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쿠스 비스콘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김수환x
작품등록일 :
2024.07.26 05:20
최근연재일 :
2024.08.22 20:35
연재수 :
81 회
조회수 :
613
추천수 :
26
글자수 :
426,357

작성
24.08.11 08:41
조회
4
추천
0
글자
11쪽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텐데

DUMMY

"니가 잘해주었구나!"



바실리쿠스가 얼싸안고 소리쳤다.



"정말 잘해주었어! 내가 친구 하나는 잘 뒀다니까, 정말, 로드렉, 오, 친구야, 친구야! 너에게 정말 감동했단다. 다른 녀석들이 너에 대해 하는 말들은 모두 가치없는 쓰레기야! 이런 최후의 순간에 니가 도움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단 말이야. 그것이 나에게 예상치 못한 감동을 주는구나."


"지금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요." 밖을 살피던 오리넨(젊은 판사)이 말했다. "언제 놈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자리부터 벗어납시다. 잡담은 그때 해도 늦지 않소."



바실리쿠스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옆옆방에 있는 돼지를 함께 데려가야겠다고 생때를 쓰기 시작했다. 오리넨과 쿠미누스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로드렉이 옆옆방 열쇠까지 챙겨와서 함께 계단을 올라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원내에 물드는 석양을 배경으로 그들은 너른 공터를 걸어갔다. 반경 15m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고 단지 어두운 옷을 입은 채 서로의 그림자 속을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고 있었다. 뒤에서 바실리쿠스가 판사를 따라잡고 어깨를 두드렸다.



"고맙긴 한데 왜 갑자기 나를 돕습니까? 우리가 언제 만난 적이 있었나요?"



오리넨은 무릎에 손을 짚고 숨을 고르다가 사람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냉소를 지었다.



"그건 아니다. 다만 나는 원장이 싫거든. 뭐만 하면 악마악마 하면서 책 쓰는 데까지 와가지고는 지랄을 해댄다고. 그 자식 말대로면 이 세상에 지 빼고 다 악마가 되는 건데, 그게 말이냐? 그런 자식이 멋대로 사람을 죽인다 살린다 하고 앉았는데 지 마음대로 하게 둘 순 없지."


"아, 저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었군요!"


"학생 시절에도 그 방면으로 유명했지." 쿠미누스가 말을 받았다.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악마가 있다면서 허공에다 주먹질을 해대곤 했어. 우린 그걸 놀림감으로 삼았지. 주먹질의 대상이 우리한테 옮겨오고 나서는 그러지 못했지만. 그 시절의 에레디오스는 혼자서 장정 둘은 때려눕히는 장신이었단다. 어느날은 길거리를 걸어가던 사람을 보고 갑자기 몽둥이로 잡으려 들더구나. 매춘굴에서 막 나오던 중년의 사내인데 그 가랑이 사이에 악마가 달라붙은 게 분명하다는 이유였지. 그런데 그 사람은 우리한테도 조금식 원한을 사던 사람이라 술에도 취했겠다 다들 이때다 싶어서 단체로 때려눕히고 속옷바람으로 만들어버렸지. 더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냥 사람을 잘못 본 거였더라구. 아아, 그 시절엔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어. 하느님, 이 어리석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제는 "옛날이여... 옛날이여!" 라고 중얼거리며 공기의 허공 속으로 떠오르는 추억의 잔상들을 깊게 차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꽤 먼 거리를 뛰어왔지만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오리넨이 가슴에 성호를 그리면서 화답했다. 반대로 바실리쿠스만 죽을상이었다.



"사람들 소리가 나요." 늑대아이가 중얼거렸다. "다들 분주하게 뛰어다니는구만.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거겠지. 듣자하니 쉬레 백작부인께서 오신다 하더구나. 원장의 제수라던데."


"제수가 뭐지?"


"형님의 아내를 말하는 거야."



아이가 또 중얼거리니 사제가 대답했다. 아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보다가 깊게 하품을 했다.



"...식당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닌데."



잠시 후 바실리쿠스가 지적했다. 그 말을 듣고 다들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의 비명과 고함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이내 다들 흥미를 잃고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젊은 판사만이 그 자리에 멈춰서서 손날로 눈을 가리고 석양이 비쳐드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긴 남쪽이잖아. 서쪽은 저기인데."



그러면서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은 해가 저문 지 한참 되어서 지나간 날들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왜 저기서 해가 지고 있는 거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옆에서는 바실리쿠스가 아까 했던 말을 또 한 번 묻고 있었다.



"어떻게 그 경비들을 뚫고 올 수 있었어?"



로드렉이 대답했다.



"간단하지. 기고만장하는 고위 수사들은 평소 경비나 불목하니들처럼 잡무하는 사람들한테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아. 그러면서도 오늘과 같이 큰 일이 나면 본인들이 위세를 세우려고 평소 안 하던 자잘한 일들까지 도맡아 버리거든. 보통 후임에게 짬 때리고 끝내던 일들을 오늘은 못 믿겠으니 내가 하겠다고 나서는 거야. 일은 본인들이 하는데 정작 실무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는 상황이 되는 거지. 그 틈만 잘 파악하면 얼마든지 침투할 기회를 찾을 수 있어. 경비들이 입는 옷을 입고 투구나 두건으로 적당히 얼굴을 가린 채로 근무교대하러 왔다 했더니 꾸벅꾸벅 졸면서 그냥 가라고 손짓하더라고. 남은 건 열쇠를 슬쩍하고 사람들이 입을 어두운 옷을 찾아주는 일이지."


"그런데 내가 올라오면서 보니까 계단이나 건물 입구를 지키는 사람도 없던데?"



로드렉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았구나. 나 역시 그 부분은 뒤늦게 알았지. 하마터면 중간에 계획이 빠그라질 뻔했지 뭐야. 아무리 나라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속이거나 매수하는 건 무리란 말이야. 어쩔 수가 없었어."


"하지만 네가 또 꾀를 내가지고 사람들의 시선을 돌렸구나?"


"정답이야."



로드렉이 주머니를 주섬주섬거리더니 새하얀 돌맹이 두 개를 꺼내들었다. 부싯돌이었다.



"지금 수도원에 불을 지르고 오는 길이거든. 이 틈에 빠져나가자구."


"....!!!"


"이 미친새끼야!"



오리넨이 달려와 로드렉의 멱살을 잡아쥐었다. 그들이 황혼의 햇빛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방화의 불빛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비명지르고 "불이야, 불이야." 외치는 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크큭, 지금 잡아야 하는 건 내 멱살이 아니라 물이 든 양동이일 텐데."



로드렉을 팽개치고 오리넨도 불을 끄는 사람들 무리에 합류하러 달려나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출구를 향해 뛰어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문제가 생겼다. 로드렉이 불을 지른 건물은 출구에 가까운 구역이었다. 사람들이 계곡으로 달려가 물을 길어오려고 지금 출구를 바쁘게 왔다리갔다리 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바실리쿠스와 일행들은 뛰어다니는 수사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수도원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얼마간 내려와서 그들은 눈물의 작별인사를 나누어야 했다. 죄인 상태에서 도망친 바실리쿠스는 이 순간 이후 평생 도망자 신세를 면할 수 없다. 사태가 진정되자마자 바실리쿠스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고 이 천인공노할 사실을 주교에게 보고할 텐데, 그러면 바실리쿠스는 앞으로 평생 이 가마욱스 땅에서 파문자가 되고 평생 따라오는 낙인을 찍힌 채 살아가야 하리라는 쿠미누스의 다급한 설명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이쯤에서 헤어집시다. 언젠가 행복한 상태에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하느님께 기도해요!"



그러던 차에 늑대아이의 예리한 촉이 작용했다. 돌연 언덕길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다짜고짜 사람들을 밀치면서 외딴 수풀 속에 숨게 했다. 소란스러운 위쪽과 달리 이 아래는 누가 몰래 살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침착했다. 이윽고 풀잎이 일어나는 소리와 함께 처음에는 한두명이 보이다가 이내 십수명 되는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나무와 언덕 틈바구니, 고사리와 딸기가 자란 관솔숲 사이에서 하나둘 일어나더니 천천하고 조용하게 수도원 담장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바실리쿠스는 한 놈이 일어나면서 근처에 핀 딸기를 몇 개 따 먹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중에 세 명은 말을 타고 있었다.



"저놈들은 뭐지?"


"호반트의 동쪽 것들이다. 저 갑옷의 형태를 본 적이 있어." 바실리쿠스의 말에 쿠미누스가 대답했다. "얼마 전에 가레랑 영주님이 격파했다던 그놈들의 잔당이 분명해! 나머지는 아마 이곳 산을 떠도는 산적들일거야. 저 녹슨 검과 헐렁한 옷이며...."



늑대 아이와 말레이카가 동시에 "조용히!" 하고 속삭였다. 쿠미누스는 여자 두 명분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굳이 의문삼지는 않았다. 로드렉은 거의 땅바닥에 붙어서 온몸을 가리고 벌써부터 호들호들 떨고 있었다.



바로 옆을 지나치면서 선명한 꼬르륵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은밀하게 칼집을 벗어난, 쇠로 벼려낸 저 개같은 것들 역시 못지않게 굶주렸을 것이다. 놈들은 칼날을 몸통에 세로로 붙여서 불빛에 반사되지 않게 가리고 올라갔다. 벗어난 칼끝이 어쩌다 풀을 건드리면 나뭇잎 같은 것들이 삭 하고 떨어졌다. 창도 몇 자루 보였다. 궁수도 있었다. 벌써부터 활에 시위를 매기고 있었다.



쿠미누스의 말대로 이것들은 얼마 전 호반트에서 건너온 부랑자 약탈꾼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근본을 자세히 아는 사람들은 이 지방에도 몇 없었다. 원래 이름난 용병단이었으나 지난 전투에서 패배하고 몰락한 이후 추격자들의 괴롭힘을 받으면서 뿔뿔이 흩어졌다가 이 국경 근처에서 몇몇 무리가 기적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들은 국경의 산림과 언덕지대에 숨어서 굶주리며 며칠간 회의를 한 끝에 차라리 국경을 넘어가 그곳의 영주들에게 몸을 의탁하자는 결론이 나서 그렇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영주보다 그들을 먼저 발견한 것이 산적두목인 로루아르 아셍이었다. 워낙 이름난 산적이라 다른 나라에서 온 용병들 역시 어물어물 들리는 소문을 기억해내고 자연히 경계하기 시작했다.



본래 나름 위세가 있었던 귀족가문의 사남 로루아르는 기라성 같은 선배 기사들 사이에서 버티지 못해 떨어져나갔다가 못된 산적 생활이 본인에게 더 맞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아예 눌러붙은 케이스다. 세상에는 로루아르처럼 타락한 기사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지만, 그런 놈들보다 로루아르가 더 유명세를 얻을 수 있었던 건 그 타고난 교활함과 행동력보다도 늘씬한 몸매와 곱상한 외모 때문이다. 로루아르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커져나갔다. 지금까지 그와 붙었던 상대중 물론 그보다도 강하고 교모하고 훌륭한 솜씨를 가진 기사들이 많았으나, 로루아르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이렇게 예쁘장하게 생긴 놈이 정말 악당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에 팔려서 모두 패배하고 말았다. 본인도 그걸 알고는 열심히 외모를 가꾸기 시작했다.



몇 달전, 일대 대영주들의 분노를 사고 아르스랑 산맥에서 올티야 언덕 끝까지 몰려 대대적으로 토벌당한 뒤 이곳 국경까지 도망쳐와 숨죽이며 살던 로루아르가, 패배에 낙담했다고 해서 그 타고난 천성을 버릴 수는 없었으리라. 언제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며, 그러던 차에 국경을 넘어온 외국의 용병잔당들을 발견한 로루아르가 가장 먼저 행한 건 웃으며 투구를 벗어보이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몇날며칠에 걸쳐서 천천히 뱀처럼 본인들의 불가 속으로 그들을 끌어들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바실리쿠스 비스콘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1 여우들 (2) 24.08.22 2 0 13쪽
80 여우들 (1) 24.08.22 5 0 12쪽
79 가을밤의 산송장들 (3) 24.08.21 5 0 13쪽
78 가을밤의 산송장들 (2) 24.08.21 5 0 12쪽
77 가을밤의 산송장들 (1) 24.08.20 5 0 15쪽
76 네놈을 파괴할 거다 24.08.18 6 0 12쪽
75 흠모의 정이 피어올랐다 24.08.17 6 0 13쪽
74 오르베스쿠와 아르파니엘 24.08.17 5 0 12쪽
73 네놈들은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단 말이야 24.08.17 4 0 12쪽
72 요 째리는 눈매 좀 보게나 24.08.17 7 0 12쪽
71 못된 것들 (3) 24.08.16 5 0 11쪽
70 못된 것들 (2) 24.08.15 5 0 11쪽
69 못된 것들 (1) 24.08.15 5 0 11쪽
68 느므딘의 어쌔신 (3) 24.08.15 5 0 12쪽
67 느므딘의 어쌔신 (2) +2 24.08.14 7 0 14쪽
66 느므딘의 어쌔신 (1) 24.08.14 5 0 12쪽
65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3) 24.08.13 5 0 12쪽
64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2) 24.08.13 5 0 12쪽
63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1) 24.08.13 6 0 11쪽
62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24.08.12 6 0 11쪽
61 당신이 무서웠어요 24.08.12 5 0 12쪽
60 이게 다들 참 어떻게 된 일일까 24.08.11 4 0 11쪽
59 여기서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겠구나 24.08.11 4 0 13쪽
»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텐데 24.08.11 5 0 11쪽
57 누이야 내 말 좀 들어보렴 24.08.10 6 0 12쪽
56 저는 어리석고 소견없는 여인이라 24.08.10 7 0 11쪽
55 저는 악마숭배자입니다 24.08.10 6 0 12쪽
54 바실리쿠스가 고문을 받고 있어요 24.08.09 6 0 11쪽
53 콩가루 고문 (2) 24.08.09 4 0 12쪽
52 콩가루 고문 (1) 24.08.09 4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