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칠 수 없는 유혹
뿌리칠 수 없는 유혹
제이미는 무심한 눈길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왕궁에서 이렇게 매일 전쟁 아닌 전쟁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시몰레이크 후작의 날 선 비판이 시민의 의심을 부채질했고 또 같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떠들어댔다.
그의 선동은 제이미를 옹호하는 많은 시민이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상인 조합. 시민연합, 길드 조합 아칸은 빠르게 회복되고는 있고 각종 연합과 조합이 등장해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제이미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도시를 장악해 나갔다. 순수한 농민 계급은 고향을 잃고 밖에서 떠돌다 제이미의 시민 정책에 힘입어 아칸 시내로 들어온 부류가 대부분이라 이들이 정치에 개입할 리는 만무했고 하루빨리 밭을 일구고 생산 활동에 치중한 생각만 하다 보니 다른 곳에 정신을 팔 시간이 없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 입에 들어올 식량이 중요하지, 누가 왕이 되든 그것을 신경 쓸 틈이 없다.
이 사이에서 상단 조직과 모험가 위주의 길드, 용병 조합들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시몰레이크는 발 빠르게 이들을 후원하면서 각 조합과 연합의 수장을 자신의 휘하로 포섭했다.
시몰레이크 후작으로서는 어떻게 하든 손끝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제이미는 처음과 달리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다. 이러다가 시몰레이크 후작에게 왕궁까지 빼앗긴다면···.
은연중 떠도는 소문에 시몰레이크 후작의 배후가 황제라고 하며 아칸 사건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도 다 황제의 보호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시몰레이크 후작의 뒤로 황제의 손길이 닿아 있다면 많은 이들이 제이미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그 사실은 점점 확산하여 제이미의 목을 죄어 왔다.
지금까지는 윌리엄 대공의 누명을 증명할 때까지라고 항변하고 있으나 그것이 계속 지속되리라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특히 나라의 정치와 경제를 책임지고 운용해야 할 아칸의 재상들이 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함으로써 솔라리스 왕국은 국가로서의 역량은 무너진 거나 다름없었다.
솔라리스 왕국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것은 봉건주의 노선을 걸어왔기에 지방 영주의 역량이 강화된 탓에 국가가 전복되어도 나라 전체가 바로 전복되지 않은 것이 그 이유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롱홀드의 엠버스피어는 오크가 들끓는 유령 도시가 되었고 롱홀드에 산재한 성들은 모두 파괴되거나 버려졌고 롱홀드와 경계를 접한 잔버크도 오크의 약탈과 파괴로 많은 마을이 전소되어 사라졌다. 더욱이 마족까지 등장한 여파로 각 영주는 성 외곽 농민들을 무시한 채 성문을 걸어 잠갔다.
이번 겨울을 나면서 성문을 걸어 잠근 영주들은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해 식량난에 허덕이며 주변에는 각종 도적 떼와 산적이 출몰하고 상도는 이미 끊어져 잡초만 무성하였다.
국토가 이럴진대 제대로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인재의 등장은 정말 아쉬운 일이었다. 테일리아드의 대병력이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국경을 넘어 테란 고원까지 진출하거나 성군 또한 국경에 집결하고 있는 분위기라 솔라리스 왕국은 안팎으로 진퇴양난의 고초를 겪는 중이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제이미 백작이다. 시골 출신인 그는 5군단 군단장일 때도 그저 자기 능력이 워낙 출중하여 존경받은 것이지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크게 부각 되지 못했다.
팬텀 가드너가의 사위가 되었지만 출신성분 때문에 고위 귀족을 휘어잡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귀족들 대부분이 시몰레이크 쪽으로 기울었고 시몰레이크 쪽으로 완전히 무게 중심이 기운 이래 시몰레이크는 점점 제이미를 압박했다.
이 기세라면 자기 개인 사병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킬 만도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바로 노르딕 백작이 이끄는 오군단이 중간에 중재자로서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시몰레이크가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오군단이 모두 각성자들이기 때문이다. 아칸에서 범죄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는 등 치안을 오군단이 담당하면서 아칸 시티가 더욱 빠르게 안정화 한 것이다.
노르딕은 시몰레이크 후작도 제이미도 아닌 딱 중간자적 입장에서 아칸 시티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치안에만 힘썼다.
제이미의 정책에 의해 아칸 시민이 늘어가고 농작물이 들어와 유통되기 시작하자 상업도 활성화되었고 문이 닫힌 상점들이 하나둘 개장하여 도시의 기능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특히 제이미의 요청으로 황제의 나라 몬도르반 왕국과 무역로가 재가동되면서 아칸은 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몬도르반 왕국의 값싼 생필품이 대거 유입되어 시민의 생활이 안정권에 접어들었고 이제는 대외적으로 나라 전체의 안정을 도모할 때가 된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우두머리인 왕의 존재다. 윌리엄 대공은 드래곤 전쟁과 네크로맨서의 반란을 직접 진압한 영웅 중 영웅이지만 아칸 시티 괴멸이라는 최악의 업적도 함께 세웠으니 그의 제 등장은 현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고 제이미에게 정권이 물릴 수 없는 것이 그의 출신성분과 더불어 아직은 왕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의견이 대다수다. 그에 따라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시몰레이크 후작이다.
만약 시몰레이크 후작이 왕에 오른다면 주신 제국 전통이 무시되는 상황이라 이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한 가문이 계속 왕위를 세습하고 다스려온 주신 제국의 특성상 팬텀 가드너가의 혈통에서 왕이 등장해야만 했다. 즉 제이미는 지금 임시 섭정일 뿐이고 실제
신성불가침 조약에 의거 정당한 왕위 계승권자는 팬텀 가드너의 피가 섞인 아그니스 공주의 아들 브렌든이 가장 유력하다. 이제 4살이 된 브렌든이 왕위로 승격되기 위해서는 성년이 되어야만 한다.
그전까지는 제이미가 섭정하는 형태로 유지된다. 하지만 시몰레이크 후작이 그걸 두고만 보지 않을 것이다. 신성불가침 조약의 정당성은 만약 황제가 인정한다면 가문이 교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몰레이크 후작이 황제의 후광을 등에 업고 있다는 소문은 오늘내일 생긴 말이 아니다. 더욱이 아칸 사건 때 시몰레이크 후작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고위 귀족 대부분이 그의 편에 선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시몰레이크 후작의 견제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그와 더불어 제이미의 통솔력은 매일 매일 시험대에 올랐다. 그런데 어제 오군단 사령관 노르딕이 뒤로 넘어져 까무러질 만한 권유를 해 온 것이다.
노르딕은 아칸의 즉 솔라리스 왕국의 우두머리를 하루빨리 정해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며 이를 위해 거사를 일으켜 시몰레이크 후작을 제거한다면 자신과 오군단이 즉각 돕겠다는 의지를 표명해 온 것이다.
정치란 이런저런 이권이 개입하기 마련이고 말이 안 통하면 가차 없이 상대를 제거하는 비열한 수도 스스럼없이 써야 한다. 이대로 시몰레이크와 힘겨루기를 하다 밀리면 팬텀 가드너는 역사의 뒤안길이 아니라 생명조차 부지할 수 없게 된다.
시몰레이크가 후환이 될 사람들을 살려 놓지는 않을 것이다. 제 아들 브렌든이 차기 왕으로 지목되어있는 이상 시몰레이크는 제이미와 브렌든, 아그니스 공주 제거를 일 순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지금 그 위험한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는 시점에 노르딕의 제한은 충격 그 자체였다. 만약 노르딕의 오군단이 자신의 측에 붙어 준다면 시몰레이크 후작의 성쯤은 금방 토벌할 수 있을 것이다.
최고의 정적을 제거하면 자신이 왕 아니 섭정이라 해도 아칸의 정치 세력을 완벽하게 움켜잡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윌리엄 대공의 무죄를 증명하고 그들 다시 등장시켜도 되는 일이다.
노르딕은 언제라도 결심이 서면 비밀리에 연락을 바란다고 했다.
제이미는 혼란스러웠다. 만약 시몰레이크를 제거한다면 아칸을 한층 더 빨리 안정시킬 수 있음은 물론 나아가 나라까지 돌볼 수 있다. 특히 마교를 통해 어반마르스와도 연결 고리를 만들어 높은 이상 적어도 최악의 순간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르딕의 제안은 정말 거부하기 힘들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제이미 저에요."
"들어오시오."
요즘 아그니스 공주는 많이 부드러워졌다. 아버지 윌리엄 대공의 일로 특히 밖에서 시위하는 자들의 고함이 듣기 싫다며 혼자 지하 밀실을 이용하던 공주는 어느 순간엔가 적극적으로 제이미의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제이미는 차라리 그편이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그니스 공주의 얼굴이 점점 밝아져 갔으며 웃음을 머금는 때도 늘어갔다.
아그니스는 궁중의 화려한 복식은 벗어던지고 늘 간편한 외출복 차림을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밖으로 정말 외출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언제 있을지 모를 암살자를 대비해 전투하기 편한 복작이라고 설명했다.
제이미는 다크 시럼 포션을 빼돌려 아그니스 공주와 아들 브렌든을 강화자로 만들어 놓았다.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아그니스 공주는 태성왕에서 검술을 사사 받았다.
황제는 아그니스 공주의 역할을 중요시 생각했고 태성황 스키미스를 통해 약간의 성력을 전수해주도록 했다. 그래서 그녀가 전혀 검술 따위를 익히지 않았음에도 밤의 자매단에서 보낸 암살자와 겨룰 수 있었다.
"노르딕 백작이 다녀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일 때문에 당신을 한 번 만나볼 생각이었소."
"케티스 따듯한 차가 마시고 싶군요."
"그리 모시겠습니다. 공주님."
과거 제이미의 집사 케티스는 이제 왕궁에서 시종들의 총책임자로 일하는 중이다. 왕궁의 전체 관리는 맨허튼 경이 도맡아 하고 케티스는 그의 오른팔로 직접 제이미와 아그니스 공주 및 윌리엄 대공의 시중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시녀 이벨롯이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 두 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인 뒤 나갔다.
아그니스는 찻잔을 입에 가져가며 말했다.
"그가 뿌리치기 힘든 제안을 했지요?"
제이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시몰레이크 후작과 관련이 있는 일인가요?"
"그가 반란을 획책하는데 오군단이 도움이 될 거라고 했소."
"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반란이라뇨. 이건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거죠. 당신은 조약에 의거 솔라리스 왕국의 섭정입니다. 시몰레이크 후작이야말로 그에 반하는 반란 세력이며 이를 말해 토벌이라고 표현하시는 겁니다."
"그런가? 하하. 시몰레이크 후작이 사실 눈엣가시인 것은 분명하오."
"그가 무슨 권리로 왕위를 탐내는 것입니까? 그거야말로 반란을 획책하는 짓입니다. 노르딕 백작은 바른 판단을 내린 겁니다."
"그럼 당신의 생각은?"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까? 당장 노르딕 백작의 오군단을 동원하여 시몰레이크 후작을 제거하십시오."
"쉬운 일은 아니오. 시몰레이크 후작은 영악한 여우외다. 5군단의 모헤드 백작은 시몰레이크 후작이 직접 백작으로 서임한 그의 후견입니다. 4군단의 필리프 백작 또한 시몰레이크 후작의 덕을 보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고. 노르딕 백작이 충의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내 의중을 떠보려 그런 말을 한 것인지는···. 섣부른 판단은 이르다고 봅니다."
"당신 이 기회가 얼마나 중요한 기회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 시몰레이크 후작을 제거할 수 있다면 아버지의 누명을 일시에 해소할 수 있습니다."
제이미는 두 눈이 커졌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아그니스 공주는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풍성한 소맷자락에서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건넸다.
두루마리를 펼쳐 읽던 제이미는 깜짝 놀랐다.
"아니 여기 적힌 것이 정말 사실이오? 이걸 어디서 구했소?"
"아직 윌리엄 대공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알음알음으로 어렵게 구한 것입니다."
"이건 알음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적국과 내통한 밀서란 말이오. 이게 진짜인지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거요?"
"밀서인 만큼 서로 간 인증은 확실한 것이지요? 양쪽 모두 찍힌 낙인은 거짓을 말할 수 없고 제삼자에게 추적 마법을 걸면 그 사실 여부가 더더욱 확실히 드러날 테지요."
"믿기 어렵소. 아니 이걸 가지고 있었으면 진즉에 말하지, 그랬소?"
아그니스 공주를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그걸 사용하면 어떻게 되죠? 시몰레이크 후작은 당연히 발뺌을 할 것이며 당장 마법을 사용하여 흔적을 지우려 할 것입니다. 그것을 이용할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아시죠?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것을···. 그 두루마리가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몰레이크 후작이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죠."
"솔직히 말씀하시오. 이건 평범한 사람이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오. 심지어 시몰레이크 후작의 최측근조차 손에 쥐기 힘든 물건을 어찌 왕궁에서 한 발짝도 나간 적이 없는 당신 손에 쥐어 쥔다는 말이오?"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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