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약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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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량한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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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3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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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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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는 곳-19

DUMMY

운유는 기억 속의 철혈용사들이 문득 그리워졌다.


현재의 병장들은 기억 속 철혈용사들과 같은 인물이었지만, 같은 능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기억 속 철혈용사들은 일일이 세세하게 지시할 필요가 없었던 데 반해 여러모로 미숙한 현재의 병장들은 그의 손발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그것은 운유에게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 자기 손발이 마음대로 안 움직이니 답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계속 경험을 쌓고 시행착오를 겪게 할 수밖에.’


운유는 현재의 병장들 가운데 과연 몇 명이 기억 속 철혈용사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현재의 병장이 기억 속 철혈용사와 같은 인물이라 해도, 반드시 같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운유의 생각에는 그러했다.


그가 생각건대 기억 속 철혈용사들은 비범했기에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끝까지 살아남았기에 비범해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죽을 놈은 죽고 살 놈은 살며 자연스럽게 걸러지겠지.’


현재의 병장들은 기억 속 철혈용사들과 다르게 처음부터 전사들을 이끄는 소임을 부여받았고 전투에서도 앞장서야 했으니만큼 더 많은 위기를 당면해야만 할 터였다.


하지만 만약 위기를 모두 극복하고 살아남는다면 기억 속 철혈용사들보다 훨씬 빠르게 완성될 수 있을 터였다.


“군장 대인께 보고드립니다.”


병장들이 몰려와 사상자와 노획한 전리품 등에 관하여 보고했다.


“병장 중에 죽은 자가 있나?”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피식 웃은 운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됐다.”


고개를 숙인 병장들이 한 자루 창을 그에게 바쳤다. 창자루가 두 동강 난 우반의 창이었다. 잘린 왼팔을 오른손으로 압박하느라 버리고 간 것이었다.


운유는 기껍게 건네받았다.


“자루로 쓸 나무를 구해봐야겠군.”


노획과 정리를 다 끝냈으므로 운유는 이동의 재개를 분부했다.



+++



전투의 흥분과 열기가 가라앉고 나자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운유는 전사들의 피로가 극심할 것임을 일찌감치 예측했기에 멀리 이동하지 않고 가까운 냇가에서 둔을 쳤다.


숙영을 준비한 운부의 부민들은 너도나도 말을 끌고 냇가로 갔다. 땀을 잔뜩 흘렸을 말의 몸을 씻겨주기 위함이었다.


땀을 제대로 씻겨주지 않고 놔두면 털이 뭉쳐서 체온을 지키지 못했고, 특히 추운 날에는 병이 나기 쉬웠다.


겨울이라 냇물은 얼어붙어 있었다.


부민들은 얼음을 깨고 장작을 가져와서 물을 따뜻하게 데웠다.


여자들이 불을 때는 동안 남자들은 더러워진 마구와 무기를 닦았다.


그 틈바구니에는 운유도 끼어 있었다. 군장이든 부민이든, 모름지기 전사는 지위를 막론하고 자기 마필과 무장을 손수 돌봐야 하는 법이었다.


운유는 우반의 창에서 두 동강 난 창자루를 떼어냈다. 그리고 자루 끝에 붙어 있던 청동검을 다른 창자루에 붙여서 단단히 고정했다.


그렇게 새로 얻은 무기를 손질하고 있는 와중 운린이 다가왔다.


“팔뚝, 다쳤네?”

“그냥 좀 긁혔어.”


운린은 그의 앞에 앉으며 말했다.


“줘봐. 약 바르게.”


운유는 고개를 미미하게 저었다.


“그냥 긁힌 거라니까. 그리고 이제 씻어야 하는데 무슨 약을 발라.”


때마침 물이 다 데워졌다.


물에 손가락을 담가서 너무 뜨겁지 않은 걸 확인한 운유는 맥을 씻겨주었다.


말의 땀은 미끌미끌해서 문지르면 거품이 났다. 그래서 물을 뿌려 거품을 씻기면 때가 밀리고 무척 깨끗해졌다.


다른 부민들도 저마다 말을 씻겨주었다. 말을 다 씻기고 난 다음에는 춥지 않게 물기를 닦아주고 모피를 덮어주었다.


“물을 데운 김에 사람도 씻게 해라. 빨래도 하고.”


부민들 역시 약탈자들과 싸우며 먼지를 뒤집어써서 많이 더러워져 있었던즉 운유는 병장들에게 지시했다.


운유의 지시대로 부민들은 머리를 감고 몸을 씻었다. 씻기 싫어하는 부민도 간혹 있었지만, 운유의 지시를 거역하지 못했다.


세신과 세탁을 하고 나자 어느새 뉘엿뉘엿 저문 해가 서산의 봉우리에 걸려 있었다.


한결 깨끗해진 부민들은 냇물을 먹고 있던 가축들을 몰아서 둔영으로 돌아갔다.


천막으로 돌아온 운유는 팔뚝의 상처를 살펴봤다. 창에 베인 상처는 그새 벌써 아무는 중이었다. 애초에 얕은 상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약 안 발라도 돼?”


운린이 물었다.


“다 아물었어.”


무심한 대꾸에 그녀는 아까부터 계속 들고 있던 약봉지를 내려놨다.



+++



밤새 거세게 불던 바람은 여명이 밝아옴과 함께 잦아들었다.


천막 밖으로 나온 운유는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차가운 겨울 공기를 들이마시자 가슴이 시렸다. 잠기운이 달아나고, 멍하던 정신이 또렷해졌다.


바람과 같이 내렸던 듯 천막 위에는 흰 눈이 도탑게 쌓여 있었다.


운유는 작대기로 천막 위에 쌓인 눈을 치웠다.


운부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됐다.


수유차를 끓여서 말린고기와 같이 먹는 것으로 간단하게 배를 채운 운부의 부민들은 천막을 접었다.


이윽고 수레에 짐을 다 실은 그들은 무릎 높이까지 쌓인 눈밭을 가로질러 이동했다.


눈밭을 가로지르는 일은 상당히 힘들었다. 몸집이 작은 새끼 가축들은 자꾸 발이 빠져버려서 수레에 싣고 가야 했는데, 수레바퀴 역시 눈밭에서는 잘 굴러가질 않았던 탓이었다.


게다가 한낮이 될 무렵부터는 눈까지 심하게 내려서, 결국 운유는 다소 이르게 이동을 중단하고 숙영을 준비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로부터 며칠간은 거듭 그런 날씨로 말미암아 이동이 순조롭지 못했다.


다행히 며칠이 지나고부터는 날씨가 괜찮아져서 예전처럼 이동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그나마 위안이었던 점은 다른 약탈자들의 습격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싸움을 걸어오는 부락이 많을 줄 알았는데······.”


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견술이 말했다.


“처음에 우리를 노리고 덤볐던 약탈자들이 된통 당했으니 아마 그 소문이 퍼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운린은 앞에서 철마를 타고 나아가는 운유를 일견했다. 그가 어깨에 걸친 창도.


“음.”


그녀는 바로 납득할 수 있었다. 하기야 소문이 퍼졌다면 그럴 법도 했다. 약탈하러 왔던 부락이 역으로 각개격파를 당했으니, 누군들 만만하게 얕볼 수 있을까.


‘철혈용사를 다섯이나 죽였더랬지? 그 군장은 외팔이로 만들어 버렸고······.’


더군다나 적잖은 전사를 잃기까지 했으니, 그쯤이면 부락의 존망을 염려해야 하는 수준의 손실이었다.


다섯 철혈용사와 적잖은 전사들을 잃은 외팔이 군장은, 다른 부락의 군장들에게 손쉬운 사냥감으로 여겨질 게 뻔했으니까.


“그런데 운린 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운린은 견술을 돌아봤다.


“대인께서는 얼마나 더 남쪽으로 내려가고자 하십니까? 이미 여기도 가축을 풀어놓고 기르기에는 턱없이 좁은 들판뿐인데, 더 남쪽으로 가면 산과 골짜기밖에 없을 겁니다.”


꾸준히 남하한 운부의 행렬은 이제 더이상 지평선이 보이지 않고 사방팔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까지 다다라 있었다.


견술은 이곳까지 오면서 여러 번이나 자리 잡을 만한 땅을 찾았는데, 윤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쳐버렸다. 하여 견술은 운유의 뜻을 가늠할 수 없었다.


“검은 평원의 남쪽에는 혹처럼 튀어나온 땅이 있다던데. 알아?”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이곳 산야에서 남쪽으로 가면 토인족이 득실대는 첩첩산중이니, 그보다 남쪽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하여튼 그 땅에 살기 좋은 곳이 있어서 거기로 갈 거래.”


딱히 숨겨야 할 것도 아니었으므로 운린은 알고 있는 대로 말해줬다.


“어······. 대인께서는 그런 곳이 있는 걸 어찌 아셨답니까?”


대답이 궁했던 운린은 대충 얼버무렸다.


“바람이 알려줬나 보지.”

“······.”


견술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한 척후가 달려왔다. 척후에게 무어라 이야기를 들은 병장은 곧장 운유에게 이를 보고하러 왔다.


“대인. 보고드립니다. 어림잡아 백이십쯤 되는 기마가 두 고개 너머에서 머물러 있는데······.”


병장의 보고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또 한 명의 척후가 달려왔다. 운유는 그 척후를 불러서 직접 보고를 들었다.


“운부임을 밝힌 전사가 뵙길 청하였습니다. 철혈용사였습니다.”

“데려와라.”


척후는 다시 앞으로 달려갔고, 이내 한 명의 기마전사를 데려왔다. 두 눈에서 검푸른 빛을 띠는 철혈용사였다.


“운부군 운형 대인을 모시고 있는 구소입니다.”


철혈용사가 운유에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운부군 운유다.”

“아! 혹시 얼마 전에 우부를 격파하고 우부군을 외팔이 만들어 버렸다던······?”

“어느 부락인지는 모른다. 외팔이로 만들기야 했지마는.”


구소는 좀 더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운유 대인의 척후를 발견하고 우리 군장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우리 부락은 지금 토인족을 사냥하러 가는 길인데, 길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는 중입니다. 군장께서는 서로 오해가 없길 바라십니다.”


운유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끝까지 예를 차려 인사한 구소가 떠나고, 병장들이 운유에게 말했다.


“활에 시위를 걸어놓으라 하겠습니다.”


운유는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병장들은 이전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운유의 무반응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어서 어떨 때는 긍정이고 어떨 때는 부정이었는데, 병장들은 이제 그 미세한 차이를 어렴풋이나마 구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장들은 각 병대에게 활에 시위를 걸어놓도록 지시를 전달했다.


운부군 운형과 그 전사들을 덮치기 위해서는 물론 아니었다. 이는 단지 만약을 대비할 뿐이었다.


비록 운부군 운형이 자신의 철혈용사를 보내서 괜한 오해가 없길 바란다고 뜻을 밝혀오긴 했으나,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으니까.


사람 일은 예측할 수 없는 법이었고 또 속임수일 가능성도 간과할 수 없었으니 병장들과 전사들은 모두 언제든 싸움에 나설 태세를 갖추었다.


“속도를 늦춘다.”


운유는 부민들의 이동을 약간 늦췄다. 앞쪽에 다른 부락의 전사들이 있음을 알게 된바. 발걸음을 서둘러서 어색하고 불편한 만남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하여 굼뜨게 두 고개를 넘고 나니 과연 많은 사람이 그곳에 머물렀던 흔적이 있었다.


병장들은 척후로 계속해서 주변을 정찰하고,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을 유심하게 관찰했다. 공교롭게도 운형의 운부 전사들이 나아간 방향은 운유의 운부 부민들이 나아갈 방향과 같았다.


얼마 전 약탈자들의 매복에 당할 뻔했던 게 병장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던지라, 그들은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도 의심하고자 노력했다.


운유가 시켜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 나름의 지위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때로 남들보다 높은 지위의 책임에 대한 부담은 그 자체만으로도 발전의 원동력이 되곤 하는 법이었다.


운유는 병장들의 그러한 모습을 가타부타 말없이 지켜봤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엉망이 된 몰골로 헐레벌떡 도망쳐오는 기마전사들과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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