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쿠스 비스콘티,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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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x
작품등록일 :
2024.07.26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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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2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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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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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DUMMY

방안에 침묵이 끼어들었다.



"괜찮다면 제가 무서워했던 그 이유를 설명하고 싶어요."


"...제가 왜 무서워요?"


"생각해보세요. 에레디오스. 한 번 생각해보라구요."


"지금도 제가 무섭습니까?"


"들어보세요."



헨나프리데의 책망하는 소리가 그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우리가 아르카상에서 함께 자라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봐요. 당신은 날마다 성벽을 타고 올라왔어요. 그리고 이 손을 잡고 나를 오프레드가 있는 곳으로 끌고 갔어요."



그녀가 말했다.



"말 그대로, 이 손을 잡고 마음대로 끌고 갔잖아요."


"제가요?"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저는 당신을 형님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을 뿐입니다."


"그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 있는 건 다른 얘깁니다. 전혀 다른 얘기죠."


"저는 아가씨를 그런 식으로 다루는... 그런 생각따윈 전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 점을 확실히 했다.



"제가 그랬다고요?"



정말 그랬을까? 에레디오스는 기억을 곰곰히 되짚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헨나프리데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있었다.



"나도 이제 다 늙고 더는 무서울 것도 없으니 그간에 못 했던 말들을 이 기회에 용기를 내고 말하는 겁니다. 에레디오스 지금 이 순간도 그래요. 당신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아요. 내 얼굴을 보지 않으면서도 내 얼굴을 보는 체를 하지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는 당해본 사람만이 알아요. 지금도 그렇죠. 그건, 그건 나를 나로 보는 눈이 아니에요. 난 알 수 있어요. 본인은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타인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정신을 차려야 해요, 에레디오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는 지금 아가씨의 말씀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습니다. 잠이 부족하십니까? 차라리 한 숨 푹 주무시죠. 지치고 피곤하신 게 틀림없어요."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는 나 자신이 훨씬 잘 알아요. 에레디오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를 겁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에게 큰 죄를 지었는지..... 허나 그 이전에, 당신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살쾡이와도 같았어요. 다른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였죠. 제가 처음 말을 걸었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저를 밀어 넘어뜨리셨잖아요."


"그럴 리가요!"



헨나프리데는 웃음소리를 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저를 밀어 넘어뜨렸어요."


"기억이 잘못되신 거겠죠."



에레디오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하늘에 맹세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때가 몇월이었는지 기억하세요, 에레디오스? 날씨와 우리들의 나이는요? 비가 왔었는지 안개가 꼈었는지 기억하세요? 정원에 어떤 꽃이 피어있었는지 기억해요?"


"예, 아주 화창한 날이었죠. 여름이었고요."


"....그날은 비가 왔었어요. 가을이었고요."


"여름이었습니다!"


"잘 생각해봐요. 그 때가 여름이었다면 그 시기에 성 알레산드라님 축일이 끼어있어서 우리가 함께 기념일을 보냈던 추억이 있어야 해요. 난 그날 선물로 제봉인형을 받았고 혹시나 당신이 부정하실까봐 지금 이렇게 들고오기까지 했지요."



헨나프리데는 탁자 앞에 오래되고 때가 탄 제봉인형을 꺼내놓았다.



"당신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나요? 못 하시는 걸 보니 제 기억이 더 정확하다는 걸 부정하셔서는 안 되겠네요. 적어도 우리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요. 그 당시 저는 이 인형을 항상 가지고 다녔으니 처음 온 날 제가 이 인형을 들고있는 모습을 보셨어야 해요. 기억나세요?"



에레디오스가 부정하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당신은 마차에서 내린 뒤에도 손안에서 자꾸 뭘 부비적거리고 있었어요. 제가 다가가서 뭐냐고 물었더니, 다짜고짜 화를 내면서 넘어뜨리는 거예요. 저는 아주, 꽈당 넘어지고 말았죠. 그 때 당신의 손 안에 들어있던 게 뭐였는지 아세요? 작은 사탕이었어요. 당신의 아버지는 사내아이가 주머니에 군것질 거리를 넣어놓고 다닌다면서 옷에 주머니를 달아주지 않았었죠."



이 부분은 에레디오스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들 몰래 갖고 있다가 형이 자기 몫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형이 다 먹고 나면 입에 넣고 자랑할 수 있을 테니까요. 부정할 생각은 하지 말아요. 당신은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그런 행동을 보였어요. 함께 자랐던 많은 사람들이 이를 증언해요."



에레디오스는 믿을 수가 없어 한 번 더 탁자 너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오프레드가 죽고도 몇 년간 상복을 입어온 이 여자가 이 순간을 위해 꽤나 준비해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노인에게 회상이란 걷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시선은 어렸던 옛날 그 추억의 장소로 갑자기 시시각각 멀어지고 있었다. 그 느낌이 에레디오스를 꼼짝 못 하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오프레드가 당신을 비웃었죠. 어린 에레디오스는 막대기를 들고 치마에 낙엽더미를 털고 있던 여자아이를 죽이겠다고 달려들었어요."



에레디오스는 가슴을 주먹을 세게 두드리고 자세를 고쳐앉았다. 물론 보잘 것 없는 하녀나 세탁부에게 재미로 몹쓸 짓을 몇 번 해보기는 했을 것이다. 허나 애들은 다 그런 법이 아닌가. 그는 묻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늙은 여인을 뒤로 한 채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고 나무컵에 물 한 잔을 떴다. 헨나프리데는 멈추지 않았다.



"그 후에도 당신은 몇번이나 저를 괴롭혔지요. 그건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힌다던가 그런 게 아니었어요. 당신이 나에게 태도를 바꾼 건, 최근 들어서 갑자기 생각난 건데, 오프레드가 울고 있는 나를 챙겨주기 시작한 날부터였어요. 그럴 때마다 오프레드는 당신을 때리고 욕했죠. 당신은 옆에서 형 눈치를 보다가 갑자기 나에게 잘해주기로 결심한 듯 보였어요. 저는 그 일을 잊을 수 없었답니다. 사람의 눈이 신기할만큼 갑자기 선하게 변모하던 그 순간을요. 그런 사람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날 이후로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관찰했어요.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얻어냈지요. 당신은 내가 아니라 항상 오프레드를 보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게 들어맞지요."



에레디오스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털석 소리를 내고 앉았다.



"뭐가 들어맞는다는 겁니까."


"당신의 그 행동들이요."



에레디오스가 웅얼거리는 말에 헨나프리데가 대답했다. 이날 밤은 사람의 말이 소음처럼 들렸다. 에레디오스는 때아닌 하품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악물었다.



"제 어떤 행동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제 입으로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냥.... 이상했다는 것 밖에는. 항상 어색했어요. 당신은."



에레디오스는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마구 비볐다. 찝찔한 물방울이 통통한 광댓살에 펴발라지는 감촉이 뭉툭하고 뜨듯미지근했다. 최근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던 탓인지 에레디오스는 감정의 한계를 맛보고 있었다.



"헨나프리데님 이렇게 찾아오셔서 왜 갑자기 저에게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한 잘못이 있다면 사죄하게 해주시죠. 하지만 근거없는 비난으로 제 마음이 더 이상 이런 상처를 남기지는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너무 힘든 일입니다. 형은 죽었지만 우린 여전히 가족이에요. 가족끼리는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


"물론 당신은 여전히 내 귀여운 동생이에요. 오프레드에게도 그랬지요."



에레디오스는 죽은 형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서 정말 형이 그렇게 말했었냐고 여러번 되풀이해 물었다. 헨나프리데는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과 나는 물론이고 그이를 생각해서라도 이 이야기를 모두 해야겠어요. 사실 우리는 그동안에 아주 바보같은 세월을 보내고 있었답니다. 당신도 알게 될 거예요. 평생 이 말들을 간직해왔으니 지금 풀지 못하면 남은 생까지 끙끙 앓다가 갈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니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네요. 그만두지 않겠어요."



에레디오스는 자존심 때문이라도 어떻게든 입을 열어보려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탑을 올랐던 날, 창고 방에서 가시 돋친 말들을 내뱉었던 그때 그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날의 일 때문에 생각에도 없던 성직으로 발걸음을 돌린 것만 해도 그 당시의 일이 그의 인생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생각만 하면 에레디오스는 스스로가 그녀 앞에서 한 마디 말대꾸도 허용할 수 없는 죄인처럼 느껴졌다.



"저를 비난하러 오신 건가요?"


"미안해요. 에레디오스. 하지만 제가 당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비난뿐이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줘요. 그랬다면 난 오늘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아까 제가 저 자신을 두고 큰 죄인이라고 말했던 거 기억하시죠. 그것도 진심이었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나에게 무섭고 몹쓸 사람이었지만, 나 또한 그런 당신을 이용해왔으니까요."



에레디오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를 이용했다고요?"


"단순한 얘기에요. 그 나이때의 여자애들이 으레 생각할 만한 어리석은 일이죠. 당신이 나를 괴롭히면 오프레드가 나를 구하러 와주었어요. 당신이 나를 서툴게 대할 때면 오프레드가 나를 다독여주러 왔어요. 난 그게 그렇게도 좋았어요. 당신은,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그 일을 잘 해주었답니다. 그때부터 당신이 예쁘고 귀여운 동생으로 보이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식으로 그간의 무례에 대한 복수를 한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우리는 그렇게 좋은 부부는 아니었답니다. 알고 계셨죠?"



에레디오스도 들리는 소문에 귀를 꽉 막고 있던 건 아니었다.



"젊은 날의 오프레드는 달랐어요. 키 크고 늘씬하고 잘 생기고 너무 퉁퉁하지도 않고.... 검과 노래를 사랑하는 그런... 수려한 사람이었죠.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많았어요. 저는 제 외모를 잘 알지요. 당시 그 성에는 저보다 가문이 좋고 용모도 빼어난 아이들이 많았으니, 제가 오프레드를 독차지하고 싶었다 해도 저를 비난하지는 않겠죠. 말하셨듯이 어린 시절에는 다들 그렇잖아요. 하지만, 용이, 그 못된 용이 그이를 그렇게 만든 거예요. 전쟁이!"



헨나프리데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그렇다고 해서." 에레디오스가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내를 때리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문젭니다."



에레디오스는 흔들거리는 눈동자를 다잡았다.



그 한 가지 만큼은, 기억 속의 헨나프리데를 부정하지 않을 수 있는 보증의 성탑이었다. 그 역시 살아오면서 지난 삶에 대한 의심과 회한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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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흠모의 정이 피어올랐다 24.08.17 5 0 13쪽
74 오르베스쿠와 아르파니엘 24.08.17 5 0 12쪽
73 네놈들은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단 말이야 24.08.17 3 0 12쪽
72 요 째리는 눈매 좀 보게나 24.08.17 7 0 12쪽
71 못된 것들 (3) 24.08.16 4 0 11쪽
70 못된 것들 (2) 24.08.15 5 0 11쪽
69 못된 것들 (1) 24.08.15 5 0 11쪽
68 느므딘의 어쌔신 (3) 24.08.15 5 0 12쪽
67 느므딘의 어쌔신 (2) +2 24.08.14 7 0 14쪽
66 느므딘의 어쌔신 (1) 24.08.14 5 0 12쪽
65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3) 24.08.13 5 0 12쪽
64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2) 24.08.13 5 0 12쪽
63 바보같은 이야기의 결말 (1) 24.08.13 6 0 11쪽
»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24.08.12 6 0 11쪽
61 당신이 무서웠어요 24.08.12 5 0 12쪽
60 이게 다들 참 어떻게 된 일일까 24.08.11 4 0 11쪽
59 여기서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겠구나 24.08.11 4 0 13쪽
58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텐데 24.08.11 4 0 11쪽
57 누이야 내 말 좀 들어보렴 24.08.10 5 0 12쪽
56 저는 어리석고 소견없는 여인이라 24.08.10 6 0 11쪽
55 저는 악마숭배자입니다 24.08.10 5 0 12쪽
54 바실리쿠스가 고문을 받고 있어요 24.08.09 5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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