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쿠스가 고문을 받고 있어요
한참 뒤 마리는 성을 나오면서 아무 하녀나 보이는대로 붙잡고 괜한 트집을 잡아 화풀이를 해댔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잠시 혼자 울다가 나와서 교회로 갔다. 문간에서 배고픈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쿠미누스가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개랙프리드를 싫어한다는 점에선 의견을 일치를 보인다는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사제님, 역시 맞았어요. 개랙프리드였어요."
그들은 아무도 엿듣지 못하는 나무그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자가 멋대로 일을 처리한 겁니다."
"역시 그랬군요. 하도 방만해서 언젠가 일을 벌일 줄 알았어요. 다른 상황이었다면 심각한 월권 행위입니다. 하지만 영주님이 이런 데 신경을 쓰지 않으시니.... 일의 심각성도 이해를 못하겠지요."
"어쨌든 가레랑 그 사람의 지시가 아닌 게 확실해졌으니 사제님이 그곳으로 돼지치기를 찾으러 갈 수 있겠네요. 언제 출발하시죠?"
"글쎄요. 모르겠군요. 여기 일도 한창 바쁘니까...."
그러면서 쿠미누스는 마리의 오만하게 쳐다보는 얼굴을 잠깐 마주보았다. 그녀의 가문 사람들은 외모는 모르겠고 태생적으로 키가 컸다. 저런 장신으로 항상 사람을 내려다보려고 하는데 부부간에 사이가 좋을리가 있겠냐고 쿠미누스는 생각했다. '뭔가 일을 꾸미시는군.' 그는 곧장 하겠다고 하는 게 자존심 상하고 귀족부인을 대하기 어색하기도 해서 다리의 중심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시늉을 하여 상대방을 답답하게 해보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개랙프리드한테 무언가 망신을 주려는 계획을 세우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옛날까지 기억을 되짚었는데, 확실히 이곳에 왔던 그날부터 항상 어떤 계획을 가진 사람이었다. 쿠미누스는 작당모의라던지 흉계를 꾸미는 건 참 질색인데 그 계획이라는 게 정말 있다면 결말이 어떤 모양으로 나게 될 지 벌써부터 알 것 같았다. '형이 동생을 여간 싸고돌아야 말이지....'
마리는 모르는 척 여름이 휘어잡는 들판을 바라보다가 이쪽으로 슬쩍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저희 영지에서 악마숭배자라니 큰일이에요. '만약 그게 사실이면' 사제님의 고생이 여간 아닐텐데요. 평소 그 아이를 잘 돌보아 주셨잖아요."
급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는 말투에 쿠미누스는 내면속에서 깊은 분노가 치밀어오름을 감지하고 땅바닥에 민들레나 쳐다보던 고개를 확 들었다. '여인이여, 지금 누구를 떠보는가?'
마리는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겠어요. 빨리 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사제가 대꾸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부르르 떨리는 입술을 꾹 닫았다. 바실리쿠스 같은 아이가 그런 못된 악행을 벌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만약 이 일이 바깥에까지 퍼져나간다면 그 교구를 관리하는 쿠미누스의 입장이 어떻게 되겠는가? 바실리쿠스가 악마숭배자인 것을 쿠미누스 저놈이 모를 리 있었겠냐 이렇게 떠벌리고 다니지 않겠는가?
'바실리쿠스 그 자식은 처신을 어떻게 하고 다니길레 이런 꼴을 보게 한단 말이냐. 내 이 기회의 그 녀석의 성질머리도 단단히 고쳐놓아야 속이 풀리겠어!'
쿠미누스는 툴툴거리면서 돌아와 우선 윌코지한테 화풀이를 하고 하인들을 시켜서 말에 안장을 메어놓으라 지시했다. 가장 아끼는 밤색의 튼튼한 모시넬로는 당근을 주면서 목을 긁어주었다. 그다지 의젓한 외양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충직하다는 것이 그리 예쁠 수가 없었다.
마을을 빠져나와 언덕길을 오르는데 뒤에서 누군가 소리쳐 돌아봤더니 바실리쿠스의 조카라는 애가 파란 봄보리 사이로 죽어라 뛰어오고 있었다. 사제는 개미처럼 작았던 아이가 코끼리마냥 쿵쿵 뛰어오는 모습을 보고 저렇게 잘 생긴 애가 바실리쿠스의 조카일리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누가 보면 나한테 돈이라도 꾼 줄 알겠네. 뭘 그리 겁세게 달려오느냐?"
"사제님, 저도 데려가주세요!" 아이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등 뒤로 번쩍 올라탔다. "제 친척이 위기인데 제가 안 갈 수 있나요?"
"안 돼!" 쿠미누스는 짐짓 엄하게 외쳤다. "가긴 어딜 가냐, 이 맹꽁아. 소풍인 줄 아니? 거긴 금녀의 구역이야! 나 혼자 거기 들어가면 누가 널 돌봐준다고? 당장 집에 들어가!"
"저한테 집이라 할 만한 것이 어디 있다고 공연히 그래 말씀을 하시나요?"
아이가 대꾸했다.
"평소에 절 돌봐주는 사람은 또 어디 있다고 그래 말씀을 하세요? 다 혼자 큰 거지! 하나뿐인 조카가 삼촌을 보러 가겠다는 데 막으시는 사제님이야말로 참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이 아이는 나이에 비해 당돌하기 그지없다.' "너가 잘 모르나본데 지금 밖은 호반트 약탈꾼들이 들어왔다고 해서 한바탕 난리에 기겁중이야. 너 같은 꼬마 여자애가 겁없이 돌아다닐 구석이 아니라고."
"사제님은 그리 운동을 열심히 하셨으면서 저 같은 여자애 하나 구하지 못하신단 말씀이세요? 그렇게 운동을 헛하셨다면 되려 제가 못난 사제님을 지켜드리기 위해 따라가야겠어요. 그렇게 마음 먹었으니 막을 생각 하지 말아요."
쿠미누스는 어이가 없다가 그럼 너 좋을대로 하라면서 자리를 앞뒤로 바꾸고 고삐를 잡았다. 그리고 본인이 쓰고 있던 밀짚 챙모자를 반 접어서 아이에게 씌웠다. '그러고보니 모시넬로가 낮선 사람을 등에 태우고도 언짢은 기색이 없다. 왜일까? 이 아이를 데려가면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있겠어.'
이른 점심에 출발하여 저녘 어스름쯤 도착해 먼지를 털고 여관에서 욕조를 빌려 애를 씻긴 다음 산을 넘고 언덕을 건너가 늦은 문을 두드렸더니 대뜸에 수사들이 나와서 맞이해주었다. 사제는 아는 얼굴들과 일일히 만나 다소간에 부족했던 인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누구죠?" 한 수사가 물었다. "아이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요?"
쿠미누스가 미리 아이의 머리카락을 적당히 깔끔하게 잘라주었는데 이렇게 보니 차라리 남자로 해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다면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도 있고 같이 바실리쿠스를 만날 수도 있으리라.
"이 애는 제 사촌입니다." 사제는 자기도 모르게 바실리쿠스와 똑같은 변명을 했다. "수도원 구경을 하고 싶다기에 데려왔죠."
"수도원이 뭐 구경할 게 있다고 이 먼 길 애를 고생시키십니까. 차라리 저 밑에 도시 장판이나 데려가는 게 옳죠."
"뭐 그건 그렇죠."
그러면서 이곳에 온 용건을 밝혔는데, 중놈들이 갑자기 입을 꾹 닫더니 이런저런 핑계로 하나둘 비실비실 멀어지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사제는 맞아주는 사람 없이 입구 앞에 혼자가 되고 말았다.
"뭔가 있구만." 사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잠시 후 웬 불목하니 하나가 달려오더니 어디서 오신 분이냐고 묻기에 사실대로 대답했다. 우선 잠잘 곳부터 마련해드리겠다고 이쪽으로 오라고 하는데 사제는 따라가지 않고 혹시 지금 수도원에 손님 오신 분이 있냐고 물었다. 불목하니는 거기까지 거짓말할 생각은 없어서 그렇다고 답했다. 그것이 며칠이나 되었냐고 물으니 한 나흘은 되었다고 했다.
쿠미누스는 일단 아이 잠자리만 어떻게 봐달라고 한 뒤 본인은 원장님 알현을 신청하러 달려나갔다.
'필시 큰 일이 난 것이야! 바실리쿠스는 지금 어디있지?'
원장은 지금 다른 용무가 있어 볼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놈의 다른 용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면 재판이 벌어지는 동안 사람을 구금해놓는 장소는 어디냐고 물었다.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건 왜지?" 쿠미누스는 엄숙히 뒷짐을 지고 반문했다. "왜 내가 바실리쿠스를 볼 수 없다는 거야?"
"이에 대한 권한은 저에게 있는 것이 아닌데 어찌 함부로 면회를 허락하냐마냐 하겠습니까. 원장님께 여쭤보는 게 어떨지..."
"그럼 원장님을 뵙도록 해주게."
"원장님은 지금 용무가 있으십니다."
"아... 용무가 있으시다?" 쿠미누스가 정색하고 말했다. "원장님 허락이 없으면 나는 면회를 할 수가 없는데 지금 원장님은 다른 용무가 있으시다? 그 용무가 언제 끝이 날 지 모르겠다? 지금 그렇게 말하는 거지?"
집사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쿠미누스는 모든 사정을 이해하고 몸을 돌려 자리를 빠져나왔다. 사실 방금은 한 가지 언어의 덪을 놓았던 것인데, 그 얘기를 통해 적어도 바실리쿠스가 여기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놈들이 나에게서 바실리쿠스를 숨기고 있다...' 쿠미누스는 어쩐지 계속 이쪽을 힐끔거리는 시선을 느끼며 정원을 거닐었다. '구린 냄새가 나는 건 확실해. 놈들이 고작 이런 일로 바실리쿠스를 고문했을까?'
한 번 직접 알아보아야겠다고 결심한 그 때 한 사내가 다가오더니 혹시 바실리쿠스를 찾고 있느냐고 대뜸 물었다.
"당신 누구요." 깜작 놀란 나머지 쿠미누스가 소리쳤다. "나에 대해 뭘 알고 그런 걸 묻는 거지?"
낮선 남자는 생긴 것 답게 소심하기 짝이 없었다. 윽박을 들은 건 본인인데도 쩔쩔매면서 자기 가슴에 손을 얹고 바실리쿠스의 친구라 설명했다.
"이름이 뭐요?"
"로드렉이지요." 이런 상황에 굳이 거짓말할 필요는 없었다.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닙니다. 지금 바실리쿠스가 감옥에 갇혀 고문을 받고 있다는 걸 아십니까?"
"바실리쿠스의 친구인데 왜 난 당신을 처음 보지?"
"제 말을 믿으셔야 합니다! 바실리쿠스가 지금 고문을 받고 있어요..."
로드렉은 쿠미누스를 붙잡고 지금까지 이곳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말해주었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사제의 얼굴이 어땠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당신은 그걸 뻔히 알고, 녀석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도 알면서, 그래 바실리쿠스의 친구라면서 손 놓고 여기서 나랑 짝짜꿍 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단 말요?"
"제 입장도 생각해주셔야 합니다.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귀족인 원장한테 대들 수 있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쿠미누스는 숨을 씨근거렸다. "그럼 지금 이게 에레디오스가 직접 판결하는 안건이란 말이야? 녀석이 지금 할 짓이 없어 직접 바실리쿠스를 태워죽이겠다고 나선단 말이야?"
"사제님 제발요.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녀석의 상태가 어떤지 직접 보셔야 해요."
사제는 한참이나 분을 삭혔다. "....갑시다!"
그들은 정원을 빠져나와 훔쳐보던 수사들 무리를 밀치고 감방이 내려다보이는 구멍으로 가까이 갔다.
"바실리쿠스!" 가자마자 사제가 엎드리고 소리쳤다. "너 거기서 뭐 하니!"
마침 바실리쿠스는 쿠미누스가 왔다는 소식을 미리 전해듣고 아까부터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둑거리는 창문 어귀에 익숙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바실리쿠스는 말도 못하고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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