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이는 곳-18
운부의 기마전사들은 비탈을 나는 듯이 달려 내려왔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그대로 쏜살처럼 질주했다.
일백 하고도 수십에 달하는 기마전사들의 말머리는 오로지 운유가 고삐 잡는 대로 움직여나갔다.
운유의 검이 먼저 겨누어진 쪽은, 새 떼가 날아올라 징조를 전해줬던 왼쪽의 산.
그 산에서 내려온 약탈자들은 대략 백여 명. 세 명의 철혈용사가 이끌고 있었다.
세 명의 철혈용사들은 앞쪽 산에서 매복해 있던 자기네 전사들을 창졸간 끝장내버린 운부 전사들의 기세에 완전히 식겁해 버렸다. 살쾡인 줄 알고 꼬리를 당겼는데 범이 나온 격이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운부 전사들과 맞붙을 용기가 싹 사라졌다. 하여 뒤쪽의 산에서 지금 내려오고 있는 자기네 군장을 기다리고자 했다.
운유는 허락해주지 않았다.
승리에 고취된 운부의 기마전사들은 마치 지칠 줄 모르는 사람들처럼 숨 한 번 돌리지 않고 맹렬하게 돌진해왔다.
소년 군장만을 뒤따른다면 절대 패배하지 않고 항상 승리하리라는 확신이 그들에게 무한한 용기와 투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세 명의 철혈용사는 일단 어디로든 달리기로 마음먹었다. 멈춰 있는 기마전사는 죽은 것과 진배없었으니까.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다만 정면으로는 도저히 맞서 싸울 의욕이 생기지 않았기에 그들은 후퇴하며 활을 쏴서 견제하는 계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자기네 군장과 합류한 다음에 쳐부수면 되리라.
그렇게 판단을 마친 세 명의 철혈용사는 서둘러 박차를 가했다. 백여 명의 기마전사들은 싸움이 일상과 같은 산야의 부락답게 일사불란하게 질주했다.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면 그 사거리는 오십 보를 넘기가 힘들었다. 하여 양측은 간격이 오십 보 내외로 좁혀지고 나서야 활을 쏘기 시작했다.
견제는 효과가 있어서 추격해오던 운부 전사들의 기세가 살짝 수그러들었다.
이에 쾌재를 부른 철혈용사들은 조금 더 욕심을 냈다. 후퇴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자 자기네 전사들의 후미에서 엄호하며 운부의 전사들을 견제했다.
그것이 그들의 실책이었다.
쐐애애애액,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퍽 하고 한 명의 철혈용사가 낙마했다. 힘껏 달리는 중이었기에 그의 시신은 눈 깜짝할 새에 눈발과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또 한 번, 쐐애애애액, 화살이 바람을 갈랐다.
어김없이 한 명의 철혈용사가 죽었다. 경이로우리만치 정교한 저격이었다.
마지막 철혈용사의 머릿속에는 딱 한 가지 생각만이 스쳐 지나갔다. 이래서 소문이 그토록 떠들썩했구나.
철혈용사는 두려운 얼굴로 뒤를 바라봤다. 눈발과 먼지를 뚫고, 한 필의 철마와 한 명의 소년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미친 듯이 달려왔다.
아무리 철마의 속도가 범상한 마필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지만, 이토록 빠른 철마는······.
몇 호흡 만에 거리가 좁혀졌다.
철혈용사는 최후의 발악으로 활을 쐈다. 청동검이 화살을 튕겨냈다.
연이어 검빛이 번뜩였다.
말에서 떨어진 한 구의 시체가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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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쪽 산에 숨어 있던 우부군 우반은 별안간 운부의 소년 군장이 매복을 간파한 듯이 움직이자 짜증스럽게 산에서 내려왔다.
삼면에서 동시에 들이쳐 단숨에 박살을 내고자 했는데. 그의 훌륭한 계책을 엉망으로 만든 운부의 소년 군장을 향해 살의가 샘솟았다.
“······음?”
산에서 내려오느라 살짝 흐트러진 전사들을 가다듬던 그는 눈 덮인 땅을 진동시키며 달려오는 기마들을 보고 당황했다.
눈발과 먼지 때문에 흐릿한 형상. 그러나 우반은 그들이 자기네 전사들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 녀석들이······ 뭘 하는 거냐. 왜 저렇게 달려오는 거야.”
좌우에 있던 두 명의 철혈용사는 그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그들도 영문을 알 수 없어서였다.
“저놈들이 미친 건가? 왜 속도를 줄이지 않는 거냐. 이대로 우리를 들이받기라도 하려고?”
눈을 부릅뜬 우반은 계속해서 속도를 줄이긴커녕 오히려 더 높여가며 달려오는 자기네 전사들을 바라봤다.
한참을 주시한 끝에, 그는 저 흐릿한 형체들 속에서 하나의 형체가 매우 이질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식별할 수 있었다.
그 형체가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다른 형체들이 먼지 속에서 사라지고 흩어지기 바빴다. 마치 그 형체가 다른 형체들을 죽여가며 어딘가로 내몰고 있는 듯한······.
“······!”
불길한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그는 저 앞쪽의 산을 바라봤다. 수레가 가축들을 둘러싸고 있는 그곳. 그곳에 있어야 할 자기네 전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우반은 황급히 전사들을 셋으로 갈라서 좌우의 철혈용사에게 각각 한 무리씩 맡겼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자기네 전사들은 속도를 늦출 기미가 없었으니,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충돌하는 낭패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너는 왼쪽으로, 너는 오른쪽으로 흩어져라! 아마 저 눈발과 먼지 뒤에는 운부의 전사들이 있을 거다. 요격해라!”
“예! 대인!”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우반은 나머지 한 무리를 데리고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자기네 전사들을 수습하고자 달려갔다.
가까이 달려가자 과연 그의 예상대로 자기네 전사들 한복판에서 날뛰고 있는 한 명의 장이족이 눈에 띄었다. 너무나 앳된 얼굴의 장이족이었다.
“대, 대인! 대인!”
“대인! 살려주십시오!”
황당하게도 우부의 전사들이 그에게 살려달라 애원했다. 그 애원에 우반은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런 수치도 모르는 놈들 같으니라고.
“애송아! 네놈이 바로 그 소문의 운부군이로구나!”
우반의 호통에 소년의 고개가 돌아갔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믿을 수 없게도, 우반은 한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소년의 표정은 무미건조했다. 그는 홀로 양 떼 한복판의 호랑처럼 날뛰면서도 전혀 흥분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용맹을 뽐내며 활약하고 있다는 들뜸조차 없었다.
우반은 소년의 무표정 속에 깃들어 있는 권태를 느꼈다. 그 권태는 끝없는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소년은 주변의 모든 전사를 잔챙이로 멸시하고 있었고, 심지어 우반 자신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우반은 으드득 이를 갈며 소년에게 돌진했다.
“너는 내 손으로 죽여주마!”
우부의 전사들을 풀잎처럼 베어 죽이던 소년은 그의 돌진에 응수하여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우반은 긴 자루 끝에 청동검을 붙인 창을 꼬나쥐었고, 소년은 피와 기름이 번들거리는 청동검을 비스듬하게 늘어뜨렸다.
쌍방의 교차는 찰나였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합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소년은 왼 팔뚝으로 우반의 창을 빗겨 쳐냈다. 팔뚝이 길게 베였으나, 깊지 않은 상처였다. 반면 소년의 청동검은 우반의 창자루를 동강 냈다.
우반은 왼쪽 팔꿈치 아래가 허전해짐과 동시에 피를 뿜어냈다. 피가 쭉 빠져나가며 피부가 창백해지고, 힘이 쫙 빠져버렸다.
만약 본능적으로 고개를 꺾지 않았다면 목이 날아갔을 터였다.
그를 지나쳐간 소년이 슬쩍 뒤를 돌아보더니,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피할 줄은 몰랐는데. 제법인걸.”
우반은 잘려나간 팔꿈치 아래를 오른손으로 압박해서 피가 쏟아지지 않게 막았다. 기력을 바닥까지 긁어낸 그는 고함질러 우부의 전사들을 모으고, 즉시 말을 몰아 달아났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더이상 수치도 분노도 떠오르지 않았다. 살고 싶거든 도망쳐야 한다는 강박만이 그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다행히 소년은 그를 쫓지 않았다. 소년이 자비로워서는 아니었고, 우반의 철혈용사들이 소년의 주의를 끌어서였다.
철마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피의 꽃이 잔인하게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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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이족이 장이족에게 철혈을 하사받으면, 그들은 천손의 권속이자 분신이 되어 백 년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다만 철혈을 하사한 천손이 죽으면 철혈용사는 수명과 관계없이 죽어버렸다.
그렇기에 모든 철혈용사는 천손의 안위를 가장 으뜸으로 여겼다.
“대인께서······.”
“대인께서 위급하시다!”
우반에게 요격을 분부받았던 두 명의 철혈용사는 우반의 생명이 위급해졌음을 직관적으로 감응했다.
하여 곧바로 요격을 중단한 그들은 우반을 구하러 갔다. 군장의 생명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앞서서 지켜야 할 것이었으니까.
두 명의 철혈용사가 갑자기 요격을 포기하고 물러나자 위기에 처할 뻔했던 운부의 전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 좌우에서 요격을 당하니 그 낭패감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후로 어떤 전투를 하든 결코 잊을 수 없을 만큼 뼈저린 교훈이었다.
병장들은 갈팡질팡했다.
“멈춰서 전사들을 재정비해야 하나?”
“아니! 계속 달려야 해! 우리가 뒤에서 받치지 않으면 군장께서 고립되신다!”
“그렇지만 또 다시 요격당하면······.”
그들의 설전은 치열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운유가 태연자약하게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대인!”
“군장 대인!”
병장들과 운부 전사들이 예를 표했다.
“대인, 팔뚝에 상처가······.”
눈썰미 좋은 한 병장이 운유의 팔뚝을 보고 화들짝 놀라 말했다.
“별것도 아닌 거로 야단 떨지 마라.”
필사적으로 저 멀리 도망치는 약탈자들을 일별한 운유는 어깨와 팔을 주물러보았다.
근육이 살짝 뻐근했다.
맥도 땀을 꽤 흘리고 있었다.
“체력은 어쩔 수가 없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는 운부 전사들을 둘러보며 선언했다.
“싸움은 끝났다. 우리의 승리다.”
그 선언만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던 운부 전사들은 함성을 터트리며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운유는 그들이 승리감을 만끽할 수 있게 한동안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날뛰던 운부 전사들이 다소 진정된 이후에야 병장들에게 분부했다.
“저들이 선물을 주고 갔으니 사양할 필요는 없겠지. 말과 무기, 갑옷과 신발 등등을 모두 수거해라.”
“예! 대인!”
병장들은 입모아 힘차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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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부의 전사들은 약탈자들의 마필과 무장, 의복 등등 챙길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챙겼다. 이렇게 시체에서 전리품을 노획하는 일은 의외로 쏠쏠한 이득을 얻는 일이었다.
운유는 운부의 전사들이 전리품을 노획하는 광경을 무심하게 굽어보았다.
그리고 견술은 그런 운유를 불가사의하게 바라보았다.
운유가 견규와 대결하여 압도했을 때도 경악했었지만, 지금의 경악은 그때의 경악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막대했다. 오늘 운유가 보여준 활약은 단순히 활을 잘 쏘고 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매복을 꿰뚫어 보는 통찰과 그에 대응하는 계교부터가 불가사의했다.
하얀 초원에서 나고 자랐으니만큼 이와 같은 산야의 지형은 생소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당최 어떻게 매복을 간파한 걸까.
‘매복을 꿰뚫어 보고 계교를 세운 다음, 말을 타고서도 산에 오를 수 있는 옆길을 단숨에 찾아내어, 여자들이 아래에서 시선을 끄는 그 짧은 틈에 뒤를 잡고, 그리고······.’
약탈자들을 분쇄해버리기까지. 그 일련의 과정이 전부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바람이 속삭여주기라도 한 건가? 정녕 하늘이 편애하는 존재라도 되는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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