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쿠스 비스콘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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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x
작품등록일 :
2024.07.26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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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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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9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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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가루 고문 (2)

DUMMY

"네 앞에 놓인 그것이 뭔지 알겠느냐?"


"이거 콩가루 아닙니까?"


"그것도 날콩가루다." 원장이 뒷짐지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수도원의 특식이란다. 이 콩은 성질이 순하고 튼튼하니 사람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영혼을 정화하여 몸속에 든 악한 것들을 모조리 쏟게 한단다. 듣자 하니 이 콩을 먹는 사람들은 진실된 말을 하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하게 된다고 하더구나."



바실리쿠스는 그 말에 뼈가 있는 것을 알고 속으로 곱씹어보았다.



"저를 고문하는 겁니까?"


"고문이라니!" 원장이 눈을 크게 떴다. "자네들도 들었지? 그건 우리를 모욕하는 말이라네, 바실리쿠스! 고문이라니? 우리는 단지 자네에게 점심으로 콩을 주었을 뿐이야. 자네 반찬투정을 하나? 도대체 우리가 지금 어떤 방식으로 자네를 고문하고 있는지 어디 설명해보지 그래!"



그러면서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고문을 받고 사흘 이상 버틴 사람은 없었어. 너는 며칠이나 갈 수 있을까? 머지않아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걸하게 될 것이야! 지금 보니까 돼지치기 주제에 성씨까지 달고 있고 건방지기 짝이 없어!'



바실리쿠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원장의 말은 화려한 꽃뱀의 독과 같아서 얼굴은 웃고 있었고, 인내와 자비로 가득한 목소리를 내고 있으나 사실 속으로는 "맞다. 이것이 우리의 고문이야!" 라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이 고문에 당한 사람들은 삼시세끼 물과 날콩가루만 먹어야 하는데 배고픔에 못 이겨 한 줌이라도 쥐어먹었다간 되려 구토를 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못 먹을 것을 주는 게 아니고 사람을 때리거나 달군 쇠로 지지거나 하지도 않으니 직접 손을 더럽히지 않고 기록에도 작성되지 않는 요긴한 술수다.



원장은 옆방으로 들어가 문을 열게 하더니 말레이카를 손수 끌어 한 칸 더 옆으로 옮겨놓았다.



"이놈은 돼지를 부리는 술사이니 가까운 곳에 둘 수는 없어. 혹여나 돼지가 밥을 물어다 주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그날 이후 원장은 지하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에 눈이 무섭게 생긴 놈과 기이하게 생긴 사내가 매 끼니마다 나타나서 콩가루가 수북히 담긴 나무그릇을 놓아주고 가는 것이다.



원장은 집무실에 돌아온 뒤에 편지를 쓰다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지난 수십년의 세월, 악마는 갖가지 유혹으로 그를 지독하리만치 괴롭혀왔다. 그러는 동안 나이는 나이대로 먹어 피부는 창백해지고 머리는 벗겨지는 데다 관절은 삐걱거리기만 하여 생로의 계절이 오고 이에 관해 찾아오는 우울은 출세의 즐거움으로도 달래지 못했다. 이제 그 긴 싸움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견습이 원장의 안색을 살피더니 요염하게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원장님 기분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응, 응, 그렇지. 오랜 골칫거리가 해결되었거든."



잠시 후에 견습이 물었다.



"원장님께서 제 골칫거리도 해결해주실 수 있을까요?"



한껏 들뜬 채로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말하자면 이제 짬밤도 먹을만큼 먹었으니 온통 사내로 득시글거리는 폐쇄된 환경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은 그 경과과 원인까지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훤히 꿰고 있었던 탓이다.



곱상하게 생긴 게 귀끝이 뾰족하고 깨끗한 볼가에는 6월의 민들레처럼 솜털이 피어서 창곁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훈들거리고 있었다. 눈섭은 짙지만 얇고 순종적인 척을 해도 째려보는 눈가의 태생은 감출 수 없었으며 입술은 독서와 노동으로 변색되었지만 원래는 제법 붉은 티가 났다. 키는 중키로 말랐지만 단단하고 제법 핏줄에 근육이 잡혔는데 척 보아도 남색하는 이들의 표적이 되는 걸 눈치채고 원장이 진지하게 일어나 자리를 잡고 앉게 했다.



견습은 한참이나 원장의 엄숙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매일 자신에게 못된 행동을 시도하는 선배의 이름을 불었다. 원장은 격노해서 그 즉시 범인을 감방에 쳐넣으라고 명령하자 한번에 우르르 몰려가 두들겨 팬 다음에 철창 구석으로 내던져버렸다. 감방에 갇힌 사람은 에시모스라고 하는 젊은이인데 제법 잘생겼지만 왼쪽 손가락이 세 개나 잘려있었다. 그 잘린 손으로 철창을 붙들면서 "이건 배신이다! 음모야!" 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리고 연신 기침을 해댔다. 한참 그러다가 아예 실성을 했는지 갑자기 깔깔 웃으면서 이상한 말들을 중얼거리고 말을 걸어도 듣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실리쿠스도 자연히 그에게서 관심을 끊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이 몰려와 그를 어딘가로 끌고 갔고, 다시는 그 사람을 보지 못했다.



'저게 바로 이곳에 갇힌 사람들의 말로야.' 바실리쿠스는 우울하게 생각했다. '왜 사제님은 나를 구해주러 오지 않는 거지?'



그는 지금 본인이 처한 상황도 만만찮으니 남에게는 신경 쓸 여유가 도무지 없었다. 눈앞에는 콩가루가 담긴 나무그릇, 원장의 노골적인 고문이 놓여있었다. 처음에는 버텨보려고 했었지만 배고픔은 어쩔 수 없었기에 눈 감고 한 입을 먹어보았는데 금세 헛구역질이 올라와서 옆으로 토사물을 쏟고 말았다. 원장의 술수에 걸려든 것이다. 그리고 그걸 뻔히 보았는데도 놈들은 치워주지 않고 바실리쿠스를 토사물과 한 방에 방치해두었다.



'한번 해보라지. 먹물쟁이 중놈들이 이런 걸로 사람을 고문해먹을라고?'



그러나 시간이 갈 수록 배고픔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있었다. 바실리쿠스는 눈을 꾹 감고 다시 나무그릇에 손을 뻗었다. '꾹 참고 집어삼키면 굶은 배는 채울 수 있을거야.' 라고 생각하며 한 줌을 쥐어먹었는데 또 헛구역질을 했다. 잠시 후 다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직 나온 눈물도 다 닦지 않고 '코를 막고 먹으면 참을 수 있을 거야.' 하며 쥐어먹고 또 구역질을 했다. 입에서 침과 콧물이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그렇게 이틀도 안 되어 부근에는 들쥐와 파리 모기가 들끓었고 바실리쿠스는 시름시름 앓고 말았다. 기침이 나오는 데다 머리는 열이 오르고 인사불성이 되어서 자기가 중얼거리는 말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며칠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어. 살고 싶으면 먹어야 해. 지금 며칠이 지났더라?' 라고 생각하며 한 번 더 손을 뻗었다가 이번에는 정말 구토를 해버렸다. 바실리쿠스는 바닥에 쓰러져 질질 짰다.



"하느님 설마 이런 곳에서 저를 죽이시진 않겠지요."



잠시 후 옆옆방에서 말레이카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바보같이 토하면서 자꾸 집어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 행동이 오히려 명을 재촉한다는 걸 왜 몰라요?"



그 소리에 바실리쿠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수치스러워 당장이라도 이 방에서 나가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마침 문이 열리고 또다시 콩가루가 든 그릇을 가져다주러 고문관들이 들어와서 겨우 몸을 일으켜 철창을 부여잡았다.



"다 말하겠습니다, 선생님들. 다 말하겠어요."


"무엇을 말하겠다는 거지?"


"전부 다 말할게요!"



바실리쿠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는 말에 평온한 얼굴의 남자가 대꾸했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설명을 해야 들을지 말지 판단할 것 아닌가."



일단 살아나보자고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었으니 대답할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비위에 거슬리지 않으려고 말을 고르는데 갑자기 자존심이 상해서 소리쳤다.



"이런 젠장! 내가 당신네들한테 할말은 무슨 할말이 있겠다고 그렇게 멍청히 서 있는 거예요?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나가요. 고작 이런 냄새나는 콩가루 따위로 내게 고통을 주려고? 어림도 없지, 이게 내가 하고싶었던 말이라구요!"


"건방진 놈."



얼굴이 얽은 사내가 혀를 차며 대꾸하면서 나갔다. 뒤이어 다른 사내도 문을 닫고 나가려는데 우뚝 멈춰서서 하얗고 얇은 팔로 문간을 잡았다.



"우리가 꼴도 보기 싫다고 하니 자네 소원대로 내일 저녁까지 이곳에 오지 않겠네. 이곳은 꽤나 차갑고 쓸쓸하지. 혼자 더러운 방안에서 잘 생각해보라구. 그러면 자네도 내일쯤은 차라리 제발 와주었으면 하고 생각을 바꾸게 될 거야."



문이 닫히자 감방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한편 바실리쿠스가 감방에 갇혀 고통을 받는 사이 영지는 오래 떠났던 가레랑이 돌아와서 한바탕 떠들썩할 뻔했다. 뮈쉬나 근방을 샅샅이 뒤져 동쪽의 호만트 침입자들을 두 다스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으나, 얼굴이 죽상이라 아무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하필이면 가레랑이 목욕도 식사도 건너뛰고 본인 없는 동안 처리했던 문건들을 점검해야 하니 전부 가져오라고 말을 꺼내서 마리가 대답했다.



"별 건 없었고 갈라르롱 백작이 도로를 수리하는 데 필요한 분담금을 내라고 하길레 금고에서 꺼내줬고요, 아랫마을 이장이 쟁기 끄는 소를 빌려야 한다고 해서 두 마리 빌려주었어요."


"쓸데없이 왜 두 마리나 빌려줬어."



그렇게 대꾸하고 책상에 놓인 장부를 읽는 데 집중했다. 부부는 약속한 듯이 테레사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가레랑은 본인이 없는 동안 영지를 잘 보살펴주었다며 아내를 칭찬했고, 마리는 웃으며 대답하는 김에 한 가지를 물어보았다.



"돼지치기에 대한 일은 묻지 않으시나요?"


"그건 왜?"


"제가 모르는 사이에 그 바실리쿠스라는 돼지치기가 수도원에 끌려갔다고 하는데, 저는 그 이야기를 오늘 아침에 들었지 뭐예요. 놀라운 건 그 자들이 하나같이 영주님의 허락을 받았노라 이렇게 대답하는 거예요. 당신이 그 호반트 침입자들을 상대하느라 나가있었다는 걸 몰라서 한 말이겠죠?"


"난 허락한 적 없어." 가레랑이 대꾸했다. "하지만 법 관련해서는 개랙프리드 (38화에 나온 가레랑의 동생으로 유명한 망나니. 지금 그는 도시의 여관에서 평소 주색잡기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놀음을 벌이고 있다) 한테 위임했으니까 걔가 알아서 처리했을 거야."



전에 말했듯이 마리는 예절없는 개랙프리드를 죽을만큼 혐오했다. 진짜로 그렇게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어버렸으면 하고 빌었던 게 한두번이 아니다. 그런데도 바퀴벌레처럼 아득바득 살아오는데 멀리 떨어지지도 않고 모기새끼마냥 주변에 신경 거슬리게 하고 틈만나면 여관방에 엉덩이나 건드리고 다니니 어찌 이런 개잡놈을 좋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가레랑이 바로 옆에서 고분고분 모셔살면서 한 마디 말대꾸없이 정결을 지킨 아내가 아니라 그런 개랙프리드한테 권한을 줬다는 건 속에 천불나는 모욕이다.



'내가 그런 놈보다도 못하다는 거야? 내가 여자라서 못 믿겠다는 거야? 그것도 아니라면 애정보다 혈연이 우선이라는 말이야? 두고봐 내가 언젠가 그놈 콧둥이를 꼼짝 못하게 확 눌러버릴 참이니까!'



"왜요?" 마리가 남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왜 하필 내가 아니라 개랙프리드에요? 난 지금 그 이야기를 꼭 들어야겠네."



그런데 또 가레랑에게 개랙프리드는 아픈손가락이라 그에 관한 이야기는 예민해질 수 밖에 없었다. 또 지금 여러가지 일로 신경이 날카로워서 이참에 그간 못 했던 말들까지 모두 한번에 내뱉었다.



"아 그만 해라 좀!" 가레랑이 벌떡 소리를 내질렀다. "왜 당신은 그 애 얘기만 나오면 갈구면서 날 못 살게 구는 건데? 그냥 내버려 두라고 말했잖아! 당신이 집안에서 남자역할 하고 싶다고 나서는 건 내가 뭐라 안해. 그런데 왜 남의 일까지 그렇게 참견을 못 해서 안달이냐고."



그 말을 시작으로 부부가 또 얼마나 죽도록 싸워가면서 주변가전들을 부숴먹었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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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가을밤의 산송장들 (3) 24.08.21 5 0 13쪽
78 가을밤의 산송장들 (2) 24.08.21 5 0 12쪽
77 가을밤의 산송장들 (1) 24.08.20 5 0 15쪽
76 네놈을 파괴할 거다 24.08.18 6 0 12쪽
75 흠모의 정이 피어올랐다 24.08.17 6 0 13쪽
74 오르베스쿠와 아르파니엘 24.08.17 6 0 12쪽
73 네놈들은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단 말이야 24.08.17 4 0 12쪽
72 요 째리는 눈매 좀 보게나 24.08.17 7 0 12쪽
71 못된 것들 (3) 24.08.16 5 0 11쪽
70 못된 것들 (2) 24.08.15 6 0 11쪽
69 못된 것들 (1) 24.08.15 6 0 11쪽
68 느므딘의 어쌔신 (3) 24.08.15 6 0 12쪽
67 느므딘의 어쌔신 (2) +2 24.08.14 7 0 14쪽
66 느므딘의 어쌔신 (1) 24.08.14 5 0 12쪽
65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3) 24.08.13 5 0 12쪽
64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2) 24.08.13 5 0 12쪽
63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1) 24.08.13 7 0 11쪽
62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24.08.12 6 0 11쪽
61 당신이 무서웠어요 24.08.12 6 0 12쪽
60 이게 다들 참 어떻게 된 일일까 24.08.11 5 0 11쪽
59 여기서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겠구나 24.08.11 5 0 13쪽
58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텐데 24.08.11 5 0 11쪽
57 누이야 내 말 좀 들어보렴 24.08.10 6 0 12쪽
56 저는 어리석고 소견없는 여인이라 24.08.10 7 0 11쪽
55 저는 악마숭배자입니다 24.08.10 6 0 12쪽
54 바실리쿠스가 고문을 받고 있어요 24.08.09 6 0 11쪽
» 콩가루 고문 (2) 24.08.09 5 0 12쪽
52 콩가루 고문 (1) 24.08.09 5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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