세렌은 거의 넋이 나간 상태로 방어조차 하지 못하고 소년을 공격을 허용하고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지금 그녀는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 얼마나 막중한 임무인가. 사실 교주가 칼멘을 너무 편애하여 살짝 질투도 느꼈던 세렌이다.
그만큼 테츠가 칼멘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자신에게 몇 번이나 반복할 정도로 여러 번 부탁한 것을 보더라도 테츠 성격에···.
그런데 이런 똥칠을 제대로 해 버렸으니 그녀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차라리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칼멘은 광기에 휩싸여 프랜시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라그는 그제야 칼멘의 왼손에서 떨어지며 칼멘을 뒤따랐다.
남은 것은 소년과 세렌뿐이었다. 소년은 씩씩거리며 달려가는 라그와 누워있는 세렌을 번갈아 바라봤다. 무표정이지만 지금 그는 갈등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누워 있는 세렌과 계속 싸울 것인지 아니면 라그를 뒤쫓아 갈 것인지를.
소년은 결심이 섰는지 달리기 시작했다.
세렌은 혼자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하늘은 어둡고 침침하고 검은 나뭇잎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도대체가! 도대체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날이다.
아니 그냥 붙잡아 패놓고 그냥 주둥이에 포션 하나 까 넣는 게 이렇게 어렵다는 말이더냐?
분하고 분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이 사실을 테츠가 알게 되면 얼마나 실망할까?
해독 포션은 이제 더는 만들지 못한다. 세상 하나뿐인 포션을 깨 먹고 임무도 말아먹었으니 욕 몇 마디로 끝나지 않을 일이다.
혹시 책임을 물어 마교에서 쫓아내지는 않을까?
순간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지나갔다. 그녀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렇다고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끝까지 가서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두며 칼멘은 계속 브렌시스를 쫓아다닐 것이고. 그것은 또 다른 피해를 일으킬 수도 있다.
더군다나 괴물 아이와 라그가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던가?
벌떡 일어난 세렌은 어금니를 뿌득 소리가 날 정도 꽉 깨물더니 두 다리에 내공을 끌어 올리고 집중했다.
그녀는 허리에 찬 바이올렛을 뽑아 들고 직선으로 뛰었다. 숲이 그녀를 막으면 무조건 베어 넘겼다. 오직 일직선상으로 달렸고 눈앞을 가로막는 모든 식물을 죄다 베어 가며 전진했다.
'라그?'
그녀는 기절해 쓰러져 있는 라그를 발견했다. 라그는 엎드린 자세였는데 아예 미동조차 하지 않아 처음에는 죽은 줄 착각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숨은 쉬고 있었다.
'뭐지? 누가 이처럼 간단하게 라그를 기절시켰지?'
파천수라장을 맞고도 왼팔에 매달려 악을 써댔던 라그였다. 그런 라그를 완전히 실신시킨 것은 누구일까? 그것도 상처하는지 없이 말이다.
갑자기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서 이런 능력을 발휘할 사람은 한 명 뿐이기 때문이다.
'설마 교주님이?'
정신이 들다 못해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라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 놓은 것을 보면 뭔가 의미가 있을 거로 생각해 그녀를 어깨에 들렀다.
분명 라그가 먼저 뛰었고 소년이 뒤를 따랐는데 그럼 소년은 어디에 있는 건지?
세렌은 정신없이 달렸다. 물론 그 와중에도 기척을 잡으려 집중했다. 숲은 매우 어두웠지만, 사람이 지나간 흔적은 확실히 남아 있었다. 특히 막무가내로 내달리는 칼멘은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 놓은 상태였다.
숲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에 왔을 때 드디어 칼멘을 찾았다. 그녀는 숲이 끝나는 언덕 위에서 저녁놀을 받으며 가부좌를 튼 채 운기요상 중이었다.
그리고 세렌은 그런 그녀 옆에 서 있는 검은 무복의 남자를 한 명 보았다. 그는 축 늘어진 소년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세렌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는데 조금 익숙한 모습이긴 했다. 하지만 키로 보나 덩치로 보나 확실히 교주는 아니었다.
"어, 세렌 장로 이제 오시오? 맘고생이 좀 심했겠구려. 나도 어쩔수 없었소. 교주님의 명령이었으니까."
그러면서 사내가 빙글 돌아섰다.
"마, 마테니 장로!"
세렌은 입을 딱 벌리고 깜짝 놀랐다. 물론 오른손으로 튀어나온 가슴을 가렸다.
"아, 이것 참. 미리 말해 두지만 내 뜻이 아니오. 난 그저 교주님의 명령만 따랐을 뿐이오. 오해 마시오."
"저기 칼멘은?"
"그녀는 무사히 해독되었소."
"네? 포션은 한 병뿐이고 그건 이미···."
"아, 그거 가짜요. 진짜는 내가 가지고 있었소."
"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난 임무를 완벽히 끝냈고 돌아가려 했지만, 혹시나 세렌 장로의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 진실을 말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이 모든 것이 다 교주님의 명령이었소."
"교주님이···."
"음, 그렇소. 사실 이번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 하는 일이었소. 세렌 장로는 전투에서는 전신이라 추앙받지만 이런 세밀한 계획에 의한 전술적 행동은 아직 서툴다는 거요. 그래서 교주님은 시험 삼아 세렌 장로에게 가짜 포션을 주어 이번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시험해 본 거외다. 나는 진짜 포션을 가지고 있다가 때가 되면 나서기로 하고 그동안 세렌 장로의 임무 처리 능력을 감시하고 있었던 거요."
-털썩
세렌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똥 한 무더기를 주둥이 안에 처넣은 표정을 지었다.
"거듭 말하지만 내가 세렌 장로를 미덥지 않아 하는 것은 아니오. 세렌 장로의 무공이야말로 장로 중에 가장 뛰어나니 말이오. 하지만 사람은 완벽할 순 없소. 보시오! 이런 간단한 임무조차 살심에 빠져 실수를 몇 번이나 저지르지 않았소? 아마 교주님은 살심을 잘 다스리는지 그걸 아시고 싶어서 세렌 장로에게 이번 임무를 맡긴 것이외다. 사실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는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세렌 장로가 마음고생하고 오해가 깊어질까 하여 내 인심을 쓴 거외다."
"칼멘은 무사한 거지요?"
"진짜 포션을 먹였으니 완벽히 저주는 해제되었소. 최상급 포션도 먹였고 세렌 장로에 두들겨 맞은 상처로 인해 내상도 입었으니 잠시 운기요상할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외다."
-쾅
세렌은 두 주먹으로 땅바닥을 후려치고 후회의 눈물을 쏟아냈다. 칼멘이 되돌아와서 다행인 것과 테츠의 바람에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한 분한 마음. 자기 자신의 저주 같은 살심 때문에 일을 망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 한 가지 더. 이건 참 내 입으로 말하기 힘든 말인데. 이번 세렌 장로의 행동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교주님께 보고해야 하오. 그게 내가 받은 임무니까 말이요. 한치의 거짓됨이 없는 진실을 교주님께 말씀드릴 거요. 알잖소 그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거짓말인 것을. 솔직히 세렌 장로의 행동을 두둔하고 싶지만, 그분 앞에서는 그런 변명 따위 애초에 통하지 않는 분이란걸 아시잖소."
"알아서 하세요. 본대로 그대로 전해 주세요. 부덕하고 모자란 제가 한심한 거지요. 이런 간단한 임무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병신년이잖아요."
"쩝, 너무 자책 마시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소. 이런 시행착오를 거쳐야 더더욱 단단해지는 법이오. 교주님은 마음이 넓은 분이시잖소. 충분히 세렌 장로를 이해할 거요. 그럼 난 이만."
"그 아이는?"
"아, 뭐 말 못 할 것은 아닌데···. 이것도 오해가 될까 봐 이야기하는 거요. 조금 전 숲에서 나뭇잎을 날려 소년을 죽이지 못하게 막은 것은 임무 때문이었소. 이 소년을 산 채로 생포해야 했기 때문이었소."
"그것도 교주님의 임무인가요?"
"그러니까. 그건 아니오. 나는 다른 분의 부탁으로 이곳에 와 새로운 변이 마족을 생포해가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그 사실을 알고 교주님께서 칼멘 일을 덧붙이신 거외다. 세렌 장로가 소년을 죽이려 하기에 어쩔수 없이 방해할 수밖에 없었던 점 이해하기를 바라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무운이 그대와 함께하기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티니 장로와 소년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세렌은 주저앉은 채 한동안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댔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운기요상 중인 칼멘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잠자듯이 두둔을 감고 축 늘어진 라그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한심 아! 한심 아! 이런 한심한 년아. 이런 간단한 임무 하나 책임지지 못하고 이 무슨 망신이냐?"
그녀는 아직 축축한 느낌이 남아 있는 오른손을 바라보고 한숨을 내 쉬었다.
"가짜 포션이라니···. 처음부터 교주님은 날 신용하지 않으신 거야. 교주님은 내가 이렇게 망칠 걸 이미 예측하고 계신 거였어. 마테니 장로처럼 완벽하게 일을 처리할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을···."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분함이 치밀어 올랐다. 왜 살심을 제어하지 못하고 매번 당하는 건지 본인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 포션이 가짜라서 정말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아니 가짜인 것이 얼만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세상 하나뿐인 해독 포션을 그따위 헛짓으로 부쉈다면···. 교주 앞에서 스스로 자결할 생각까지도 했었다.
하지만 테츠는 이미 한 수 위에 올라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마테니는 깔끔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벽히 처리하고 돌아갔다.
임무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세렌에 보여 주면서 말이다.
세렌은 라그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웠다. 모든 긴장이 풀리자 라그 때문에 입었던 내상이 다시 올라왔고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칼멘은 온 정신을 집중해 운기요상 중이다. 마테니가 세렌을 기다려 준 것도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마테니는 라그를 죽이지 않고 기절시켜서 칼멘과 라그의 끈을 끊어 놓지 않았다. 그렇게 날뛰던 소년도 간단히 제압했고 진짜 포션으로 칼멘의 저주까지 풀었다.
-피식
생각하면 할 수록 실없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난 싸움 빼면 할 수 있는 게 없는 년이구나.'
마테니의 보고를 들은 테츠는 엄청나게 실망할 것이 분명하다. 그는 황태자다. 그분의 기사로서 그를 위해 죽음까지 바치겠다고 맹세한 황태자의 기사다. 그를 지키기는커녕 그에게 오히려 돌봄을 당하고 있으니 이런 수치가 또 어디 있을까 싶다.
***
마주 앉은 세 사람.
"이제 슬슬 결정을 내릴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
"언제까지 고집만 피우실 겁니까? 대세는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
"개인 목숨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국 신민들의 미래를 위한 일입니다."
사내는 젊다. 오뚝한 콧날 시원하게 곧게 뻗은 눈썹. 맑고 깨끗한 눈동자 속에서는 강한 신념이 들어 있었다.
그의 옆에는 기이할 정도로 긴팔을 가지고 열서너 살 정도의 소년 체구를 가진 아주 못생긴 난쟁이 한 명이 앉아 있는데 연신 콧구멍을 후벼파며 썩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 끝에 묻은 코딱지를 튕겨내며 말했다.
"제이미는 노르딕 장군을 믿고 있는 모양인데 그건 말입니다. 고양이 앞에 생선을 던져 주며 지켜 달라고 부탁하는 거나 마찬가지입죠. 대공은 이미 알고 계시죠? 노르딕이 누구의 개인지. 누구를 위해 충성하고 그의 적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낼지 말입니다."
젊은 사내도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칸 시티에서 일어난 인간 수확장 사건만 보더라도 오군단은 단 한명도 희생되지 않았습니다. 최고의 군단을 그대로 방치한다는 것에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케이사르 그는 생각보다 간교한 사람입니다."
드디어 흰 수염 가득한 노인이 입을 연다.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노인의 모습이지만 이글거리는 눈빛 하나만큼은 두 사람을 압도할 정도였다.
"그가 틀렸다고만은 할 수 없지 않겠나? 자네가 방금 말하지 않았나···. 제국 신민의 미래를 위한 거라고···. 난 단지 인간의 미래를 신의 손이 아닌 인간 본연의 손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것이 좋지 못한 결과를 불러올지라도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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