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일생
구사일생
놈의 손이 검날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그건 검의 잔영일 뿐. 진짜는 이미 놈의 목을 향해 쾌속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인간이든 뭐든 한 가지에 집중하면 나머지 부분은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지게 된다.
놈은 세렌이 내지른 첫 번째 검의 잔형에 완벽히 속아 그것을 움켜잡기 위해 집중했고 정작 실제 검은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푹
바이올렛은 놈의 목을 완벽히 관통하여 뒤쪽으로 빠져나왔다. 검은 거의 손잡이까지 박혔다.
세렌과 같은 무인과 싸움해 본 적이 없었기에 대처할 수 없었다. 실전 경험이라고 하는 말이 이래서 중요하다.
세렌은 검을 비틀기 위해 손목을 틀었다.
-꽉
하지만 녀석이 한 수 빨리 양손으로 바이올렛을 움켜잡았다. 손목이 아직 완전치 못해 찰나의 틈을 놓친 것이다.
내공을 끌어 올려 검을 비틀려 했으나 녀석이 힘은 절대 만만치 않았다.
-스스슥
검이 뽑힌다. 이 얼마나 대단한 완력인가! 내공이 아닌 순수한 근육의 힘으로 각성자의 육성 내공을 압도하고 있다.
검을 잡은 손은 거대한 바윗덩이가 양 사방에서 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왼쪽 가슴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호흡도 정상적으로 되지 않아 기혈이 제대로 힘 있게 뻗어 나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성격의 세렌은 절대 아니다.
백로마현으로 놈의 복부를 연속으로 세 번 강타 했다. 치유력이 빠르긴 해도 조금 전 상처가 완벽히 치유된 것은 아니었다. 세렌에 베인 상처 부위가 다시 터져 올랐다.
검이 반 이상 뽑혔다. 왼손에 모든 힘을 다 끌어모아 복부의 상처에 천마장법 중 하나인 회선무류강을 때려 넣었다.
-퍽
장법의 반발력으로 검은 뽑혔고 세렌은 뒤로 풀려날 수 있었다. 처음으로 놈이 휘청했다. 회선무류강은 장력을 내 칠 때 순간적으로 손목을 회전해 내력이 상대방에게 회오리처럼 파고들어 타격을 가한다. 회선무류강에 맞으면 내장이 배배 꼬여 종국에는 속에서 터져 버린다.
이미 상처 난 곳에 전력을 다한 회선무류강을 맞았으니 아무리 괴물이라도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틈을 노려 연이은 공격을 해야겠지만 세렌 또한 심상치 않은 상처를 입고 있다. 부서진 폐에 박힌 갈비뼈를 빨리 뽑지 않으면 왼쪽 폐가 회생 불능이 될 수도 있다.
일단 급한 대로 지혈은 했지만, 폐에 찬 물을 빨리 뽑아내야 했다.
무조건 빨리 놈을 쓰러트리는 수밖에 없다.
다량의 피를 흘린 세렌은 눈꺼풀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무리 각성자라 해도 피가 금방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치열한 공방 중에 품에 있던 포션과 허리에 차고 있던 포션은 충격에 다 깨져 버렸다.
-쉬이이이이이익
갑자기 느껴지는 힘의 기운! 놈의 형태를 보는 순간 세렌의 몸이 굳어졌다.
놈의 긴 머리칼이 하늘을 향해 거꾸로 곤두서기 시작했는데 눈에 보이지 않지만, 놈이 뿜어내는 투기에 의해, 즉 기에 의해 머리칼이 거꾸로 치솟은 것이다.
동굴이 우르릉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벽면이 쩍쩍 갈라지며 아가리를 벌렸다. 어느 인간이 아니 어느 정도 괴물이기에 단지 몸에서 뿜어내는 기력만으로 대지를 흔들 수 있다는 말인가?
세렌은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과거 일만 오크에 둘러싸였을 때도 이 정도 공포감은 아니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공포가 아닌 절망 같은 거란걸 세렌은 인지 하지 못했다.
절망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었지만, 그녀는 결코 투지를 꺾지 않았다.
테츠의 말이 떠올랐다.
'넌 어차피 전장에서 피어나고 전장에서 질 꽃이야.'
세렌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놈은 결코 살려 보내서는 안 되는 놈이란 걸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세렌은 마지막 힘을 짜내 내공을 끌어 올렸다.
조금 전 전투의 여파와 놈이 내뿜은 기의 힘으로 동굴 벽 여기저기에 큰 금이 나 있었다. 여기를 파낸 것은 전문적인 광부가 한 것이 아니기에 버팀목 따위는 아예 없었다. 한 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때 라그가 자신의 뒤쪽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하필 내 등에 업힌 것이 가장 큰 실수구나."
세렌은 힘껏 바닥을 차고 반대편 동굴 벽을 향해 쌍장을 내질렀다.
-뻐뻑
세렌의 마지막 힘을 담은 파천수라장은 동굴 벽이 아닌 놈의 가슴을 후려쳤다. 의도한 것이 아닌 놈이 그 세렌과 벽 사이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세렌은 반발력으로 뒷걸음치면서 한 모금의 피를 울컥 토했다.
세렌이 전력을 다한 파천수라장을 정통으로 맞고도 놈은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괴물 같은 놈."
모든 힘을 다 쏟아낸 상태였으니 기력이 거의 빠져버렸고 자하강기도 사라졌다. 그리고 반발력에 의해 기혈이 뒤틀려 버렸다. 내공이 모이지 않는다. 왼쪽 가슴 흉통이 거의 사라졌다. 그건 상처 부위가 죽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눈꺼풀이 저절로 감겨왔다.
-휘이이익
놈은 무식하게 정면으로 달려들었고 아차 하는 사이 이미 세렌의 목을 움켜잡고 들어 올렸다.
세렌보다 약간 작은 키의 아이는 이제 막 청년티가 올라오는 인간 사내아이와 똑 같았다. 머리카락이 위로 곤두서 있어 보이지 않았던 앳된 얼굴이 확실히 보였다.
-우드득
세렌의 목등뼈가 비명을 질렀다. 호흡이 가빠오고 안압이 차올랐다.
내공은 전혀 모이지 않고 검을 쥔 손에서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키아악"
꺼져 가는 의식 속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애써 의식을 잡으려 감기는 눈을 치켜뜨려고 발악했지만, 뇌에 공급되는 산소가 줄어가면서 의식은 바람에 곧 꺼져 가는 촛불과 같이 사그라들었다.
"우욱! 컥, 컥."
입속에서 흙모래가 뿜어져 나왔다.
머리에 둔기를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충격과 함께 몸에 힘이 아예 들어가지 않았다.
세렌은 거칠게 호흡을 내뿜으려 움직이려 안간힘을 다했다.
내공은 모이지 않았고 왼쪽 가슴이 차가웠다.
발버둥을 치는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가만히 보니 자신은 지금 바닥에 엎어져 있는 상태였다.
'살아 있었나?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놈에게 목을 잡히고 뼈가 부러질 정도의 충격을 받은 그것까지만 기억이 났다.
'녀석이 내가 죽은 것 같아 팽개치고 간 건가?'
세렌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마심공을 펼쳤다. 가슴이 천천히 진정되고 조금 호흡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뭔가에 턱 걸리는 것처럼 모처럼 모였던 내공이 확 흩어져 버렸다.
"괜찮아? 응? 괜찮아?"
단번에 목소리 주인을 알았다.
"너도 살아 있었냐? 놈은 어디로 갔지?"
"가라고 해서 갔어."
"네가?"
"응."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기혈이 막혀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각성자라고 하지만 제대로 치유가 되지 않아 몸이 죽어가고 있었다.
"날 뒤집어 주겠니?"
라그는 작은 소녀지만 힘은 뭐 말할 필요가 없다.
가뿐히 세렌을 뒤집었다.
"왼쪽 옆구리 허리띠에 보면 단검이 하나 있을 거야."
라그는 앙증맞은 손으로 세렌의 옆구리를 더듬어 단검을 찾아냈다.
"내 말 잘 들어 단검으로 왼쪽 가슴 상처를 가르고 손을 집어넣으면 뼈가 만져질 거야. 그걸 살짝 들어내 맞춰야 해. 할 수 있겠어?"
이제 겨우 인간의 말과 사회성을 익히기 시작한 아이다. 그런 아이에게 이런 부탁 자체가 무리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방법이 없다. 자신의 팔에는 일절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응, 해 볼게."
라그가 인간성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현자 레노번이다. 지금, 이 순간 세렌이 가장 고맙게 생각해야 할 사람인 거다.
라그는 그녀의 왼쪽 가슴을 풀어 헤치고 상처를 살폈다. 주먹을 맞은 부분이 움푹 꺼져 있는데 살이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단검으로 손을 넣을 정도로만 갈라서···."
-푸욱~ 슥.
"으윽"
"아파?"
"아니 계속해."
라그는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단검을 찔러서 살을 갈라 버렸다. 라그는 순수함이라는 감정을 아직 깨우치지 못했다. 어쩌면 영원히 깨우치지 못할 수도.
고사리 같은 손을 넣으려 하자 세렌이 말했다.
"손 좀 닦고 넣어. 먼지가 들어가면 곤란하니까."
"응."
그녀는 자기 가슴에 손을 쓱쓱 문대더니 갈라진 살 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으, 뼈, 단단한 거 만져지지? 그걸 뽑아 올려줘."
"응, 이건가?"
라그는 생각보다 능숙하게 갈비뼈 하나를 들어 올렸다.
세렌은 기침하며 피를 쏟아냈다. 폐 속에 고인 물과 피가 기도를 타 넘어 온 것이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그렇게 몇 개만 더하자."
실로 끔찍한 고통이었지만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으로 버틸 수 있었다.
"왼쪽으로 그래. 으, 조금만 더 옳지 그래. 그거 그걸 뽑아. 아악!"
세렌의 눈이 크게 부릅떠지고 실핏줄이 터져 시뻘겋게 변했다.
"우웩!"
마지막 피를 쏟은 세렌은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뭔가 꼼지락꼼지락하는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라그가 양손으로 상처 난 분위를 꾹꾹 누르고 있었던 거였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지?"
"음, 음. 한참. 아주 한참."
시간 표현을 할수 없는 라그는 손가락을 펴 보이고 하나둘 접어가면서 이야기했다. 여기 오기 전 막 셈에 관한 공부를 받고 있었던 터였다.
세렌은 천천히 호흡해 보았다. 호흡은 무리 없이 가능했고 왼쪽 가슴에 박힌 뼈가 빠지면서 치유 능력이 발동된 모양이었다. 힐링 포션이 있으면 훨씬 빨리 상처를 치유하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가 어디인가?
"왜? 도망가지 않고?"
"싫어. 난 언니가 좋아."
"좋아? 후, 넌 우리와 달라."
"왜? 왜? 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언니 상처를 치유해야 하니까 만지지 말아 줄래?"
"응 가만히 있을 테야."
천마심법을 운용했다. 다행히 조금씩 기가 모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제자리를 찾아 빠르게 움직여 나갔다. 단번에 푸르뎅뎅하던 피부에 붉은 혈색이 감돌았다.
흩어졌던 내공도 모이기 시작했다. 적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는 것, 자신이 살아 있다는 기쁨을 느끼는 것 지금은 다 사치다. 머리를 비우고 천마심법에 완벽히 빠져들었다.
그렇게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고 몸은 한결 개운한 상태가 되었다. 물론 상처가 완벽히 치유된 것은 아니다. 겨우 내공을 돌릴 정도로만 이다.
각성자의 신체이기에 이 정도지 과거의 평범한 몸이었다면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거다.
"네가 가라고 했는데 녀석이 그냥 갔다고?"
"응, 언니 놔두고 그냥 떠라 나고 명령했어."
"네가 명령해?"
세렌은 어이없어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럼 네가 내 목숨을 구한 거네."
"언니가 죽는 건 싫어."
"전에 너 죽이려고 했는데도?"
"응. 괜찮아. 지금은 아니잖아."
'레노번께서 아이를 만들어 놨구나.'
"녀석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어?"
"저기로···."
라그는 오른쪽 동굴을 가리켰다. 다행히 밖으로 나가는 쪽이 아닌 더 안쪽으로 들어간 것 같다. 그럼 일단 칼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상태로 추적해봐야 놈을 잡을 수 없다. 하지만 세렌을 잡아끄는 것은 놈의 강함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든 몰레이그를 찾아야 했고 사자의 서를 입수해야만 했다. 그것이 세렌의 목표다.
몸을 움직이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정도가 됐다. 놈과 다시 싸우는 것은 확실히 무리다. 라그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아니면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살아났으니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업어주지 못하니까 그냥 따라올래? 아니면 밖으로 나갈 테야?"
어찌 되었든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라그다. 목소리가 사뭇 따뜻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갈래."
세렌은 떨어진 바이올렛을 주워 검집에 넣었다. 다시 한번 치 떨리는 전투가 떠올랐다. 막강한 괴력 앞에서 내공도 소용없었다.
"아직 수행이 부족해. 자만만큼 위험한 생각도 없어."
세렌은 천천히 오른쪽 동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 아이 너와 같은 종족이지? 마족 맞지?"
"그래"
"다른 마족과는 상당히 다르던데? 넌 그가 누군지 알고 있어?"
"···."
"왜? 언니에게 말하기 싫어?"
"모두의 아버지야."
"모두의 아버지? 어떤 뜻으로 받아들이면 돼?"
"태어난 마족의 아버지. 그는 마왕이야."
순간 카렌의 몸이 경직되었다.
"마왕이라고? 그 아이가? 마왕은 죽지 않았어?"
"라그와 같아 다시 태어난 거야. 그는 마족의 아버지라고. 그래서 강한 거야. 마왕. 마왕이야."
"환장하겠군."
라그 말이 사실일 확률이 높다. 그놈은 보통 괴물 아이와는 차원이 다른 능력을 보였다. 자신도 어찌하지 못할 정도로.
마왕이 왜 여기에 있는지 알수 없지만, 그가 인간을 좋지 않게 본다면 여기 살아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결단코.
그럼 자신은 왜 살려 둔 걸까? 설마 죽은 줄 알고 팽개친 건가? 운이 환장할 정도로 좋았다고 봐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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