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약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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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량한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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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3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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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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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이는 곳-15

DUMMY

견융이 돌연히 죽은 뒤, 그 아들딸이 견부를 반으로 갈라 나눠 가지고 각자의 길을 떠났다면 모든 일은 조화롭게 매듭지어졌을 터였다.


그러나 견규와 견리는 그리하지 않았다.


남매는 서로 싸웠다. 물론 그 둘이서만 싸운 것은 아니었다. 저마다 따르는 무리가 있었다.


본래 견규를 따라 독립할 예정이었던 부민들은 견규를 따랐고, 본래 견리를 따라 독립할 예정이었던 부민들은 견리를 따랐다.


두 사람과 두 무리가 서로 싸웠고, 둘 중 어느 쪽도 따르지 않는 부민 대다수는 중립으로 추이를 관망했다.


결국에는 견규가 견리를 죽였다.


견리가 죽자 그녀를 따르던 무리는 견규에게 항복했다. 중립으로 추이를 관망하던 부민 대다수도 견규를 군장으로 받들었다.


그로써 견규는 견부를 다시 통합할 수 있었다.


다만 완벽하게 장악할 수는 없었다.


견부는 견규를 따랐던 무리, 견리를 따랐던 무리, 둘 중 누구도 따르지 않았던 무리로 갈라졌고, 세 무리로 말미암아 견부의 결속은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


견규는 견리의 무리를 믿지 못했고, 견리의 무리는 견규를 두려워했다. 견규는 차라리 견리의 무리를 깔끔하게 제거해버리고 싶었지만, 중립이었던 대다수 부민의 반발을 예상하여 그마저 실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같은 균열은 견규로 하여금 견술을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


누이가 어머니를 독살했노라 견술이 증언한다면 군장의 죽음에 관한 의혹은 종식될 것이요 자신의 명분은 확고해질 것이었으므로.


균열이 생겼던 견부의 결속도 다질 수 있을 터였다.


“누이동생 몫이었을 것들을 가져가겠다고?”


사정이 이러했기에 견규는 소년의 제안에 떨떠름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누이동생의 몫이었을 것들. 즉 견리가 본래 독립하면서 데리고 나갈 예정이었던 부민들과 가축 따위를 일컬음이었다.


“그래.”


견규는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교만한 건지 교활한 건지 분간이 안 되는군.’


견리의 무리는 지난 싸움에서 크게 패하여 죽고 다쳤기 때문에 살아남은 자는 남녀 도합 백여 명이 미처 안 됐다.


그렇기에 견규로서는 내어줘도 전혀 아깝지 않고 오히려 앓던 이가 빠진 듯이 시원할 자들이었다.


그들이 가진 가축도 아울러 내어줘야 하겠으나 그 역시 딱히 큰 부담은 아니었다.


‘이기면 견술을 가져올 수 있고, 져도 골칫덩어리들을 떠넘길 수 있으니, 어느 쪽이든 나한테 손해는 아니다. 나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어.’


참으로 절묘한 제안이었다. 이 제안만 놓고 본다면 소년은 대단히 교활한 인물임이 자명했다.


이 제안만 놓고 본다면.


‘한데 이놈은 이런 제안을 할 이유가 없으면서도 왜 굳이······? 설마 나와 싸워서 이길 수 있으리라 믿는 건가?’


정녕 그렇다면 교활한 인물이 아니라 황당하리만치 교만한 인물인 셈이었다.


견규는 랑연을 힐끔 곁눈질했다.


교활한 놈이건 교만한 놈이건 그에게는 이득뿐인 제안이었으니 승낙할 요량이었는데, 행여나 랑연이 또 오지랖을 부려서 멋대로 이 제안을 무산시킬까 봐 우려되었다.


“좋다. 어디서 어떻게 싸울지는 네 마음대로 정해라. 어떤 식으로든 네가 이긴다면, 누이동생 몫이었을 부민들을 내어주고, 가축들은 아예 두 배로 내어주지!”


견규는 랑연이 끼어들어서 훼방을 놓기 전에 냉큼 그 제안을 승낙해버렸다. 다소 섣부른 감이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의 용맹을 믿었다.


‘애송아. 아무래도 네게 잔꾀가 있어서 이런 제안을 했나 본데,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아무 소용 없다는 걸 가르쳐주마.’



+++



랑연은 견술을 설득하기 위해 재차 노력했다.


“설마 운부군이 네 형과 싸워 이길 수 있으리라 믿는 거냐? 보나 마나 패배할 거다. 그럼 넌 네 형에게 가야 하겠지.”

“······.”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내게 와라. 견융과의 의리를 위해서라도 내가 널 어른이 될 때까지 보호해주겠다.”

“······.”


묵묵히 그녀의 설득을 듣던 견술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제 입으로 맹세한 바를 어길 수는 없습니다. 저는 운부군을 따르기로 했으니, 운부군께서 저를 걸고 내기를 한다고 해도 마땅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랑연은 몹시 답답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견술은 담담하게 말했다.


“운부군이 패배한다고 해도 형님의 부락에 의탁하게 될 뿐이니, 실은 저에게 그다지 해로운 일도 아닌 셈입니다.”


설득을 포기한 랑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녀는 야트막한 한숨을 내뱉으며 운부의 군장을 돌아봤다.


운부군 운유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가슴에 청동 거울이 달린 가죽 갑옷이었다.


운린이 뒤에서 그의 허리띠를 단단히 동여매 주며 말했다.


“네가 그런 절묘한 제안을 할 줄은 몰랐어. 저쪽 입장에서는 이기든 지든 손해가 없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안을 하다니.”


그녀의 감탄에 운유는 어리둥절했다.


“뭔 소리야?”


운린은 운유의 맹한 표정을 보고 덩달아 어안이 벙벙해졌다.


“뭔 소리냐니······? 다 계산하고 그런 제안을 했던 게 아니었어? 저 남자가 견술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간파하고, 견술을 미끼 삼아서 저 남자가 아쉬워하지 않고 내줄 만한 사람과 가축을 뜯어내려고······.”

“······?”

“······.”


운린은 좀 전의 감탄이 다 달아난 표정으로 그의 제안이 어째서 절묘하고 치밀했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이럴 수가.”


운린의 설명을 들은 운유는 경악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치밀한 계산을 순식간에 끝마치고 절묘한 제안을 했던 건가?”


스스로의 천재성에 몸이 떨려올 지경이었다.


“······.”


운린은 묵묵히 허리띠를 매주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준비를 다 마친 운유는 철마에 올라탔다. 다른 무장은 갖추지 않았고, 오로지 활 한 자루와 돌촉 화살 세 발만을 챙겼다.


맞은편의 견규 역시도 마찬가지로 세 발의 돌촉 화살만을 챙긴 채 철마에 탔다.


두 사람은 이백 보 떨어진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운유 측에서는 운부의 부민들이 운유를 응원했고, 견규 측에는 견부의 전사들이 견규를 응원했다.


싸움 구경을 하러 나온 랑부의 부민들은 딱히 어느 쪽도 응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어느 쪽이 이길지 내기를 하지도 않았는데, 운유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광야의 전통대로! 화살 세 발로써 승부를 가릴 것이다! 승자는 얻을 것이고! 패자는 잃을 것이다!”


이 승부를 공증한 랑연이 그리 선언하며 손짓했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랑부의 한 전사가 북채를 잡고 힘차게 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둥⎯⎯

둥⎯⎯


북소리가 벌판에 울리고, 운유와 견규는 천천히 말을 몰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를 자신의 왼쪽에 두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오른손잡이가 활을 쏠 때는 왼손으로 활을 잡고 오른손으로 시위를 당겨야 하기 때문이었다.


둥⎯⎯!

둥⎯⎯!


북소리가 점점 커지자, 그에 맞춰 한 쌍의 철마도 점차 빠르게 움직였다. 평보로 걷던 그들은 곧 보법을 바꿔서 경쾌하게 뛰기 시작했고, 북소리가 빨라질수록 기세를 올렸다.


둥두둥둥! 둥! 둥! 둥두둥둥! 둥! 둥!


북소리가 절정에 달하자, 마침내 그들은 전속력으로 질주하며 독수리처럼 빙글빙글 선회했다. 그러면서 나선을 그리듯 서서히 거리를 좁혀갔다.


응원하고 구경하던 사람들의 긴장감은 덩달아 고조되었다.


운린은 저도 모르는 새에 땀으로 축축해진 주먹을 오므렸다. 심장이 북과 같이 거세게 고동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면서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운유와 견규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화살을 메겼다.


먼저 시위를 놓은 사람은 견규였다. 그의 활은 운유의 활보다 장력이 강했음에도 도리어 더 빨리 쐈고, 심지어 그 조준은 정밀하기 그지없었다.


견규가 활을 쏘고 반의 반 박자 직후, 운유가 활을 쐈다. 그리고 활을 쏘자마자 즉시 다음 화살을 메겨 쐈다. 일련의 동작은 신속하고 매끄러워서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마무리됐다.


두 발의 화살을 연달아 쏜 운유는 급격히 말머리를 돌렸다.


쐐애애액!


운유를 향해 날아오던 견규의 화살은, 운유가 첫 번째로 쏜 화살에 요격되었다. 공중에서 맞부딪친 화살은 거의 가루처럼 부서졌고, 운유가 두 번째로 쏜 화살은 견규의 가슴을 맞췄다.


이런 미친.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 장면을 목격한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한마디였다.


“억!”


가슴에 화살을 맞은 견규는 명치를 가격당한 사람처럼 숨을 못 쉬고 괴로워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하마터면 낙마할 뻔했는데, 초인적인 의지로 재빨리 호흡을 회복하고 다시 몸을 가누었다.


만약 갑옷의 청동이 화살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죽었을 터였다. 이를 상기한 견규는 모골이 송연해져서 운유를 바라봤다.


“헉!”


견규는 기겁해서 헛숨을 들이켰다. 그가 화살에 맞고 몸을 못 가누던 그 짧은 틈에 운유는 벌써 지척까지 달려와 있었다.


운유의 철마는 가속력이 제대로 붙어 있었고, 반대로 견규의 철마는 속도가 죽어버렸던 탓에, 도망치기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견규는 허둥지둥하며 화살집에서 화살을 꺼냈다.


하지만 그가 화살을 꺼내 시위에 메기기도 전에, 운유가 날린 화살이 견규의 활을 반으로 쪼개 버렸다. 엄청난 장력을 버티고 있던 활대가 쪼개지며 그 파편이 사방팔방으로 비산했다.


“크아악!”


무수한 파편 하나가 견규의 왼쪽 눈에 박혀버렸다. 견규는 손바닥으로 눈을 덮으며 처절하게 비명 질렀다.


이제 운유는 화살이 남아 있지 않았고, 견규에게는 두 발의 화살이 남아 있었지만, 더이상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계속해서 견규에게 달려온 운유는 그 기세를 실어서 활을 휘둘렀다. 활대가 견규의 머리를 때렸고, 견규는 맥없이 말안장 위에서 떨어져 버렸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그러고도 아직 정신줄을 붙잡고 깨어 있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견규의 철마가 그를 지키기 위해 뒷발로 일어서며 앞발을 번쩍 들었다. 이에 흥분한 맥이 똑같이 뒷발로 일어섰다. 철마의 발굽이 아슬아슬하게 엇갈리며 땅을 내리찍었다.


“워. 워.”


운유는 고삐를 당기며 맥을 진정시켰고, 견규의 철마에게도 손바닥을 내보였다. 그는 견규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 적어도 오늘은.


푸르르륵!


견규의 철마는 운유의 뜻을 읽은 듯 더는 날뛰지 않았지만, 비켜서지도 않았다. 맥은 더운 콧김을 내뿜으며 사나운 눈으로 견규의 철마를 노려봤다.


“너. 개먹이야.”


운유는 철마 위에서 견규를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한낮의 해를 등진 운유는 역광으로 말미암아 그 얼굴이 온통 어둠으로 칠해져 있었고, 몸이 광휘에 휩싸여 있었다.


머리를 얻어맞아 혼미한 와중 한쪽밖에 안 남은 눈으로 그 자태를 우러러본 견규는 불현듯 정신이 아득해져 버렸다.


“부락을 잘 간직하고 있어라. 머지않아 거두러 올 테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를 범접해버린 미물의 심정이 바로 이러할까.


견규는 더 견디지 못하고 그만 기절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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