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이름없는 무사로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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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림
작품등록일 :
2024.07.29 20:14
최근연재일 :
2024.08.3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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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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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기억

DUMMY

밤이되자 아랑은 조용히 여관에서 빠져나와 교회로 향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한 사제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드비스트 주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제는 그를 주교에게 안내했다.


“오셨군요.”

“성녀 양반은 어디에 있소?”

“참회실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알겠소.”


주교가 참회실의 문을 열자 아랑은 그를 보았다.


“여긴 사제가 고해성사를 듣는 자리가 아니오?”

“자리를 마련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사제의 말에 아랑은 속으로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죄를 고백합니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챈 아랑은 그녀를 향해 전음을 날렸다.


-라엘 소저, 사람들을 물리시오.


그 말에 성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찾아오셨군요. 저들은 아무 죄가 없으니 그냥 보내주십시오.”

“그리 하겠소.”


그의 말에 라엘은 참회실 밖으로 나갔다.


“주교님, 외부인을 참회실에, 그것도 사제가 앉아 고해성사를 들어야 할 자리에 앉히다니 이건 도를 넘은 것 같군요.”

“동대륙에 주신의 말씀을 전할 좋은 기회일세.”

“좋은 뜻으로 행한 일이라도 그 수단이 잘못되었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네는 그저 주신을 위해 봉사하면 되네.”

“제가 이 일을 문제 삼으면 어찌 하려고 이러십니까?”


그 말에 주교는 인상을 썼다.


“자네··· 많은 변했군.”


주교의 말을 무시한 채 라엘은 입을 열었다.


“저자와 단 둘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왜? 아는 자인가?”

“동대륙의 무사지만 참회실에 이렇게 많은 이목이 있다는 게 정상이 아니라는 건 저자도 알고 있습니다. 이방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더 이상 보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변변치 않은 변명이었지만 라엘이 이런 자리를 주선한 것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상 그는 라엘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좋네. 사람을 물리지. 오늘 일은 서로 무덤까지 가져갔으면 좋겠군.”


라엘이 이 일을 거론하면 좋을 게 없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먼저 오늘 일을 함구할 것을 요구했다. 그의 물음에 라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교는 참회실 밖으로 나갔다.


참회실에 두 사람만 남자 라엘이 입을 열었다.


“이제 눈과 귀가 없나요?”

“이 근방에는 더 이상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네.”

“그럼 편히 말씀하시지요.”


두려움이 묻어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아랑은 한숨을 쉬었다.


“라엘, 자네가 내 무위를 돌려 놓을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는 소문을 들었네. 그게 사실인가?”


그 말에 라엘의 눈망울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비수처럼 날아와 박히는 말에 아랑은 두 눈을 감았다. 강력한 무위를 가지고 있던 아랑은 마왕이 사라진 후에 나타날 새로운 위협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을 게 분명했다.


교단은 대륙의 정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왕국들이 교단을 압박, 혹은 회유하고 이에 넘어간 교단이 그녀에게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라고 명을 내렸다면 순한 성품의 그녀는 이를 거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아랑은 눈을 떴다. 배신감. 만일 그녀가 교단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이런 행동을 저질렀다면 이는 명백한 자신에 대한 배신이었다.


“후우···”


한 숨을 내쉰 아랑은 생각을 정리했다. 비록 라엘의 성품이 유순하지만 교단의 성녀로서 불의에 대항해 강단 있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아랑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라면 환자를 방치하라는 명령 따위는 듣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마음을 정리한 아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내 목숨을 구했네. 그런 자네를 믿었기에 내 단전도 맡겼지. 나는 그만큼 자네를 신뢰하고 있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라엘을 보며 아랑은 마음이 아팠다. 함께하는 동안 본 그녀의 모습은 능히 성녀라 불릴 수 있을 만큼 선했다. 아랑은 자신이 직접보고 겪은 것을 믿기로 했다.


“자네가 그런 선택을 한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나는 자네의 선택을 믿네.”


그 말과 함께 아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에 라엘은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 이대로 가시는 건가요?”

“그럼? 같이 춤이라도 출까?”


그의 말에 라엘은 슬픈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좀 더 따지셔야지요. 나한테 왜 그랬냐고 따지셔야지요. 용사님은 그럴 자격이 있으시잖아요.”

“목숨을 구해줬는데 무공까지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지. 내가 그렇게 염치없어 보이는가?”

“그런 뜻이 아니라···”


어두운 표정의 라엘을 보며 아랑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그러고 있으니 내가 자네를 닦달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나를 생명의 은인을 몰아붙이는 파렴치한으로 만들 셈인가?”


농담을 하는 그의 모습에 라엘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다 작게 웃었다.


“여전 하시네요.”

“그럼, 덕분에 건강히 잘 지내고 있네. 아참, 이거 먹게.”


아랑은 품에서 양갱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좋아하지 않는가?”

“기억하고··· 계셨네요···”

“그렇게 풀 죽어 있지 말고, 이거 먹고 기운 내게. 나는 이만 가보겠네.”

“벌써 가시게요?”

“볼일을 다 봤으니 가야지. 너무 오래 있으면 그자가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의 말에 라엘은 고개를 숙였다.


“교단의 좋지 않은 면만 보여드려 속상하네요.”

“사람이 모인 곳이 다 그렇지 않겠는가? 마음 쓰지 말게.”


아랑이 나가자 라엘은 양갱을 입가로 가져갔다. 입안에 퍼지는 단맛과 함께 흘러내리는 눈물에 그녀는 훌쩍이며 입을 우물거렸다.


그녀의 훌쩍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아랑은 몸을 돌려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아랑은 라엘에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척!


“요, 용사님?”


아랑과 함께 모험을 하면서 여러 강자와 권력자를 만났지만 아랑은 그들에게 동대륙의 예법을 도통 취하지 않았다. 그런 그를 알고 있었기에 라엘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동대륙의 무사, 아랑은 서대륙의 성녀 라엘에게 목숨을 빚졌소. 이에 내, 단 한 번. 목숨을 던져 그대의 검이 되어 주겠소.”


그 말고 함께 아랑은 자신의 목패를 라엘을 향해 던졌다. 목패를 받아 든 라엘은 소중하게 그것을 매만졌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에 라엘은 작게 몸을 떨었다.


“감사합니다. 용사님···”


***


3년 전 아랑이 실종된 이후 파티원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마왕과의 전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 교회는 라엘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자네라면 용사님의 무위를 돌려놓을 수 있지 않았는가?”

“교회가 용사님에게 큰 빚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허망하게 날리다니!”


계속되는 질타에 라엘은 고개를 숙였다.


“신성력을 잃어버리는 게 그렇게 두려웠나?”

“죄송합니다···”


열을 내는 사제들 가운데서 가장 화려한 옷을 입은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사제들은 입을 다문 채 길을 만들었다.


“여기 중 누가 그 상황에서 고귀한 희생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하, 당연히 사제된 자로써 대륙을 구한 위인을 위해 고귀한 희생을 하는 걸 망설일 자가 있겠습니까?”

“성자와 성녀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자는 고귀한 희생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말에 사제들이 입을 다물자 교황은 라엘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누구나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고귀한 희생을 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라엘 성녀 뿐이었으니 다른 분들은 이 일에 대해서 더는 입에 올리지 마세요.”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사제들을 둘러본 뒤 그는 라엘의 눈을 바라보았다.


“괜찮습니다. 그럴 수 있어요.”

“성하···”


인자한 미소를 지어준 뒤 등을 보이고 돌아가는 교황을 향해 라엘이 입을 열었다.


“저는··· 그 순간 계산을 했어요.”


그녀의 말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자 라엘은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용사님의 상처는 치료만 하면 살 수 있는 상처였어요. 물론 그러면 무위는 되찾지 못하겠지만요.”


숨을 고른 라엘은 눈물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마왕이 사라진 이상, 무위보다 필요한 건 치유의 기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그 순간 용사님 개인의 무위와 제가 앞으로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의 목숨을 저울질했어요.”


그녀의 말에 교회내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성녀라는 자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저울질을 했다는 것인가?”

“용사님이 앞으로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무게는 생각해 보았는가?”


사제들의 비난에 라엘은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 용사님은 강인한 분이시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실 거라 믿었어요.”

“그게 무슨 무책임한 말인가!”

“당장 눈앞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나중을 위해 그를 외면하는 게 주신을 교단의 성녀로서 할 짓인가!”


사제들의 언성이 높아지자 교황이 다시 나섰다.


“그만들 하세요.”

“하지만 성하···”

“걷지 못하는 자를 걷게 해주고 눈이 먼 자의 눈을 뜨게 해주었으면 되었지 그 후의 삶도 교단과 사제가 책임져야 하는 겁니까?”

“···”


사제들이 입을 다물자 교황이 말을 이었다.


“장애가 있을 때는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적선을 했는데 교단의 힘으로 몸이 건강해지자 수입이 끊겼으니 교단이 내 생계를 책임져라. 이런 자를 정상이라 볼 수 있습니까?”

“성하, 고정하시지요.”


사제의 말에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성녀 라엘은 단전이 파괴되고 죽어가는 용사님을 살렸습니다. 이는 이미 고귀한 일입니다. 저는 반드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한 사람을 완벽하게 고쳐주는 것 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음부터 건져내는 것이 보다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조용해지자 교황은 라엘에게 다가갔다.


“라엘 성녀님, 성녀님은 그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습니다. 더는 자책하지 마시지요.”

“그 때의 선택이 너무 후회되요. 용사님께서는 저희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셨는데···”


라엘이 계속 눈물을 흘리자 교황은 쭈글쭈글한 손으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모든 선택에는 후회가 따릅니다. 성녀님이 용사님의 무위를 되찾아 준 뒤 병자들에게 더 이상 치유의 기적을 베풀어 주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들의 앞에서 후회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나요?”


그의 물음에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가 없는 선택을 하는 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녀의 물음에 교황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선택을 할 때 후회가 아닌 다른 것을 보는 건 어떨까요?”

“다른 것이요?”

“네. 스스로의 선택에 부끄러움이 없는지 생각해 보는 겁니다. 만일 성녀님이 개인의 지위를 위해 신성력을 잃는 게 두려워 그런 선택을 했다면 성녀로서 굉장한 부끄러움을 느끼겠지요.”


교황의 말에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제 선택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다만 용사님께 너무 죄송스러운 마음 뿐입니다.”

“그렇다면 용사님의 무위를 되찾아 준 뒤 다른 병자들을 봤을 때도 똑같이 후회했을 겁니다. 결국 이런 고민은 스스로를 병들게 만들 뿐입니다.”


그 말과 함께 교황은 라엘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제 그만 그 순간, 그런 선택을 한 자신을 용서해주세요.”


교황의 말에 라엘은 자리에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용사님께서 용서해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용사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서대륙의 모든 인간을 구원하신 분입니다. 성녀님 역시 서대륙의 백성 중 하나입니다. 성녀님의 구원을 위해서 그분은 성녀님을 용서할 것입니다.”


그 말을 하며 교황은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용사님이라면 본인의 생명을 구해준 성녀님께 감사해하고 있을 겁니다.”


그의 위로에도 라엘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신념이 흔들리자 그녀의 신성력도 약해지기 시작했다.


아랑에게 용서를 받은 그녀는 비로서 마음의 짐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 교회를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라엘은 아랑을 위해 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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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웨버 백작 24.08.22 15 0 13쪽
24 웨버 성으로 24.08.21 22 0 12쪽
23 기사단 24.08.20 24 0 12쪽
22 정보 24.08.18 27 0 12쪽
» 그날의 기억 24.08.17 29 0 13쪽
20 부패 24.08.15 27 0 12쪽
19 도적의 여왕 24.08.14 29 0 13쪽
18 북새통 24.08.13 31 0 12쪽
17 신뢰와 상처 24.08.12 30 0 15쪽
16 도움 24.08.11 34 0 12쪽
15 현자를 찾아서 24.08.10 36 0 15쪽
14 푸른 탑 (3) 24.08.09 38 0 14쪽
13 푸른 탑 (2) 24.08.08 39 0 14쪽
12 푸른 탑 (1) 24.08.07 49 0 13쪽
11 남의 대륙 후기지수 양성 24.08.06 47 0 12쪽
10 여정의 시작 24.08.05 53 0 12쪽
9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 24.08.04 60 0 13쪽
8 잠자는 호랑이의 코털을 뽑다 24.08.03 67 1 12쪽
7 무위를 드러내다 24.08.02 75 1 16쪽
6 가문의 위기 24.08.01 75 1 11쪽
5 함정 24.07.31 71 1 13쪽
4 조금 치는 루키와 썩은 물 24.07.30 96 1 13쪽
3 싸움구경 24.07.29 128 0 13쪽
2 웅크리다 24.07.29 176 2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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