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아마 얼씨구나 할 테니까
이윤환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끊읍시다? 이 새끼 지금 내 전화를 끊은 거야?”
다시 이길래의 번호를 누른 이윤환의 얼굴이 점점 험악해졌다.
“거기다 내 전화를 씹어? 이 자식, 이거 개념 밥 말아먹은 거 아냐?”
중얼거리는 이윤환을 보며 여명신문의 시경캡이 킥킥거렸다.
“또라이라더니 진짠가 보네. ”
이윤환은 인상을 버럭 긁었다.
“웃지 마. 성질 같아선 쫓아가서 머리털이라도 뽑아 놓고 싶으니까.”
여명신문 시경캡은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이름에 뭐가 있나? 죽은 이 선배도 장난 아니었다고 하던데.”
“이길래 선배? 그 선배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아, 맞다. 너 신입 때 이 선배가 해동에 있었겠구나. 거기선 조용했어?”
“조용했지. 아무도 안 건드렸으니까. 그리고 선배들 사이에서만 악명이 높았지, 후배들한테는 잘해줬어. 딴 선배들처럼 타박도 잘 안 하고. 뭔가 항상 여유도 있어 보였고.”
“말투가 꼭 롤모델 말하듯 한다?”
“그랬지,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졌지만.”
여명신문 시경캡이 피식 웃었다.
“그렇겠지, 기자라는 타이틀만 놓고 보면 그 선배만 한 사람이 없지만 그다음이 없으니까.”
이윤환이 여명신문 시경캡을 보며 물었다.
“이길래 선배 말이야, 죽기 전에 여명에서 차장 달았었어?”
여명신문 시경캡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달아준다고 해도 마다하더라고. 자긴 체질이 아니라면서. 그런 선배가 데스킹을 해줘야······, 아니다. 그 선배가 데스킹하면 회사 망하겠구나.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싹 다 조져댈 테니까.”
여명신문 시경캡은 아쉬운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까운 사람이 안타깝게 죽었어.”
이윤환이 눈살을 구기며 물었다.
“그 교통사고, 여명에서 깊게 취재하느니 마느니 하지 않았었어?”
“그랬지. 그런데 위에서 덮으라고 해서 덮었어.”
“뭐 이상한 게 나온 거야?”
“그야 모르지, 석연찮은 부분이 있긴 했지만 어떻게 알겠어. 경찰도 조사를 하다 말았는데.”
입맛을 다신 여명신문 캡이 노트북 화면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나저나 어쩔 거야? 저 또라이는?”
이윤환은 눈을 가늘게 뜨며 정지화면 속 이길래를 바라봤다.
“어떡하기는 뭘 어떡해. 이 기회에 확실히 잡아야지.”
여명신문 시경캡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초장에 잡아. 까딱하다간 애를 키우는 게 아니라 모시고 살 수도 있으니까. 봤지? 아까 카메라고 뭐고 개무시하고 욕 박아가며 할 말 다하는 거? 딱 봐도 쟤, 보통내기가 아니야. 근데 말야, 쟤 신입인데 어떻게 이 바닥 돌아가는 걸 저렇게 잘 알지? 형사과 팀장이 난처해지는 순간에 딱 치고 들어갔잖아. 저 형사과 팀장한테 눈도장은 콱 찍었겠는걸?”
“반대로 딴 기자들은 따라지 됐고.”
“그러지 말고 쟤 동작으로 붙여. 형사들 또 이런 은혜는 절대 안 잊잖아.”
“안돼. 처음부터 땅 짚고 헤엄치게 할 수는 없어. 이참에 단단히······.”
갑자기 진동하는 전화로 인해 이윤환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화면에 뜬 발신자는 사회부장 조진상이었다.
“네, 선배.”
-이길래 말이야, 강남라인이라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런데······.”
-그냥 관악라인으로 옮기고 동작서에 붙박이로 붙여 놔.
“동작에요? 설마 CKF텔레콤 사건 취재를 맡기라는 말씀이세요?”
-신입한테 맡길 사이즈가 아냐. 적당히 통제하면서 뭐 물어오는지 지켜봐. 형사과 팀장이 은혜 입은 까치 얼굴을 하고 있던데 거기다 붙여놔도 좋고.
“선배, 그렇게 되면 마와리 돌리는 걸······.”
-일단은 CKF에 집중하자고. 이거 단순 자살로 끝나지 않을 거 같으니까.
“예?”
-지금은 그렇게만 알고 있어. 뭐라도 나오면 나한테 직보하고. 국장까지 레이더 돌리고 있으니까 긴장하고.
“아, 알겠습니다.”
얼떨떨해하는 이윤환의 표정을 본 여명신문 시경캡이 물었다.
“내 말대로 동작에 붙이라고 하지?”
이윤환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살을 구긴 채 고민하던 이윤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명신문 시경캡이 이윤환의 팔을 잡았다.
“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왜 그래? 어디 가?”
“종합상황실.”
“왜? 뭐 있어?”
“아니, 누구 좀 잠깐 보고 오려고.”
*
나름 빙 돌아 사내에게 다가갔다.
이쯤 되면 내가 다가가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여전히 뭔가를 찍고 있다.
손을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동영상일 가능성이 크다.
나는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으로 핫팩을 주무르며 사내에게 다가갔다.
이십 대 후반, 작지 않은 백 칠십 중반의 키, 흰 피부가 아닌데도 눈 밑 그늘이 짙은 게 꽤나 피곤해 보였다.
목까지 패딩 지퍼를 바짝 올려 입이 보이지 않았다.
손에 든 스마트폰을 움직일 때 하관이 드러났다.
거스러미가 일어난 입술은 손으로 뜯었는지 슬쩍 피가 난 흔적도 남아있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손은 이미 꽝꽝 얼어 빨갛다.
슬쩍 보이는 스마트폰은 은색 소형차 쪽을 찍고 있다.
과학수사라고 적힌 승합차와 구급차로 가로막혀 보닛만 보이는 차를 왜 찍는 걸까?
백팩에서 핫팩을 꺼내 탁탁 소리를 내며 두드렸다.
사내의 눈동자가 잠깐 나를 스치고 갔다.
위험한데?
눈동자에 초점이 없다.
두드려서 열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핫팩을 사내에게 내밀었다.
“손이 얼었네요. 이것 좀 쥐고 계세요.”
사내의 시선이 내 얼굴을 향했다.
빙긋 웃으며 핫팩을 흔들었다.
“그러다 동상 걸려요. 지금이야 몰라도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면······.”
사내는 촬영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이럴 때는 따라붙으면 안 된다.
좀 전에 난리 친 걸 봤을 테니 내가 기자인 것도 알 테고.
몸을 움직이지 않고 사내의 동선만 눈으로 좇았다.
사내는 몇 발 움직여 다른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그때 멀리서 중형 세단이 현장으로 향했다.
세단?
처음으로 든 생각은 CKF 관계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었다.
의경의 손짓에 멈춰 선 세단은 운전석 차창이 내려갔다.
뭐라고 몇 마디 주고 받은 세단은 의경의 지시에 따라 근처에 주차한다.
형사 하나가 세단을 향해 걸어간다.
경례를 하지 않으면 이건 백 퍼센트 CKF 사람이다.
세단의 조수석에서 내린 사람이 형사와 몇 마디를 나누고 뒷좌석이 열렸다.
뒷좌석에서 내린 건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사내를 살폈다.
목까지 끌어올린 지퍼를 올린 것도 모자라 후드를 뒤집어 쓴다.
저 사내, 세단에서 내린 사람이 누군지 아는 눈치다.
중년 남자와 몇 마디를 주고 받은 형사팀장이 지시를 내린다.
그러자 경찰과 의경들이 분주해졌다.
폴리스 라인을 뒤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촬영하지 말아 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곧 시신을 차량에서 구급차로 옮길 모양이다.
다시 롱패딩의 사내로 시선을 옮겼다.
후드로 가려져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저 사내 분노하고 있다.
의경 둘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자, 물러서 주세요. 촬영하시면 안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둘 뒤로 물러나고 악착같이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놈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나한테 욕 처먹은 놈들이다.
기가 막히네.
정신 나간 놈들이 스마트폰을 돌려 나까지 찍고 있다.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 보란 듯이 놈들의 사진을 찍었다.
저것들은 나중에 짬 나면 손 보는 걸로 하고······.
사내를 눈으로 좇으며 그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따라 이동했다.
응?
저놈들은 또 뭐지?
패딩 안에 수트를 입은 양복쟁이들 셋이 다가온다.
셋은 뿔뿔이 흩어져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고 있다.
양복쟁이들을 본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반대 방향으로 몸을 옮기고 있다.
나는 얼른 명함을 꺼내 볼펜으로 급하게 휘갈겨 몇 자 적었다.
사내는 공영주차장 출구 쪽으로 이동하는 사람 서넛과 함께 이동하고 있다.
크게 돌아 움직일 때, 누군가 날 불렀다.
“이길래!”
고개를 돌려보니 윤서희를 옆에 달고 있는 해동 기자다.
못 들은 척하고 빠르게 뛰어 사내가 움직이는 쪽으로 몸을 옮겼다.
양복쟁이 하나가 검은 패딩 사내를 쫓듯 성큼성큼 걷는다.
나는 사람들과 이동하는 사내 쪽으로 다가가 양복쟁이를 향해 소리쳤다.
“해동일보 이길래 기잡니다. 혹시 CKF텔레콤에서 나오셨습니까?”
양복쟁이는 흠칫했고, 검은 패딩 사내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나는 검은 패딩 사내와 부딪치며 슬쩍 명함과 핫팩을 패딩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곤 양복쟁이에게 다가가 명함을 내밀었다.
“맞죠? CKF텔레콤 직원? 잠시 몇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양복쟁이는 손사래를 치고 떠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잽싸게 사내의 팔을 잡았다.
“저기 와 계신 분은 누구신가요? 선생님께서는 사고자 분과 같은 부서에 근무하십니까?”
양복쟁이는 내 손을 뿌리치려 했고, 난 더 세게 사내의 팔을 움켜쥐었다.
“이거 놓으세요.”
말은 내게 하면서도 눈은 검은 패딩을 찾고 있다.
다른 양복쟁이들까지 내 쪽으로 다가와 슬쩍 검은 패딩의 위치를 확인했다.
나는 대놓고 양복쟁이에게 물었다.
“누굴 찾고 계십니까? 세 분이 계속 두리번거리고 계시는 것······.”
양복쟁이는 험악한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아니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가요.”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 녹음 앱을 켰다.
“CKF 직원이 아니시란 말씀 이시죠? 저 두 분도?”
내게 팔을 잡혔던 양복쟁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양복쟁이를 향해 웃으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짚었나 보네요.”
찬찬히 셋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럼, 실례했습니다.”
“잠깐! 녹음 한 거 지우세요.”
“좋은 말로 할 때 가라는 거요? 별것도 아닌데 그러죠, 뭐.”
삭제하는 장면까지 친절하게 보여줬다.
앱을 끄고 전화를 주머니에 넣자, 셋은 다시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검은 패딩은 잘 빠져나갔겠지?
양복쟁이들이 당황하는 것만 봐도 목적은 달성한 것 같다.
높은 확률로 검은 패딩은 연락을 해 올 거다.
이놈들에게 쫓기고 있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을 테니까.
기다리는 건 기다리는 거고, 우선 조진상하고 CKF 홍보팀장이 뭘 주고받았는지, 아니면 뭘 주고받으려고 했는지부터 알아봐야겠다.
내가 아무리 죽을 똥을 싸며 취재해 봐야 데스크에서 킬하면 죽도 밥도 안 될 테니까.
생각을 정리하고 움직이려 할 때, 해동일보 기자와 윤서희가 다가왔다.
그런데 이 자식 표정이 안 좋다.
나는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너, 네가 돌아야 하는 라인이 어딘지도 모르는 거야? 그리고 캡 전화는 왜 씹는 건데? 미쳤어?”
“돌아야 하는 라인이 어딘지 알고, 캡 전화는 상황상 받을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미치지 않았고요.”
“뭐?”
“그럼 전 제 라인으로 돌아가도록 하죠.”
바짝 얼어있는 윤서희에게 눈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잠깐 서봐. 너 오늘부터 동작서에 붙박이니까.”
피식 웃음부터 났다.
물에 빠진 형사팀장을 건져준 나보고 생색이라도 내면서 단물 빨아오라는 모양이다.
잘됐네, 왔다갔다 고생할 일도 없고.
나는 몸을 돌려 인상을 긁고 있는 기자 놈을 바라봤다.
“보고는 누구한테 합니까? 선배한테 하나요?”
“너, 신입이 선배한테 말하는 예의 몰라? 다나까 쓰라고 전달 못 받았어?”
“전달은 받았고, 다나까는 쓸 생각 없어요. 여기가 무슨 군대도 아니고 다나까를 써요.”
“야! 아무리 인턴에서 신분을 갈아탔다고 해도 기본은 지켜야 할 거 아냐!”
“기본이요? 다나까를 쓰는 게 기본이에요? 그럼 하나 물어봅시다. 다나까를 쓰라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똥군기 잡는 거 빼고.”
“하아, 참. 말이 안 나오네. 갑자기 신분이 바뀌니까 눈에 뵈는 게 없냐? 너 이 새끼, 미필이야?”
“이 새끼?”
후우, 순간 욱했다.
새파랗게 얼어있는 윤서희만 없었어도 들이 박을 뻔했다.
도끼눈을 떴더니 기자 놈도 움찔한다.
“선배, 잘못하는 걸 지적하면서 욕하는 건 상관없어도 이 새끼 저 새끼는 찾지 맙시다. 나도 성질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니까.”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크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할 말 끝났으면 난 동작서로 갈게요.”
고개를 돌려 윤서희에게 말했다.
“택시비도 아낄 겸 같이 가죠.”
“네?”
구급차가 빠져나가며 경찰들도 철수를 준비하는 모습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차피 그쪽으로 갈 거잖아요. 그러니 나랑 가요. 여기 상황도 끝난 거 같은데.”
윤서희가 우물쭈물해 선배라는 놈을 보며 물었다.
“선배도 갈 거면 같이 가시든가요.”
“됐어, 둘이 먼저 가. 그리고 너······, 대면식 때 보자.”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그날만 학수고대하고 있어요. 선배가 못한 대답, 거기선 들을 수 있을 거 같아서.”
*
윤서희는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온기가 남아있을 거 같지 않은 핫팩만 손에 쥐고 있었다.
반쯤 고개를 숙인 채로 운전석 등판만 바라봤다.
이럴 땐 고민하게 두는 게 맞다.
언 몸부터 녹이는 게 순서고.
창밖을 바라보다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기사님, 여기서 세워주세요.”
고개를 들어 창밖을 확인한 윤서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반쯤 나가 있던 넋이 돌아왔는지 윤서희가 내게 물었다.
“아직 서까지는 좀 남았는데요?”
“일단 내려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영문을 몰라하는 윤서희에게 말했다.
“날도 추운데 뜨끈한 국밥이나 먹고 들어가죠?”
“국밥이요?”
“속이 뜨뜻해야 몸도 금방 따뜻해져요. 혹시 국밥 못 먹는 건 아니죠? 싫어하면 다른······.”
“그건 아닌데, 좀 있다가 보고 해야 해서.”
시계를 보니 11시가 거의 되어간다.
“어차피 보고할 것도 없잖아요. 택시 타고 동작서에 도착했다고 보고할 것도 아니고. 이대로 딴 데 돌아봐야 나올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밥부터 먹어요. 보고할 건 밥 먹다 보면 생길 테니까.”
“예?”
나는 손을 들어 국밥집으로 들어가는 형사들을 가리켰다.
“저기 형사들 밥 먹으러 가네요. 그러니까 톡이나 보내요. 형사들하고 같이 식사하러 간다고.”
“그래도 될까요?”
“날 믿고 보내봐요. 아마 얼씨구나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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