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쿠스 비스콘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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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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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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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0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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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야 내 말 좀 들어보렴

DUMMY

한편 바실리쿠스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살펴보자. 도르헤 영감의 장례식날 온 마을 식구들이 한 데 모여 옷 벗고 목욕을 하고있을 때 파수꾼인 바실리쿠스는 먼 발치에 서서 경비를 보고 있었다. 본인은 먼저 목욕했으니 상관없다고 둘러댔지만 실은 모두가 모인 자리에 염치없이 껴있는 게 싫어서 자리를 피한 것이다. 그럼에도 남들이 자기 흉을 보지는 않을까 두려워 멀리는 가지 못하고 소리가 들리는 부분만 맴돌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실수로 계곡물을 밟고 낙옆덤불을 퍽 차기도 하면서 비척비척 돌아다니다 보니 한 번은 달빛이 밝게 내려앉는 공터에 도착했는데, 그곳에 다른 경비들이 한 데 모여서 쑥덕거리고 있었다. 바실리쿠스도 그곳에 합류했다. 이런 희생적인 임무를 자처하는 이들은 대부분 혈기왕성한 젊은이였기에 그들 중에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에 둔감해진 부류도 있었다. 그런 이들은 곁눈으로 바실리쿠스를 슬쩍 보고는 피식 웃더니 옆에 자리를 만들어 같이 앉으라고 했다. 그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오는 얘기가 만약 경비에 실패해서 외부 사람에게 들킬 시에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였다.



첫째로 나오는 얘기는 당연, 공연히 떠벌리지 못하게 그 자리에서 확실히 목을 긋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퍼런 단칼을 쉭 뽑아 앞에 내놓는데 척 보아도 사람 죽이려고 만든 물건이 확실해보였다. 자기는 만약을 대비해서 날이 피부에 닿자마자 갈라지도록 평소보다 공들여 날을 갈아왔다면서 백정이 박피할 때 쓰는 칼도 이보다는 예리하지 못할 거라, 아주 단숨에 숨통을 끊으리라 자랑하듯이 지껄여댔다. 하지만 어찌 사람 죽고 살고 하는 문제를 그리 가벼히 논할 수 있겠는가?



다른 의견은 적당히 을러대기만 할 뿐 해치지는 말자는 것이었다. 물론 이 의견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러나 반대편 참여자들의 반론, 그렇게 적당히 을러댄다고 해서 놈이 떠벌이지 않을 확신이 있느냐는 말에는 시원스레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마을 사람들을 잘 알고 있고 그들의 집과 가족들의 위치를 알고 있으니 협박이 쉽지 않겠냐는 말에는, 그러면 가족이 없는 부랑자나 외부에서 오는 불청객은 어찌 하겠냐는 반격이 날아갔다.



애초에 네놈들이 경비를 잘 서기만 하면 들킬 일도 없다고 비아냥대는 소리도 있었지만 무시당하고 말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바실리쿠스가 그러지 말고 어른들의 의견을 묻어서 그동안의 선례를 알아보는 건 어떠냐고 하니 무엇에 그리 화났는지 허공에 주먹질을 해대고 본인들이 어른들 조언을 구할 나이가 지났다는 점만큼은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지금부터 대열에서 이탈하고 어른들에게 고자질하러 가는 놈은 겁쟁이니까 형제회에서 퇴출이랬다. 거기에는 바실리쿠스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산하고 다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 얼마쯤 서있었더니 저 아래 누가 켁! 하고 사레들리더니 또 얼마간 중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바실리쿠스가 놀라서 달려가보니 이 시간에는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 있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 먼저 뛰어가 우선 그 입부터 막고 보았다. 달빛에 드러나는 얼굴은 분명 발라리 수녀였다.



'이제 다 끝장났구나!'



바실리쿠스는 순간 자기가 주머니 속에서 무엇을 잡았었는지 알고(물론 날카롭게 갈아온 칼자루) 화들짝 놀라 뺐다.



발라리는 눈을 감고 어떤 일을 각오하는 사람처럼 쓰러져있었다. 그는 평소에 발라리가 자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았다. 특별한 계기가 없이 생리적 현상만으로 그러했다. 그 점은 좀 억울하지만 그녀는 귀한 수녀님이고 자기는 진흙탕 나부랭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살다보니, 째리는 눈빛 한 번에도 나오던 말이 달아나버리고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어버려 길을 가다 발라리 비슷한 거라도 보이면 사람 인생 섭섭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어찌 함부로 죽일 마음을 품겠는가?



"바실리쿠스.... 놔줘요. 당신은 비겁한 사람이군요."



이 지경의 바실리쿠스가 그 순간 말을 꺼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었는가는 말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기적적인 합의점을 찾아냈다. 바실리쿠스는 이날 자기가 발라리의 목숨을 구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는 너 갈길 가고 나는 나 갈길 가자고 대신에 아무한테도 오늘 있었던 일은 말하지 말자고 하여서 그날 일은 그렇게 결론 난 줄 알았던 것이다.


(첨언하자면 바실리쿠스는 발라리가 그날 그렇게 가마욱스를 훌쩍 떠나서 어디로든 가버린 줄 알았다. 이런 식의 재회는 바실리쿠스에겐 죽은 귀신이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한 결론으로 우선 첫째가 깊은 배신감, 발라리는 바실리쿠스 같은 사람쯤이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충격으로 말을 잃은 것이고, 둘째는 발라리가 그날의 단체목욕에 관한 일만 몇 마디 뻥끗 해도 우리 식구들은 물론이고 온 지방이 연기와 쑥대밭으로 변하리라는 두려움이 둘째였다. 남녀가 뒤섞인 단체목욕이며 마을에서 본 적 없는 낮선 사람들이며 짐승처럼 울거나 네 발로 걷기도 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대번에 악마, 혹은 이교적인 우상숭배로 엮이기 쉽다.



원장이 조금만 깊게 물어뜯어도 모든 것이 탄로날 것이다. 식구들은 끌려가고 집들은 불태워질 것이다. 그러니 늦기 전에 차라리 내 선에서 끝내자, 나만 죽으면 더 이상 문제삼을 일도 없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처럼 챙겨주던 사제의 믿음을 배신하면서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태워서 죽여달라 애원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날 저녁에는 또 한 번 중요한 손님이 멀리서부터 두 아이를 대동하고 오고있다고 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갑자기 원장은 시도때도 없이 분주해지고 정신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어느정도냐면, 바실리쿠스의 자백에 대한 것도 까맣게 잊은 듯했다. 법정은 개회명령이 떨어지지 않고 식당의 부엌에서는 연신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요리사들이 조수에게 욕을 해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때 바실리쿠스는 감방 바닥에 조용히 누워있었다.



'불에 타면 아플까? 죽을 때까지 오래 걸릴까? 지금 죽으면 어디로 가게 될까? 죽기 전에 고해를 할 수 있을까?'



그는 설날 대축일에 목이 잘리고 깃털이 뽑혀서 숯불에 천천히 통구이되던 거위를 생각했다. 이런 순간에도 먹을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 이렇게 죽을 거면 차라리 맛좋은 거위 통구이든 뭐든 마지막으로 원없이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바실리쿠스는 한 손으로 풋내나는 날콩가루를 만지작거리면서, 입안에는 새콤달콤한 겨자소스와 갈색으로 바삭바삭한 거위껍데기,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물 오른 거위의 몸통아리를 꾸역꾸역 집어넣는 상상에 뜨거운 군침을 삼켰다. 가능하다면 연어라던가, 절인 청어라던가, 말린 대구라던가, 마늘냄새나는 소시지에 베이컨, 달걀냄새가 진하게 나는 허니케이크, 신선한 생 무화과와 아몬드를 채운 대추야자, 뜨끈한 고기찌개에 치즈가루를 뿌려먹는 국수라던가... 하얗고 말랑말랑하고 따끈따끈한 흰빵이라던가.... 그렇게만 한다면, 지금까지 바실리쿠스가 먹었던 그 어떤 식사를 합쳐도 그보다 곱절은 풍족한 식사를 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역시 조금은 아쉽겠으나 그래도 이 한 많은 삶을 끝내고 온몸은 재와 먼지가 되어 낳아주신 하느님의 곁으로 얌전히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한 가지, 아까부터 말레이카가 울면서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럴 바에는 나도 죽겠어요. 차라리 죽어버릴 거라고!" 지금 옆옆 감방에서는 돼지가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녀는 엉엉 울다말고 말했다. "왜 맨날 다른 사람들은 생각도 안 하고 혼자 멋대로 일을 벌이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살아남는다고 내가 고맙다 할 줄 알아요? 허구언 날 뭔 일만 생기면 말버릇처럼 '나만 얻어맞으면 돼, 나만 고개 숙이면 끝나는 일이잖아.' 하면서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걸 등신같이 손해만 보고 다녔잖아. 그런 주제에 평소에는 남한테 지기 싫다고 허풍치고 다니고. 당신은 지금 그 버릇이 도진 것뿐이란 말이야, 정신 좀 차려 제발!"



그 말을 듣고 바실리쿠스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철창 가까이 기어가서 누이를 설득하려고 했다.



"누이야, 잠시 내 말좀 들어보렴.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게 한 가지 있어. 나는 돼지같은 놈이다. 하지만 너는 달라. 너의 부모님은 분명 어디 고귀한 집안의 사람들일거야. 너처럼 똘똘하고 예의바른데다 잘 생기고 세상의 이치를 또박또박 잘 알아가는 아이는, 나처럼 어디 진흙탕에 굴러먹다 죽어도 모를 놈이랑은 비교도 할 수가 없어. 허나 운명의 장난으로 너는 천애고아 신세가 될 수 밖에 없었지. 너뿐만이 아니다. 클리셰와 안나라던가, 개니쿠스, 그레코르 형님도 그렇고, 다들 훌륭한 사람들이야. 우리는 어릴 때부터 살 부비대며 싸우고 놀고 잘 지내왔지만 커가면서 어찌 나는 이리도 못나고 혼자만 쌩둥맞고 또 어리석고 멍청하게 자라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남들 몰래 울며 자란 세월이 한두 해가 아니었다. 너희들이 외양간에 들어가 잘 적응하고 자라는 동안에도 나는 신통한 변신술 하나 제대로 익히지 못해 이렇게 사람과 가축 사이를 오가며 한심하게 살지 않느냐? 나는 어리석은 놈이라 이 이상은 잘 말하지 못하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어냐면.... 너처럼 훌륭한 아이를 위해서라면 나같은 놈은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는 거야.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 그리고 지금 그 기회가 왔잖아. 그런데 니가 그렇게 말하면 지금 내가 뭐가 되니! 내가 뭐가 되냔 말이야! 너는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된다고!"



하면서 바실리쿠스 역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말레이카 역시 저런 놈은 누가 좀 때려줬으면 좋겠다고 악을 썼다.



그 때 문이 열리고 수어명의 음습한 그림자들이 들어와 바실리쿠스의 철창 앞을 에워쌌다. 바실리쿠스는 올 게 왔다 생각하며 일어나 분연히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철창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쿠미누스 사제였다. 사제는 바실리쿠스의 양 볼을 철썩 두드리며 뭐 그리 우느냐고, 이 놈아 너 이제 목숨 건졌다고 소리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바실리쿠스는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모두 아는 사람들이었다. 활짝 웃고 있는 아이와 늑대아이와 쿠미누스 사제, 인간으로 변신한 로드렉와 다른 쥐 인간 친구 두 명, 그리고 젊은 판사까지 온몸에 어두운 외투를 뒤집어 쓴 채로 이 지하까지 내려온 것이다.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로드렉이 의기양양하게 앞으로 나왔다.



"너는 그동안 내가 놀기만 한 줄 알았어? 나는 어디에든 친구들이 아주 많단 말이야. 그리고 얼마든지 새로운 친구들을 더 사귈 수도 있지. 이곳을 살펴보겠다고 떠난 그날부터 나와 내 친구들은 이 인외마경같은 수도원 안으로 천천히 침투해 들어갔어. 가지고 있는 돈과 술과 말재간을 백분 활용해서 지하 감방의 간수들과 친해졌고, 그들의 교대시간과 업무수준을 파악했다고. 그렇게 되면 갇힌 죄수 한둘 쯤 날라다가 도망치는 건 껌보다 쉬운 일 아니겠어? 아, 오랜만에 이빨 좀 깠더니 피곤하군, 정말. 이게 바로 '사람 셋이 모이면 없던 용도 나타난다'는 격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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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가을밤의 산송장들 (3) 24.08.21 5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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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가을밤의 산송장들 (1) 24.08.20 5 0 15쪽
76 네놈을 파괴할 거다 24.08.18 6 0 12쪽
75 흠모의 정이 피어올랐다 24.08.17 6 0 13쪽
74 오르베스쿠와 아르파니엘 24.08.17 5 0 12쪽
73 네놈들은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단 말이야 24.08.17 4 0 12쪽
72 요 째리는 눈매 좀 보게나 24.08.17 7 0 12쪽
71 못된 것들 (3) 24.08.16 5 0 11쪽
70 못된 것들 (2) 24.08.15 5 0 11쪽
69 못된 것들 (1) 24.08.15 5 0 11쪽
68 느므딘의 어쌔신 (3) 24.08.15 5 0 12쪽
67 느므딘의 어쌔신 (2) +2 24.08.14 7 0 14쪽
66 느므딘의 어쌔신 (1) 24.08.14 5 0 12쪽
65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3) 24.08.13 5 0 12쪽
64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2) 24.08.13 5 0 12쪽
63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1) 24.08.13 6 0 11쪽
62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24.08.12 6 0 11쪽
61 당신이 무서웠어요 24.08.12 5 0 12쪽
60 이게 다들 참 어떻게 된 일일까 24.08.11 4 0 11쪽
59 여기서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겠구나 24.08.11 4 0 13쪽
58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텐데 24.08.11 4 0 11쪽
» 누이야 내 말 좀 들어보렴 24.08.10 6 0 12쪽
56 저는 어리석고 소견없는 여인이라 24.08.10 7 0 11쪽
55 저는 악마숭배자입니다 24.08.10 6 0 12쪽
54 바실리쿠스가 고문을 받고 있어요 24.08.09 5 0 11쪽
53 콩가루 고문 (2) 24.08.09 4 0 12쪽
52 콩가루 고문 (1) 24.08.09 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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