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이는 곳-17
운유가 견규와 대결하여 보여준 활 솜씨는 랑부의 부민들에게 대단히 감명 깊은 것이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운유의 실력은 명궁으로 칭송받을 만했고, 명궁은 용사의 자질이었으므로, 상무의 기풍이 강한 기마전사들은 자연히 이를 떠벌리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입이 근질거리는 병에 걸려버린 랑부의 부민들은 평소 교류와 교역을 하며 친분이 있던 다른 부락들에 찾아가서 운유와 견규가 대결한 일화를 역병처럼 퍼뜨리고 다녔다.
그리고 그 일화를 들은 다른 부락의 사람들은 랑부 부민들처럼 입이 근질거리는 병에 전염되어서 똑같이 그 일화를 또 다른 부락 사람들에게 퍼뜨려주었다.
덕분에 하얀 초원에서 새로 넘어온 소년 군장이 견부군 견융의 아들을 제압하고 많은 가축을 득했더라는 소문은 들불처럼 번졌고, 결국에는 운부의 행렬마저 앞질러버리게 되었다.
운부의 행렬이 제삼의 권역에 도달할 무렵, 이미 그곳의 부락들이 운유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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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하얀 초원에서, 혹은 누런 고원에서 넘어온 부락들이 모여 살며 형성된 제삼의 권역은 북쪽의 야지와 남쪽의 산지가 결합해 있는 지형이었다.
그래서 북쪽은 탁 트인 평야에 띄엄띄엄 아담한 동산이 돌부리처럼 솟아 있는 지형인 데 반해 남쪽으로 갈수록 산세가 험준해지고 웅대해지며 평야가 드문드문한 지형으로 변했다.
지형이 이렇다 보니 이곳 산야의 부락들은 말을 타고 산을 오르는 재주가 남달랐다.
북쪽의 강성한 부락이 침략해올 때도 산으로 올라가야 했고, 남쪽의 토인족 촌락을 침략해갈 때도 산으로 올라가야 했기에, 산 타는 재주가 남달라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오······. 운부의 애송이가 그런 횡재를 했단 말이지?”
우부[雨部]의 군장 우반은 하얀 초원에서 백오십 년을 살다가 모종의 사연으로 검은 평원에 넘어와 다시 백 년을 살아온 인물이었다.
작금에는 겨우 아홉 명의 철혈용사와 구백여 명의 부민을 거느린 약소한 부락의 군장이었지만, 아직 삼백 살도 안 먹은 그의 나이를 고려해보면 나름의 잠재력이 있다고 할 만했다.
“예. 대인. 마침 우리 부락 근처를 지날 것 같다고 합니다.”
운부의 소년 군장에 관한 소문을 들은 우반은 입맛을 다셨다.
근래 운부의 소년 군장에 관한 소문이 그의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로 파다했는데, 그 내용인즉 운부의 소년 군장이 견부군 견융의 아들과 내기하여 이기고 가축을 잔뜩 받았더라는 것이었다.
겨울을 무사히 나기 위해 갖은 수를 써서 식량을 비축하고 있던 우반에게는 상당히 솔깃한 이야기였다. 산야의 부락들은 넉넉지 못한 평야와 목초로 인해 만성적인 빈곤에 시달렸기에.
마침 자신의 부락 근처를 지날 것 같다고 하니, 붙잡아서 가축을 빼앗으면 이번 겨울나기에 큰 보탬이 될 성싶었다.
우반은 철혈용사들에게 분부했다.
“전사들을 모아라. 소문의 그 운부가 우리 부락 근처를 지난다 하니, 미리 매복해 있다가 불시에 덮쳐서 가축들을 빼앗을 것이다.”
이에 한 철혈용사가 말했다.
“대인. 한데 소문에 의하면 운부의 소년 군장이 대단한 용사라고······.”
“소문이야 으레 와전되기 마련이다. 견융을 격파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 아들을 격파한 것뿐인데, 그까짓 게 뭐가 대수란 거냐.”
우반은 코웃음을 치며 철혈용사의 우려를 일축했다.
애당초 견융의 아들이라 해봐야 홀로서기도 해본 적 없는 풋내기였을 터. 그런 풋내기를 이겼다고 자랑해봤자 우반으로서는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이런 소문은 곧이곧대로 믿으면 안 되는데 말이야. 다들 견융의 이름값에 너무 정신이 팔려있어.’
우반은 운부의 소년 군장이 견융의 아들을 제압했다는 이유만으로 명궁이네 뭐네 떠들썩하게 소문 난 게 도리어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물론 견부군 견융은 무서운 용사임이 자명했으나, 그것과 이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아둔한 사람들은 그 둘을 구분하여 생각하지 못했다.
“설령 그놈이 소문대로 대단한 용사라 해도, 머릿수에서 우리가 한참 우위일 것이다. 속히 말안장을 올리고 무기를 챙겨 준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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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이 사라지고 능선이 나타났다.
능선 뒤에는 또 다른 능선, 그리고 그 뒤에도 또 다른 능선이 첩첩이 쌓인 듯이 이어졌다.
군데군데 산과 언덕이 솟아 있는 벌판은 흰 눈을 양털처럼 소복하게 덮었고, 운부의 행렬은 발자국을 찍으며 나아갔다.
하늘에서는 양털 뭉치 같은 눈송이가 펑펑 내렸다.
병장들은 언제나처럼 척후를 전후좌우로 뿌려서 정찰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견부 부민들도 그간 병대의 체계에 익숙해져서 완전히 그 안에 녹아들어 있었다. 일찍이 회색 산맥을 넘기 전에 거두었던 풍부의 부민들처럼.
“군장께 보고드립니다. 근방에서는 별다른 위협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척후의 정찰 결과를 취합한 병장들이 보고했다.
이곳 산야의 지형은 시야를 가리는 산과 언덕이 많아서 매복에 용이했다. 하여 그들은 평소보다 꼼꼼하게 보고를 검토했고, 척후들에게는 더욱더 꼼꼼이 정찰할 것을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병장들의 그러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운유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잠든 듯한 얼굴로 그들의 정성 들인 보고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병장들은 살짝 맥이 빠졌으나 운유의 이러한 면모에도 적응되었기에 조용히 물러났다. 비록 운유가 잠든 모습이어도 귀는 항상 열려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푸드드득!
왼쪽에 있는 완만한 비탈의 산에서 새 떼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병장들은 날아오르는 새 떼를 별 감흥 없이 쳐다보았다.
그런데 별안간 운유의 목소리가 그들의 귀에 닿았다.
“척후들은 산 위까지 살폈나?”
흠칫한 병장들은 운유를 돌아봤다. 그는 여전히 잠든 얼굴로 눈을 감고 있어서, 병장들은 일순 자신들이 헛것을 들은 게 아닌가 헷갈렸다.
한 병장이 눈치를 보며 답했다.
“대인. 산 위는 살피지 않았습니다.”
눈을 뜬 운유는 풍광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여상스럽게 주위를 둘러봤다.
“정면에 하나. 왼쪽에 하나, 오른쪽 뒤에 하나. 세 개의 산이 가까이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산의 나무는 잎사귀가 가늘고 뾰족해서 겨울에도 우거지니, 사람을 숨기기에 알맞지.”
지나치게 태연한 어조였던 탓에 병장들은 그것이 심각한 얘기인 줄도 모르고 눈을 껌뻑였다.
“견술. 너는 무슨 뜻인지 알겠나?”
“······이곳 산야의 부락들은 말을 타고도 산길을 능히 달립니다. 만약 우리를 노리는 자들이 있다면, 바로 여기에 매복해 있을 겁니다.”
“맞다. 여기는 매복에 걸려든 사냥감을 세 방향에서 때리기 좋은 산세야.”
그제야 병장들은 좀 전에 날아올랐던 새 떼가 징조였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낯빛을 굳혔다.
운유는 고개를 젖혔다.
“바람이 부는구나.”
그의 말마따나 바람이 불며 눈발이 서서히 거세지고 있었다.
운유는 병장들에게 분부했다.
“이미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듯하니 다들 티 내지 말고 얌전히 들어라. 우리는 지금부터 저기 앞의 산까지 빠르게 이동한다. 도착한 뒤에는 수레로 가축을 둘러싸고, 여자들은 수레를 지킨다.”
병장들은 운유의 분부대로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고 말없이 듣기만 했다.
“우리가 갑자기 빠르게 이동하면, 매복이 탄로 났음을 알고 급히 산에서 내려오겠지. 우리는 산에서 내려오는 놈들을 차례로 격파한다.”
숫자가 얼마나 될지는 몰랐다. 다만 삼면에서 포위할 속셈으로 분산되어 있을 테니, 충분한 돌파력이 있다면 각개격파가 가능할 터였다.
“이해했나? 그럼 움직여라.”
병장들은 각자의 병대에게 달려가서 소리쳐 운유의 분부를 전했다. 자세한 사정까지 설명할 여유는 없었으므로 방향을 지시하고 서둘러 이동할 것을 독촉했다.
병장들이 기색이 워낙 다급하였던바. 부민들은 의아한 와중에도 일단 그 분부에 따라서 이동 속도를 높였다. 그래 봐야 가축과 수레 때문에 큰 차이는 없었지만.
“가축 몇 마리쯤은 그냥 내버려 둬라. 빠르게 이동해!”
속도가 높아지면서 가축 일부가 행렬을 이탈했다.
컹컹대며 뛰어간 개들이 가축을 다시 행렬로 돌아도록 몰았고, 부민들도 말을 타고 가서 가축을 잡아 오려 했는데, 병장이 그 광경을 보고 외쳤다.
그러자 상황의 심각성을 확실하게 체감한 부민들은 가축의 망실을 감수하며 이동 속도를 최대한으로 높였다.
우우우우우우우웅!
거대한 짐승이 포효하듯 모진 바람이 불며 눈발이 사납게 휘몰아쳤다. 가까이 있던 산이 시야에서 사라질 만큼 거센 눈발에 이동 속도가 다시 느려지고, 부민들은 조급해졌다.
바로 그때 운유가 웃으며 말했다.
“하늘마저 나를 편애하는구나.”
그의 낭랑한 웃음에 부민들은 영문을 모르면서도 아무튼 이 거센 눈발이 자기네에게 이로운 일이겠거니 하고 넘겨짚었다.
덕택에 조급해지던 마음이 차분해졌고, 기세가 오른 그들은 침착하게 이동을 끝낼 수 있었다.
앞쪽의 산자락까지 다다른 부민들은 병장들의 재촉 하에 수레로 가축들을 둘러쌌다. 그즈음 바람이 그치며 눈발도 약해졌고, 시야가 다시 확보됐다.
“여자들은 수레 뒤에 몸을 숨기고 활을 쏴라!”
수레와 여자들을 산자락에 남겨둔 운유는 병장들과 청년들을 모두 이끌고 옆으로 빠져나왔다.
잠시 후, 그리 가파르지 않은 비탈 위에서 한 무리의 기마전사들이 달려 나왔다.
그들의 숫자는 고작해야 칠십여 명에 불과했고, 선두에는 검푸른 빛의 눈을 가진 철혈용사 두 명이 있었다.
산 위에서 나타난 기마전사들은 수레에 둘러싸여 있는 가축들을 보고 주춤했다.
거센 눈발 속에서 그들이 매복해 있던 산 아래로 이동해오는 사냥감들을 확인했기에 눈발이 멎자마자 활을 쏘며 달려 나올 요량이었는데, 뜻밖에 사람은 없고 가축만 있자 당황한 것이었다.
그들은 가축을 약탈하러 왔기 때문에 가축에게는 활을 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지금이다!”
산 위의 기마전사들이 주춤하자, 운린이 힘껏 호령했다. 수레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여자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화살 비를 퍼부어줬다.
“헉! 저, 저놈들이!”
“크악!”
화살에 맞거나 혹은 화살을 피하려다 발을 헛디딘 기마전사들이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동요하지 마라! 계집애들의 화살 따위에 움츠러들다니. 너희가 그러고도 우부의 전사더냐?”
그들을 통솔하던 두 명의 철혈용사는 버럭 고함질렀다. 그 고함으로 인해 기마전사들은 침착함을 되찾았고, 흐트러졌던 기세를 추스를 수 있었다.
“가자! 가서 저 계집들을 마음껏 짓밟고 취하러······.”
용기를 북돋기 위해 독려하던 철혈용사는 그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비탈이 울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
옆길로 돌아서 산 위까지 올라온 운부의 기마전사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그들에게 돌진해오고 있었다. 철혈용사의 독려를 그들도 들었는지, 하나같이 두 눈에서 분노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도, 그 선봉에는 철마를 탄 긴 귀의 소년이 있었다.
청동검이 누렇게 빛났다.
철마가 두 명의 철혈용사 사이를 화살처럼 지나갔고, 누런 검빛이 번뜩였다. 머리통 두 개가 비탈 아래로 데구르르 떨어졌다.
그 뒤를 이어서 운부의 기마전사들이 쇄도해왔다. 약탈자들은 절규하며 비탈 아래로 끊임없이 굴러떨어졌다. 운부의 용감한 처녀들은 화살로 맞이해줬다.
마침내 모든 약탈자를 짓밟은 운부의 기마전사들은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것에 목이 터지도록 포효했다.
운유는 비탈 위에서 멀리 내다보았다.
두 개의 산에서 부랴부랴 내려오고 있는 나머지 약탈자들.
그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전사들의 포효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검끝을 내려 약탈자들에게 겨누었다.
“달려보자. 내 형제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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