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마녀
돌아온 마녀
"레, 레베카님이 어찌 이런 곳에···"
"어서오시구랴. 대장 나으리."
"흥! 불사왕 불만 있으면 그분께 말해요. 괜히 저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술잔만 올려드린 모건 백작을 무시하고 레베카는 방긋방긋 얼굴로 레노번의 손을 맞잡았다.
"호호, 안 본 사이에 꽤 듬직해지셨네요. 레노번."
"아니 귀한 분께서 어찌 이런 삭막한 곳에···."
"제가 오면 곤란한 일이 있을까요? 왜 그런 말을 하세요?"
물론 레노번은 마교 교주가 황태자라는 것을 아는 유일한 마법사고 레베카가 황태자비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레베카가 가지는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아는 레노번으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곳은 극히 위험한 곳입니다. 칠무신 한 명만 대동하시고 오시기에는···."
-탕
"무례하군."
모건 백작은 술잔을 탁자 위에 소리 나게 내리찍으며 불쾌한 감정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불사왕을 못 믿어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곳에는 마왕이 배회하고 있습니다. 사신왕에 그 이야기를 전해 듣지 못하였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온 것이 아니오? 아. 그 뭐 마왕이라는 작자는 이미 한 번 만나본 적이 있으니 다시 한번 더 만나고 싶은 바람이 있다오. 그때는 놈과 실력을 겨루지 못했으니 이번에는 한 번 신나게 싸울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은 거라는 말이오."
"자, 앉으세요. 현자. 하고픈 이야기에 오늘 밤이 짧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면 제 낯짝은 치워 드리는 것이 두 분이 편할 듯싶습니다. 전 부하들과 한잔하러 갑니다."
"과하게 마시지 마세요."
모건 백작이 슬쩍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언제 제가 취한 것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한 번 취해 보는 것이 소원이라면 모를까."
모건 백작이 밖으로 나가자 레베카는 싱글벙글거리며 말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어찌 이 험한 곳까지 그분의 명령이셨습니까?"
"아뇨, 황제께서는 만류하셨어요. 제가 자청해서 온 겁니다. 사실 이 일을 떠맡는 조건으로 황제께 한 가지 소원을 요구했죠."
"네? 소원요?"
"네, 감금된 에르제베트 황비를 자유롭게 풀어 달라는 거였죠. 황제 몰래 황태자를 도운 사실과 테일리아드에 정보를 흘린 벌을 받고 계셨거든요."
"그렇군요. 황비님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네요."
레베카는 고개를 돌려 입을 헤벌쭉 벌리고 있는 콜베르를 바라봤다.
"이 사람이 그가?"
"저런 레베카님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옆에 사람이 있는지도 잊어버렸습니다. 이놈은 제 제자로 맞아들인 콜베르입니다. 인사 드리거라 이분은 황제님의 총애를 받고 계시는 마녀니라."
"에? 마녀요? 여기 베틀 워락의 한 가운데 마녀라니요?"
"허어, 무엄하다. 뉘 앞에서. 녀석의 버릇없음을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호호, 괜찮아요. 늘 듣는 소린데요. 뭘 새삼스럽게. 제자를 잘 두셨네요. 그의 능력이 범상치 않아 보이네요."
"제가요?"
콜베르는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레베카를 바라봤다.
"내가 마녀인데 무섭지 않니?"
"전혀요. 현자님께서 이리 반가운 얼굴로 맞이한 분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수 있는 일이죠."
"넌 늘 자기 몸을 조심해야 한다. 널 노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거든."
"글쎄요? 제가 그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지르진 않았는데요?"
"그건 네가 가진 능력 때문이야. 그분이 널 선택한 이상 황제께서도 널 눈여겨보시고 있단다."
"엑? 화, 황제께서 저, 저를요?"
"험, 으흠, 흠흠, 조용히 하거라. 쯧쯧 넌 마법보다 예의부터 다시 배워야겠구나."
"죄송합니다. 스승님."
"허허, 저도 안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소문이···."
"황제의 눈과 귀는 늘 저희 주위를 감싸고 있지요. 어때요? 네크로맨서의 주술 해독하기 쉽지 않으셨죠?"
"허, 다 아시고 오셨으면서···."
"그럼 저희가 발견한 석벽의 주문을 알고 계신 거예요?"
콜베르의 놀란 목소리가 재미있는지 레베카는 소리를 내 웃었다.
"난 마녀야. 내가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고 하더라도 네크로맨서의 주술까지 넘볼 수는 없어. 그것도 금단의 책에서 나온 말라키의 주술은 더더욱 이지."
"저희도 갖은 수법을 동원해봤지만 겨우 삼 분의 일 정도만 밝혔거든요. 그건 불가능해요. 세 명의 네크로맨서가 모래알처럼 이렇게 막 우수수 무너지면서···. 악!"
참지 못한 레노번이 지팡이를 들어 콜베르의 머리통을 소리 나게 후려쳤다.
"네 녀석의 입방정을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구나."
"재미있는 친구네요. 악의가 없고 티 없이 순수해요."
"허허, 그 때문에 저도 제자로 받아들임에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순진한 것은 때론 해악이 되기도 하니까. 매사 조심해야죠. 그분께서 제게 특별히 부탁한 아이니만큼."
갑자기 레베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분은 늘 바쁘지요? 아직 저를 원망하고 있을까요?"
"그럴 리가요? 그분은 참으로 신기한 분이십니다. 세상 모든 일을 다 아시고 행동하는 것 같습니다. 하하. 그분께서도 레베카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저더러 잠자리가 적적하다 하시며 농을 한 적이 있으셨습니다."
레베카의 볼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흥, 그런 사람이 연락 한번 없다니 섭섭하군요."
콜베르는 두 사람의 대화에 끼지 못해 눈만 초롱초롱 굴리고 있다가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레베카님은 그 주술진을 해결할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황제께서 사신왕을 부르셨어. 사신왕은 큰 실수를 저질렀지. 아마도 편히 잠자기도 힘들 거야."
"도대체 어떻게 그리 빨리 이곳 사정을 들으셨습니까? 황궁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반년도 더 걸릴 거리입니다."
"이 세상에는 네 지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기도 한단다."
"그럼 방법도 찾으셨다는 말입니까?"
레베카는 레노번을 바라봤다.
"어떨 것 같아요?"
"목소리에 담긴 자존감이 느껴집니다. 방법을 찾으신 거군요."
"그 주술진을 보지는 않았지만, 정보원의 보고에 의하면 포탈 같은 거더군요. 몰레이그를 비롯한 네크로맨서 지휘부의 수장들만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세렌 라메이트도 마찬가지고요. 그걸 봐서는 포탈이 확실하죠. 이동진 같으면 한 번 사용하면 끝일 테지만 포탈이라 이쪽에도 문이 열린 채로 대기 중인 거예요. 교주님께서 사용하시는 다크 디멘션 포탈의 변형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교주님이 포탈을 쉽게 여닫을 수 있는 것은 라마단의 정수를 품고 계시기 때문에요. 평범한 네크로맨서는 감히 바라볼 수조차 없는 사기 덩어리죠. 그건 한번 죽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물건이기도 하고요. 만약 교주님이 여기 오신다면 이런 이야기는 시간 낭비일 뿐이겠죠. 하지만 그 바쁜 분께서 이곳까지 오지 않는다는 것은 더 중요한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거겠지요."
"흠, 그분께서도 알고 있을 겁니다. 세렌양이 포탈을 통과한 것은 그분께서 하신 일일 테니까요."
"바로 그렇죠. 자기 대신 세렌을 믿고 보낸 거라고 봐야죠. 어때요? 우리도 빨리 쫓아가서 조사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걸 열 사기가 더는 없습니다. 사실 성군이 온다는 보고를 받은 즉시 모을 수 있는 사기는 모조리 사용했습니다."
"알고 있어요. 세르자비 황비께서 풀려나신 이유는 하나가 더 있죠."
"허허,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군요."
"네크로맨서의 반란 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네크로맨서를 추방한 사람이 누구겠어요? 죽음의 사막으로 추방한 사람이 바로 세르자비 황녀에요. 그녀는 최고 수준의 마녀라고요. 스스로 차원을 만들고 그곳에 사람들 가둬 버리는 엄청난 주술력을 가진 마녀지요. 황제께서 왜 그녀를 납치해서 황녀로 삼으셨을까요? 대마법사 평의회 바보들이 세르자비 공주의 힘을 두려워하여 제거하려 않았나요?"
"하, 과거의 잘못이지요. 그들은 저희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바도 멍청이들인 거죠. 사고나 쳐서 드래곤이나 불러들일 줄 알지. 그 병신들 드래곤 전쟁이 끝나자마자 해체 시켰어야 했어요. 그놈들이 신성불가침 조약까지 만들기 전에 말이죠."
"후,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이야기 해봤자 지금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요. 현자의 말이 맞아요. 저는 세르자비 황비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황제께 이 사건의 해결책을 건의했어요. 바로 네크로맨서를 가뒀던 죽음의 사막으로 가는 문을 열어 달라고 말이죠."
"아! 설마. 그런 방법이."
"네, 저 혼자 열사의 땅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배를 잡고 웃고 말았죠."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곳은 열사의 땅도,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도 아니었어요. 술과 꿀과 고기가 넘치고 오아시스에서는 밤바다 술판이 벌어지더군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 우리 사랑하는 교주님께서 그곳을 낙원으로 만들어 놓으셨더군요. 심지어 사자머리 마족과 네크로맨서가 어깨동무하고 춤추고 있는 희한한 광경도 목격했고요. 그곳은 제국에서 추방된 자들의 낙원이더군요."
"으하하. 교주님께서 그곳을 그렇게 만드셨나 봅니다."
"왜 아니겠어요? 심지어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으세요?"
"궁금합니다."
"하. 테드버드 남작이에요."
"아하하하. 이거 너무 황당하지만, 이해되는 이야기군요. 교주님이라면 그러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세상에나 마족과 한 테이블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더군요. 기가 막혀서 원."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전후 사정을 테드버드 남작에게 이야기했고 테드버드 남작은 두 사람을 추천해 주었습니다."
"두 사람이라면?"
"사라센의 사제들이라는 네크로맨서 집단의 수령 격인 인물이고 이들은 몰레이그와도 관계가 깊은 인물이죠. 두 사람은 제 천막 안에 감금해 두었습니다. 일단은 그들은 제국에서는 아직 죄인의 신분이기에."
레노번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제 얕은 지식으로 교주님 외에는 포탈을 가동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넓고 찾아보면 반드시 방법이 나오게 마련인데 말이죠.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하하."
"물론 두 사람이 도전해 봐야죠. 그들의 말로는 자신들이 몰레이크보다 더 강한 사기를 가졌다고 하니 몰레이그가 완성한 주술진이라면 그 두 사람이면 문제없이 열겠죠?"
"에? 그동안 저희가 한 수고가 헛일처럼 느껴지는군요."
콜베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야 우리대로 진행하면 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는 난감한 부분이죠. 서로가 바라는 목적이 다르다면 문제 될 것이 크게 없지만, 만약 같다면 최후에는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겠죠···."
"그렇겠지요. 그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필 모건 백작이 보호자로 임명되었는지···."
"스스로 자청한 거예요. 그는 싸움에 미친 사람이에요. 싸움이 될 만한 곳이면 어디든 뛰어들 광전사예요. 마왕이 이 근처를 어슬렁어슬렁한다는 정보를 들었던 거죠. 하필 다른 칠무신은 모두 각자 임무 때문에 자릴 비운 상태이기도 하고요."
두 사람의 대화는 밤이 늦도록 계속되었다. 콜베르는 졸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눈을 껌벅껌벅했다.
레베카가 돌아가자 콜베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곯아떨어졌다.
누군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눈을 번쩍 떴다.
"어, 스승님. 벌써 가시게요."
"일어나서 채비를 정비하거라. 오늘은 몹시도 바쁜 날이 되겠구나."
두 사람은 천막을 떠나 레베카의 처소로 향했다.
그들은 곧 단정하고 깨끗한 모습의 남녀를 소개받았다.
"이분이 자라크고 이쪽 분은 부인인 시소리라고 해요."
"에? 이 두 사람이 네크로맨서라고요? 설마? 네크로맨서는 죄다 기형에다 생긴 것이 다 이상하게···. 악!"
콜베르는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버릇없는 제자의 입방정을 받아 주시게."
"하하. 괜찮습니다. 네크로맨서는 사기의 영향으로 신체 기형이 많죠. 어쩔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본 네크로맨서 여성분 중에 가장 이쁜 분입니다. 이건 진심이에요."
"넌, 입을 닫고 가만히 있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구나."
"이 두 분이 도와주신다면 어쩌면 포탈을 가동할 수 있을 지도 몰라요. 한시가 급하니 일단 먼저 포탈을 확인해 봐야겠어요."
레노번과 콜베르 그놈 장군과 지휘자들이 앞서고 레베카와 네크로맨서 그리고 불사왕과 성군의 지휘자들이 뒤를 따랐다.
그리고 콜베르 바로 뒤에 칼멘이 바짝 붙어 걷고 있었다.
동굴의 끝 석벽에 도착한 네크로맨서 두 사람은 석벽을 유심히 살폈다.
"확실히 엄청난 사기가 느껴지는군요."
"가동할 수 있나요?"
자라크는 한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모두 잠시만 뒤로 물러나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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