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약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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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량한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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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3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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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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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는 곳-12

DUMMY

견융은 스물한 명의 철혈용사를 거느리고 명성을 떨치던 견부의 군장이었다. 여러 견씨의 부락들을 통틀어도 그녀에 비견할 만한 용사는 흔치 않았을 정도였다.


천여 년을 살며 몇 번이고 자식을 독립시킨바 있던 그녀는 어느 날 또 한 번 자식을 독립시킬 필요성을 체감했다.


부민들이 조화롭게 번창하여 부락이 과도한 인원을 수용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마침 그녀는 슬하에 아들 둘과 딸 하나가 있었다. 한 명은 아직 철마를 못 길들인 소년이었고 다른 두 명은 철마를 길들인 청년 처녀였으니, 잉여를 반씩 나눠주어 내보내면 될 성싶었다.


견융은 장성한 아들과 딸을 불러 독립을 준비토록 했다. 그들에게 물려줄 부민은 몇이고 가축은 몇이며 또 이러저러한 재산을 얼마만큼 내어줄 것인지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이 흐른 뒤, 예기치 못한 이변이 발생했다.


견융이 돌연히 죽어버린 것이었다.


그녀가 죽은 까닭은 아무도 몰랐다. 음식을 잘못 먹고 탈이 나서 죽었을 수도, 병이 나서 죽었을 수도 있었다.


애당초 이유 모르게 요절하는 사람이야 흔해 빠진 세상이었다. 장이족은 천수가 다하지 않는 천손이었지만, 하늘의 윤회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견부의 부민들은 군장의 급작스러운 죽음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묵묵히 수긍했다. 그들은 곧 견융의 장성한 아들과 딸이 견부를 반으로 갈라 나누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짐작과 달리 견융의 아들은 칼을 들고 누이에게 쳐들어갔다.


그러고는 외쳤다.


‘내 누이는 심성이 간악하고 표독스러워, 부락을 독차지하고자 욕심부렸다. 군장을 독살했고, 내 음식에도 독을 타서 암살하려 했다!’


견융의 딸은 칼을 피해 급히 달아났다.


그리하여 견융의 부락은 셋으로 갈라졌다. 견융의 아들을 믿는 자들과, 견융의 딸을 두둔하는 자들과, 이기는 쪽에 붙으려는 자들로.


“형님은 저에게 거짓 증언을 요구했습니다. 저는 차마 누님에게 그리 누명을 씌울 수 없어서 거부했고, 천운의 따라준 덕택에 형님의 수중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만 추격자들을 떨쳐내지 못해······.”


장이족 소년 견술의 사연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흥미진진한 얼굴로 몰입해 있던 운유와 그 좌우의 사람들은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탄식했다.


그들은 저마다 심중으로 추리를 해보았지만, 아무리 그럴싸한 추리여도 결국 진상을 규명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초원과 평원에서는 견술의 사연과 비슷한 일들이 종종 벌어졌고, 때로는 소문으로도 널리 전해졌지만, 하나같이 두루뭉술하게 매듭지어질 따름이었다.


“이제 어쪌 셈이지?”


운유가 불쑥 견술에게 물었다.


“이 길로 랑부에 찾아갈 작정입니다. 그곳에 어머니의 벗이 계시니, 그분께 중재를 부탁드릴 겁니다.”


견술이 결연하게 답했다. 골육상쟁을 막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이 길로 곧장? 네 누이한테 우선 찾아가질 않고?”


운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리송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견부의 권역이 어디에 있고 또 랑부의 권역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았던지라, 견술이 이런 상처투성이 꼴로 랑부의 권역까지 가다가는 도중에 쓰러질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견술 스스로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러했으니, 운유로서는 그 작심이 불가해했다. 중재고 뭐고 일단 그 누이한테 찾아가서 치료부터 받아야 할 상태이건만.


“······.”


한동안 침묵하던 견술은 운유가 의아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자 마지못해 말했다.


“누님에게 찾아가면······ 누님은 아마 형님과 같은 요구를 할 겁니다.”

“······?”


일순 운유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네 누이도 너한테 위증을 요구할 거라고? 그리고 너는 그 또한 따를 마음이 없고?”


견술이 위증으로 누이에게 누명 씌우길 거부하고 결사의 탈출까지 감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바. 운유는 당연히 견술이 그 형과는 소원하고 누이와는 다정하리라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한데 견술이 누님도 형님과 같다고 말하자 혼란에 빠져버렸다.


“듣고 보니 너희 모두 다정다감한 오누이들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맞나?”

“······.”

“그럼 대체 왜 위증도 거부하고 필사적으로 탈출까지 해서는, 그 꼴로 랑부에 찾아가 중재를 부탁하려 했던 거냐?”

“그야 골육상잔을 두고만 볼 수는 없으니까요.”


운유는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결술을 바라봤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이나마 숨돌릴 틈을 주신 후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구질구질하게 더 매달리지도 않고 깔끔하게 작별을 고한 견술은 몇 번 심호흡하더니 다시금 달려나갔다.


추격자들은 견술이 운부의 행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했다. 눈앞에서 다 잡은 사냥감을 놓쳐 난감해하던 그들은 이에 희색을 띠었다.


운유에게 가볍게 예를 표해 보인 추격자들은 운부의 행렬을 멀찍이 우회하여 견술을 쫓아갔다.


“별종이네.”


운린이 문득 말했다.


“······.”


줄곧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운유는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지자 운린이 의아하여 물었다.


“갑자기 왜 웃어?”


한바탕 시원하게 웃어댄 운유는 눈물 맺힌 눈꼬리를 손가락으로 비비며 대꾸했다.


“저놈, 바보 같은 게 마음에 들었어. 내가 길러봐야겠다.”

“네가 거두겠다고?”


운린은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아까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나 본데, 단순한 가식일 수도 있어. 사람 속내를 어떻게 한 번 보고 다 알아?”

“불량품이면 다시 버리지 뭐.”


그는 실실대며 견술이 떠난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견술은 보이지 않았고, 견술이 타고 있던 준마만이 들판에 우두커니 멈춰서 있었다.


“뭐야. 이놈 그새 어디로 사라진 거야?”


운유가 어리둥절하자 견술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병장이 말했다.


“달리던 도중 저 풀밭으로 낙마해 버렸습니다. 아무래도 힘이 다 빠졌던 모양입니다.”


사연을 이야기하며 취했던 휴식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던 걸까. 하기야 온몸에 상처와 출혈이 심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는 추격자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운부의 행렬을 크게 우회하느라 추격자들은 아직 견술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병장들에게 손짓했다.


“주워와라. 저기 저 사냥개들은 죽이고.”


이번에는 그 누구도 그의 뜻을 받들어 달려나가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활을 쏘며 달려간 병장과 전사들은 추격자들을 포위하여 모조리 죽여버렸고, 풀밭에 쓰러져 있는 견술을 준마에 실어 데려왔다.



+++



견술은 양털을 여러 겹 덮은 채 깨어났다. 좌우를 돌아보니 화로의 열기가 후끈한 천막 안이었다.


‘······형님한테 도로 잡혀온 건가?’


기억의 마지막을 되짚어 보았다. 말을 타고 달리다 갑자기 눈앞이 핑 돌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팔다리에 맥이 빠져 낙마했던 기억. 그 기억 다음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없었다.


아마 추격자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그를 잡아 왔으리라.


라고 차분하게 판단을 내리자마자 천막의 문이 열리며 또래의 동족 소년이 들어왔다.


“······어?”


견술은 어안이 벙벙하여 동족 소년을 보았다.


쫓기던 와중 우연히 조우했던 낯선 부락. 눈앞에 있는 동족 소년은 바로 그 낯선 부락의 군장이었다. 또래이면서도 벌써 철마를 길들이고 자신만의 부락을 통솔하던······.


그 동족 소년 뒤로 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마찬가지로 동족의 여인이었는데, 지팡이를 짚고 걷는 절름발이였다.


천막에 들어온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견술을 바라보았다.


“운부군 운유다.”


소년 군장이 말했다. 누워있던 견술은 얼결에 몸을 일으켰는데, 순간 격통에 다시 쓰러지듯 누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온몸에 붕대가 감아져 있었다.


끙끙대며 격통이 가시길 기다린 견술은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조심하며 몸을 일으키고자 애썼다.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으나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그렇게 겨우겨우 상체를 일으켜 앉은 견술은 소년 군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운부의 군장을 뵙습니다.”


운유는 고개를 까딱이며 그 인사를 받아줬다.


“대인께서 저를 구해주신 것입니까?”

“그래.”


그는 굳이 겸양하지 않고 말했다.


“내가 구하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죽었을 테지.”


상처가 겉보기보다 더 위중해서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줄 알았더랬다. 약을 먹이고 보살피는 동안 때로는 열이 펄펄 끓고 때로는 차게 식었는데, 천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절대 소생하지 못했으리라고.


“대인의 은택에 감사드립니다. 기필코 보답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답할 건데?”


운유의 물음에 견술은 진지한 얼굴로 곰곰이 숙고하더니 이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염치 불고하고 정직하게 고백하겠습니다. 당장 저는 가진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더구나 저는 랑부에 가서 어머니의 벗께 형님과 누님을 중재해주십사 청해야만 합니다.”


곁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운린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자기 형이 보낸 추격자들에게 죽을 뻔해 놓고도 여전히 중재 타령이라니.


“중재를 청한 뒤, 대인께 돌아오겠습니다. 만약 대인께서 저를 거두어 주신다면 대인을 아버지처럼 모시며 재주를 다하여 섬기겠습니다.”

“네 말마따나 당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어른이 되어서야 쓸모가 있을 텐데. 언제까지 보답할 테냐?”

“대인께서 원하시는 때까지 대인을 섬기겠습니다.”


무릇 천손들은 고고하여 남의 밑에 들어서길 싫어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견술은 기한도 정하지 않고 따르겠노라 단언했다.


“천 년을 따르라 하면 따를 테냐?”

“따르겠습니다.”

“만 년을 따르라 한다면?”

“따르겠습니다.”


운유는 낮게 웃었다.


천 년 뒤에도 과연 변치 않을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었지만, 아무튼 재밌었으니 만족이었다.



+++



견술은 랑부에 가서 중재를 청하고 돌아오겠노라고 비장하게 말했지만, 실은 운부의 행렬도 랑부의 권역을 지나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견술은 다친 몸으로 무리하게 다녀올 필요가 없었다. 운부의 행렬에 끼어서 같이 움직이면 그만이었으니까.


물론 수백 명이 수레와 가축을 끌고 움직이느라 속도가 느렸으나, 어차피 혼자서는 십 리도 못 가 쓰러질 상태였다. 견술은 조급함을 버리고자 노력했다.


“네가 중재를 청할 작정이라던 그 랑부의 군장은 누구지?”


이동하던 와중 운유가 견술에게 물었다.


“랑연 대인입니다.”

“랑연?”


운유는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고 운린이 물었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아는 이름이야?”

“기억에 남을 만한 이름이었지.”


운린은 호기심을 느꼈다. 그녀도 슬슬 이백 살 속늙어버린 운유에게 적응해가고 있었기에, 그의 기억에 남을 만한 이름이면 분명 만만치 않은 인물이리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럭저럭 용감한 여자였어. 건방지게 굴길래 한쪽 눈을 뽑았는데, 도리어 더 사납게 덤벼들더라고.”


그는 시시한 추억이라는 듯이 여상스럽게 말했다.


“흥이 식어서 그냥 살려줬지. 재주가 아깝기도 했고 말이야. 그래 봬도 랑부에서 필적할 자가 몇 없던 용사였거든.”


이백 살 속늙어버린 동생에게 완전히 적응하는 날이 과연 올까? 운린은 급격히 자신감이 사라졌다.


운유는 그녀의 속도 모르고 나른하게 하품했다.


“그나저나 이러면 구태여 그 여자의 땅을 우회할 필요가 없겠네. 시일을 단축할 수 있겠어.”


운부의 행렬은 랑부의 권역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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