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약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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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량한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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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3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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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3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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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는 곳-27

DUMMY

“보고드립니다. 토인족 육백여 명이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병장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냉소했다.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군.”

“토인족은 죄다 덜떨어진 놈들밖에 없는 건가? 대충 우리 두세 배쯤 되는 숫자로 몰려오면 이길 수 있으리라 여기는 거. 너무 뻔해서 지겨울 지경이야.”


암강 이남으로 내려오고 몇 번씩 토인족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운부의 전사들 역시 죽고 다쳤다. 하여 지금의 운부에 남은 전사들의 숫자는 백 명을 조금 넘길 뿐이었다.


척후가 발견한 육백여 명의 토인족들은 전부 무기를 갖춘 남자들이었으니 전사의 숫자만 따지면 무려 여섯 배의 차이였다.


그러나 병장들은 그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태연자약했다.


그들은 군장을 우러렀다.


“대인. 분부를 내려주십시오.”


운유는 우선 싸움터를 고르기로 마음먹었다.


척후들을 불러서 주변의 지형을 물어보고, 그중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곳으로 직접 가서 확인해보았다.


그가 점찍은 곳은 다섯 개의 언덕이 가운데의 오목한 땅을 둘러싸고 있는 곳이었다.


“토인족들을 이곳까지 유인할 것이다.”


한 언덕 위에 올라선 운유는 그 맞은편의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맞은편 언덕은 가팔라서 내려올 수는 있어도 올라가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저 언덕으로 퇴로를 막을 것이다.”


그는 이어서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세 언덕을 가리키며 병장들을 나누었다.


“저 아래 오목한 곳까지 유인한 다음, 왼쪽의 언덕에는 병장 일곱이 숨는다, 그 옆의 언덕에는 병장 아홉이 숨고, 오른쪽의 언덕에는 병장 여섯이 숨는다.”


세 개의 언덕에 숨을 것을 미리 지시한 운유는 자신들이 서 있는 언덕을 가리켰다.


“나머지는 나를 따라서 바로 이 언덕으로 올라온다. 수레와 가축들도 이 언덕 위에 놓을 것이다.”


그의 계책대로 운부의 부민들은 수레와 가축을 몰고 와서 언덕 위에 놓았다.


“여자들은 수레와 가축을 지키고 있어라.”


그렇게 함정을 준비해놓은 운유와 기마전사들은 구릉지를 달려 토인족들을 찾아갔다.


구릉지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거듭되는 험지였다. 그래서 걸어서 움직이는 토인족들은 되도록 언덕 사이의 오목한 곳을 통해서 이동했다. 언덕을 계속 넘나들면 금방 지쳐버리는 탓이었다.


운유와 일백여 기마전사들은 언덕 위에서 육백여 명의 토인족들을 내려다봤다.


토인족들은 언덕 위에서 불쑥 나타난 기마전사들을 보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토인족들은 허둥대며 반응했는데, 그 반응들이 하나되지 않고 따로따로였다.


예컨대 누군가는 돌팔매질과 활질을 하려 했고, 누군가는 언덕 위로 달려오려 했다. 그리 뒤죽박죽이다 보니 돌과 화살이 날아와도 썩 위협적이지 못했다.


운유는 일단 화살비를 한 번 퍼부어졌다. 언덕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토인족들 수십이 우수수 쓰러졌다.


“언덕을 올라라!”


뒤늦게 토인족들의 촌주가 청동검을 휘두르며 고함질렀다.


토인족은 기세 좋게 함성을 지르며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수십이 죽었어도 여전히 운부의 기마전사들보다 몇 배나 더 많은 토인족들이 일제히 언덕을 오르자 제법 압박감이 느껴졌다.


운유는 미련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들은 뒤편에 펼쳐져 있는 너른 구릉지를 마음껏 달렸다.


탁 트여 말달릴 수 있는 땅에서 기마전사를 압박할 수 있는 존재는 같은 기마전사뿐이었다.


토인족들이 언덕을 기어올랐을 때, 기마전사들은 이미 언덕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토인족들은 내리막을 시원하게 달리면서 기마전사들을 쫓아갔다. 일부러 빠르게 달리지 않았기에 토인족들은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졌다.


기마전사들은 토인족들이 그 착각을 되도록 오랫동안 이어가게끔 속도를 조절하며 달아났다. 대담한 몇몇은 손 뻗으면 잡힐 듯 말 듯 한 거리까지 토인족이 접근하게 놔두었다.


퍽!


“으억!”


토인족들이 던진 돌멩이에 맞아 낙마하는 기마전사들도 이따금 있었다. 토인족들은 돌을 잘 던져서 기마전사들조차 그 솜씨를 얕잡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몇몇이 돌에 맞아 떨어지는 일쯤은 큰 흐름에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언덕을 넘고 또 넘어서 기마전사들은 토인족을 순조롭게 유인해냈다.


본디 짐승의 힘은 사람과 견줄 것이 아닌바. 언덕을 넘나들며 달리느라 토인족들은 싸움이 시작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반면 기마전사들은 여전히 팔팔했다.


“나팔을 불어라.”


운유의 분부에 뿔나팔이 울려 퍼졌다. 이에 기마전사들은 조금 속도를 높여서 눈앞에 있는 언덕을 넘었다. 그러자 운유가 싸움터로 점찍었던 곳이 나타났다.


병장들은 운유에게 지시받았던 대로 갈라져서 좌우의 세 언덕 뒤로 몸을 숨겼다.


운유는 여덟 병장을 몸소 이끌고 수레와 가축과 여자들이 있는 맞은편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기마전사들이 모두 자리를 잡은 그 직후, 개미 떼처럼 바글바글한 토인족들이 운유의 맞은편 언덕으로 올라왔다.


맞은편 언덕의 토인족들은 운유가 있는 언덕을 바라봤다. 그 언덕 위에 모여 있는 수레와 가축, 그리고 사람들을 보았다.


직전까지 지쳐 헐떡이던 토인족들은 한순간 용기백배했다.


가축들이 바로 저기 있구나! 그럼 이제까지처럼 도망만 쳐대지는 못하겠지!


“마귀자가 그리 무시무시하다더니. 과연 풍문은 믿을 게 못 되는구나! 우리가 두려워 쥐새끼처럼 달아날 줄만 아는 놈들! 가죽을 벗겨서 매달아버리자! 배 터지게 고기를 먹자!”


촌주와 장로들이 토인족 전사들을 독려하며 외쳤다.


도망만 치는 기마전사들을 쫓느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열불이 머리 끝까지 뻗쳐 있었던 토인족들은 그 독려에 용기백배했다.


그들은 상당히 가파른 내리막을 주저 없이 질주하여 그 아래 오목한 곳에 다다랐다.


이에 운유가 읊조렸다.


“나팔을 불어라.”


뿌우우우우우!


뿔나팔 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곧이어 좌우의 세 언덕 뒤에 숨어 있던 기마전사들이 일제히 뛰쳐나왔다.


좌우에서 달려나오는 기마전사들. 그사이에 끼어 버린 토인족들은 당황했다.


도망치던 때와는 전혀 다른 기세와 속도였다. 유인을 위해 설렁설렁 달리던 때와는 달리, 지금의 기마전사들은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그야말로 돌풍처럼 질주해왔다.


‘저놈들이······ 저렇게 컸었나?’


기마전사들을 마주한 토인족들은 그런 당혹에 빠졌다. 흉포한 기세를 내뿜으며 달려오는 기마전사들은 끔찍하게도 크고 무거워 보였다.


이대로 부딪힌다면? 상상력이 공포를 자극했다. 좀 전까지 마귀자를 찢어 죽이고 그 부모자식형제자매친척친구까지 씹어먹을 기세였던 토인족들은 한순간에 쪼그라들었다.


기마전사들을 마주한 토인족들은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뿔을 바깥으로 겨누며 단단히 뭉친 소 떼와 같지는 못했다. 토인족들은 어지럽게 뒤엉켰을 뿐이었다. 그저 나 대신 다른 동족이 짓밟히길 바라면서.


촌주와 장로들은 토인족 전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애썼지만, 아무리 고함쳐도 토인족 전사들은 따르지 않았다.


수십 명에 불과한 기마전사들이 수백 명의 토인족들을 기세만으로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기마전사들은 토인족들에게 접근하여 활을 쏘고, 물러났다가 되돌아와서 활을 쐈다.


토인족들은 아무 반격도 할 수 없었다. 서로 너무 가깝게 뒤엉켜 버려서 돌팔매질도 활질도 할 수가 없었다.


“······.”


운유는 언덕 위에서 묵묵히 그 아우성을 굽어보았다.


그는 토인족들의 우두머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알아보기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청동과 철 단추 따위를 주렁주렁 달아놓은 갑옷을 입고서, 청동검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으므로.


토인족들의 혼란이 극에 달한 바로 그 순간, 운유는 창을 치켜들었다.


“가자.”


세 번째로 뿔나팔이 울렸다.


운유와 여덟 병장들, 기마전사들은 나는 듯이 달려 언덕을 내려왔다. 그리고 그 기세를 실어서 화살처럼 토인족들을 찔렀다.


운유는 창을 연거푸 크게 휘저었다. 뭉쳐 있던 토인족들은 대여섯 명씩 피를 흩뿌리며 나가떨어졌다. 맥은 살아있든 죽어있든 가리지 않고 박살 내며 쉴 새 없이 나아갔다.


창끝에는 서릿발처럼 냉혹한 살기가 서렸고, 만물을 하찮게 여기는 무심한 눈길은 단 한 사람을 향했다.


“수십 명이다! 수십 명! 한 줌밖에 안 되는 놈들한테 겁먹지 말란······ 허, 허억!”


토인족 전사들을 다그치던 촌주는 별안간 쇄도해 오는 기마전사들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런 청동빛을 번뜩이고, 하얀 눈 위에 붉은 꽃잎이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시커먼 철마는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고 돌진해왔으며.


긴 귀의 소년은 죽음을 몰고 다녔다.


피에 물든 누런 창끝이 촌주를 향해 곧게 겨누어졌다.


“어, 어어······.”


철마에 탄 긴 귀의 소년이 해를 가렸다.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촌주는 눈앞이 새까매졌다.


피보라가 일었다.


눈을 부릅뜬 머리통이 하늘로 붕 떠올랐다.


긴 귀의 소년은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매의 발톱처럼 머리통을 낚아챘다.


“너희 우두머리가 죽었다!”


촌주의 머리통을 높이 들어 올리며 운유가 소리쳤다.


가까이에 있던 토인족들은 그 소리를 듣고 운유를 바라봤다. 동시에 그 손에 들린 촌주의 머리통을 보았다.


“초······ 촌주님이 죽었다.”

“초, 촌주님이 죽었다. 촌주님이 죽었어!”


가까이 있던 토인족들은 공포에 빠져 비명 질렀다. 그 비명은 멀리 있던 토인족들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촌주님이 죽었다고?”

“그럼 장로님들은? 장로님들도 죽었어?”

“촌주님도 장로님들도 다 죽었다!”


촌주의 죽음은 눈 깜짝할 새에 촌주와 장로들의 떼죽음으로까지 부풀려졌다. 참인지 거짓인지를 분간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촌주도 장로들도 죽고, 자기들도 다 죽으리라는 공포가 토인족들 사이에서 불길처럼 번졌다.


장로들이 급히 소리치며 스스로가 죽지 않았노리 알리고자 했지만, 이미 번져버린 공포를 걷어낼 수는 없었다.


토인족들은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좌우와 앞은 기마전사들이 날뛰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들이 내려왔던 언덕은 가팔라서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토인족들은 두손 두발을 다 써서 엉금엉금 기듯이 언덕을 올라야 했다.


“빠, 빨리 올라가!”

“밀지 마!”

“어, 어어? 끌어당기지 마!”


토인족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언덕을 기어올랐다. 그 와중 다른 토인족을 밀치고, 밟고, 심지어는 끌어내리는 온갖 다툼도 끊이지 않았다.


살고 싶다는 욕망 앞에서 사람들은 한없이 추해졌다.


기마전사들은 토인족들의 그 추한 꼴을 비웃으며 거듭 활을 쏘고, 돌진해서 쳐 죽였다.


그럼에도 토인족들은 다 같이 힘을 합쳐 맞서는 대신,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데에만 열중했다.


우리에게는 맞서 싸우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나에게는 언덕을 오르는 것이 최선이었으니까.


언덕을 오르면 적어도 자신의 목숨만은 구할 수 있다는 한 가닥의 희망이 그들을 눈멀게 했다.


기마전사들은 이를 알고 언덕을 기어오르는 토인족들을 일부러 노리지 않았다. 토인족들이 한 가닥 희망으로 스스로를 목 졸라 죽게끔.


육백여 명의 토인족 전사들은 그렇게 대다수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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