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 쟁탈전 (5)
주르륵 흘러들어오는 지식들. 직접 맞아본 것들은 물론, 심지어는 대결에서 겪어보지 않은 기술까지도 있었다.
-힘과 체력을 흡수하였습니다.
-소량의 마나를 흡수하였습니다.
-시력과 청력, 감각의 날카로움이 소폭 상승합니다.
-대검 검술에 대한 지식을 흡수하였습니다.
-고유 기술, ‘대검 참격’에 대한 지식을 흡수하였습니다.
-고유 기술, ‘검막’에 대한 지식을 흡수하였습니다.
-고유 기술, ‘흩뿌리는 일격’에 대한 지식을 흡수하였습니다.
스으으. 이내 사라진 빛. 나는 시체에서 손을 떼었다.
빠르게 흡수된 다량의 지식으로 어질거리는 머리. 하지만 그에 대해 관조하는 것은 조금 미루어야 할 듯싶었다.
“보, 볼타르경을...!”
웅성거리는 목소리. 아직 상당수는 귀빈석 근처를 수색하고 있었지만, 이쪽으로 다가온 몇몇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기사 볼타르.
2 왕자 쪽 진영에서 가장 강력한 기사이자,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세 기사 중 한 명.
그런 인물이 숨을 거둔 채 바닥에 쓰러져있는 모습은 수도의 병사들에게 있어 꽤나 충격적인 모습일 터.
물론 병사들에게는 별다른 볼일이 없다. 빛을 모두 흡수한 나는 몸을 일으켜 반쯤 얼어붙은 병사들을 지나쳤다.
꿀꺽. 나에게 뭔가를 물어보기는커녕, 막아설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병사들을 지난 나는 귀빈석 쪽으로 향했다.
완전히 박살이 나 있는 시설들. 완전히 가로막히지는 않았던 볼타르의 첫 공격과 두 번째 공격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1 왕자의 시신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전투가 이루어지는 사이 하로크를 비롯한 이들이 가까스로 구출한 모양.
“...”
나는 그 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파괴의 현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풍경이,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아.’
나는 곧바로 그 이유를 깨달았다.
이 모습을 만들어낸 기술은, 이제 내 것이었으니까.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였다.
마나의 파동이 어떤 식으로 허공을 휩쓸며 귀빈석을 타격했는지, 어떤 형태로 단상이 부서지며 붕괴했는지.
대검 참격, 그리고 검막.
나는 또렷하게 보이는 그 흔적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소모가 큰 기술들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약한 다수를 상대하기에는 효과적이다.
“잡아, 잡아!”
“이쪽으로 오십시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거의 끝나가는 상황을 정리하는 병사와 기사들의 고함인 듯했다.
행사가 예정대로 진행되기는 글렀군.
짧으면서도 담백한 감상을 마친 나는 고개를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이 어지러운 상황이 어찌 정리되건, 일단은 휴식을 좀 취해야 할 것 같았다.
***
예상했던 대로 축제는 중단되었다.
2 왕자 일당이 신성한 축제에서 1 왕자의 암살을 노렸다는 소문은 명백한 의도 아래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실질적인 세력 대결에 더해 마지막 한 수까지 막아낸 상황.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건 도박의 실패는 당연한 후폭풍으로 돌아왔다.
부상을 입긴 했어도 간신히 목숨을 건진 1 왕자 루페르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고, 2 왕자 필립스는 곧바로 구금되었다.
그리고.
“1 왕자가?”
하루가 지난 뒤. 나는 루페르가 만남을 요청했다는 말을 전달받았다.
“...”
이유야 짐작이 갔다.
내가 기사 볼타르를 쓰러뜨렸다는 소식을 그도 전해 들었을 테지.
데리튼의 검술을 이어받았다는, 다소 확인하기 어려운 소문과는 다른 확실한 성과.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거절할 수도 있다.
조금 껄끄러워지긴 하겠지만, 어차피 나는 결국 이 왕국을 떠날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석판에서 읽어낸 날짜의 시작은 바로 내일 밤.
어쩌면 지금이 일대일 대화로 그를 떠볼 수 있는 마지막 시기였다.
아라하드 네크로폴리스 일당은 2 왕자가 거의 모든 것을 걸었을 축제에서의 암살 시도에 조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뭔가 남아 있는 계획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현재 상황만 본다면 가장 의심스러워지는 것은 1 왕자.
‘만약 확실한 증거가 잡힌다면.’
나는 손마디를 가볍게 움직였다. 무기가 없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아. 어서 오게.”
별다른 기다림 없이 들어선 1 왕자의 집무실. 고급스러운 원목 테이블에 앉자 그가 앞쪽에 놓인 와인을 따라 건네주었다.
적이 될지도 모르는 이가 건네주는 술.
하지만 이전에 숲의 거대 거미를 처리한 후 독에 대한 저항력을 흡수했던 내 입장에서는 딱히 거리낄 것이 없었다. 오히려 상대의 의도를 확인할 수도 있는 기회다.
나는 적당한 정도의 예의가 섞인 동작으로 술잔을 받아 한 모금 들이켰다.
기분 좋을 정도의 매캐함을 머금은 훈연 향과 함께 달콤한 꿀 향기가 피어오르고, 그 사이를 은은한 포도주 향이 감싸 안는다.
“좋은 술이로군요.”
간단히 건넨 말. 1 왕자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헤센 고원에서 자라는 포도로 숙성시킨 와인일세. 마음에 들면 몇 병 선물해주지.”
짧게 오가는 말. 나는 포도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켜며 그의 용건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아버지는 강인한 인물이었지.”
잠깐의 침묵 끝에 흘러나온 말. 시선을 살짝 돌린 1 왕자 루페르가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지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늙은 왕 바르탄은 젊었을 때에 수십 차례의 전투에 직접 참여하여 왕국의 영토를 크게 넓힌 인물이라는 것을.
“하지만 세월의 흐름은 이길 수 없는 법.”
잠깐 말을 멈춘 후 포도주를 입 안에서 굴리다 삼킨 그가 질문을 건넸다.
“죽음을 앞둔 부모를 지켜본 적이 있나?”
딱히 대답을 바라고 건넨 질문은 아닌 듯, 1 왕자가 말을 이었다.
“비통하지. 참담하기도 하고.”
“그렇습니까.”
“하지만 마냥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지. 나에게는 책임이 있으니.”
별로 슬픈 얼굴은 아닌데. 나는 1 왕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은 왕위 계승자는 나뿐이지.”
이미 2 왕자 필립스는 없는 이 취급하는 듯한 선언. 틀린 말은 아니었다. 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왕위 쟁탈전은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뭐, 굳이 따지자면 먼 조카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아직 어린 녀석이지. 유약한 성격 탓에 지지기반도 거의 전무하고.”
그 덕분에 살아남은 것이겠군.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오늘 내가 자네를 왜 불렀는지는 알 거라 생각하네.”
적당한 타이밍에 나오는 본론.
“왕의 기사가 되지 않겠나?”
상당한 무게감을 담은 말. 하지만 이제, 마냥 오만하지만은 않은 말이었다.
“...”
나는 잠시 침묵했다. 사실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바이메르 왕국에 계속해서 머물 생각이 없는 나에게 왕의 기사라는 직책은 그저 허울 좋은 구속일 뿐.
“그리 끌리는 제안은 아니로군요.”
왕족에게 건네는 말임을 고려한다면, 딱 자른 거절이나 다를 바 없는 대답. 어차피 거절할 것이라면 괜히 여지를 주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나았다.
“...”
살짝 좁혀진 왕자의 미간. 뭐라 말을 덧붙이려는 듯 입가를 꿈틀거리던 그는 이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조금 실망스럽긴 하지만 자네 수준 정도 되는 실력자에게 마냥 강요하지는 못하겠지. 다만, 생각이 바뀐다면 언제든지 말하게나.”
“알겠습니다.”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는 걸 잘 알기에, 나는 선선히 대답을 건넸다.
물론 이것으로 용건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내가 루페르 왕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까.
“혹시, 검은 뱀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모르는 이가 듣는다면 이해가 가지 않을, 하지만 조금이라도 아는 이가 듣는다면 바로 눈치챌 질문.
나는 비전 시야를 켠 채 왕자를 주시했다.
극도로 끌어 올려진 감각은 아주 미세한 흔들림도 잡아낼 수 있었다.
고귀한 신분과는 달리 개인의 능력 자체는 일반인에 불과한 왕자가 이것까지 속이지는 못할 터.
“검은 뱀?”
의아한 듯 흘러나오는 반문.
“무엇을 말하려는지 잘 모르겠군. 트라본 경과 관련된 말인가?”
정직한 반응. 나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인성이 별로인 것과는 별개로, 적어도 네크로폴리스와 내통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근래에 흉흉한 소문이 도는 것 같아서.”
“뭐, 그럴만 하지.”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스 녀석이 그 난리를 쳤으니.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이제 내가 곧 왕위에 오르면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테니 말이야. 그때가 되면 자네의 생각도 바뀔지도 모르지.”
그것으로 대화는 끝. 전혀 설득력이 없는 말을 대충 흘려들은 나는 왕자에게 인사를 건넨 후 방을 빠져나왔다.
‘역시 2 왕자 쪽인가.’
나는 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잠겼다. 축제에서 벌인 난리가 2 왕자가 다급한 마음에 벌인, 네크로폴리스와 협의되지 않은 일일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 흑마법사 놈들의 사악함을 생각한다면, 왕궁의 어느 쪽과 내통을 했건 그리 끈끈한 결속은 아닐 테니까.
호화로운 왕궁. 나는 다소 조용한 복도를 거닐며 언뜻 보이는 창밖을 힐끔 바라보았다.
다가오고 있는 날짜. 어차피 곧 알게 될 터였다.
물론 그 전에 미리 준비해둘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해두는 것이 맞겠지. 생각을 마친 나는 왕궁의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행사에서 소란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왕국의 수도, 바이에르타의 어딘가. 어두운 실내에 다소 건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2 왕자 필립스가 마상 창 시합에서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녀석은 현재 왕궁의 감옥에 구금되었다고 합니다.”
“멍청한 놈들.”
앙상한 노인이 작게 혀를 찬 후에 말을 이었다.
“뭐, 상관없다.”
아라하드 네크로폴리스의 2 인자, 이곳에서의 계획을 총괄하는 흑마법사 히르겐이 눈을 번득였다.
“어차피 우리의 계획은 그대로 진행될 테니.”
스산하게 빛나는 눈동자. 노인의 시선이 어두운 실내를 훑었다.
준비는 거의 끝났다.
물론 근위 기사단장 데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에 의해 자신의 소환수인 검은 뱀이 소멸당하고, 그 안에 담겨 있던 마력 핵과 석판이 소실된 것은 큰 피해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히르겐 개인에게 주된 타격을 입혔을 뿐, 계획 자체를 망가뜨린 것은 아니었다.
“...음.”
흑마법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 뼈로 만들어진 지팡이를 움켜잡은 앙상한 손에 검은 기류가 파직거렸다.
물론 그간 왕국 곳곳에서 있었던 약간의 어긋남들로 인해 네크로폴리스가 전면에 나서는 것이 원래의 예정보다 빨라진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계획은 완벽에 가까웠으니까.
‘바로 내일.’
스으으. 어두운 공동에 음산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바로 내일.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거대한 계획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혼란이, 왕국의 수도 바이에르타를 덮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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