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쿠스 비스콘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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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x
작품등록일 :
2024.07.26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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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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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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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무서웠어요

DUMMY

집무실로 사람을 불러서 피해 현황을 조사하도록 하고 혹시 수녀원에도 화마가 끼치진 않았는지 알아보고 오도록 했다. 보고를 듣고 에레디오스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람이 안 죽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야.'



이제 남은 건 혹시라도 숨어있는 놈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순찰을 도는 일이다. 그런데 지금 인력 대부분이 도망간 산적 놈들 고작 일곱을 쫒는다고.... 누구는 여덟, 열 둘, 스무 명 다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그놈들 쫒아간다고 다 나가버려서 남은 인원으로 곳곳을 돌아야 한다. 식당에 아직 요리사 조수들이라도 몇명 남아있는 게 다행이었다. 이들은 평소에 선배 요리사들에게 모진 갈굼을 받았기 때문에 바깥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불을 지피고 자리를 지키도록 머릿속에 기계적인 각인이 세겨져 있었다.



남아있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둘씩 짝을 지어서 등불이든 횃불이든 하나씩 가마에서 불을 가져다 쓰게 한 다음 원장 자신도 몸소 횃불을 붙이고 원내를 돌기 시작했다. 각자에게 몇 개씩 순찰할 구역을 정해주긴 했지만 아랫것들을 믿을 수는 없으니 중요한 구역은 본인이 직접 가서 다시 보기로 했다.



어둠은 고즈넉이라는 단어를 아는 것만 같았다. 원장은 불에 탄 자리를 볼 때마다 가까이 가 살펴보며 이따금 어린애처럼 꺽꺽 울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하지는 않았다. 듣기로는 불이 나기 훨씬 전부터 왠 어린아이가 '불이야' 하면서 뛰어다녔다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재산까지는 태워먹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다.



원장은 지나가는 길에 쿠미누스 사제를 마주치고 반갑게 인사했다. 상의를 반쯤 풀어해진 채, 우락부락한 근육 사이사이로 피어나는 하얀 김을 밤하늘 저편으로 날려보내며 한 손에 칼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사제는 멀리서 원장의 얼굴을 보더니 크게 놀란 얼굴로 뭐라뭐라 얼버부리다가, 원장이 계속 뒷짐지고 서있으니 결국은 설렁설렁 뛰어와서 직접 순찰을 도실 줄은 몰랐다고 중얼거렸다.



쿠미누스는 얼굴에 전투의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수도원 깊은 안쪽까지 들어가서 숨어있는 산적의 잔당 두 명을 기절시키고 오는 길이었다. 놈들이 깨어나기 전에 묶을 밧줄을 찾아다니는 길이라고 했다.



"그거라면 걱정할 것 없소. 놈들의 위치만 말해주시오. 우리 수도원 불목하니들이 밧줄 위치를 더 잘 알 테니 녀석들을 만나면 시켜서 놈들을 묶어 끌고오라고 시키면 될 일 아니오? 그보다도 쿠미누스 형제, 그대에게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겨야겠습니다."



쿠미누스는 이 자가 아주 오랜만에 자신을 형제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놀란 나머지 의심에 찬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원장의 시선은 힘과 정열을 상징하는 듯한 쿠미누스의 단련된 육체로 흐뭇하게 향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침 아주 귀찮은 일을 시키려고 지나가던 자신을 부른 것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수도원 내부 본당 숨겨진 장소에 오랜 옛날 가스트로 원장님 시절부터 한 땀 한 땀 곳곳에서 고이 모셔온 수십가지 성물이 있는 장소가 있소이다. 그런 중요한 성물이 있는 장소는 모든 수도원마다 한 개씩은 있을 텐데, 그러면 우리 원에도 있다 생각할 게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당신 말마따나 아직 더 숨어있는 산적놈들이 있다면 자연 우리처럼 그런 생각에 도달할 테고, 그러면 우리 셀레미즈의 가풍이 깃든 반석, 살아있는 역사, 소중한 재산이 위험에 처한 셈이나 다름없소. 내 보아하니 그대는 비록 나이를 먹었지만 전투적인 감각은 녹슬지 않은 것 같소이다. 조금 숨을 몰아쉴 뿐 다친 곳은 없어보인다는 점에서 그렇소. 내 당장 남아있는 이들 중 직책이 높은 수사 셋과 건장하고 튼튼한 젊은 수사 둘을 붙여줄 테니 그곳을 부디 안전하고 철저하게 지켜주시오!"



쿠미누스는 급한 일이 있다고 몸을 빼봤자 성인들의 유물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냐는 반문을 받을 게 뻔하고, 그게 아니라도 뭔뭔 말꼬투리를 잡아서 자꾸 괴롭힐 게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그냥 알겠다고 하고 근처에 서있던 노인들의 절름거리는 안내를 받으면서 성물보관실로 천천히 향했다.



이제 한 시름 놓은 셈이다. 원장은 갑시다 하면서 대답이 없자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같이 있던 사람들은 다 가버리고 자기 혼자만 그곳에 덜렁 남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고 무릎을 움직여 본당, 교회, 예배당, 성구보관실, 성체보관실, 불에 타고 재만 남은 약초밭과 채마밭, 유리 온실(안쪽이 모두 따뜻하게 익어버렸다) 돼지똥냄새 나는 축사(다행히 여기는 피해가 없었다) 등등을 힘내어 다 둘러보았다. 적당한 데 주저앉아 무릎을 천천히 주무르면서 볼 만한 곳은 다 봤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돼지 냄새를 맡고 있다하니 바실리쿠스 비스콘티의 얼굴이 떠오르고 말았다.



"그러고보니 그 녀석은 이 소란중 감방 안에서 뭘 하고 있을까. 산적놈들이 감방 문을 열어재꼈을 수도 있겠어. 한 번 보고 와보자."



하여 갔더니 문은 다 휑 열려있어 사람이고 돼지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바닥에 쏟아진 토사물과 돼지 구유통에 남은 잔반, 그리고 한쪽에 모인 오물통과 사발에 놓인 콩가루만이 바실리쿠스 비스콘티의 흔적을 증거하고 있었다. 에레디오스는 이것만은 참을 수가 없어서 길길이 날뛰었다. 갑자기 겁이 헉! 하면서 드는 생각이 만약 바실리쿠스 같은 지독한 악한이 탈옥하면 무슨 일을 가장 먼저 벌일까 하는 짐작이었다. 악당은 당연히 본인에게 가장 득이 될 일을 향해 갈 것이다. 득이 될 일이란 게 뭐겠는가, 무방비 상태의 쉬레 백작부인을 납치하여 사방으로 몸값협박을 벌이는 극악무도가 아니겠는가?



'만약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놈은 오늘 나한테 목졸려 죽는 거야!'



하면서 그 뚱뚱한 몸으로는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속도로 헨나프리데가 잠든 숙소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가는 것이었다.



"헨나프리데! 헨나프리데!"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잠금장치를 풀었다. 열자마자 에레디오스는 후딱 들어갔다가 헨나프리데의 눈과 마주치고는 얼어붙고 말았다. 사람의 눈은 늙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한 것이다. 어두운 방안에서는 그녀의 암녹색 눈동자만이 옛날처럼 번뜩거리고 있었다. 에레디오스는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었던 시절 언젠가에 이처럼 어둠 속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았던 것 같았다. 그 눈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입으로는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어디있소, 그 놈 어디 있습니까? 바실리쿠스 안 왔어요?"


"바실리쿠스가 뭐죠?"


"아주 못된 악마입니다! 때려 없애버려야 하죠. 그런 놈이 당신에게 해를 끼칠 수는 없을 겁니다. 제가 막겠어요!"


"그러지 말고 잠시 앉으시지 그래요."



헨나프리데가 테이블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몹시 힘들어 보여요. 물 좀 드릴까요?"



원장은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헨나프리데는 온몸을 긴장한 채 그를 맞고 있었고 저편에 두 여인이 촛불을 들고 엉거주춤한 채, 몸을 숨겨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하는 듯한 자세로 서있었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어졌다. 그는 연신 사과하면서 오늘 일은 제발 바깥에 말하지 말아달라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부탁했다. 그런 뒤 방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헨나프리데가 그의 팔을 붙잡으며 되려 시녀들을 나가게 했다. 시녀들은 눈치껏 나갔다.



원장은 자리가 불편했지만 헨나프리데가 늙은 여자한테 그런 신경 쓰지 말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잠시 후 그녀가 물을 떠와서 한 잔을 모두 들이켰다. 그래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자 자기가 얼마나 목이 말랐는지 알고는 깜짝 놀랐다. 에레디오스는 고위 성직으로 오랜 세월 살아온 습관이 있어서 겸연스레 헨나프리데에게 물 한 잔만 더 달라고 말을 했다가 벌떡 일어나서 자기가 마시겠다고 하며 물통으로 걸어갔다. 물은 두 컵이나 더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탁자로 돌아왔다.



'정말로 정신없이 달려왔던 모양이로군. 아니, 그간의 탐욕으로 물든 생활 때문이야! 그래, 원장으로서 부끄러운 짓거리들을 많이 했어. 아까는 하느님의 뜻이 뭔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했었건만, 이제와서는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군. 나의 나태와 탐욕, 식욕이 아니면 뭣 때문이랴!'



그렇게 자기 혼자만의 생각으로 빠져들다가 다시 헨나프리데의 눈을 바라보고 정신을 차렸다.



'아니다. 이 여자 때문이야.' 그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 여자 생각만 하면 나는 제정신이 아니게 된다. 하지만 형이 죽은 뒤로는 잘 만나지 않았었지. 예전만큼... 그런 느낌도 들지 않고. 단순히 늙어서 그런 것인가?'



확인하기 위해 에레디오스는 너무 무례하지 않을 만큼만 헨나프리데를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앞으로 모은 손에 눈이 갔다. 촛불에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손에 핀 잔주름과 검버섯과 창백한 피부 아래 굵에 솟아오른 핏줄이 또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헨나프리데가 아니었다면 추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보니 조금 추한 것도 같았다. 에레디오스는 자신의 손을 살펴보았다. 살이 찐 탓에 퉁퉁한 것만 빼면 그도 사정이 나은 것 같진 않았다.



'바깥 상황을 살펴야 하는데.' 에레디오스는 초조하게 생각했다. '수리 견적을 따져보고, 산적들을 추적하고, 숨은 녀석들을 찾아내고... 그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온몸이 의자에 못 박힌 것처럼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시 아까 그 손가락으로 눈을 향했다. 손끝은 갈라진 곳 없이 호두나무 고목의 표면처럼 매끈했고, 그 뒤로 이어가는 손가락부터 손목까지도 살아있는 흰 뱀처럼 살콤살콤 이어지고 있었다. 그 손목을 흑색 부드러운 새틴 레이스 소매가 확 덮어버렸다. 3단 소매에서부터 가슴이나 어깨가 파이지 않은 단촐한 상복으로 이어나가며 옷과 살이 맞물리지 않아 헐렁거리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에레디오스는 새삼 놀랐다.



'너무 말랐어.'



그런 깨달음이 오자마자 에레디오스는 티 나지 않으려고 사람좋게 웃어보였다. 헨나프리데의 얼굴은 촛불 뒤에 숨어있었다. 에레디오스는 자기 표정이 잘 보이게 고개를 조금 앞으로 내밀어서 한 번 더 웃었다.



헨나프리데는 그런 에레디오스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갑자기 옛날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에레디오스가 오프레드가 처음 왔을 때부터 성탑을 올라 여자아이들을 데려가던 시절, 장군의 성에서 나오던 날과 오프레드와 결혼하면서 다시 재회한 날까지 어물어물 건너다가다 갑자기 본인은 죄인이라 고해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정말로 못난 사람이라 이 죄 하나만큼은 다른 신부들에게 말하지 않고 오늘을 위해 고히 간직해왔다는 것이다. 고귀한 원장님의 고해를 받아야지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난데없는 고백에 에레디오스는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말해보라고 하였다.



몇 번 한숨을 짓더니 한참 뒤에 헨나프리데가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이 무서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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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가을밤의 산송장들 (1) 24.08.20 5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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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흠모의 정이 피어올랐다 24.08.17 6 0 13쪽
74 오르베스쿠와 아르파니엘 24.08.17 6 0 12쪽
73 네놈들은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단 말이야 24.08.17 4 0 12쪽
72 요 째리는 눈매 좀 보게나 24.08.17 7 0 12쪽
71 못된 것들 (3) 24.08.16 5 0 11쪽
70 못된 것들 (2) 24.08.15 6 0 11쪽
69 못된 것들 (1) 24.08.15 5 0 11쪽
68 느므딘의 어쌔신 (3) 24.08.15 5 0 12쪽
67 느므딘의 어쌔신 (2) +2 24.08.14 7 0 14쪽
66 느므딘의 어쌔신 (1) 24.08.14 5 0 12쪽
65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3) 24.08.13 5 0 12쪽
64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2) 24.08.13 5 0 12쪽
63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1) 24.08.13 7 0 11쪽
62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24.08.12 6 0 11쪽
» 당신이 무서웠어요 24.08.12 6 0 12쪽
60 이게 다들 참 어떻게 된 일일까 24.08.11 4 0 11쪽
59 여기서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겠구나 24.08.11 4 0 13쪽
58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텐데 24.08.11 5 0 11쪽
57 누이야 내 말 좀 들어보렴 24.08.10 6 0 12쪽
56 저는 어리석고 소견없는 여인이라 24.08.10 7 0 11쪽
55 저는 악마숭배자입니다 24.08.10 6 0 12쪽
54 바실리쿠스가 고문을 받고 있어요 24.08.09 6 0 11쪽
53 콩가루 고문 (2) 24.08.09 4 0 12쪽
52 콩가루 고문 (1) 24.08.09 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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