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쿠스 비스콘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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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x
작품등록일 :
2024.07.26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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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0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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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리석고 소견없는 여인이라

DUMMY

그랬더니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는 건 혹시 바실리쿠스가 그날 있었던 치부를 감추려고 자기를 일부러 고자질했던 건 아닐까 하는 의혹이었다. 은근슬쩍 일부러 자기 몸을 만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돼지치기한테 확 붙들린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데, 역시 그 생각만 하면 참을 수가 없어서 하루에도 몇번이나 몸부림을 쳐대는 것이다.



'그 자식이 엮이면 일이 제대로 풀리는 법이 없고, 나는 항상 피곤하거나 불쾌해지기만 하는 거야. 이거야말로 하느님이 정해주신 뿌리깊은 악연이 아니고 뭐겠어? 그러고보니 그 녀석은 아무 피해도 입지 않았고 나만 이렇게 처박혀 있는건데 억울하고 분해서 어떡하지!'



하면서 남 눈치도 상관않고 배게나 벽돌 같은 것들을 주먹으로 쿵쿵 쳐대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이 날은 원장 에레디오스가 보낸 조사단이 온 날이었다. 그들은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바실리쿠스의 치부가 될 만한 것들을 물어보고 다니다가 수녀원 문간에 들어와서 라랑튀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이제 막 물러가려 하고 있었다. 그 말을 엿들은 발라리는 본인도 아는 게 몇 가지 있었으니, 한 두가지 계산해보다가 바실리쿠스 비스콘티 그놈에 대해 몇 가지 증언만 해주면 잠시라도 이 지옥같은 곳에서 나갈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빡 서고 말았다.



"내가 알아요!" 그리하여 미친사람처럼 문밖으로 소리를 질러댄 것이다. "내가 바실리쿠스의 치부를 알고 있다고요! 날 데려가요!"



그렇게 탈주수녀가 조사관들의 말을 타고 셀레미즈 수도원으로 들어가 오늘 이렇게 와서 증언할 수 있게 되었다. 며칠 포근하다가 다시 비가 오는 날이었다. 아침까지는 푸름이 화창한 듯 하더니 점심 즈음 눅눅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이내 빗방울이 솔잎 사이로 툭툭 떨어지면서 관솔길 아래 묻힌 버섯 씨앗들을 조근조근 두드리기 시작했다. 발라리가 도착했을 때 산은 빗소리에 젖어있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불어난 계곡이 콸콸거리는 소리가 경내에 울려퍼지는데 아예 운무가 산허리를 뒤덮어서 베어물린 듯 보였다. 이 때 바실리쿠스는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빗물이 지하실 개수구로 기어가는 모습을 무력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구멍을 타고 들어온 구렁이를 겨우 잡아서 날로 뜯어먹고 겨우 허기를 면하기도 하였다. 원장은 수녀를 만나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들었고, 법정에서도 지금과 같이 정직하게 증언할 것을 약속받은 다음 따뜻한 식사와 함께 포근한 침대에서 쉬도록 했다. 원장에 밀고자, 수녀까지, 여기까지만 해도 바실리쿠스의 비참한 몰락은 거의 확정이 난 듯 보였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전말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전혀 이해할 수도 없는 괴상망측한 일인데, 이 수도원에 막 도착한 참에는 '여기 바실리쿠스 그놈이 갇혀있단 말이지.' 하고 씩씩거리던 발라리 수녀였거늘, 고작 며칠 사이에 완전 딴 사람이 된 것이다. 예전같았으면 대놓고 성질을 부리지는 않아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끝마다 툭툭 던지듯 내뱉거나 비꼬는 버릇을 고치지 못해 몹시 따지고 들기 일쑤이니 왕따를 당하는 그녀였는데, 어쩐 일인지 이제 그 말씨는 곱고 차분했으며 며칠 전의 짐승같던 모습과는 다르게 상대방의 아픔의 공감하며 항상 명랑하고 기쁜 마음을 추구하는 호인이 되었다. 하루는 심부름을 들어주던 여자아이에게 동전 두 개를 쥐여주어서 주변 수사들의 칭찬을 받는 일까지 있었다. 아이가 신이 나서 친구들한테 자랑하자 애들이 때거지로 몰려와 달라고 악을 썼는데도 언짢은 기색 하나 없이 있는 지갑을 탈탈 털어서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줬다는 것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물론 이 수도원은 살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니 발라리를 아는 사람은 없다. 하여 누구도 이런 변화를 눈치챌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평소 교우가 좋지 않은 그녀인지라 '갑자기 착한 척 하긴! 저 애는 항상 밖에 나갈 궁리만 했었으니 바깥바람을 쐬었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이유는 없지. 잠시 기분전환이나 한 것 뿐이고, 돌아오면 분명 원래의 괴팍한 광년이 되어버릴 걸!' 이런 식으로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리라.



결국은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지금 모르는 사람들은 그 변화가 얼마나 은밀하게 이루어졌는지 평생 모른다. 사실 발라리가 이렇게 마음씨를 고쳐먹은 계기는 정말 예상치 못햇던 누군가와의 '만남' 때문이었는데, 이 얘기는 나중 기회가 날 때 천천히 풀어보기로 하겠다.



다시 돌아와서, 처음에는 바실리쿠스의 인생을 파괴할 수 있겠다며 고소해하던 그녀였지만 막상 저렇게 가여히 우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고 말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그 사람이 바실리쿠스였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요. 밤중이라 너무 어두웠거든요."


"무어라!"



이번에는 에레디오스가 소리쳤다. 그 말에 발라리가 화들짝 놀라고 다른 사람들로 깜짝 놀랐다. 이전까지 에레디오스는 온 예우를 다하여 외부에서 찾아온 수녀를 극진히 대했으나 중요한 순간에 돌아서버리는, 배신과도 같은 행위에 벌떡 화가 나버린 것이다.



"그 따위 증언번복은 용서하지 않을거야! 사실대로 말해, 사실을! 며칠 전 나한테 했던 그 말 그대로 진술하란 말이야! 왜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말을 돌리는 것이지? 여인이여, 그대는 아직 속세의 버릇을 벗어내지 못했다네. 거짓말을 하고 있어! 여러분, 항상 이런 것입니다. 제가 맞춰보지요. 저는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입장을 바꾸어버리는 여인들의 어리석음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발라리 수녀는 바실리쿠스의 눈물을 보고는, 아담과 하와 시절부터 우리같은 죄인들이 담습해온 육체의 습관을 체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질적인 모성애가 바로 그것이지요. 역사적으로 보아도 삿된 모성심으로 큰일을 그르친 여인들의 이름을 나는 몇번이고 열거할 수 있습니다. 지금 수녀는 정신이 혼란한 나머지 본인을 더듬고 범하려 한 남자까지도 못 알아보고는 그대로 용서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나는 이유, 사람의 마음을 시도때도 없이 조종하는 악마와 악한 주술의 역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인간의 시도때도 없는 어리석음이야말로, 우리가 악마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는 물증이지요."



그 말을 들으니 발라리는 뭐가 욱 하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원장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저는 소견없고 어리석은 여인이라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저께 원장님께 진술했던 것들도,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다 기억나지는 않아요. 저는 소견머리 없는 여인이니까요."



가늘롱은 앉은 채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그때부터 발라리는 바보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후 원장은 그녀에게서 제대로 된 증언을 듣지 못하고 어물쩡거리거나 잘 모르겠다는 말만 한 백번은 들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중간에 들어와 피고가 발라리인 줄 착각했을 정도로, 바실리쿠스는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마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원장의 살찐 대머리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소근거렸다. '원장이 너무나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뭔가 일을 저지르는 건 아닐까?' 물론 수사들은 아까부터 악마얘기가 나올 때마다 공포에 물든 얼굴로 "주여, 주여! 우리를 구하시옵소서." 하고 중얼거렸지만 말이다.



원장이 이에 대해 프레뎅 남작에게 의견을 물었지만 남작은 대답하지 못하고 발라리의 얼굴만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아까부터 저 여자애가 자꾸 낮이 익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만나보았던 모든 여자들의 얼굴을 조목조목 짚어보면서 마침내 인근 영지의 귀족 자제들까지 그 수사영역이 미치고 있을 때 옆에 앉아있던 가늘롱이 못 참고 입을 열었다.



"성모님에게도 모성심이 있습니다. 성모님은 깊은 모성으로 지금 천당에서 저희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를 중재해주십니다."


"지금 뭐라 했소, '어린' 프레뎅? 성모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불완전한 육신에 갇힌 어미의 본능을 같은 선상에 둘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원장이 차갑게 대꾸하자 그제야 남작이 정신을 차리고 호통을 쳤다.



"내 즉시 이놈의 사지를 몽창내겠다. 누가 네놈한테 그런 걸 물어보았단 말이냐? 어디서 배워먹은 말버릇인지 공연히 좁은 식견을 열어서 애비한테 망신만 주는구나! 너 같은 놈이 애미애비 죽일 놈이야!"



하면서 가늘롱의 귀를 부여잡고 올려붙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픈 귀를 잡은 채 밖으로 끌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지 말아요!" 발라리가 눈에 눈물이 맺히면서 소리치는 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아프게 했다.



원장은 이 이상의 법정모독을 허락할 수 없었다. 본인한테도 휴식이 필요했다. 요 며칠간 잠과 끼니를 거르고 가끔 등목까지 했더니 늙은 몸에 무리가 간 것 같았다. 점심을 먹는 동안 잠시 법정을 파하기로 하고 걸어가면서 발라리와 바실리쿠스를 차례대로 쏘아본 다음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문은 아까부터 열려있었고, 슬금슬금 구경하러 나온 수사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그 너머로 잠시 물러났던 안개운무가 갑자기 돌아와서 사람들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에 휩싸이고 모든 것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무소불위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더듬어가며 이름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원장이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못 보고 비켜서지 않는 놈들이 있어 밀치면서 식당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식사에는 프레뎅 남작도 초대받지 못하고 완전히 불청객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쿠미누스는 됐다, 그래도 시간은 벌었어, 하며 바실리쿠스를 쏘아보았다. 허나 절망에 휩싸인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심장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바실리쿠스야, 너 왜 그랬니. 왜 그런 거짓말을 했어?" 건물 안으로 구름과 습기가 몰려들고 있어 불목하니들이 들어와 불을 땠다. 바실리쿠스는 대답하지 않고 앉아있기만 하니 답답하기 그지없어 쿠미누스는 본인의 단련된 주먹으로, 본인의 단련된 가슴판을 펑펑 소리나게 때렸다.



잠시 후 위병들이 걸어와 이제부터 다시 바실리쿠스를 구금해야 하니 따라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쿠미누스도 면회인 자격으로 함께 갈 수 있었다. 안개가 마치 방해하는 악마처럼 달려와 시도때도 없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래도 걷는 내내 어디 하나 발 빠지지 않고 쉴새없이 바실리쿠스를 설득하고 종용해보았지만, 돼지치기는 대답없이 걷기만 할 뿐이었다. 발라리가 그 이상한 증언(산속에서 사람들이 짐승 소리를 내며 목욕을 하고 있었다는)을 한 이후 사람이 반쯤 얼 나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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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네놈들은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단 말이야 24.08.17 3 0 12쪽
72 요 째리는 눈매 좀 보게나 24.08.17 7 0 12쪽
71 못된 것들 (3) 24.08.16 4 0 11쪽
70 못된 것들 (2) 24.08.15 5 0 11쪽
69 못된 것들 (1) 24.08.15 5 0 11쪽
68 느므딘의 어쌔신 (3) 24.08.15 5 0 12쪽
67 느므딘의 어쌔신 (2) +2 24.08.14 7 0 14쪽
66 느므딘의 어쌔신 (1) 24.08.14 5 0 12쪽
65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3) 24.08.13 5 0 12쪽
64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2) 24.08.13 5 0 12쪽
63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1) 24.08.13 6 0 11쪽
62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24.08.12 6 0 11쪽
61 당신이 무서웠어요 24.08.12 5 0 12쪽
60 이게 다들 참 어떻게 된 일일까 24.08.11 4 0 11쪽
59 여기서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겠구나 24.08.11 4 0 13쪽
58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텐데 24.08.11 4 0 11쪽
57 누이야 내 말 좀 들어보렴 24.08.10 5 0 12쪽
» 저는 어리석고 소견없는 여인이라 24.08.10 6 0 11쪽
55 저는 악마숭배자입니다 24.08.10 5 0 12쪽
54 바실리쿠스가 고문을 받고 있어요 24.08.09 5 0 11쪽
53 콩가루 고문 (2) 24.08.09 4 0 12쪽
52 콩가루 고문 (1) 24.08.09 4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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