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이름없는 무사로 살겠다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무협

서강림
작품등록일 :
2024.07.29 20:14
최근연재일 :
2024.08.30 18:20
연재수 :
31 회
조회수 :
1,726
추천수 :
9
글자수 :
179,874

작성
24.08.01 17:20
조회
75
추천
1
글자
11쪽

가문의 위기

DUMMY

탁자가 바닥에 나뒹굴자 제임스의 미소가 깊어졌다.


“자작가의 혼담에 너무 기쁘셔서 이런 반응을 보이시는 겁니까?”

“아무리 자작가라 해도 데스턴가를 얼마나 만만히 보았다면 내 하나뿐인 딸을 첩으로 들이겠단 말을 하겠는가!”

“그럼 혼담을 거절한다는 뜻이군요.”

“이런 모욕에도 그대를 그냥 보내주는 건 자작가의 후계자여서임을 명심하게!”

“남작님께서도 혼담을 거절당한 아버지께서 이번 일에 모욕감을 느끼실 것임을 명심하셔야 할 겁니다.”


자기 할말을 하고 저택밖으로 나서는 제임스의 모습에 나에른이 이빨을 깨물었다.


“저, 저자가···”

“아버지, 괜찮으신가요?”


자신을 부축하는 올리비아를 보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찮다.”

“자작가에서 이를 빌미로 시비를 걸어오면 어떻게 하나요?”

“겨우 이런 어거지 명분으로 문제를 만든다면 귀족회의에 이를 알려 망신을 줘야지.”

“부끄러움을 아는 자들이라면 여기서 더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거예요.”


안심하는 부녀를 보며 카르마가 입을 열었다.


“남작님,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자작가에서 이 일을 귀족회의에 알리기 전에 영지전을 일으킨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영지전이라고요?”


생각치도 못한 말에 나에른은 눈을 크게 떴다.


“이 작은 마을에 뭐, 탐낼 게 있다고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맞습니다. 카르마 경, 데스턴 마을은 목책으로 방비는 잘 되어있고 무리한 공격을 강행하면서까지 얻을 게 없는 마을입니다. 자작가에서 무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데스턴 마을에 있을 수도 있고 자작가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영지전을 벌여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상대방이 엄포를 놓고 갔는데 아무 대책 없이 가만히 있는 건 좋지 않다는 겁니다.”


그 말에 나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목책을 점검하고 물자를 확보해 두도록 하지요.”


제임스가 돌아간지 얼마되지 않아 막달라 가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을 보내 데스턴 가문에 경고장을 보냈다.


“이번 일로 막달라 자작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이에 데스턴 가문의 사과와 함께 영애를 자작가 후계자의 첩으로 보낼 것을 요구한다.”

“이자들이 정녕!”


나에른이 소리치자 사자는 한 번 움찔 하더니 마저 서신을 읽었다.


“닷새 안에 이를 받아드리지 않으면 막달라 가문에 선전포고한 것으로 간주하겠다.”


사자가 돌아가자 데스턴가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저자들은 정말 영지전을 벌일 생각이 아닙니까?”

“막달라 자작가의 위세는 저희보다 크고 강합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모든 영지민을 목책안으로 대피시키고 농성한다면 버틸 수 있을 걸세.”


말을 마친 나에른은 카르마를 보며 입을 열었다.


“카르마 경, 갑작스러운 사태에 미안할 따름입니다. 경께서는 더 이상 이 일에 엮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남작님! 카르마 경은 이곳에서 가장 강한 기사입니다! 붙잡아도 모자랄 형편에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데스턴가는 작은 남작가이긴 하지만 손님에게 나가서 싸워줄 것을 청할 정도로 예법을 모르는 곳은 아니오. 주인은 응당 손님을 보호해야 하는 법. 가문의 힘이 약하니 손님을 피신시키는 게 가주로써 역할이 아니겠소?”


그 말에 가신들이 입을 다물자 카르마가 앞으로 나섰다.


“기사로써 어찌 불의를 보고 모른 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 힘이 닿는 만큼 남작님을 돕겠습니다.”

“아아, 그리 큰 결심을 해주시다니···”

“역시 제로 브레이커의 기사도는 남다릅니다.”


가신들이 안도하자 나에른은 얼굴에서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은 사양의 미덕을 보일 상황이 아닙니다. 카르마 경의 도움을 받아도 되겠는지요?”

“제 행동은 기사도일 뿐, 저는 데스턴가로부터 어떤 편익도 원치 않습니다. 부담가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막달라 자작가의 선전포고와 카르마의 말은 삽시간에 마을로 퍼져 온 동네 사람들이 이 소식을 알게 되었다. 물론 아랑도 예외는 아니었다.


‘되는 일이 없군.’


애송이에 이어서 자작까지 달라붙자 아랑은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여정은 올리비아에게 힘이 되고 싶다는 개기가 있었기에 데스턴가에 도는 전운을 못 본 채 할 순 없었다.


‘뭐 적당히 두들겨 패서 돌려보내면 되겠지. 그리고 그 놈이 사람은 괜찮네.’


대수롭지 않게 밭을 갈던 그를 향해 카르마가 달려왔다.


“스미스! 여기서 뭘 하는 겐가!”

“농부가 밭을 가는 게 뭐 잘못된 일입니까?”

“자네는 더 이상 농부가 아니라 내 종기사일세! 이런 일은 그만두고 어서 훈련에 매진하게!”

“카르마 경, 기사에게 검은 그만두고 밭을 갈라고 하면 모욕적이겠지요?”


난데없는 질문에 카르마의 눈썹이 약간 올라갔지만 그는 곧장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런데 왜 농부에게 밭일을 그만두고 검을 잡으라는 건 모욕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겁니까?”

“그야 농사일이 가장 천한 일이 아닌가? 자네도 알겠지? 기도하는 자, 싸우는 자, 그리고 일하는 자. 자네에게 검을 잡을 기회를 주었는데 어찌 이러고 있는 겐가?”


그의 말에 아랑은 쟁기질을 하며 입을 열었다.


“검을 손에서 놓으면 감각이 무디어지듯 밭을 방치하면 잡초가 자라 시간이 갈수록 본래의 모습을 찾기 어려워집니다. 무인의 마음가짐과 밭의 모습이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으니 농사일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무인은 벽을 허물기 힘들고 무인의 마음가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농부는 원하는 성과를 내지 못하리라 생각됩니다.”


이상한 말을 하는 아랑의 모습에 카르마는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지금 농사일이 중요한 게 아닐세. 막달라 가문에서 선전포고를 했어. 당장 영지전에 대비를 해야 하는데 한가하게 밭을 갈 때인가?”


“그렇다면 무인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고된 훈련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저 알량한 실력으로 힘없는 자들 위에 서서 세상의 재미를 즐기는 게 스스로를 정진하는 것보다 나은 일이라고 볼 수 있는 겁니까?”


아랑은 지난 3년 동안 농사를 하며 얻은 심득을 카르마가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해 주었지만 그는 이를 한 귀로 흘려 들었다.


“내가 잠시 자작령을 둘러보았는데 그 위세가 데스턴가를 삼킬 듯했네. 이미 영지전을 치를 준비를 마친 뒤 시비를 걸었던 모양이야. 공세가 시작되면 전란에 정신이 없을 테니 자네가 아가씨 곁에 단단히 붙어있게.”


자신의 말에 전혀 관심이 없는 그의 모습에 아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쯧, 이것도 자네 복 일세.’


같은 것을 보고 들어도 둔재와 천재가 깨닫는 바는 다르다. 아랑의 두루뭉술한 소리도 누군가에게는 귀한 가르침이 될 수도 있었다.


카르마의 독촉에 아랑은 쟁기를 놓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앞으로 닷새 동안은 붙들려 있겠군.’


애송이의 헛소리를 닷새나 듣고 있어야 할 상황에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땠다.


***


남은 시간동안 나에른은 바쁘게 움직였다. 목책 밖에 있는 밭은 필시 약탈당할 테니 빠르게 수확할 것을 명했다.


장정들은 모여 목책을 보강하고 창을 다루는 법을 급히 익혔다. 가신들은 용병이나 방랑기사를 구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운이 좋았는지 그들은 용병 스무 명과 방랑기사 셋을 구해서 돌아왔다.


“보수는 확실한 겁니까?”

“물론이네. 전리품은 최우선적으로 자네들이 선점할 수 있게끔 하겠네.”

“역시 불리한 쪽이 값이 더 후하군요! 마음에 듭니다!”

“저쪽에서도 접근 했었나보군?”

“물론입니다. 하지만 제로 브레이커 카르마 경이 있다는 소식에 이쪽에 붙었지요.”

“수당과 전리품 배분율도 좋고 최악이 상황이 오더라도 카르마 경 옆에 있으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테니 데스턴가로 왔습니다.”


솔직한 그들의 말에 나에른은 마음이 놓였다.


약속했던 닷새가 지나자 막달라 가문의 병력이 데스턴 마을 앞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들은 아직 덜 자란 작물이 남은 밭이 상하지 않게 하며 진을 쳤다.


“데스턴 마을을 깨끗이 흡수할 생각인가 보군요.”

“영지민 피해가 줄어든 건 좋지만 저들이 저런 행동은 한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 아니겠소?”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풀이 죽은 사람들을 보며 나에른은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카르마가 나섰다.


“공격측은 방어측에 비해 못해도 세배의 병력은 더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저희는 목책안에서 영지민들까지 모아 결사항전을 각오했으니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카르마 경께서는 적의 기사수를 감안하고서도 해 볼만 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얼핏 봐도 적진에 있는 사슬 갑옷을 입은 기사가 서른은 돼 보였다. 반면 이곳에는 포섭한 방랑기사를 포함해 열이 전부였다.


병사들도 마을 장정들을 끌어 모은 수준으로 카르마가 없었다면 진작에 흩어질 병력이었다.


군의 사기가 바닥을 치자 아랑은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겁먹은 모습을 티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지만 흔들리는 눈동자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그래, 기사들이 문제란 말이지···’


아랑은 병법은 잘 알지 못했지만 카르마의 말을 들어보니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목책을 부수지도 넘지도 못하는 범인들의 싸움에서 수비측은 공격측 보다 확실히 유리해 보였다.


‘그렇다면 그 문제, 내가 해결해주지.’


밤이 되자 아랑은 두건을 두른 채 조용히 진영을 빠져나갔다. 절정, 그러니 소드 마스터급의 움직임으로 목책을 빠져나가는 그를 눈치챌 수 있는 인물은 진영에 존재하지 않았다.


별 무리 없이 적진에 도착한 그는 잠시 고민을 했다.


‘이대로 암습을 한다면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다. 하지만···’


하수들을 상대로 암습을 하는 건 그의 위신이 서지 않았다. 이에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적진 앞에서 외쳤다.


“크흠, 이리 오너라!”


그의 외침에 병사들이 창을 들이밀며 그에게 다가왔다.


“누, 누구냐!”

“일반 병졸들에게는 볼일이 없으니 비키시오.”


이미 자신의 존재를 들어냈으니 아랑은 더 이상 봐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막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와장창!


기사들의 기운을 쫓아 막사를 덮치기 시작한 그는 기사를 찾아내 주먹을 날렸다.


뽀각!


“아아아악!”


뼈가 부러지자 비명을 지르는 기사를 내버려두고 아랑은 다음 표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막사들이 허물어지고 희생자가 속출했음에도 몇몇 기사는 싸울 준비를 마치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뭣들 하고 있어! 당장 놈을 죽여라!”


병사들이 달려들자 아랑은 살기를 피워냈다. 이에 병사들을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남을 죽이고자 한다면 자신도 죽을 각오를 해야 하오.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순식간에 기사 십여명의 팔다리를 부러뜨린 자가 하는 말은 세상 그 어떤 문장보다 알기 쉽게 병사들의 뇌리에 꽂혔다.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자 아랑은 작업을 마저 진행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차라리 이름없는 무사로 살겠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1 평화에는 대가가 따른다 24.08.30 8 0 12쪽
30 드레이크 (4) 24.08.29 11 0 12쪽
29 드레이크 (3) 24.08.28 14 0 12쪽
28 드레이크 (2) 24.08.25 19 0 11쪽
27 드레이크 (1) 24.08.24 16 0 12쪽
26 전운 24.08.23 14 0 13쪽
25 웨버 백작 24.08.22 16 0 13쪽
24 웨버 성으로 24.08.21 22 0 12쪽
23 기사단 24.08.20 24 0 12쪽
22 정보 24.08.18 27 0 12쪽
21 그날의 기억 24.08.17 29 0 13쪽
20 부패 24.08.15 27 0 12쪽
19 도적의 여왕 24.08.14 29 0 13쪽
18 북새통 24.08.13 32 0 12쪽
17 신뢰와 상처 24.08.12 31 0 15쪽
16 도움 24.08.11 34 0 12쪽
15 현자를 찾아서 24.08.10 37 0 15쪽
14 푸른 탑 (3) 24.08.09 38 0 14쪽
13 푸른 탑 (2) 24.08.08 39 0 14쪽
12 푸른 탑 (1) 24.08.07 50 0 13쪽
11 남의 대륙 후기지수 양성 24.08.06 48 0 12쪽
10 여정의 시작 24.08.05 53 0 12쪽
9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 24.08.04 60 0 13쪽
8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뽑다 24.08.03 68 1 12쪽
7 무위를 드러내다 24.08.02 76 1 16쪽
» 가문의 위기 24.08.01 76 1 11쪽
5 함정 24.07.31 72 1 13쪽
4 조금 치는 루키와 썩은 물 24.07.30 96 1 13쪽
3 싸움구경 24.07.29 128 0 13쪽
2 웅크리다 24.07.29 177 2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